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퍽철퍽 바닥에 흥건히 고여있는 피를 닦아내다 잠시 대걸레에 몸을 기대 한숨을 쉰다 이로써 나는 몇번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지 잘 몰랐다 세이버와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럭저럭 마무리 지은 성배전쟁이 끝나고 학교 생활도 마무리 짓기 위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여느때와 같이 학교에 갔다가 잇세이에게 불려 학생회실에 가 스토브를 고쳤다 "이거 고친지 얼마 안된거 아니냐 잇세이?" 내 물음에 잇세이는 고개를 한번 젓고는 그건 나에게 처음 보이는 물건이라고 했다 '하지만 난 분명히 이걸 고친 기억이 있는데...'

압권은 토오사카에게 인사를 했을 때라고 생각한다 "안녕 토오사카" 평소와 마찬가지로 인사를 던졌을 때 토오사카의 부자연스럽게 굳은 얼굴과 경악하는 잇세이의 얼굴 그제서야 뭔가 이상한걸 깨달았다 그리고 교실에 들어서서 칠판에 적혀있는 날짜를 본 순간, 이번에는 내가 굳어졌다

'왜야-----!!!!!!!!!'


***

그 이후로 같은 3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틀째에 이리야를 만나고 삼일째에 그와 만나서 그의 손에 죽고...

아 엄밀히 말하자면 같은 3일은 아니다 토오사카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넨 실수는 처음을 빼고는 하지 않았고 어차피 최소 한번은 죽는다는 사실에 지쳐 얼마 도망가지도 않은채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아주 드문 경우긴 하지만 나를 죽인 그가 캐스터거나 버서커인 경우도 있었다

버서커였을 적에는 랜서나 캐스터였을 때보다 꽤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지만 그때의 나는 태평하게 '버서커 적성도 있었구나 랜서'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한 누군가가 나를 살려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지...' 여전히 불쾌하게 욱신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청소 도구를 정리한 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은 성공할 수 있으려나'


***


집에 도착해서 한숨 돌리며 포스터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딸랑- 하고 방울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낮게 영창을 외고 포스터를 꽉 쥐었다 그러고보니 이 포스터 강화에 실패해서 죽은 적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위에서 등골 시린 살기가 느껴졌다 반쯤 구르듯이 몸을 날리고 뒤를 돌아본 그곳에 랜서가 서 있었다
붉은 눈이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나를 쳐다본다 그 후 벌써 몇번을 반복했는지 모를 말들을 주고 받고 어린애 장난처럼 포스터를 몇번 휘두르다가 밖으로 나가고 그에게 걷어차였다

'크읏... 이건 정말이지 달갑지 않은데...' 몇번을 차여도 메다꽂히는 이 느낌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초반 몇번에는 이를 피하기 위해 공격을 한 적도 있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꽤 능력있는 서번트니까
몇번의 몇번을 반복해서 맨 처음 그날을 재현한다 생각해보면 그날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 꽤 잘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제는 지금의 나다 그날의 날을 따라 광에 온 후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기위해 나는 무수히 많은 죽음을 맞이해야했다 괜히 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남자가 아니다

"트레이스 온"

그리고 스스로의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뒤쫓아온 남자를 마주보고

ㅡ찔렸다

다행이다 요번에는 늦지 않았다 위치가 잘못 되지도 않았다 간신히 즉사할만한 지점은 피했다 천천히 무너져내린 나는 서서히 그를 향해 기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예쁜 붉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향해 웃었다

'?' 약간 어리둥절해보이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의 발목에 칼을 내리꽂았다 "네놈----!!!!!!!!" 단숨에 창을 고쳐잡은 그를 피할 힘이 남아있지 않아 그저 살며시 몸을 웅크렸다 쿨럭 소리와 함께 입에서 검붉은 피를 토해낸다

이거 혈액부족으로 죽는거 아닐까 곧 그에게 회수된 창의 두께만큼 넒혀진 옆구리에서도 찐득한 피가 흘러나왔다
뒷맛이 안좋은 듯 칫 하고 혀를 차는 그가 너무나도 그 다워서 웃음이 났다 랜서는 그런 나를 보면서 '하 미친 놈이었던가?' 하고 중얼거렸다

그 후 금방 떠나지 않을 생각인지 조용히 서 있는 그의 존재를 느끼며 나도 조용히 눈을 감고 마지막을 기다렸다 '이번에 다시 눈을 뜨면... 원래대로 돌아가있을까... 아니면 죽음인..' 거기까지 흐릿한 정신으로 생각했을 때 그가 나를 거칠게 돌아눕혔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냐" 매섭게 노려보는 그 눈에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입 안이 피로 가득차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도 그걸 깨달았는지 다시 한번 혀를 차고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


어느 순간 감은 눈 저편이 부셔서 무언가 환한 빛이 나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대로 된 사고가 가능하지 않는 그 시점에서도 그 빛이 아름답고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어이 꼬마 일어나 어이" 거칠게 뺨을 툭툭 치는 그의 손길에 정신이 들었다 그제서야 내가 기절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라..? "나... 살아..있.." "그래 내가 살렸으니 말이야 너 대체 나한테 뭔짓을 한거냐?"

그 말에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성공...했어...' "어이 내 말 안들리냐 꼬마야?" "룰 브레이커" "하?" "룰 브레이커 배신과 부정의 단검이야 너를 찌른 거"


***


그래 나는 마지막에 포스터를 다시 강화하지 않았다 대신 투영을 했다 몇번이나 실패하고 몇번이나 다시 도전했다 투영은 강화보다 더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이 끝없는 세계의 주민이 된 후 내가 광에서 행한 마술은 오로지 투영 마술뿐이었다

"핫 그래서 그놈과의 연결이 끊어진건가" 크하하하하 하고 호쾌하게 웃던 그는 내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여전히 남자의 취급은 거칠구나 랜서ㅡ


"어이 꼬마야 네가 어떤 수를 써서 그런 물건을 손에 넣은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감사하도록 하지 뭐 댓가로 나는 목숨을 살려줬으니 됐나?"


"그런데 말이야 꼬마야 난 사력을 다한 싸움을 하기 위해 소환됐거든 이대로는 사라질 수 없어"

"하지만 그녀석과 계약이 끊긴 이상 곧 이 세계에서 사라지겠지 아무것도 못하고 허무하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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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꼬마 네녀석이 내 마스터가 되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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