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일찍 일어났다.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돌아온 후 내내, 그러니까 의문의 실종 사고를 겪기 전에 비해 두 시간씩 일찍 일어났다. 잠을 설치는 것도, 악몽을 꾸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어르신 같은 잠버릇이 들었을 뿐이기에, 딸아이가 젓가락만 잘못 달각거려도 화들짝 놀라던 부모님조차 이 이른 기상에는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놓았다. 물론 시연은 이 새로운 습관의 진짜 연원을 알고 있었다. 

‘등불이 비싼 곳에서는 일찍 일어나야지.’

밤이 이르니 아침을 일찍 시작해야 하는 것은 불이 귀한 사회에서의 당연한 이치다. 돈 많고 시녀들 줄줄 딸린 귀한 아가씨라면 모를까, 상관에게 닦여대는 말단 종자 신세에 일출보다 늦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될 말이다. 거의 비명을 지르며 오전 다섯 시 반에 깨어나던 것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습관이 되었다. 이 세계에는 시연을 비명 없이 깨워 줄 알람 시계가 있고- 별 생트집을 잡아 경멸하고 구박할 상서령은 없는데도. 


*


일찍 일어난 시연이 그 시간에 하게 된 일은 도시락 싸기였다. 계란을 풀어 약불에 올리고 적당히 익는 동안 냉장고의 밑반찬을 골라 담았다. 어설픈 솜씨로 지단을 둘둘 말아 겨우 말이같은 모양을 만들고 나서, 계란물이 마저 익는 동안 밥을 퍼 담았다. 조그마한 2단 통이 다 차면 일 인분 도시락이 완성이었다.

귀염받고 자란 딸답게 반찬하는 실력은 없었다. 상서령 댁에서 부엌데기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부엌데기였다면 뺨 얻어맞고 나서 밥풀이라도 양껏 떼어먹었지, 칠일칠야 물만 먹고 굶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알아들을 사람 없는 혼자만의 농담이었다. 

사실은 그저 일 년을 쉰 후 복학한 학교에서 남들의 눈길을 받으며 식사하는 것이 거북했을 뿐이다. 급식도, 식당도 마다한 시연은 점심 시간을 보낼 장소로 옥상을 택했다. 지나치게 많이 남는 아침 시간을 그녀는 알차게 점심 준비에 사용하기로 했다. 


도시락을 들고 볕 드는 옥상에 앉아 밥을 꼭꼭 씹어먹으며, 시연은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있든 없든 언제고 제 힘으로 왕보다 더한 것이 되었을 것 같은 남자와, 늘 만개한 꽃 같을 아름다운 남자 그리고 그 곁의… 시연이 가장 오래 곁을 지킨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탁색이라곤 섞이지 않은 결벽한 용모가 그녀 앞에서는 어떤 횡포를 펼쳤는지, 본인 앞에서 차마 항의도 할 수 없는 그 일관성 있는 재해가 그녀를 어떻게 흔들고 휘감았는지. 그렇다고 모두에게 공평한 자연재해로 치부하기엔 그녀에게는… 좀 너무하지 않았었는지. 

아니야, 내게만 너무했을 리가 없다. 시연은 마지막 계란말이 한 쪽을 집어먹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상서령님은 내가 마지막 심부름으로 전했던 조 공님의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내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내게 아무렇지 않게 손 뻗었던 것처럼, 내가 없어져도 그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사람이니까. 

어쩌다 여기에 생각이 이르면 괜스레 울컥해 빈 도시락통을 뚫을 듯 노려보았다. 생긴 것답게 밥 하나 복스럽게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시연은 돌아온 후에도 일부러 삼국지와 중국 역사책조차 찾아보지 않았다. 그 남자가 그 큰 도시락을 맛있게 비우고 천수를 누리다 갔다면 괜히 분할 것 같아서… 잘 있어요? 궁금해하고 싶지 않은 남자의 안부를 혼자 물으며 시연은 쓸쓸히 도시락통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비종이 치고 교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도시락 가장 윗칸에 계란말이를 꾹꾹 눌러넣던 시연이 아차 했다. 오늘은 수학여행 룸메들이 점심을 사 준다며 꼭꼭 얼굴 보자 당부했던 날이었다. 저들이 미안할 것도 없는데 미안하다며 고개도 못 들고 펑펑 울던 애들이 겨우 그녀를 보면서 깔깔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시연 쪽이 미안해서 불편할 지경이었지만-

‘도시락은 필요 없겠네.’

유난히 예쁘게, 네모낳게 잘 말아진 계란말이가 아쉬웠다. 시연은 잠깐 고민하는 척만 하고 손으로 하나를 집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함께 말아넣은 김의 짠맛이 은은하게 퍼졌다. 가장 좋아하는 김 계란말이였다. 각진 소용돌이 모양이 혀 밑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졌다. 

“…밥 잘 먹고 있어요?”

계란말이를 우물우물 씹어 삼킨 후 숨처럼 무심코 내뱉은 그 말에는 방향이 없었다. 들을 사람은 눈 앞에도 등 뒤에도 없고, 주인 잃은 도시락통만이 계란말이 한 조각만큼의 자리를 비운 채 얹혀 있을 뿐이다. 시연은 잠시 침묵했다. 침묵했다가 공연히 혼자 헤헤 웃었다. 상서령이 들었다면 반드시 핀잔했을 실없는 웃음소리였다.  나를 단 한 번 궁금해하지도 않을 남자, 얼마나 오래 살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죽은 지 한참일 그 남자를 향해 그녀가 관대하게 도시락통을 밀어 주었다. 

“선심 썼다, 내가. 이거 두고 갈 테니 굶지 말고 다니세요. 전 학교 다녀올게요.”

그대로 빙글 뒤돌아 부엌을 나서는 복학 여고생을, 야무지게 뚜껑 닫힌 2단 도시락통이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락통답게, 아무 생각도, 아무 감정도 없이, 다만 따뜻한 밥과 반찬만을 가득 담은 채로. 





근간 독자로 열심히 포스타입을 드나들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제 포타에도 구독자가 계시고...(와...) 이제 뭐 더 쓸 것도 없는데 어쩌나... 그래도 최근에 쓴 게 있어 올려놓고 갑니다. 모쪼록 행복한 덕질 하시기 바랍니다.



아무거나스 안가리고스 마구머거스 @z__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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