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급 에스퍼



47화



 ‘그래, 어이가 없지? 나도 알아.’

 윤호는 힘주어 입술을 꼭 다물고, 저를 쳐다보는 진우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지난번에도 사례한다는 말에 군말 없이 그러마 따라오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도 진우가 윤호의 제안을 거절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윤호가 치렀던 사례금은 일에 비해 아주 큰 금액이었다. 노동에 대한 대가뿐만 아니라, 입막음비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찬찬히 윤호의 얼굴을 살피던 진우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사례는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진 신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진우의 대답에 순간 긴장이 탁 풀렸다.

 “좋아요.”

 가슴에 얹어놓았던 돌 하나가 치워지는 기분에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럼, 짐 챙기고 계세요. 저는 창구 문 닫기 전에 퇴원 수속하고 올게요.”

 아까와는 비교되지 않게 가벼워진 목소리로, 윤호는 문을 나섰다.



 산호색으로 물든 얼굴과 저를 노려보는 반듯한 눈매는 바라보기만 해도 진우의 숨통에 보드랍고 따뜻한 분홍색 올가미를 걸어 죄는 듯했다. 저것을 두르면 숨이 막힐 것을 알아도 기꺼이 목에 걸고 싶도록 사랑스러운.

 진우는 한참 더 윤호의 얼굴을 샅샅이 살펴보며 탐닉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태연함을 가장하여 대답하자, 야무지게 꼭 다물려 있던 윤호의 입술이 벌어져 자두 맛 사탕처럼 달콤해 보이는 혀가 반짝 드러났고, 웃음 짓는 눈은 손톱달 모양으로 가늘어졌다.

 복도 저편으로 총총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진우는 쿵덕거리는 왼쪽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윤호의 무의식적인 진짜 미소는 필요에 의해 의식적으로 짓는 미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심장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진우 씨 사정을 이용했어요.’

 붉어진 얼굴을 슬쩍 손으로 가리며 어물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이까짓 일에 사람을 이용했다며 죄책감을 느끼다니, 그런 이유로 불편한 침대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며 성실하게 저를 돌봐준 것이라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더군다나, 신윤호가 저를 필요로 한다면 진우는 이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이용당해 줄 요량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는 것을 겁내는 본인이 부끄러운 듯, 몹시 위축된 모습으로 눈썹 끝을 늘어뜨린 윤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불을 삼킨 것처럼 뱃속이 화끈거렸다.

 윤호의 마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그의 이전 파트너라는 작자를 당장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분노의 열기와, 목까지 붉게 물들인 윤호의 몸에서 향긋하게 피어오르는 체향에 이성의 끈을 놓칠뻔한 짐승 같은 제 본능의 열기를 동시에 느끼고, 또 그것들을 잠재우느라 필사적으로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진우를 붙들어 준 것은 윤호의 눈이었다. 투명한 크리스탈 돔 같은 각막에 쌓인, 불안이 가득 찬 윤호의 갈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진우는 그의 의도를 빨리 알아채지 못한 자신의 아둔함이 한심해 벽에 머리라도 쾅쾅 찧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신윤호 옆에 있을 자격이 안 돼.’

 능력이 모자라면 눈치라도 있던지. 진우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한 단계 내리며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잠시 기숙사를 좀 들러서 가도 되겠습니까? 지금 입은 옷은 친구한테 빌려 입은 거라 영 불편해서요.”

 진우는 운전석 옆자리에 타며 말했다.

 현장에서 입고 있던 옷은 죄다 헐은 대다, 그나마 상처를 치료하는 통에 잘려 나가 걸칠 것이 없던 진우였다. 예전부터 이럴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곤 했던 신혁이 진우의 소식을 듣고 눈치껏 제 옷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가진 옷 중 크기가 제일 낙낙한 것으로 대충 골랐는지, 신혁이 빌려준 옷은 위아래가 영 어울리지 않았다.

 채도 높은 선명한 보라색에 흰색 바이어스가 세로로 그어진 운동복 바지와, 장미에 둘러싸인 커다란 재규어가 멋지게 포효하는 장면이 가슴팍에 수 놓아진, 반질반질 윤이나는 재질의 짙은 녹색 셔츠는 단순히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는다를 떠나서 옷 주인의 난해한 취향이 엿보였다.

 심지어 품은 얼추 맞지만, 유난히 키가 껑충하게 큰 진우에게는 길이가 조금씩 모자라서 손목과 발목이 옷 밖으로 비죽 나와 있었다. 벌써 겨울의 한파가 다가오는 날씨에 겉옷이 없는 것도 문제였다.

 윤호는 그 꼴을 보고 웃지 않기 위해 얼른 시선을 정면으로 돌린 후 미간을 힘주어 구겼다. 하지만 입술 끝이 요상하게 씰룩거리는 것만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죠.”

 각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웃음을 참고 기숙사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방향지시등을 넣고, 우회전을 기다리던 윤호의 눈에 진우가 입은 녹색 셔츠가 들어왔다.

 세상 담백한 무표정으로 창밖을 보는 진우의 가슴팍 위에서, 장미에 둘러싸인 채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위협적인 포즈를 취한 재규어를 다시 보자마자 윤호는 끝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풉-! 아하하하!”

 갑작스러운 윤호의 폭소에 운전석을 돌아본 진우의 눈이 커졌다.

 “하하하! 아 정말…!”

 깜박거리던 횡단보도의 녹색불이 사라지고 빨간불이 켜지자, 천천히 핸들을 돌리는 윤호의 얼굴에는 카메라 앞에서 만드는 표정처럼 완벽한 미소가 아닌, 왼쪽눈과  오른쪽눈이  짝짝이로 일그러지는 자연스러운 큰 웃음이 가득 걸렸다.

 “하하하, 웃어서 미안, 미안해요. 그런데 그 옷이 정말. 아하하…”

 시원하게 터트렸던 웃음소리는 점점 사그라들다가, 어두운 차 속을 가득 채운 정적에 금방 묻혀버렸다.

 “……”

 어색하게 얼굴을 굳힌 윤호가 민망함을 떨쳐내기 위해 몇 번 작게 헛기침했다. 그러나 좁은 차 안에는 여전히 싸늘한 냉기를 품은 침묵만이 흘렀다.

 아, 그깟 웃음을 왜 참지를 못했을까. 뒤늦게 끔찍한 후회가 몰려왔다.

 -삐이익, 삐이익…

 크게 당황한 탓인지, 방향 지시등을 넣는다는 게 그만 실수로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판판한 고무 날이 마른 유리창을 오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허…”

 갈증으로 바짝 타는 목에서 넋 나간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윤호는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차 문을 박차고 나가 데굴데굴 굴러서 어딘가의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둘러 와이퍼를 끄고 다시 방향지시등을 넣으며 허둥거릴 때였다. 피식, 옆좌석에서 작게 웃는 콧바람 소리가 들렸다. 진우가 바보 같은 윤호의 모습을 보며 웃은 것이다.

 ‘와, 웃었어.’

 병문안을 온 친구들에게는 그렇게 미소며 웃음이 헤펐으면서, 윤호에게는 아직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입술 끝만 올리며 미소 짓고 있는지, 아니면 눈을 휘고 이를 보이며 활짝 웃고 있는지, 콧잔등을 찌푸린 장난스러운 모습일지.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고개만 살짝 돌리면 진우의 표정을 볼 수 있겠지만, 혹시 천치같이 구는 저를 비웃는 표정을 보게 될까  봐, 윤호는 실수로라도 옆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앞에 고정하고 기숙사까지 입 닥치고 운전만 했다. 홧홧하게 타오르는 게 제 얼굴인지, 제 가슴속인지 혼란스러워하며.



 차가 곧 에스퍼·가이드 청 제공의 오래된 연립주택형 기숙사 앞 주차장에 멈춰 섰다.

 “여기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질문이라기보다는 제안이나 확인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나 윤호는 함께 차에서 내려 기숙사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진우를 뒤따랐다.

 “같이 가요.”

 갸우뚱, 진우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굳이 네가 왜?’ 하는 얼굴이라 윤호는 서둘러 덧붙였다.

 “아, 저. 기숙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기도 하고…”

 속으로 뜨끔해서 변명하던 윤호는 혹시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이는 게 싫거나, 그저 호기심으로 방문하겠다는 말은 실례였나 싶어 말끝을 어물어물 흐렸다.

 다행히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같이 가시죠.” 하고 짧게 말한 뒤 앞서 걸었다.

 윤호는 개의치 않는 태도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성큼성큼 저만치 빠르게 멀어지는 진우의 뒤를 얼른 쫓아갔다.

 사실 윤호의 말은 절반쯤 사실이었다. 공무직 능력자들에게 저렴하게 제공되는 능력자 기숙사는 지금껏 윤호가 관심 두지도 않고, 가볼 일도 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호기심이 일었다. 능력자 센터에서 멀지 않았기에, 차를 몰고 다니다 보면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한 번씩 지나가기 마련이라, 새삼스럽지만 내부가 궁금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이유는…

 윤호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계단을 힘든 기색 없이 착착 가볍게 올라가는 앞사람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저 인간이 사는 곳이 궁금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으며, 윤호는 제가 강진우라는 사람에 대해 여러모로 잘못 추측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뻣뻣한 표정과 태도 때문에 인간성 없고, 사회성도 없고, 친구 따위도 없는 딱딱한 사이보그 정도로 여겼던 것이 무색하게, 그는 무척 책임감 있고, 재미있는 친구들과 다정하게 지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애인도 있는 모양이고.’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울컥했다가, 윤호는 위화감에 혼자 움찔했다.

 ‘애인이 있으면 뭐?’

 저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윤호는 황급히 머릿속에 이리저리 채워진 화이트보드를 싹싹 지우며 계단을 오르는 발을 힘차게 굴렀다.

 4층짜리 빌라의 4층에 진우의 방이 있었다. 아이보리색 유광 페인트가 벽에 두텁게 발린 계단참에서 진우가 번호 키를 누르는 것을 기다렸다.

 -띠리릭

 가벼운 기계음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작다.’

 그것이 첫인상이었다. 흔하디흔한 남색 타일이 깔린 현관과, 10센티쯤 되는 턱 위로 올라서면 바로 이어지는 작은 싱크대가 전부인 간이부엌, 그리고 세탁기와 빨래건조대가 놓인 베란다가 딸린 침실과, 욕조 없는 화장실이 있는 1.5룸 형태의 기숙사는 참으로 조그마했다.

 ‘휑하다.’

 두 번째 인상이었다. 제대로 놓인 것은 침대뿐, 그 작은 공간이 텅 비어 보일 만큼 이렇다 할 가구 하나가 없었다. 옷장 대신 놓여있는, 크지 않은 행거에는 온통 시커먼 옷들이 걸려있었다.

 진우는 윤호가 제 방을 둘러보는 것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는지, 손에 든 종이가방을 행거 앞에 내려놓고 입고 있던 상의의 단추를 툭툭 빠르게 풀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윤호는 갑자기 훌렁 드러난 진우의 살색에 놀라 황급히 눈을 돌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애써 듣지 못하는 척하며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선이 향한 곳은 작은 용량의 냉장고 위에 놓인 잡동사니들이었다.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것 같은 썰렁한 싱크대 옆에 놓인 키 작은 냉장고 위에는 관리비 고지서나 배달음식점 선전용 책자 따위가 대충 놓여있었다.

 [기숙사 신청일 안내]

 맨 위에 놓인 종이에 인쇄된 제목에 눈길이 멈췄다. 두 번 접힌 자국이 있는 복사 용지는 날짜가 멀지 않은 기숙사 신청일에 대한 우편물이었다.

 흘끗, 진우쪽을 봤다가 윤호는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티셔츠를 집어 들고 머리와 팔을 꿰어 넣는 진우의 하체에 걸쳐진 것이 드로즈뿐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여기저기 크고 작은 반창고가 붙어있었지만, 언뜻 보아도 잔뜩 화가 난 등 근육을 자랑하는 널따란 역삼각형 상체에, 탄탄하게 조여진 둔부, 올림픽 선수를 연상케 하는 하체를 가진 뒷모습은 천재 조각가가 정성 들여 조각해 놓은 것처럼 완벽한 비율이었다.

 윤호는 머릿속에서 꾸역꾸역 불어나는 잡생각을 떨치려 노력하며 아예 인쇄된 복사 용지를 집어 들었다.

 기숙사는 1년 단위로 새롭게 신청하게 되어있었다.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뉘어 있는 신청 기간에 일제히 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하는 구조였다. 빠르게 훑어보니, 진우가 거주하는 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구식 기숙사였다.

 “다 됐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윤호에게 다가왔다. 윤호는 읽고 있던 종이를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스포츠 패딩 차림에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진우가 서 있었다. 생채기 난 얼굴과 매치되니 어디서 치고받고 싸운 불량 학생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어딘지 조금 섹시해 보인다는 생각에 윤호는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네,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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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을 어디다 뒀더라 찾고다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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