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놈은 왜 나한테 시비를 걸고 난리인가. 눈을 실처럼 가늘게 떴다. 섭남답게 얼굴은 꽤 잘났다. 그런데 표정을 보아하니 이 자식도 얼굴만 잘난 것 같다. 저 눈빛에 이상한 장난기가 그득했다. 얘한테 잘못 말리면 일이 꼬일 것 같았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긴장감에 과자를 더 꼭 안았다. 빼빼로였다.



“뭐.”


“매점에서 애들이 말하던 거 너지?”


“알면서 왜 물어.”



이 학교는 미쳤다. 내 일거수일투족이 다 소문난다. 제노랑 엮이면 100% 확률로. 이게 바로 악역의 삶인 건가. 또는 오백만원을 짊어진 여자가 견뎌야 할 시련인가. 그렇다면 견뎌주겠어. 눈에 독기를 가득 품었다. 이동혁이 눈썹을 치켜올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쩌라고. 우리 엄마 돈 많음.


“이제노한테 또 까였다며?” 


“뭐어?”



내가 그 새끼한테 대쉬한 적도 없는데, 이 자식이? 혈압이 끓어올랐다. 실실거리는 이동혁을 보며 주먹을 쥐다 관두었다. 지금까지 정준희의 행보를 보면 이동혁이 저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업보지, 업보야. 그런데 왜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의 업보를 내가 돌려받는데…. 자동으로 오백만원을 마음에 새겼다. 나는 지금부터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다. 돈만 있으면 부처의 마음으로 참을 수 있다.


그러자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떴다. 번뇌로 시끄러웠던 마음이 고요해졌다/ 날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동혁을 무시하고 걸음을 돌렸다. 나는 이런 하찮은 말싸움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중생이다. 서브남의 시시껄렁한 말 따위는 내 깨달음에 어떠한 흠집도 내지 못한다. 나는 돈의 힘으로 모든 것을 초월하며….



“야, 야! 가지 말아 봐. 시비 걸려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옆에서 파리가 떠든다. 이동혁은 후다닥 걸음을 재게 놀리더니 집요하게 날 쫓아왔다. 잠만! 할 말 있어, 잠깐만 멈춰 봐…. 열심히 귀를 닫아도 눈앞에서 이동혁이 알짱거리니 문제였다. 짜증나게. 얼굴을 빠직 일그러뜨렸다. 멈춰 서니 이동혁이 앞에서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그게….”



그러면서 꼴에 주위를 살핀다. 지금 당장은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누구나 금방 올 수 있는 탁 트인 복도였다. 이동혁이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무턱대고 내 손목을 잡았다. 외간 여자 손목을 막 잡네. 기가 막혔지만 끌려가 주었다. 이동혁이 향한 곳은 인적 드문 학교 뒤 쓰레기통 근처였다. 이쯤 되면 화나는 것보다 호기심이 먼저였다.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고 장소를 가려?



“할 말이 뭔데?”



동혁이 또 눈을 굴렸다.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동혁은 몇번이고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닫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줘야 돼. 슬슬 배가 고파졌다. 나 얼른 빼빼로 까먹어야 하는데. 답답해져서 먼저 자리를 뜰까 생각하던 와중에 동혁이 제대로 말을 꺼냈다.



“이제노랑 김여주 있잖아.”


“… 그 둘은 왜?”


“둘이 진짜로 안 사귀는 거 같아.”



엥. 자동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금 소설 시점은 초중반 즈음이었다. 제노랑 여주는 갓 사귀기 시작하고, 악역인 정준희는 한창 질투심을 불태우며, 섭남 이동혁은 김여주에게 호감을 느낄 시기. 이동혁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제노랑 여주는 이미 사귀는 게 명백했다. 학교에서 얼마나 커플 짓을 하고 다니는데. 손 잡고 문제 알려달라는 핑계로 몸 딱 붙이고…. 볼 때마다 눈꼴 시려서 일부러 책상에 시선을 고정했었다. 그 둘이 안 사귀면 뭔데. 친구? 이 세상 어느 친구가 그러고 사냐.



“너 미쳤니?”


“진짜야! 내가 들었어!”



혹시 섭남이 나 엿먹이려고 함정을 파나. 눈을 가늘게 떴다. 이동혁은 정말 억울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도리질을 쳤다. 저게 연기가 아니라는 보장이 있나? 김여주한테 지랄하는 내가 싫어서 제대로 골로 보내려고 계획 짜는 거 아니야? 정준희의 악랄함과 이동혁의 영악함을 생각해보면 가능성 있다.



“상식적으로 이제노가 왜 김여주랑 안 사귀는데? 그리고 사귀지도 않는데 둘이 왜 그렇게 붙어 다녀?”


“둘이 사귀는 척만 하는 거래. 내가 몰래 들었어.”


“그런 짓을 왜 해…?”



동혁이 또 고개를 저었다. 그거까진 지도 모른다는 거겠지. 그 뻔뻔한 도리질에 되려 직감만 세게 들었다. 이건 함정이다. 나를 창의적으로 엿 먹일 방법을 섭남이 찾아낸 거야. 섭남도 남주처럼 여주를 좋아하는데, 내가 얼마나 거슬리겠어. 얼마나 여주가 당한 만큼 복수해주고 싶겠냐고. 바로 대놓고 정색했다. 몸을 돌리니까 이동혁이 또 호들갑을 떨며 날 잡았다.



“내 말 다 안 들었잖아!”


“들을 필요도 없겠다.”


“결론이 이게 아니야.”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눈에 힘을 풀고 동혁을 바라보았다. 연차가 쌓여 성의 없어진 연예인 그 자체였다. 동혁은 내가 경청을 하거나 말거나 목소리를 낮추고 쫑알댔다.



“정준희, 그러니까 너랑 나랑은 한 배를 탄 거지.”


“내가 왜?“


“넌 이제노를 좋아하고, 난 김여주를 좋아하잖아. 둘이 무엇 때문에 사귀는 척하는지 몰라도, 우리한테 기회가 있는 거지.”



그 기회가 뭐든 이동혁한테 다 몰아주고 싶다. 김여주건 이제노건 다 네가 가져라. 애먼 나한테 이제노 붙여주지 마. 애초에 걔가 나 싫어해. 이동혁이 잡은 손을 부리나케 뿌리쳤다. 여름에 덥게 왜 이래.



“그래서?”


“여주 옆에 이제노 좀 치워줘. 나도 이제노랑 여주 멀어지게 해볼게.”


“내가 무슨 수로? 이제노는 나 싫어해.”


“이제노가 진심으로 널 싫어하는 것 같아?” 



동혁이 입꼬리를 빙글거렸다. 그걸 멍하게 보는데 문득 화가 끓어올랐다. 뭐가 어쩌고 저째?



“뭐? 당연하지, 눈알이 달렸으면 그걸 못 알아채냐? 방금도 이제노한테 매점에서 욕 먹고 왔는데 날 진짜 싫어하는 거 같냐고? 어! 걔가 날 너무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거 같다! 걔가 나 쳐다보는 거 봤냐? 날 바퀴벌레 보듯 한다고!”


“그게 아니-.”


“나 이제노 싫어해! 내가 걔 싫어해서 아주 미쳐버리겠다! 이제노가 갑자기 돌아서 날 좋아하게 되어도 나는 걔 싫어!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하나 본데, 내가-.”



이동혁한테 갖은 말은 다 퍼부어주다가 멈칫했다. 이동혁의 얼굴 옆, 저 복도 끝에 누군가의 몸이 살짝 나와 있었다. 실루엣을 보니 남자였다. 더 자세하게 보려고 눈살을 찌푸렸다. 뒤통수만 보였다. 저거 누구야, 혹시 내가 하는 말 다 들었나?



“야, 저거-.”


“아니아니! 가지 말고!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어.”



누군지 쫓아가서 보려고 했는데 이동혁이 막았다. 옆에서 이동혁이 입을 바삐 놀렸다.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내 촉에 이제노가 너 그렇게 안 싫어하는 거 같거든? 너무 들이대지만 말고 내가 시킨 대로 자제하면서… 무시해도 말소리가 끝없이 머릿속에 박혀 들었다. 스탑. 손을 들어 이동혁의 말을 막았다. 안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한 번만 더 그딴 말 하면 처맞을 줄 알아.”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쥐었다. 이걸 이동혁의 얼굴에 날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주먹을 더 단단하게 고쳐 쥐는데, 유리문 너머 경악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6


도영은 요 며칠 동안 정말 기뻤다. 최고 사고뭉치였던 자기 반 정준희가 요즘 조용했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친구들이랑 싸우고 난리를 치느라 면학 분위기 조성이 얼마나 힘들었었는데. 준희에게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요새는 얌전했다. 도영은 다음 수업 자료를 챙기며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따라 바람도 선선하고, 습도도 높지 않고. 딱 기분 좋은 초여름 날씨였다. 모든 게 완벽했다.



“한 번만 더 그딴 말 하면 처맞을 줄 알아.”



라고 생각했는데. 도영은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욕을 하는 소리에 질끈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이대로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수업 자료를 꼭 붙잡고 고개를 돌렸다.


준희였다. 학교 뒤쪽으로 나가는 문틈 사이로 준희가 보였다. 그 앞엔 동혁이가 실실거리고 있었다. 우리 반의 제일가는 사고뭉치랑 둘째가는 사고뭉치였다. 준희가 동혁이 앞에서 입술을 앙다문 채 짝다리를 짚고 있었다. 역시나 더없이 익숙한 자세였다. 도영은 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잔상에 입을 벌렸다. 준희가 지금 하고 있는 건 일종의 준비 자세였다. 자신을 화나게 하는 놈을 일단 제 손이 닿는 거리 앞에 세운 다음, 주먹을 쥐고 바로 얼굴이나 목 같은 급소를…. 도영은 정신이 들자마자 수업 자료를 떨어뜨리고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준희야! 선생님 앞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아니-.”


“동혁이는 친구들이랑 축구 안 하니? 선생님은 준희랑 할 말이 있어서, 얼른 가보렴!“



도영은 목숨을 걸고 준희와 동혁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혹시 준희가 앞으로 튀어 나갈까 봐 팔짱을 끼고 동혁이를 시야에서 차단했다. 흡사 고등학생이 아니라 위험인물을 현장에서 제압하는 경호원 같은 모습이었다. 준희는 도영 건너편의 동혁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도영에게 막혔다.


도영은 결의에 차 준희를 교무실까지 무사히 데리고 갔다. 오늘도 준희를 사고에서 무사히 지켰다. 준희 본인이 일으키는 사고지만, 그래도 도영은 뿌듯했다.




#7


담임쌤에게 붙들려 한참 설교를 듣다가 간신히 풀려나왔다. 친구에게 예쁜 말 고운 말 쓰기, 너무 화가 나도 폭력을 쓰지 않기… 그래도 나 진짜 잽은 안 날렸는데. 이동혁을 때리진 않았다고 항변하니까 담임쌤이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해서 한 한숨이 아니라 안도의 한숨이었다. 준희가 예전엔 사람도 치고 다녔구나. 그걸 알게 되니까 담임쌤한테 미안해서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무슨 설교를 하든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참 착하게 말을 듣고 있으니 선생님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정준희가 속을 어지간히 많이 썩였구나. 같은 (구)직장인으로서 참 미안했다.


교무실에서 다시 교실로 올라가면서 참 많이 반성했다. 대학교도 나오고 취직까지 한 어엿한 직장인 주제에, 고등학생들이랑 이러면 안 되는데. 여기에 빙의하니 묘하게 여느 고등학생들처럼 놀게 되는 것 같다. 나잇값 해야지, 나 자신아. 죽더라도 돈 끌어안고 죽기로 했잖아. 고등학생들이랑 똑같은 수준에서 놀면 곤란하다. 조용히 학교 생활하면서 수시나 챙기기도 바쁘다.


원작이랑 안 엮이기. 이제부터 이 문장을 신조로 삼기로 했다. 내가 착한 역할이면 모를까, 악역이면 원작이랑 엮여봤자 손해만 본다. 그리 꿋꿋하게 다짐하며 교실 문을 열었다.



“제노야,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어느 부분이? 미지수를 세 개로 놓고 대입하면….”



그렇게 다짐하자마자 남주랑 여주가 대문짝만하게 눈에 들어왔다. 여주가 이제노한테 착 달라붙어 문제지를 보고 있었다. 이제노는 그걸 밀어내지도 않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풀이 과정을 처음부터 설명하는 중이었다. 아주 대낮부터 사랑이 넘치시네. 이동혁은 미쳤나, 저게 어떻게 사귀는 척이야. 핑크빛 분위기에 토할 거 같다.


아무런 내색도 안 하고 조용히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제노랑 김여주가 꽁냥거리는 꼴이 싫긴 하지만 시비를 걸 순 없다. 시비를 걸면 원작 정준희 꼴밖에 나지 않는다. 원작이랑 엮이지 않겠다는 좌우명을 세운 지 5분 만에 어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도 공부나 해야지. 수능 다시 치는 건 싫지만 돈은 좋다. 정엄마 씨한테 말해서 개인 과외 끊어달라고 해볼까. 그 정도 재력이면 비싼 과외도 여러 개 붙여줄 수 있을 텐데. 우선 수학 하나, 영어 하나, 국어는 과외쌤을 불러 말어….



“준희야, 교무실 갔다 왔지?”


“… 응?”


“어쩌다 갔다 왔어? 교실에 없어서 찾았잖아.”


“아….”


“기분 나쁘면 안 얘기해줘도 돼.”



그렇게 원작이랑 안 엮이겠다고 다짐했는데. 원작이 직접 제 두 발로 걸어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제노한테 수학 문제 설명을 듣다 말고 성큼 다가온 김여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 그런 척하며 주위를 살폈다. 이제노는 대놓고 여주를, 이동혁은 안 그런 척 여주를 신경 쓰고 있었다.


다시 여주랑 눈을 맞췄다. 생기 있게 빛나는 눈이 내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랑 사이 나쁜 김여주가, 굳이 내가 교무실 갔다 온 얘기를 꺼낼 이유가 뭐겠어. 이건 나랑 싸우자는 거다. 그것도 아니면 이제노랑 이동혁 앞에서 나한테 쪽을 주고 싶은 거겠지. 보나 마나 내가 또 무슨 사고를 쳐서 담임쌤한테 불려간 줄 알 테니까.


수가 너무 유치했다. 김여주 착한 줄 알았는데 나한테 쪽 주네. 이걸 그냥 뒤집어엎어 버릴까. 팔팔 끓는 화를 다시금 식혔다. 이미 저기서 이제노랑 이동혁이 이쪽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여주한테 조금이라도 시비를 걸었다간 저 둘이 득달같이 달려올 것이다. 이제노랑 이동혁이 무섭진 않았지만 담임쌤이 불쌍했다. 남자애 둘이랑 머리채를 잡고 싸우면 또 그거 수습하시느라 피부가 나빠지시겠지… 참아야지. 고등학생들이랑 똑같은 수준에서 투닥거릴 순 없었다.



“잘… 모르겠다?”



그리하여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눈썹은 들어 올리고, 축 처져 있던 입꼬리엔 최소한으로 힘을 주었다. 여주의 눈을 보는 대신 눈썹 사이 미간을 바라보았다. 금세 영혼은 없지만 성의 없다고 꼽주기엔 애매한 표정이 만들어졌다. 아침마다 과장이 붙잡고 옷차림을 지적할 때마다 하던 표정이었다. 난감한 대상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할 때 효과가 좋았다. 지금은 그 대상이 김여주였다.



“모른다고?“


“어… 글쎄… 담임쌤이었는데….”


“….”



그리고 말은 일부러 느릿하게 했다. 이것 역시 과장용 대처법이었다. 과장은 성격이 급해 상대방이 느리게 말하는 걸 싫어했다. 결국 제 성질을 못 이겨 날 놓아주고 다른 사람을 쪼러 떠나곤 했다.

김여주의 질문에 요리조리 말을 돌려가며 동태눈깔로 대응했다. 야, 니가 점심시간마다 붙잡고 쌍수 추천하는 과장을 만나봤냐. 첫날엔 눈썹 정리, 둘째 날엔 쌍수, 셋째 날엔 코, 넷째 날엔 입술 필러를 추천했었지. 분명 사무 직종인데 자꾸 얼굴 재건축을 추천하고 지랄이셨다. 그 과장님이 바로 지금 스킬을 개발하게 해준 장본인 되시겠다. 부하 직원 쪼는 쓸모없는 과장인 줄 알았는데, 이런 데엔 쓸모가 있네.


계속 눈치 없는 것처럼 김여주가 묻는 말을 피해 가니, 여주도 더 말을 붙이지 못했다. 결국 여주는 별 소득 없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노의 옆이었다.


둘이 손잡는 것까지 보다가 고개를 박았다. 저 꼴을 보느니 차라리 미분을 하겠다. 수학 문제를 풀며 진지하게 진로를 고민해보았다. 이번엔 취직 잘 되는 이과로 노선을 틀어볼까. 울 엄마한테 돈이 많긴 하지만, 미래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다. 나 하나 먹고 살 구멍은 뚫어놔야지. 다행히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이다. 재수까지 한다고 가정하면 2년 반은 남은 셈이다. 수능 전날에 빙의 안 해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랬으면 숨 참고 한강 다이브했다.


한창 문제 후반을 풀어나가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고개를 문제에서 뗐다. 시선이 느껴진 쪽이었다. 이제노가 날 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돌렸다.



뭐야. 또 나한테 시비 걸 거 찾고 있었나? 쌓인 사건이 한두 개가 아니라 이제노를 향하는 눈길이 뾰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노는 내가 쳐다보건 말건 여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주가 그런 이제노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이제노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걸렸다. 눈은 자연스럽게 휘어졌다.

 

아주 염병을 떠는구나. 이동혁은 진짜 더위를 먹은 건가? 저 둘이 어떻게 안 사귀는 사이야. 이제노 눈에서 지금 꿀이 뚝뚝 흐르고 있구만. 누가 보면 여주를 지가 낳은 줄 알겠다. 도가 넘는 아빠 미소에 토를 했다. 다시 수학 공식으로 시선을 옮겼다. 음, 진정돼. 이것도 보면 토하고 싶긴 한데 저것만큼은 아니야. 갑자기 이제노를 보다 수학 문제를 보니 수학 문제가 예뻐 보였다. 수학아, 우리 원작 따위는 잊고 오순도순하게 우리끼리 살아보자.




#8


학교 끝날 때까지 여주가 더 내게 시비를 걸진 않았다. 또 치근덕거리던 유얄미는 학원 간다는 핑계로 떨어뜨렸다. 정말 염치도 없이 끝까지 얻어먹으려는 애들은 유얄미김미워주밉상으로 처음 봤다. 그냥 돈을 내놓으라고 해라. 내 지갑 믿고 학생이 가기 부담스러운 곳도 팍팍 가는 것 하며… 날강도가 따로 없었다.


종례 끝나고 쫓아오려던 이동혁 떼랴, 유얄미 떼랴. 오늘 하루도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학교에서 7교시를 보내는 건 똑같은데, 어떻게 된 게 매일 하루하루가 다이나믹했다. 회사와 집을 반복하던 일상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다시 통장에 입금된 오백만원이 떠올랐다. 아니다. 회사 따위 그립지 않았다.



“아, 누구야.”



핸드폰 연결음이 울렸다. 나한테 전화 올 데 없을 텐데. 이동혁은 확실히 아니다. 전화번호 달라고 붙잡고 늘어지는 걸 방금 전에 필사적으로 떨쳐내고 왔는데. 김여주도 성격상 굳이 전화까지 걸어서 싸우려고 들진 않을 것 같고. 이제노는 아예 이럴 이유가 없다. 맞다, 유얄미, 김미워, 주밉상 중 하나인가? 가능성 있다. 배고픈데 돈 낼 사람이 없나 보지. 맞으면 바로 끊어버려야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자 표시 제한?”



뭐지? 핸드폰을 수상하게 노려보았다.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결려온 전화가 몇 번 더 울리더니 이내 끊어졌다. 핸드폰 액정을 다시 들여다보기가 무섭게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도 발신자 표시 제한이었다.


국제 전화 아니야? 이거 받으면 요금 폭탄 맞나? 어쩌면 고도로 발달한 보이스피싱일지도 모른다. 무심코 실수로 받는 것만으로도 통장에서 돈이 줄줄 새 나가는 거지. 내 통장에 오백만원 들어온 건 또 어디서 알고? 괘씸한 마음에 바로 거절 버튼을 눌렀다. 이 자식들이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네. 어디 한 푼이라도 줄까 보냐. 절대 안 뺏긴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현관문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또 들어가면 정성찬이 있겠지. 벌써부터 걔가 학교가 뭐니, 이제노가 뭐니 할 생각에 골이 아파지는 것 같았다. 좀 밖에 있다가 들어갈까. 잠깐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엄마 집인데 내가 눈치 볼 게 뭐가 있어. 정성찬이 시비 털면 나도 똑같이 해주면 된다. 그렇다고 예전 정준희처럼은 말고, 적당히 상식적인 선에서. 정성찬 하나 못 이기면 앞으로 이 험난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겠어.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열어젖혔다.



먼저 보인 건 정성찬이 아니라 모르는 아저씨였다. 사십 대 후반쯤 되는 것 같은데. 키는 엄청 컸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집안인데도 은근히 옷을 차려입은 태가 났다. 머리도 넘긴 것 같고. 왜 남의 집에서 열심히 꾸며 입고 있지? 의아하게 쳐다보니 남자가 날 잠깐 보다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괜스레 머쓱해져서 꾸물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손님인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고개 돌린 건 뭐야.



“아빠!”



위층에서 정성찬이 우다다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아빠? 정성찬이 그 아저씨 옆에 가서 섰다. 이제 보니 둘이 꽤 닮아 있었다. 키도 크고 목도 좀 긴 것 같네. 그렇다면 좁혀지는 인물이 단 하나 뿐이다. 내 새아빠이자 정성찬의 친아빠. 정성찬에겐 풀어지던 얼굴이 내 얼굴을 보니까 다시 굳었다. 의붓딸 진짜 싫어하시네요. 싫어할 만 하지만, 그래도 어른이 그렇게 대놓고 티를 내셔야 되겠습니까. 눈치를 보며 거실에 한 발을 디뎠다. 방에 들어가서 문 닫고 있어야지.



“아아, 준희 왔니?”



갑자기 정성찬의 아빠가 입을 열었다. 아까까지 개무시했으면서 왜? 주춤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새아빠가 어느새 상냥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얼굴만 보면 진짜 예뻐하는 의붓딸이 학교에서 돌아온 줄 알겠다.



“준희 와 있었구나.”


“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랑 옅은 향수 향기. 정준희랑 묘하게 닮았으면서 조금 다른 얼굴이 보인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여자를 살폈다. 걸친 옷이 한눈에 봐도 명품이었다. 목소리도 부드럽게 단호했다. 나이를 먹어서도 자기 관리를 하는 태가 났다. 왜 새아빠가 돌연 친절한 척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오랜만에 집에 오니까 좋네.”



정준희의 엄마, 오백만원의 출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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