우리는 평범히 사랑을 하고 있지만, 평범히 사랑하지 못했다.

그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알고 있음에 불구하고 우리는 손을 잡았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세상에서 우리의 손은 마주잡았다.

땀이 흐르고, 피가 흐르고, 눈물이 오가도 그저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우리는.



나의 시선은 손에 향했다. 그리고 다시 앞을 향했을 때. 본래 새하얗게 자리를 잡고 있는 병원이 보였다. 병원이었다. 하얗고 약냄새가 가득한 이 공간에서 창 밖을 바라보면 앙상한 나뭇가지가 대비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갈라진 입술을 조용히 축였다. 봄인데도 이상하리만큼 아무것도 피지 않은 나뭇가지고 지금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림자가 드리우다 그 그림자가 이동하듯 사라졌다. 차가운 시선, 맺히는 상. 기어코 제 손 끝은 무언가를 잡지 못했다. 변절자들의 세상, 정의가 멸하고 무너진 세상. 이 세상에서 가슴을 쥐었다. 바라고 우러러 보았던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은 심부에 닿지 않았다. 가슴으로 외치던 정의란 악인에 의해 멸하였다는 사실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검은 이상과 닮은 것들을 영원히 이을 수 없는건가. 나는 눈이 떴을 때,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침묵이라는 죄악의 답변을 받았다. 나는 목울대가 흔들리며 아까 차마 묻지 못한 것을 물었다. 그가 괜찮냐고 물었다. 침묵하고, 아직 경과를 봐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침묵이라는 것이 나의 몸을 굳게 만들기 시작했다. 떨리는 눈동자는 나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나는 어떠한 이상을 위해서 이렇게 달려온 것인가. 눈을 뜨는게 버거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후회의 말이 입술에 걸쳐지더니,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나는 타인을 믿는 나태함에 사로잡혀 그대로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하나의 죄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잊으면 안 되었다. 그 아픔을, 그 비명을, 그 대비되는 세상을. 길게 비명을 지르며 사방을 그어버린 세상이 무너져내리듯이 터져나왔다. 세상의 잔해가 무너지고 도시 하나가 거의 다 무너지게 되었다. 오랫동안 안일했던 히어로들이 당한 결과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 ·· ···햇빛이 너무나도 따사롭게 내리던 그 날.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던 변질자들의 승리가 나의 폐부를 고통스럽게 찔렀다. 그 사건은 너무나도 매캐한 불냄새를 남기고 다친 이들을 바라보며 소리를 내지르도록 만들었다. 홍채 속에 담기는 세상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마치 어느 날의 저주마냥 세상이 한 순간에 바뀌었다. 우리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그건 아니었다.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미련하였던걸까. 아니라고 자부해야했고, 자부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소복히 쌓여가는 비난의 화살은 우리들의 가슴께를 짓이기고 있었다. 그렇게 괴로운 하루가 무색하게 불안과 상념을 내비추지 못했다. 겉으로 괜찮은 듯 침묵하였지만, 병원 내부에서는 나의 상념이 짙어졌다. 겨우내 일어난 네가 재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나에게 생각보다 크나큰 위로가 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위로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허망하고 어색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그 세상은 다시금 되풀이 되면 안 되었다. 손끝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다시금 비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성급하게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했다. 빗금 친 날짜가 있는 달력에서는 어느샌가 빗금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 옆으로 식물이 하나 있었고, 그 식물을 나는 이름을 굳이 붙이지 않았다. 다만, 그 식물에 상념을 읊었던 정도의 이야기. 딱 거기까지. 우리는 눈이 마주하고 그 잠시를 조용히 눈만 마주했다. 처음 발화의 도화선에 불을 지핀 것은 내 자신이었다. 


"일어났어?"
"··· ··· ···어."


이 앞에 선 너와의 연애가 아직도 비밀리에 이어지고 있었다. 알 사람은 어쩌면 알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마주한 이 연애 속에서 비밀리에 마주하고 있었다. 타인들은 네 앞에 앉아있는 나를 명분 좋게 포장했다. '동료 히어로가 걱정이 된 엔제'라고 말이다. 저 자신을 숨길 줄도 모르는, 그저 구렁텅이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사계절을 보냈다. 일 년, 두근거리기만 하였다. 이 년, 설레기만 하였다. 오 년, ··· ···. 칠 년, ··· ···. 잘 모르겠더라. 설렌다는 감정보다는 이제 너무나도 익숙해진 사이에서 뭐 더 나아갈 수 있던가. 우리의 발화가 익숙함이라는 나른함에 어느샌가 동강난것은 참 오래 된 일이었다. 나의 불만족과 나의 답답함을 아는 것인지, 그 손이 천천히 내 손에 잠깐 닿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바라봤다. 처참히 당한 듯한, 눈의 상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눈, 괜찮은거야?"
"병원에서 어련히 알아서 해주겠어."
"··· ···하기사. 그렇겠지."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 이후로 많이 지났는데. 특별한건?"
"··· 일단은, 히어로들이 집합해서 훈련을 해야한다는 것과 ···."


기다렸다.

정확히는 말의 끝이 전부 흐렸다.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답을 하지 않았다. 나의 말에서 빛바랜 장면들이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첫 만남, 덧그리는 손의 위치, 그 위로 잡히는 숨의 소리. 핏물 젖은 세상에서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구하겠다고 나아가는 그 발걸음. 대답이나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하던 순간. 그리고 그 반대. 대답을 요구하기에는 너무나도 바쁜 우리들. 위험해진 서로의 사이. 고독한 베를렌. 배반이라도 당한 것 마냥 아픈 우리의 기억들. 동공에서 무너짐과 같이 바스러지는 추억의 맺힘. 몸을 일으켰다.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서 잠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너는 우리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 말에 서로의 등을 내주었다. 우리는 맞대어 서로의 뒤를 지켜주는 그런 존재로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지 않는. 남들이 모르는 그 사랑을 이어왔다. 친절을 가장한 이로 숨통을 조이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히어로의 위상을 위한답시고 숨을 앗아가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하게, 그러지 않기로 약속한 것과 다름 없는 사이였다. 그렇기에 나는 네 심장에 총구가 닿는 것을 원치 않았고, 복부에 칼집이 닿는 것을 윈치 않았던 것이다. 갱 오르카. 그 이름은. 망설임 없이 사람들 앞에 가로 서서 한 명이라도 살리겠다며 핏방울이 터져 세상에 달리아 꽃을 수놓아도 마지막까지 그럴터인데. ···그런 네게 나는 약점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나로 인해 네가 무너지는 세상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매섭기 피어난 핏붉은 달리아를 당신 가슴이 아닌, 설령 달아야한다면.

나의 가슴을 무덤으로 삼기를,

바라고 또 바래야만 하는

히어로였다.


계절의 끝에 입을 맞추지 못하였다. 소실점을 잃어버린 청아한 울음들을 내뱉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나는 네게 읊었다. 정적이 흘렀다. 끈기 있게 대답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어째서냐 물어보지도 않는 네게 나 또한 말을 읊지는 않았다. 나는 너에게 말해줄 과거가 없었다. 침묵이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족을 읊지는 않았다. 단지 서로의 눈을 마주할 뿐이었다. 우리는 감정을 공유하지 않았다. 네가 설명 없이도 성큼성큼 나아와 나에게 캐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감정은 절로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사이는 절망 가운데, 나락 가운데로 추락하지도 않았다. 끝났다. 그냥, 끝났을 뿐이었다.


"··· ···잘 있어. 재활도 끝났으니, 사무소에서는 이제 히어로처럼 대해."
"평소와 같이."
"그래."

말이 맺혔다.


"정말, 평소처럼 대하라는거지."


침묵하였다.

막연한 그 모습에 나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형벌처럼 가슴께에 미적지근한 무게가 눌리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 감정을 알고 있었다. 비련한 추억 속에, 한 빌런에게서 느낀 그 감정을 나는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각자의 길을 향해야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서글프다며 비린내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라. 망조의 말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지막으로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던 그 사람의 소리를 기억한다. 이름을 불렀으면 하는 마음은 없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소리내어 비명할 수도 없었다. 외롬에 약하지 않아야하니까. 지독한 고통속에도 당연시 해야만했다.


발걸음을 한 번 또 옮겼다. 나의 발걸음이 문뜩. 멈추었다. 병실에 식물을 두고 왔었는데, 그 식물을 어쩌면 좋은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을 하지 못했었다. 미처 전하지 못한, 도달치 못한 하나의 매개체가 있다는 것. 그것이 또 대화의 흐름을 이어버리겠지. 그렇기에 우리는 그 식물을, 잊어야만 했다. 추억이라는 것을 이 순간은 잊어야한다. 보고 싶다던가, 그립다던가. 그런 언사를 우리를 내뱉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약점이어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강점이자, 히어로여야만 했다.


기울었던 해가 수몰했다. 영원히, 영원할 가운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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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아카 | 파판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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