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딱히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인 묘사는 없지만.. 혹시나 몰라 적습니다. 아래 내용 중 옥상 위에 올라가 자살을 고민하는 장면이 잠깐 나옵니다. 보시기 전에 주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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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따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결은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파들 속에 섞여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더이상 넘어가지 않는 달력의 페이지처럼 오늘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끝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한결의 바람과 달리 거리는 온통 새로운 날에 대한 설렘과 흥분으로 가득했다. 


가로수 위에 거미줄처럼 늘어진 채 점멸을 반복하는 색색깔의 전구들. 달빛을 몰아내고 대낮같이 휘황찬란한 빛으로 하늘을 밝히고 있는 간판들. 사람들의 새된 웃음소리.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정체불명의 노랫소리. 옷이 부대끼는 소리. 요란한 발자국 소리.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높고 낮은 목소리들. 


사방에서 몰아닥치는 빛과 소음들이 어둠이 내린 공간을 가득 채우며 흥분감을 고취시켰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잔뜩 들떠 있었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오직 한결만이 그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결은 자신의 눈과 귀를 파고드는 모든 것들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시야는 온갖 빛들로 채워진 채 빙글빙글 어지럽게 흔들렸고, 귓가는 끊임없이 윙윙거리는 소음들로 먹먹했다. 속이 뒤틀리며 목구멍 너머로 울컥 쓴물이 넘어왔다. 싫다. 보고 싶지 않았고 듣고 싶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한결이 비척거리던 걸음을 멈춰 세우고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양손을 들어 올려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 한결의 어깨를 사람들은 마치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툭툭 치고 지나갔다. 사람들에게 치여 한 발짝, 또 한 발짝 힘없이 밀려나던 한결이 결국 균형을 잃고 뒤로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아, 미안해요.”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채 주저앉아 있는 한결의 머리 위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목소리의 주인은 이미 사라진 채 텅 빈 허공만이 한결을 반겼다. 거리의 빛이 스며들어 탁한 회색빛으로 물든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던 한결의 눈가가 불현듯 시큰거리며 아려왔다. 그리고는 말릴 새도 없이 주르륵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씨발.”


나지막하게 욕설을 뱉어낸 한결이 손바닥으로 재빨리 얼굴을 훔쳐 눈물을 닦아냈다. 구질구질하다. 지금 이 거리 한복판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자신도, 꾸깃꾸깃 구겨진 채 쓰레기처럼 버려진 자신의 마음도,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자신의 인생도, 다 너무 구질구질해서 참을 수가 없다. 


"내일따윈⋯."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어 뒷말을 집어삼킨 한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주위를 둘러봤다. 무언가를 찾는 듯 자신의 양옆으로 늘어선 고층의 건물들 사이를 누비던 한결의 시선이 이윽고 한 건물 옥상에서 멈추어 선다. 옥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두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서 스멀스멀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위에서 다시 아래로 시선을 끌어내리며 건물의 높이를 가늠해보던 한결이 자신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괜찮아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란 한결이 황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자신의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웬 낯선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진회색 코트 아래로 눈이 아플 정도로 쨍한 샛노란 색감의 두툼한 니트를 입은 여자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결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어디 아픈 거예요?"

"⋯아니요."

"혹시 도움 필요해요?"

"됐어요."


여자의 호의를 차갑게 끊어낸 한결이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겨울의 냉기를 머금은 차가운 바닥에 한참을 앉아 있었던 탓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려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비틀비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는 한결을 도와주려는 듯 여자가 손을 뻗어왔다. 한결이 여자의 손을 쳐내듯 밀어내고는 느릿느릿 발을 움직여 인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에 뒤섞여 한발짝 한발짝 힘겹게 걸음을 내딛던 한결이 조금 전 두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던 그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 구석에 위치해 있는 엘리베이터 위로 몸을 실었다. 층수가 새겨진 채 두 줄로 쭉 늘어서 있는 버튼 사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버튼 위에 손을 갖다 대자 빨갛게 불이 들어오면 10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잠깐만요."라는 목소리가 언뜻 들린 것도 같았지만 굳이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1, 2, 3⋯.


엘리베이터 벽에 가만히 등을 기댄 채 하릴없이 상단에 설치된 표시창을 들여다봤다. 1에서 출발한 숫자가 이윽고 10에서 멈추어 선다. 처음과 끝. 퍽이나 지금의 상황과 어울리는 숫자네. 멈춰선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는 한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린다.


환하게 불이 켜진 복도 한가운데에 우뚝 멈춰선 한결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커다란 유리문이 눈이 들어왔다. 유리문 표면에 붙어있는 난잡한 스티커들이 그곳이 PC방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10층엔 PC방 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우웅-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등을 떠밀리듯 한결은 급히 유리문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의 끄트머리에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문이 위치해 있었다. 굳게 닫혀있는 철문의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돌리자 다행히도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그 너머로 발을 들이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에 휩싸인 계단을 올라 또 하나의 철문을 열고 나가자 그제서야 겨우 옥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록색 페인트로 칠해진 옥상 바닥의 군데군데에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만년설처럼 녹지 않고 남아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옥상 끝자락까지 걸어간 한결이 자신의 허리 높이 정도까지 오는 난간 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 봤다. 조금 전 자신이 주저앉아 있던 그 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고 반짝거리는 조명들로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그곳에 있든 없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얼굴이 아려올 정도로 매서운 찬 바람이 한결을 훑고 지나갔다. 한결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입김이 바람에 날려 순식간에 허공 위로 사라진다. 추위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 인지 난간을 움켜쥐고 있는 한결의 손가락 끝이 덜덜 떨려온다.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한결의 두 눈이 천천히 감긴다. 시야를 어지럽히던 조명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며 고요한 어둠이 찾아왔다. 윙윙-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몸이 휘날리며 두둥실 떠오르는 착각이 든다. 땅 위에 박혀있던 두 발이 금방이라도 허공으로 떠오를 것만 같다.


그때였다.


"한결."


뜬금없이 불리어진 이름에 한결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불안한 마음에 선뜻 뒤를 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러자 또다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왔다.


"한결. 세진고등학교 2학년 3반."


그 말에 한결은 자신도 모르게 휙 몸을 돌려 세우고 말았다. 도대체 누구길래. 뒤로 돌아선 한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희미하게 깔려있는 어둠속에서도 그 존재감을 잃지 않고 쨍하게 빛을 발하는 예의 그 샛노란 색감의 니트였다.


"⋯⋯."


잠시간 니트 위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천천히 끌어올리자 자신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거리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던 그 여자였다. 한결은 혹시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인가 싶어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누구세요?"


한결의 물음에 여자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내심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결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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