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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거지 같은 섬에 두 번씩이나 버려지다니 (2)




제발 아가리 좀 다물어, 여주야…


벙쪄 보이는 이동혁의 표정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잘 보여서 사과 빡세게 해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개짓거리니. 원래는 이동혁 얼굴을 보자마자 여태 미안했다고 사과라도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다짜고짜 싸가지 없는 말만 찍찍 내뱉는 이동혁을 보고 있자니 사과 말고 시비가 먼저 나왔다. 내가 반말해도 된다고만 했지, 언제 그렇게 싹바가지 없게 시비 걸어도 된다고 했니. 난 쫄릴 거 없다 이거야 (지금 세상에서 제일 쫄아 있음). 벌벌 떨리는 손을 꼬옥 쥐어 잡은 채로 이동혁을 노려봤다. 이동혁은 뭐 이딴 게 다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 반말해도 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말 바꿔? "

" 반, 반말만 된다고 했지! 내가 언제 그렇게 시비 걸어도 된다고 했어? "

" … "

" 내가 존나 꼴 보기 싫어도 그렇지. 그런 말 들으면 아무리 나라도 기분 나쁘거든? "




솔직히 마크가 시비 털었으면 내가 할 말이라도 없지. 내 과거의 기억이 맞다면, 난 이동혁한테 잘 보이기 위해 안달이었지 딱히 시비를 턴 적은 없었다. 맨날 쉬는 시간마다 찾아가서 과자 갖다 줘, 마크랑 동아리실 갈 때마다 목마르겠다며 음료수 사다 바쳐줘. 하루는 애가 하도 골골대길래 마크 주려고 사 왔던 종합 감기약도 건네준 적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존나 어이없네. 지금 나한테 이렇게 시비 터는 이유가 뭐야 대체? 미운 눈빛으로 이동혁을 흘겨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은혜도 모르는 놈 같으니.




" 딱 봐도 동아리 물 흐리려고 온 거 같아서 한마디 한 건데. 이젠 그것도 듣기 싫어? 그럼 뭐, 어떻게 대해줘? 상전처럼 대해 줘야 하나? "

" 동아리 분위기 개판 만든 건 미안하게 생각해. 그래서 지금 동아리실 온 거잖아. "

" 동아리실 온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인데. 이제 와서 춤 연습이라도 하게? "

" 아니. 나 동아리 나갈 거야. "

" … 뭐? "




이동혁은 갑작스러운 내 동아리 탈퇴 소식에 조금 놀란 듯 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6년 전의 김여주는 나가라~ 나가라 쌩 지랄을 해도 눈 하나 깜빡 안 했으니까. 뒤에서 내 뒷담을 하든 말든, 내 앞에서 꼽을 주든 말든. 나는 마크 하나만 바라본 채 고등학교 3년 내내 댄스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3학년 때는 마크랑 반이 달라지는 바람에 동아리 활동에 더욱 집착하기도 했었고. 이동혁 입장에서는 현재 내 행동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언젠 나가라고 대놓고 꼽을 줘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던 애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동아리를 나간다고 하니까. 하지만 현재의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상태였다.


애초에 학년도 다르고 층도 다른 이동혁, 박지성을 알게 된 것도 댄스 동아리 때문이었으니까. 내가 이곳을 나가기만 한다면, 마크는 몰라도 이동혁과 박지성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었다. 한마디로 엮일 거리가 모조리 끊긴다는 말씀! 나는 하나 둘 바뀌어갈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콧바람을 드릉드릉했다.




" 진짜 쪽팔린 거 아는데, 나 동아리 탈퇴한다고 동아리 회장한테 말 좀 해 주라. 아까 안에 보니까 이미 연습 시작한 애들이 몇 명 있는 모양이더라고. 나 가면 또 애들 개정색 할 거 아니야. 연습에 집중도 안 되고. "

" … 진짜 나가겠다고? 동아리? "

" 그럼 진짜로 나가지 가짜로 나가니? "




얼빠진 듯한 이동혁의 표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새낀 나가준다고 해도 지랄이람. 아마 이동혁이 나를 싫어했던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건, 백퍼 동아리 일 때문이었을 거다. 이동혁은 유독 동아리에 대한 집착이 심했는데, 워낙 춤을 좋아하고 춤 쪽으로 장래를 정한 애여서 그런지 남들보다 동아리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이동혁 입장에선 마크 때문에 댄스 동아리에 들어오게 된 내가 아주 눈엣가시처럼 느껴졌을 테지. 추라는 춤은 안 추고 맨날 구석에 서가지곤 마크 춤추는 모습이나 구경하고 있었으니까.


하루는 교내 공연에 나갈 멤버를 고르고 있었는데, 과거의 나는 마크와 함께 공연에 나가겠다는 집념 하나로 공연 출전 멤버에 지원한 적이 있었다. 학년도 학년이고, 교내에 똘추라고 소문이 난 나를 함부로 내칠 수 없었던 동아리 회장은 울며 겨자 먹기로 나를 공연 출전 멤버로 뽑았고… 그 결과는 말 안 해도 알겠지.




" … 하… 여주야. 아직도 춤 숙지 못했어? "

" … 누나. 대형 틀리셨어요, 지금. "

" 노래 다시 틀게요. "




시도 때도 없이 실수를 반복하는 내 모습에 마크는 말없이 이마를 짚었고, 박지성은 보기 드문 똥 씹은 표정을 한 채로 내 대형을 지적했으며, 이동혁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한 얼굴로 조용히 노래만 틀었다. 연습실에 배치되어 있는 전신 거울엔 삐걱대는 내 모습이 10초에 5번 단위로 비춰졌고, 그럴 때마다 연습실 분위기는 아주 개판이 났었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다. 쪽팔리고 창피한 건 둘째 치고, 죄책감 하나 없는 얼굴로 태연스럽게 연습실을 누비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감히 장담하건대, 6년 전의 김여주는 눈치라는 것이 결핍된 채로 태어난 인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과거의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공연에 나갔었고, 지금은 교내 공연이 시작되기 전이었으니. 나는 과거의 흑역사를 깔끔하게 청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들뜬 상태였다. 이런 절호의 찬스를 내가 놓칠 리가.




" … 동아리 나가면 번복은 없어. 다시 들어오려고 해도 못 들어온다고. "

" 아니, 알겠다니까? 절대, Never, 맹세코 다시 들어갈 일 없으니까 걱정 마. 댄스 동아리 근처엔 모습도 안 드러낼게. 너네 연습실 쪽으론 발걸음도 안 옮긴다. "

" … 알겠어. 동아리 회장한테 너 나간다고 말 전해줄게. "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이동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동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해사하게 웃어 보이며 고맙다는 말을 남발했다. 아싸! 첫 번째 미션 클리어! 지금쯤이면 댄스 동아리 애들이 점심 먹고 연습실로 몰려오고 있겠지? 나는 복도 쪽으로 틀어 놨던 몸을 다시 이동혁 쪽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 여태 미안했어, 동혁아. 동아리 분위기 개판 만든 것도, 춤에 애정도 없으면서 마크 따라서 동아리 들어온 것도. "

" … "

" 이젠 너 불편하게 할 일 없으니까, 나도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




내 말을 들은 이동혁이 동아리실 문에서 손을 떼어내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동혁 얼굴은 답지 않게 긴장한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이동혁을 향해 상큼한 (물론 내가 생각했을 때다) 미소를 내보이며 결정적인 한마디를 날렸다.




" 반말하라고 했던 거 취소. "


" … 뭔… "

" 이제부턴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꼬박꼬박 존댓말 써 줬으면 좋겠어~ 그럼 이만! "




내면에 있던 직장인 꼰대 정신을 못 버린 나는 얼척 없어 보이는 이동혁을 내팽개친 채 발걸음을 옮겼다. 나만 보면 싸가지 없게 굴기 바빴던 이동혁의 얼빠진 얼굴은 생각보다 더 통쾌했다. 첫 번째 임무를 끝마친 소감이요? 하하, 별거 없죠. 속으로 셀프 인터뷰를 갈긴 뒤 이동혁의 벙찐 얼굴을 떠올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동혁아. 함께해서 미안했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





동아리를 탈퇴하고 난 뒤.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교실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이나랑 매점에서 과자 몇 개 까먹으며 수다 좀 떨었더니 점심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다. 이나는 매점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보며 오늘은 마크 안 따라가냐며 놀란 얼굴을 해 보였고, 나는 그런 이나를 향해 차도녀 뺨 오만 대는 갈길 법한 쿨한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이제 그런 애새끼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이나야. 나 김여주는… 다시 태어났으니까. 일본 청소년 드라마에도 안 나올 법한 오글거리는 대사를 내뱉으니, 이나는 거의 질색 팔색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새끼 미남 집착병 사라지더니 정신병 하나를 새로 옮아온 것 같다고. 그런 거 아니야, 미친 새끼야. 아무리 해명을 해도 이나는 듣지 않았다. 역시 개지랄도 1절만 해야 하는 건가. 나는 뜬금없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 매점 신상 존나 미친놈이네. 렌지에 돌렸더니 지우 포켓몬마냥 맛이 강화됨. 그냥 미친놈에서 개미친놈 됐음. "

" 매점에서 빵만 8,700원어치 먹은 거 자랑하니? 쪽팔리니까 자리에 앉기나 해. 배 안 고프다고 점심 거른 놈이 무슨 걸신들린 애마냥 빵을 처먹냐. "

" 빵 배와 밥 배는 분리되어 있단다. Another… Ok? "

" 엿이나 까 잡수시고요. 앉아서 교과서나 꺼내 놔. "




이나는 질린다는 듯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면서도, 친절하게 5교시가 무슨 과목인지까지 알려 주었다. 하여튼, 날 너무 사랑해서 문제라니까. 실실 웃는 낯으로 걸상 안에 들어 있던 교과서를 꺼내들었다. 손에 들린 교과서 표지엔 과거의 김여주 미친놈이 남겨 놓은 마크 관련 낙서들이 한가득 써져 있었다. 이 정도면… 6년 전의 김여주는 정신 질병 같은 걸 앓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교과서 표지에 낙서해 두었던 모든 것들을 지우개로 박박 지우기 시작했다. 땀까지 흘리며 열심히 낙서를 지우고 있자니, 내 옆자리에 있던 남자애 하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언젠 이거 지우면 죽여 버린다고 협박했었으면서. 갑자기 왜 지움? 무슨 바람이 불어서. "

" 이젠 이 누나도 철이 좀 들었단다. 상대방 불편하게 만드는 짓은 안 하기로 했어. "

" 헐, 웬일? 저번 주까지만 해도 존나 미친놈처럼 굴더니. 그럼 나 너네 집에 있는 학교 홍보 포스터 가져가도 됨? 마크 얼굴 대문짝만 하게 박힌 걸로. "

" 존나 당연하죠. 그냥 무료 나눔 해 드립니다. 뭐, 굿즈라도 만들어서 팔아 주랴? "

" 미쳤냐고. 그걸 누가 사는데. "




과거의 김여주였으면 샀을걸… 내 옆자리에 앉아 깔깔대는 남자애를 바라보며 실없이 웃어 보였다. 옛날엔 이 쉬운 걸 못해서 마크를 불편하게 만들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마크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건 아주 쉬웠다. 마크 따라서 동아리 들어가는 개짓거리 안 하고, 독점하고 있었던 마크 포스터도 다른 애들한테 나눠 주고, 마크 있는 곳마다 따라가지 않고, 마크가 부담스럽게 느낄 만한 행동들 안 하고. 이 정도만 해도 마크는 훨씬 더 나은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개 싸이코 정신병자 같은 김여주한테 시달릴 일 없이… 아련한 눈빛으로 깨끗해진 내 교과서를 내려다봤다. 이젠 정말 과거를 청산할 시간이었다.




" … "

" … "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마크는 내 쪽을 바라본 채로 멍을 때리고 있었다. 처음엔 이마크가 나를 보고 있는 건가 했는데. 이마크의 시선은 내가 아닌 내 교과서 쪽에 가 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던 교과서가 깔끔하게 변한 걸 보니, 이마크도 여간 놀란 게 아닌 듯싶었다. 게다가 오늘은 이마크한테 말 한 번도 안 걸었고, 점심시간에 이마크를 따라 동아리실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니까. 이마크 입장에선 갑자기 이렇게 행동하는 내가 놀라울 법도 했다. 아마 이마크는 지금쯤 내가 동아리를 나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겠지. 이마크랑 거의 한 몸 수준으로 붙어 다니는 이동혁이 내 얘기를 안 했을 리가 없으니까. 뭐, 이동혁이 내 동아리 탈퇴 소식을 대신 전해 줬다면 나야 땡큐였다.


지루한 수업 시간을 견뎌내며 속으로 생각했다. 동아리도 나왔고, 이동혁한테 사과도 했고. 오늘은 이마크 귀찮게도 안 했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1년 동안 내 스토커 짓을 견디고 있었을 이마크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것. 솔직히 과거로 돌아오자마자 이마크한테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게 바로 사과였다. 옛날엔 사과할 틈도 없이 얼레벌레 졸업하고 헤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된 말 한 번 건네지 못했으니까.




" 야, 오늘 집 가기 전에 떡볶이 때리실? "

" 놉. 나 오늘 할 거 있음. "

" 니가 무슨 할 게 있어. 니가 하는 거라곤 집 가서 이마크 포스터 두 시간 동안 관찰하는 것뿐이잖아. "

" 음~ 떡볶이 말고 널 때릴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 "

" 내일 보자 여주야~ "




정이나는 살벌한 내 말을 듣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곤 곧바로 반을 빠져나갔다. 쟨 항상 저러더라.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틱틱 시비나 걸고. 한결같은 정이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오늘 떡볶이가 존나 땡기긴 하지만, 떡볶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후다닥 가방을 챙긴 뒤 곧바로 마크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내 행동에 놀랐는지, 마크는 답지 않게 당황한 듯한 얼굴을 하며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있었다. 오랜만에 봐도 귀여운 건 여전하네. 젠장야로… 이 깜찍한 자식.




" 마크야.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잠깐 시간 좀 내어줄 수 있을까? 오래는 안 걸릴 거야. 한 15분 정도? "

" … 갑자기? 무슨 일인데. "

" 여기선 말 못하는 거야. 난 너랑 단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어. "




단둘이서만 얘기하고 싶다는 내 말에 마크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마크는 내가 자기한테 고백하려는 줄 아는 것 같았다. 하긴, 여태까지의 행보로만 친다면 지금 당장 고백을 갈겨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 잔뜩 그늘진 이마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 미안한데, 너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닐 거야. 고백으로 혼내준다거나… 뭐 그런 거. "

" … "

"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 "

" … 알겠어. "




이마크는 확신에 찬 내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귀가 새빨갛게 달아 오른 걸 보니, 괜히 김칫국 먹고 오해한 게 창피한 모양이었다. 이 미친놈 (좋은 뜻)… 왜 이런 순간마저 귀엽고 난리야. 순간 과거의 김여주로 돌아가서 순덕 마인드로 이마크 덕질할 뻔했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이마크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이마크는 학교 뒤쪽의 넓은 화단 중에서도 가장 인적이 드문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세상에, 우리 학교에 이런 곳이 있었어? 싶을 정도로 아늑한 공간에, 나는 잠시 한눈을 판 채 학교 화단을 구경했다.




" 할 말이라는 게 뭔데? "

" 어… 그게. "

" … "

" 후우… "




갑작스레 훅 밀고 들어오는 마크의 행동에,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사과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빨리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으니. 나는 과거의 김여주가 했던 미친 짓들을 하나 둘 상기시키며 마음을 바로잡았다.




" … 미안해. 근 1년 동안 너 귀찮게 하고, 불편하게 한 거. "

" … "

" 춤도 못 추면서 동아리 따라 들어간 것도, 동아리 분위기 개판 만든 것도, 너랑 관련된 모든 일에 쓸데없이 나선 것도, 너 있는 곳마다 모조리 쫓아다니면서 너 불편하게 한 것도. 전부 다 미안해. "

" … "

" 갑자기라고 생각할 수 있어.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널 불편하게 만든 전적이 있었으니까. "

" … "

" 그래도, 지금 이건 전부 다 진심이야. 정말로. "




놀란 듯 보이는 이마크의 얼굴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입까지 벌린 채로 날 바라보고 있던 이마크는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듯한 모양새였다.




" 이제 너 불편하게 만들 일 없을 거야. 주말 사이에 생각이 많이 바뀌기도 했고… 이젠 우리도 고등학교 2학년이잖아. 나도 이젠 정말 정신 차려야 할 것 같아서. "

" … "

" 여태까지 정말 미안했어. 다른 건 다 흘려 들어도, 미안하다는 말 하나만큼은 진심이니까. 그것만큼은 꼬아서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 "




단호한 내 말에 이마크는 그제서야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적어도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는 듯했다. 진심을 담아서 사과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 긴장됐었는데, 이마크가 이렇게 흔쾌히 받아들여 주니 여태 걱정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다행이네. 이것까지 수작질로 받아 들일까 봐 걱정 많이 됐었는데. 그렇게 이마크와 함께 두 눈을 마주하며 화단에 서 있었을까. 갑자기 한 쪽 손을 꼼지락거린 이마크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왔다.




" … 혹시, 그… … 친구 생겨서 그러는 거야? "

" 응? "

" 저번 주말에 시내 나온 거 봤어. 우연히 보긴 했는데… "




아. 저번 주말에 재현 오빠랑 같이 놀고 있던 걸 봤다는 건가. 이마크가 말을 너무 작게 하는 바람에 앞에 있는 단어는 듣지 못했지만, 아마 새로운 이성 친구가 생겨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갑자기 변한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고. 그냥 새로운 이성 친구가 생겨서 관심 끊은 거라고 말해야 설득력이 좀 있겠지. 나는 마크의 말에 수줍은 얼굴로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 그걸 보고 있었어? 좀 부끄럽네. 남들 눈엔 (우리 사촌 오빠랑 내가) 그렇게 보일 법도 하겠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




응, 맞지. 오빠랑 내가 사촌 지간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또래 이성 친구들처럼 가깝게 지내니까. 남들이 친구라고 봐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재현 오빠가 대학교 다니고 있는 성인이라고 해도, 얼굴 액면가는 웬만한 고등학생 저리 가라니까. 우리 재현 오빠 갑자기 회춘했네. 성인에서 고등학생으로. 나는 이 얘기를 들려주자마자 자기가 그렇게 동안이냐며 좋아할 재현 오빠의 모습을 상상하며 작게 웃어 보였다. 오늘 집에 가자마자 말해줘야지.




" 나는 이걸로 할 말 다 끝났는데. 혹시 마크 너는 더 할 말 남아 있어? "

" … 아. 그럼 우리 그냥… 반 친구 사이로 지내는 거지? "




우물우물 말을 꺼내오는 이마크의 행동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크가 아무리 유순하고 착한 성격이라지만… 자기 1년 동안 피곤하게 한 여자애랑 친구를 하고 싶나? 하긴, 웬만하면 후배들이랑도 트러블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한 마크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이마크한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고… 나랑 엮여 봤자 이동혁이랑 박지성이 싫어할 게 뻔하니까. 머쓱한 얼굴로 이마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어… 굳이? "

" … "

" 나랑 친구해 봤자 너한테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그래. "

" … "

" 그냥 웬만하면 모르는 사이인 척하고 지내자. 여태까지 정말 미안했어. "




멍한 얼굴의 이마크를 화단에 냅둔 채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더 있어 봤자 의미 없는 말들만 주고받을 거 같고. 저기서 계속 얘기를 나눴다간 정말 절친한 반 친구 사이로 발전할까 봐 무섭기도 했다. 원래 악연은 한 번에 딱 끊어내는 게 맞는 거거든. 고게 맞쥐.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따라 날씨 한 번 더럽게 좋았다.





*





오늘 같은 날에 편의점을 안 갈 수 없지.


마크랑 이동혁한테 사과도 했고, 댄스 동아리도 탈퇴했으니까. 모든 일이 술술 풀린 만큼, 오늘은 편의점을 통째로 털어다가 집에서 파티나 열어야겠다. 세팅 다 하면 재현 오빠도 불러야지. 손에 지갑을 쥔 채 학교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벌써부터 맛있는 거 먹을 생각에 코가 드릉드릉했다. 그렇게 해맑게 웃는 얼굴로 학교 근처에 있는 편의점 문을 열어젖혔을까. 웬 시끄러운 말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 아니, 노인 공경 모르냐? 노인 공경? 어른이 말이야, 어? 뭘 들고 있으면 먼저 자리를 비켜 줄 생각을 해야지! "

" … 아… 죄송해요. "

" 죄송하면 다냐? 죄송하면 다냐고! "




편의점 카운터 앞에는 잔뜩 화가 나 보이는 험상궂은 할아버지와 함께 박지성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팔척 햄스터가 있다 했더니, 박지성이었냐. 나는 벌써부터 아파오는 머리에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딱 보아하니 동네에서 제일 싸가지 없기로 유명한 할아버지한테 잘못 걸린 모양이었다. 저 할아버지, 옛날에도 저러더니. 어떻게 다시 돌아와도 변한 게 없냐. 여자애들 교복 치마 보면서 싸 보인다고 혼잣말 중얼거리고, 남자애들 옆으로 지나가면 아무 잘못도 없는 애들 가져다가 일진 나부랭이냐면서 화내고. 참, 한결같이 한심하게 사시네.


박지성을 향해 욕을 내뱉고 있는 할아버지를 애써 모른 척하며 과자 코너로 숨어들었다. 내가 오늘 이마크 무리랑 손절하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이제 와서 박지성이랑 엮일 수는 없잖아? 속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며 장바구니에 과자를 담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김여주, 오지랖 부리지 말자…




" 싸가지 없는 놈! 어른 공경도 할 줄 모르는 놈이 무슨 학생이냐! "

" … "



오지랖… 부리지… 말자…


" 너거 집에서도 이따위로 가르치든? 부모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

" … "



오지… 랖…



" 한 대 치게? 칠 거면 쳐라! 그렇게 눈 깔고 있지 말고, 한 대 치라고! "


" 아, 아니… 제가 어떻게… "




이런 개씨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손에 든 장바구니를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처음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저 할아버지 말하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준이 아니네. 다짜고짜 행패를 부리는 할아버지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험한 말 한 번을 안 하는 박지성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내가 이마크를 징글징글하게 따라다니고, 동아리 분위기를 개판 만들었을 때도 욕 한 번 안 하던 애였다. 반말해도 된다는 내 제안에도 불구하고 꼬박꼬박 존댓말을 쓴 것도 박지성 한 명뿐이었고. 내가 아무리 이마크 무리랑 손절했다 쳐도… 저런 상황까지 그냥 넘어갈 정도로 인성이 파탄 나진 않았다. 나는 박지성이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내 모습에 박지성은 꽤나 놀란 듯 보였다.




" … 누나? "

" 이리 와. "




박지성의 팔목을 잡아채며 내 뒤쪽으로 박지성을 숨겼다. 물론 내 덩치에 팔척 햄스터를 숨겨 봤자겠지만… 박지성은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도 불구하고 군말 없이 내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잔뜩 성난 듯한 할아버지의 얼굴이 내 쪽을 향했다. 옛날엔 다짜고짜 행패 부리는 할아버지 행동이 무서워서라도 벌벌 떨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온갖 꼰대질을 다 견뎌온 현대인 24살의 김여주란 말이다. 이딴 거에 쫄 리가 있나. 존나 택도 없지. 나는 당당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뭐야? "

" … "

" 이 예의는 저승 가고 육신만 이승에 남은 것 같은 놈은. "

" … "




내 말에 박지성이 경악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나를 내려다봤다.


음… 뭔가 단어 선택을 잘못한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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