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대학가 반복되는 성추문, 이번엔 명문대 출신 조교(종합)

K여자대학 문과대학 조교가 여학생들의 몰카를 찍었다는 신고가 들어와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0월 0일 여대생 B씨는 조교 A씨가 자신의 사진을 몰래 촬영한 것 같다며 경찰에 신고하였고, 출동한 경찰은 압수한 A씨의 휴대전화에서 수백 장의 여성들의 신체 부위를 찍은 사진들을 발견하였다. 

현재 A씨는 K여자대학 측에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나 학교 측에서는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고 징계위원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경찰은 A씨를 몰카 촬영 혐의(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카메라 등 이용 촬영)로 입건하고, 영장이 발급되는 대로 A씨를 구속할 예정이다.

A씨는 서울의 명문 사립대 출신으로 평소에도 K여대생들을 무시하고 성적으로 희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K여대 총학생회에서는 ...



"말세네."

여자는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읽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입으로 욕을 내뱉지 않았을 뿐이지 해당 사건에 대해 굉장히 유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험악한 표정이었다. 그런 여자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남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여자에게 얘기했다.

"그러게요. 아, 누나 그거 사학과래요."

"뭐?"

여자의 표정이 아까보다도 훨씬 구겨졌다. 미형인 편이지만 눈꼬리가 올라가 사나워 보이는 인상이 누구 하나 잡아 먹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의 전공이 국사학이기도 했지만 K여대 사학과라면 여자도 남자도 잘 아는 인물이 재직 중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새끼 학생들만 찍은 게 아니라던데요."

"뭐? 무슨 소리야."

"교직원이나 강사 사진도 있었대요."

"아 미친..."

"...심지어 젊은 여교수들 사진까지 있었단 소문이더라고요."

여자의 얼굴은 분노로 붉어지다 못해 터질 것 같았고 꽉 쥔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남자는 괜한 얘기까지 꺼낸 것인 듯해 자신의 입방정을 원망하였다. 여자가 그 젊은 여교수를 얼마나 좋아하고 따르는지 알고 있었는데도 그녀의 사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꺼낸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물론 여교수의 성격상 사진을 쉽사리 찍혔을 것 같지도 않고, 설령 사진이 발견됐다고 한들 여자가 생각한 것처럼 크게  상처받지는 않았겠지만. 그도 그럴 것이 자신에게 기사도 뜨기 전에 이 사건과 소문들에 대해 알려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어색한 침묵 속에 웅웅거리는 진동 소리가 울렸다. 화면 가득찬 이름은 "성민경". K여자대학교 문과대학 역사학과 학과장이자 남자와 여자의 멀고도 가까운 선배였다. 


1.2

"시원아. 정말 미안한데 나 좀 도와 줄 수 있을까..?"

이렇게 터무니없는 부탁이라는 걸 알았다면, 민경이 그닥 상처도 충격도 받지 않았단 걸 알았다면, 승낙하지 않지 않았을까. 아니 자신의 성격상. 그리고 쉽게 부탁을 하지 않는 민경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쉽사리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아마도 자신이 존경하는 민경이 진심으로 부탁했다면 분명 승낙했겠지. 

그래도 적어도 알았다면 얘기도 듣지 않고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 하지는 않았겠지 싶었다. 시원은 K여대로 가는 지하철 역, 남쪽으로 이어진 지하철의 종점에 내려 깊은 후회에 빠졌다. 

"미쳤다. 인간적으로 너무 먼데..."

2시간 30분. 지하철만 세 번을 환승했다.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 나오는 마을버스까지 포함하면 네 번의 환승이었다. 산 구석에 박힌 학교 탓에 장장 10년간 짧지 않은 통학을 했기에 경기도 정도야 괜찮지 않겠냐며 얕본 자신이 한심했다. 역에서 학교까지 가는 마을버스로 오늘 다섯 번째의 환승을 하고 창가를 바라보며 시원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서른.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년이 지나 소논문도 몇 편 쓰고 슬슬 박사논문을 준비해 볼까 하고 있던 시원은 바쁘다면 바쁘고 한가하다면 한가한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한가해진 사람이었다. 저번 학기까지는 강의를 두어 개 맡을 수 있었지만, 강사법이 시행되어 반백수나 다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성실한 성격 탓에 이런저런 소소한 일거리는 들어왔지만 생활비를 대기에도 빠듯해 저축을 슬슬 없애야 하나싶었다. 궁한 것은 아니지지만 또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지는 않은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정기적 수입은 매력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1년만 부탁할게. 정말 미안해."

일 년. 하필이면 사건이 터진 것이 공채가 모두 끝난 뒤여서 빈 자리를 채우는 데까지 1년이 걸리게 된 것이다. 대학원이 없는 K여자대학에서 갑자기 학생 조교를 뽑을 수 있을리 만무했다. 사정은 알 만했다. 학과의 고생스러운 일만 떠맡는 막내교수인 학과장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교를 하나  대령해 놓아야만 했을 것이다. 

"다음 정류장은 K여대 정문, K여대 정문입니다."

버스 안내 방송이 울리고 하차벨을 찾기 전에 이미 누군가 눌러 놓았다. 대부분 승객들이 같은 곳에서 내리는지 짐을 챙기고 교통카드를 찍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시원은 스마트폰을 꺼내 지도를 켜고 역사학과 사무실이 위치해 있다는 문과대학 가동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캠퍼스는 꽤 아담했는데 중앙에 나 있는 큰 대로를 따라 그다지 높지 않은 건물들이 열을 맞춰 위치해 있었다. 선교사가 세웠다는 오래된 학교답게 곳곳에는 벽돌로 지어진 낡은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낡은 건물일 수 있겠으나 옛 것을 좋아하는 시원의 눈에는 좋게만 보였다. S대의 국사학과가 있는 건물도 예전엔 이런 벽돌 건물이었기에 더욱 그리움 향취가 강했다. 그러나 2월 초인데도 퍽 푸근한 공기에 4월이 돼도 등골이 서늘했던 연구실을 떠올라, 새삼 남쪽은 남쪽인 건가 싶어 웃음이 났다. 

"일단 소개도 하고, 업무 파악도 해야 하니까 2월 중에 한번 날 잡고 와. 같이 밥도 먹구."

문과대학 가동은 그 낡은 벽돌 건물들 중에서도 최고로 낡은 듯한 5층짜리 건물이었다. 디귿자로 생긴 큰 건물에는 문이 여럿있었은데 시원은 가장 대로변에 위치한 큰 현관으로 향하였다. 출입문을 열자 오래된 건물에서 풍기는 냄새가 훅하고 풍겨왔다. 곰팡내 같기도 하고 먼지 냄새 같기도 한 익숙한 그 냄새였다. 방학 중이라 그런지 복도는 그림자 하나 없이 한산하였다. 시원이 문간에 서서 한참 두리번거리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올라가려는 참이었다. 방금 들어온 문이  끼익하며 금속과 금속이 맞닿을 때 나는 그 특유의 소리를 내며 열리고 차가운 공기와 함께 누군가 들어온 것이 느껴졌다. 무심코 뒤를 돌자 웬 여학생이 들어 온 듯했다. 갈색 웨이브 머리의 학생은 그 자체로도 꽤나 예뻤지만 거기에 더해 한껏 멋을 낸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보면 열과 성을 다했다고도 할 수 있는 그 모습에 학부생 시절이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빤히 쳐다 보았다. 그 모습에 갈색 머리 여학생 역시 시원을 잠시 쳐다 보더니 가볍게 목례를 하고 복도 한 켠으로 사라졌다. 혹시 역사학과 학생일까 하며 시원 역시 발걸음을 재촉하여 윗층으로 향했다. 


1.3

"아이고. 학과장님께 말씀 들었어요. 정시원 선생님이시죠? 어서 들어 와요. 먼길 오시느라 힘들었죠?"

자신을 김영선이라 소개한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성은 역사학과의 단둘 뿐이었던 조교였다. 물론 말만 조교지 쫓겨난 A씨나 시원과는 달리 K여대 정규 교직원이었다. 

"아녜요. 캠퍼스가 정말 예쁘네요."

"이제 개강하면 더 예쁠 거예요. " "내 정신 좀 봐. 계속 서서 기다리시게 했네. 자, 자, 저기가 선생님이 앉으실 자리예요. 일단 앉아서 기다리세요. 학과장님 곧 오신다고 했어요."

영선은 마주 보고 있는 책상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온다고 얘기를 전해 들어서인지 책상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책상에는 3-4년 정도 된 듯한 다소 낡은 느낌의 데스크탑과 프린터가 놓여 있었다. 시원은 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움직이며 의자의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민경을 기다렸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그를 보고 반색하였다.

"시원아!"

"민경 언니!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겠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 민경의 표정이 그간 사건으로 인해 얼마나 피곤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표정이 밝아 보여 다행이라고 시원은 생각하였다. 민경은 금새 본래의 냉정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영선과 함께 식사하러 가자고 얘기했다. 

문과 가동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후문을 나가자 대학가 특유의 밥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민경은 익숙한 듯 골목으로 향하더니 작은 한정식집으로 영선과 시원을 안내했다. 익숙해 보이는 영선과 달리 시원은 이런 가게가 어색한듯 뒷목을 더듬으며 쭈뼛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식사가 끝난 후 화장실을 간 영선과 계산 중인 민경을 기다리며 식당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시원에게 민경이 계산을 마쳤는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 집. 구해야겠지?"

"네, 아무래도요."

식사를 하며 들은 얘기를 종합해 보면 회계나 수업 편성과 같은 줄기가 굵은 행정일은 직원인 영선이 도맡아 하고 자신은 학생들 관련 업무 정도를 맡는 것이었다. 일은 예상한 것 보다 많지 않아 보여 다행이었지만, 8시 반이라는 출근시간은 예상한 것 보다도 이른 시간이었다. 뭐 9시라고 해도 집에서 통근을 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개강하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자취는 처음이니?"

"음, 학부때 교환학생 갔을 때 정도네요. 안 그래도 직방같은 걸로 좀 알아보고 있어요."

다행히 이 근방에는 K여대 말고도 P대학이 있는, 소위 말해 대학가라 원룸이 많았고 경기도라 가격도 많이 비싸진 않았다. 시원은 많지는 않은 자신의 저금으로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사실에 가슴을 얼마나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내가 도와줄 거 있음 말해. 정말 너무.. 고마워."

"헤헤. 힘들 때 술이나 사주세요."

"그럼. 술이 뭐야 밥도 사줄게."

"에고, 오래 기다리셨어요?"

영선까지 가게에서 나오자 세 사람은 다시 학교로 향했다.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교내를 걷고 있는데, 한 학생이 일행을 발견하고는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웃으며 작게 손을 흔드는 민경으로 보아 수업을 들은 학생인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방학인데도 학생들이 교내에 꽤 있더라구요."

"응. 많지는 않지만. 동아리나 뭐, 근장들도 있고 하니까. 왜?"

"아까 올라오는 길에 되게 아주 화사한 학생을 봤거든요. 인상에 남아서요."

"아, 선생님. 걔 우리 근로장학생일지도? 수아도 오늘 오후에 근무가 있거든요."

"에  이렇게 말했는데 알 정도예요?"

시원이 꽤나 놀라며 되물었다. 화사한 학생이라고만 했는데 알 정도라니? 민경도 아는 학생인지 맞장구를 쳤다.

"수아가 예쁘긴 하죠. 애들 얘기 들어보니 P대에서도 꽤 유명할 정도라는데."

"헤에 그렇구나. 음 그래도 뭔가.. 그렇게 연예인 같다기 보단 정말 화사하고 아담하고 귀여운 느낌이었어요."

봄의 캠퍼스가 사람이 된다면 그런 느낌일까 싶었다. 아담하고 화사하고. 그러면서도 뭔가 묘하게 차분한 듯한.

"그럼 수안 아닌가. 걘 키가 너랑 비슷한 정도거든."

"역사학과 2대 여신이라고 한대요. 애들이 장난으로."

영선이 말을 덧붙이자 민경이 난감한 화제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으로 인해 시원은 다른 여신이 누군지 알아챘지만 짐짓 모르는 척 영선에게 물었다.

"다른 한 명은요?"

"어유, 우리 성 교수님이죠."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왜요. 언니 정도면 여신인데요...?"

시원이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하자 민경은 부끄러운지 눈을 흘겼다. 민경은 시원보다 5살 위, 그러니까 35살이었는데 나이를 말하기 전까지는 알기 어려웠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이를 알 수 없는 타입이었다. 아주 동안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시원이 민경을 처음 만난 이십 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물론 그와 더불어 검은 생머리에 하얀 피부, 조금 기가 세 보이지만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미인인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이차나 직급차를 생각하면 직속 상사를 계속 놀릴 수는 없는 것이어서 시원 역시 더 입을 놀리지 않았다. 

"근데 우리 정 선생님도 인기 많으시겠는데요. 키도 크시고."

"예? 에이 그럴리가요. 멀대기만 하죠 그냥."

"시원이 인기 많았죠. 학교 다닐 때도. 남녀 가리지 않고 다 좋아했잖아."

민경이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는듯 눈을 반달로 접으며 영선에게 얘기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게 이런 것인가 싶어 시원은 후회에 빠졌다. 그래도 처음 만난 직장(?) 동료에게 괜한 오해는 사고 싶지 않아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술도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해서 친구가 많았을 뿐이에요. 인기는 무슨요."

"누가 철벽이고 둔해서 몰라서 그렇겠지만. 흐응. 뭐 그런 걸로 해 둬."

민경은 팔짱을 끼고 다시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안 그래도 위를 향해 길게 뻗은 눈매가 접히자 요사스럽기 짝이 없었다. 시원은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민경이 왜 저런 표정을 짓는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이 이상한 화제가 일단락된 것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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