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일부 크롭입니다. 심리묘사? 특정한 인물에 시선을 두지 않은, 나름 제가 제일 편하게 쓸 수 있는 문체로 작업해봤습니다. 날도 춥고 이런저런 일들이 많네요.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이길 바라겠습니다. 따뜻하게 챙기시길.


이슬이 타고 흐를 것 같은 단정한 콧잔등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추워. 열을 내지 못하는 몸이 불편하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허나, 근래 들어 느끼는 추위는 유독 견디기 힘들었다. 본래 보통의 뱀파이어였다면 추위도 느끼지 않았을 테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월하의 몸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월하는 몸을 비적비적 일으켜 두터운 숄을 어깨에 둘렀다.


"....참 우습지."


아무리 두터운 옷을 걸쳐도 따뜻해지지 않는 몸이라니. 가라앉은 녹빛 눈동자가 쓸쓸하게 빛났다. 말은 그렇게 해도 바람을 막아주는 것에는 나름대로 탁월한 효능이 있었기에 월하는 촘촘하게 짜여진 숄을 여몄다.


그녀는 침대 옆 놓인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잉크를 머금은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한참 동안 방안을 유영했다. 약초의 연구 결과와 해야 할 일들을 적어둔 것이 주를 이뤘다.


「홍화(safflower)

 - 씨의 형태를 주로 이용하며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차보다는 기름의 형태로 섭취하는 것이 좋다.


피와 진통에 효능을 보인다. 피가 부족할 때, 죽은 피를 제거해야 할 때 섭취하면 좋은 효능을 보인다. 허나, 위장계열의 질병이 있을 시 이 식물과 관련된 처방을 금한다.」


「12월 13일(마을로 나가는 날)


아이, ....가희의 옷을 사둘 것. 보통 아이보다 빨리 자리는 것 같다.  물론  아이를 길러본 적은 없지만, 과거의 나와 비교하더라도 빠른 속도임은 분명하다. 인간이 뱀파이어가 된 사례를 접한 적이 없기에 좋은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이번에는 조금 큰 마을로 내려가 조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2월 17일까지 금영화와 캐모마일을 따서 말려둘 것. 현재 보유한 수량이 많지 않다.」


창백한 빛이 하얗게 바랜 손등에 부딪혔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월하는 고요함을 벗 삼아 노트 빼곡히 제 삶을 기록해나갔다. 마을의 외곽, 사람들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지리적 위치 탓에 이 근방에서 월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월하는 그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이제  가까운 관계라면 지긋지긋했다. 심장이 파도라도 된 것처럼 울렁거리는 것도, 어떤 존재에 의해 삶이 이리저리 헤집어지는 것도 모조리.


하지만 가희는 어떨까. 유영하듯 움직이던 그녀의 손이 한순간에 멈춰 섰다. 그 아이는 이런 삶이 답답하지 않을까?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연신 흔들렸다. 인간의 삶을 거둔 것도, 관계를 맺을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도 월하, 그녀 자신이었다. 세상에 옳은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건, 그 일이 얼마나 참혹하건, 비정상적이건 간에 거기서도 '온전한 악인'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의 일이란, 그것도 사람이 개입한 일이란 아주 복잡해서 얽힌 실타래를 푸는 것만큼 어려워서 이렇게 숨어드는 삶을 택한 자가 월하였다. 그럼에도 순간의 연민을 이기지 못해서 품게 된 작은 아이를 어찌할지 정의조차 내리지 못해서. 월하는 깜깜한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채 노트에 적힌 가희라는 이름을 응시했다.


Diane. 유려한 필체 속 오직 가희의 이름만이 미묘하게 어그러져 있었다. 고작해야 글로 옮기는 것만으로 수없이 고민한 흔적이 도드라졌다.


그 글자가 제게 남겨진 유일한 빛이라도 되는 듯, 한참이나 그녀의 이름을 손끝으로 더듬던 월하가 제 침대 맡에 걸린 꽃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거꾸로 매달린 채 바싹 마른 꽃이 수없이 걸려 있었다.


사람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풀꽃은 닮은 아이의 미소가 뇌리에 스쳤다. 그렇게 맑게 웃는데, 내가 그 애를 보호라는 명목으로 잡아두는 건 아닐까. 무거운 짐이 내려앉은 것처럼 누가 봐도 야휜 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추웠다. 남들보다도 높은 아이의 체온이 생각나서, 꽃을 제게 한 다발 안기는 순수한 호의가 떠올라서 근래 느낀 어떤 추위보다도 당장 지금이 너무나도 추웠다. 그럴수록 월하는 숄을 단단히 여몄다. 두꺼운 양모에 온기가 깃들지 않아도 좋았다. 아니, 그럴수록 좋았다. 기실 꽃을 받아들 때마다 월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가희의 호의에 답하기 위해 입꼬리를 간신히 올려봐도, 웃음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릴 적이 생각났으니까. 풀물에 손끝이 파랗게 될 때까지 식물을 헤집고, 천치처럼 헤헤거리던 자신이 생각났으니까.


[아빠, 선물이에요. 저번에 엄마한테만 줬으니까 이번은 아빠한테만 줄래요.]


그때 그 사람은 어떤 표정이었더라. 좋아했었나? 얼떨떨했었나? 그것도 아니면 지금의 나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었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들이 많은데 그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만은 기억나지 않았다. 까맣게 도려낸 것처럼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하나도 모르겠어. 남이 듣기엔 한없이 덤덤한 목소리였으나, 그 사이에 미약한 떨림이 배어 있었다. 월하는 천천히 손바닥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도, 토해낼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으면서도.


통, 통, 통. 아주 미약한 타음이 문틈 사이를 비집었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이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인가가 걸어서 15분을 족히 걸어야 하니 아마 그녀를 찾는 사람은 가희가 분명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삐걱거리며 낡은 문이 열렸다. 큼직한 문과 대조되는 아주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


"가희니? 아직 시간이 이른 데. 무슨 일로..."


월하의 말에 가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이의 등 뒤로 햇볕이 나른하게 내려앉았다. 공기는 아직도 쌀쌀했으나 분명한 아침이었다.


"아. 아침이구나."

"네! 아침부터 찾아와서 미안해요. 귀찮으시죠.."


아이가 말끝을 잔뜩 흐렸다. 월하는 그 모습에 아니라고 손사래 칠 수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그저 아이의 머리를 툭툭 쓰담고 몸을 낮춰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그녀의 최선이었다. 고작 그뿐임에도 가희는 활짝 웃었다.


"드리고 싶은 게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거."


등 뒤로 숨겼던 손에는 붉은 꽃이 한 아름 들려 있었다. 풀물이 잔뜩 밴 손끝, 한점의 부정도 발견할 수 없는 눈동자. 너는 어떻게 그렇니.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게 뭐라고. 월하는먹먹해진 감정을 몇 번이고 다그친 뒤에서야 꽃다발을 받아들 수 있었다.


"붉은색?"


여태껏 가희가 준 무수한 꽃 중에서도 붉은색은 없었다. 대부분 노란색, 혹은 새벽녘에 가까운 푸른색이 주를 이뤘었다. 색이 한껏 오른 아마릴리스는 무척이나 예뻤다. 아마릴리스, 월하도 익히 아는 꽃이었다. 불길하리만치 붉은색이 특징인 꽃의 꽃말은 '침묵', '겁쟁이'.


월하의 삶에서 붉은색은 불길함의 징조와도 같았다. 처음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을 때도, 너무 아파서 죽을 것처럼 아파서 짐승을 물어뜯었지 않았던가. 그녀는 심장 아래에서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불안함을 눌러 담았다.


"고마워, 꽃이 예쁘네."

"역시 붉은색이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가희가 새벽을 닮은 눈동자를 반듯하게 접으며 월하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전에 봤던 게 틀리지 않았어. 긴가민가했었지만 역시 월하에게는 붉은색이 꼭 어울렸다. 서늘한 녹빛 눈동자도 좋았지만, 지금까지도 선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붉게 빛나던 그 눈동자를. 가희는 월하의 칭찬에 상기된 기분을 주체치 못했다. 그녀는 알았다. 월하의 서늘한 눈동자가 꽃을 줄 때마다 어떤 열기를 띤다고. 기쁨이나 행복함에 기인한 열기는 아니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같은 표정을 띠는 월하가 꽃을 줄 때만은 미세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서, 그것이 연민이나 동정에 기인한 것이라도 황홀해서, 아침마다 꽃을 들이미는 것이 일종의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제 뺨에 손등을 가져다 대는 월하의 손바닥에 가희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만의 비밀을 털어놓는 아이처럼.


"있잖아요. 우리가 남들이랑 다르다고 했었잖아요. 그러면, 그런 거면, 언젠가 나도 월하처럼 눈동자가 붉게 변해요?"


급격하게 월하의 표정이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가희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월하는 가희의 반응을 신경 쓸 틈도 없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숨을 쉬어도 어지러웠다. 붉은 아마릴리스가 자신을 포위한 채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가희가 주저앉은 월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린아이의 품에 들어올 정도로 야휜 어깨가 숄 너머로 잡히자 가희의 큼직한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렇게 약한 사람을 내가 괴롭혔어, 나 때문이야.


"왜 울어, 가희야."


월하가 가희에게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을 것 같이 가느다랗게 속삭였다. 내가 우는 것보다도 당신이 그렇게나 창백하잖아.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을 몰아쉬잖아. 가희의 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그녀에게 몰아치는 감정을 쏟아내고 싶으면서도 자신에게 남은 건 오직 월하뿐이라서, 그녀가 너무나도 소중해서 말을 겨우겨우 삼켜냈다.


"제가, 흑... 제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죄송해요. 그러니까 아프지 말아요."


작은 손으로 한 올 한 올 따낸 꽃이 아깝지도 않은지 가희는 떨어진 꽃다발을 문밖으로 집어 던졌다. 눈앞에서 붉은색이 사라지고 나서야 월하의 기색은 눈에 띄게 편해졌다.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로 잘못했어요. 가희는 뭉개진 발음으로 몇 번씩이나 월하에게 사과했다. 눈물이 뚝 뚝 가희의 뺨을 타고  월하에게로 흘렀다.


뜨거워. 제 얼굴로 뚝 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한 채 월하는 가희의 어깨를 툭 툭 쓰다듬었다. 등께에 닿는 손이 아이가 느끼기에도 너무 가벼워서, 월하가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여서. 가희는 더욱 큰 소리로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가희야. 나 좀 봐봐."


월하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진정되어 있었으나, 가희는 그녀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아니 올려다보지 못했다. 월하를 올려다봤을 때, 그 눈빛에 서려 있을 감정이 두려워서. 식물의 잎사귀를 닮은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일말의 감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두려웠다. 자신의 세계인 월하가 저를 용서하지 않을까 봐. 비쩍 골은 채 죽어가던 자신의 앞에 바람처럼 나타났던 월하가, 바람처럼 사라질까 봐. 품을 파고들어 가느다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제품을 파고든 온기가 가여워서, 겁쟁이인 자신을 소중히 하는 이 아이가 너무나도 가여워서 월하는 가희를 떼어낼 수 없었다. 그저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그냥 내가 빨간색을 안 좋아해서 그래, 라며 속삭이며 작은 등을 쓸어내렸다. 저 안 버릴 거예요? 가희가 속삭였다. 월하는 차마 입을 떼어내지 못했다. 언젠가 우리가 헤어질 거라고, 영원히 함께라는 건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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