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썼을때는 로그호라가 9권까지만 정발됐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싶기도 하고 쓸때는 재밌었는데 왜 뒤를 더 안 써놨지 싶기도 하고.

새 글 쓸 기력은 없는데 예전 글 읽어보니 그냥저냥 읽을만 한 것 같아서 기록용 백업





레이네시아 공주에게 미움을 받을 사람과 애정을 받을 사람이 나누어져 있는 편이 좋다. 그것이 시로에가 내린 결론이었고 곧 <원탁회의>가 가질 앞으로의 태도였다. 따라서 과거의 사건으로 공주님의 관심을 (그리고 애정이 잔뜩 어린 투정을) 받게 된 크러스티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호감을 받는 역이 될 것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회의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한명이 자동으로 정해지자 남은 문제가 다가왔다. 누가 미움을 받을 것인가. <원탁회의>의 남은 10길드는 그 일로 회의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이라는 신분을 갖고 동쪽의 <대지인> 대표로서 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잘 보이지는 못해도 적어도 밉보이지는 않는 것이 그들의 입장에서도 좋을 테니까. 전투계 길드는 퀘스트 때문에라도, 상인 길드는 판매통로 때문에라도 쉽게 자원 할 수 없는 위치였다. 일이 어떻게 꼬일지도 예상할 수 없었고.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그 일은 쉽게 해결되었다.

"…하니 호감은 크러스티씨가 얻는 걸로 하고 그 반대의 역은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인사를 하고 회의장에서 바쁘게 빠져나가는 시로에를 사람들이 놀람 반 당황 반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작은 길드라고 해서 그런 입장이 좋지만은 않을 텐데 저런 결정을 너무나도 쉽게 내렸다.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또 무슨 계책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꽤나 명석하게 머리를 굴릴 줄 안다는 길드 마스터들도 시로에의 생각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도대체 능구렁이는 자기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대지인>들과 합쳐서 제2의 <원탁회의>라도 만들려나?”

가능성 있는 이야기 아니냐고 호탕하게 웃으며 아이잭이 떠들어 댔다.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시로에에게 계획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수근 대는 사람도 있었다. 미묘하게 정신없는 회의 분위기, 그 중에서도 크러스티는 조용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능구렁이가 정말 또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글쎄요.”

아이잭이 일부러 크러스티에게 말을 걸어 그의 주변 분위기를 풀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크러스티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의 뜻에 따라주지 않았다. 아이잭과 크러스티 옆에 앉아있던 아인스가 그런 크러스티의 반응을 신선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크러스티는 그들의 시선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아까 시로에가 떠난 그 곳을 못마땅함을 잔뜩 담아 응시할 뿐이었다.

 




“주군. 주군을 만나길 청하는 자가 1층에 있다.”
“나를?”

2층 사무실에서 산더미 같은 서류에 포위된 채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있던 시로에는 아카츠키의 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입장제한을 걸지 않은 이 건물에, 아카츠키에게 자신의 존재를 먼저 알리고 기다리며 있을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원탁회의>를 구성하는 11길드중 하나라고는 해도 <기록의 지평선>은 길드원 8명의 초 약소 길드였다. 생산이나 전투에 특화되지도 않아서 격식을 차리고 사람을 맞을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손님이라, 시로에는 자신의 현재 몰골을 떠올리고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씻을 시간은 고사하고 잘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어서 이틀간 책상에서만 살았는데. 이 모습으로 누군가를 맞이해야 한다니. 오늘은 사양하고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는게 좋지 않을까.

“누군데?”
“<D.D.D.>의 길드마스터.”
“크러스티씨?”

시로에는 깜짝 놀라 아카츠키를 바라보았다. 크러스티씨가 나를 보러왔다고? 고블린 토벌에 앞장서고 있는 그가 시간을 내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시로에는 적지 않게 놀랐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이유로도 약간 놀랐다. 지난 <원탁회의> 소집 이후에는 서로가 바빠 마주치지 못했지만 둘은 지금처럼 격식을 차릴 사이는 아니었다. 적어도 원탁회의의 다른 길드마스터들은 자유롭게 드나드는 이 건물에 저렇게 한 단계 거쳐서 들어 올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도 그런게…. 아무리 그래도 우리 나름 사귀는 사이니까?’

길드가 작다고는 해도 타인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시로에는 자신이 그에게 밝혔던 자기 입장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시로에는 그와 교제하는 것 자체는 정말 좋았다. 크러스티를 정말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알려지는 것은 극도로 꺼렸다. 심지어 아카츠키나 마리엘, 냥타씨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번은 크러스티가 길드원들 정도는 괜찮지 않겠냐고 시로에에게 묻자 시로에는 그렇게 하나씩 허용하다가 전체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잘라 답했었다. 시로에로서는 괜히 그에게 책잡힐만한 것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보나 자신이 그보다는 약한 위치였기 때문에 (길드의 규모라던가, 원탁회의에서의 대외적 위치같은 것들을 고려했을 때 확실해 보였다.) 관계가 알려지면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자신을 빌미로 그에게 협박을 할 것이라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것에 쉽게 넘어갈 시로에는 아니었지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이세계인데, 괜히 위험을 남겨두고 싶지는 않았다. 시로에의 대답을 들은 크러스티는 별 다른 첨언을 하지 않았기에 시로에는 그이후로 크러스티가 자신에게 맞춰 배려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행동도 그 일환인가? 시로에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며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의 큰 움직임에 몸이 적응하지 못하고 비틀거렸으나 <모험자>의 신체특성이 있어서인지 힘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카츠키가 뒤따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두고 시로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하면서.



1층에 내려가서 마주보게 된 크러스티의 얼굴빛은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시로에는 생각했다.


“<D.D.D.>의 길드마스터, 크러스티입니다.”
너무 형식적인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시로에는 그의 의도에 따르기로 했다. 저것은 자신을 배려하는 행동일 것일 테니까.
“<기록의 지평선>의 길드마스터, 시로에입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2층으로 올라가시죠.”

서툴게 보수해놓은 철제계단을 나란히 올라가면서 시로에는 등 뒤가 뭔가 서늘하다고 생각했다. …화난건가? 최근에 일이 많아 양쪽 다 텔레파시조차 사용하지 못했다. 그것 때문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냉철한 이미지, 쿨하고 깔끔한 느낌과는 다르게 크러스티의 자신의 것에 대한 소유욕은 무서울 정도로 강렬했다. 그 관심대상인 시로에에게도 숨겨지지 않고 드러날 정도였다.

시로에가 사용하는 공간에는 딱히 접대용 방이라고 지정된 곳은 없었지만 서류작업실 옆의 작은 방에는 티 테이블이 있었다. 시로에는 크러스티를 그 방으로 적당히 안내했다. 시로에는 아카츠키에게 차를 부탁하고 그를 소파로 마저 안내했다. 하지만 크러스티는 앉는 것을 마다하더니 아카츠키가 방을 떠나자마자 문을 걸어 잠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주군?! 당황이 가득 담긴 아카츠키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덜컹였다. 그러나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카츠키는 억지로라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잠긴 문에 대고 검을 사용하기에는 시로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 곤혹스러웠다. 자칫 잘못하면 그녀의 검이 향하는 것이 그녀의 주군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방 안에서는 크러스티가 문을 꽉 잡아 붙든 상태로 시로에에게 말했다.

“이 방에 출입제한을 걸어요. 당신과 나, 둘만 있을 수 있도록.”

강렬한 감정을 속으로 잔뜩 눌러놓은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하는 크러스티에게 시로에는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몸이 떨려왔다. 원탁회의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가 사냥터에서 고블린을 수십마리씩 때려눕히는 걸 봤을 때에도 이러한 공포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 출입제한이 걸린 것을 알아채고 아카츠키는 방 밖에서 황망히 자신의 주군을 불렀으나 그녀보다도 더 당황하고 놀란 시로에는, 그녀에게 숨기지 못한 떨림이 담긴 목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아카츠키. 중요한 얘기라서 그런 거니까…. 마리엘씨에게  문서들 좀 전해주겠어?” 

자신도 이유를 모르지만, 누가 들어도 괜찮지 않지만 시로에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주군.”
“이야기가 끝나면 텔레파시로 부를게. 다른 팀원들한테도 전해줘. 내가 텔레파시를 할 때까지는 본부에 오지 말아달라고.”
“……. 알겠다.”

못마땅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어조였지만 아카츠키는 그의 말에 따라 옆방에서 서류를 들고 마리엘에게 갈 수 밖에 없었다. 문 앞에 서서 밖을 경계하던 크러스티는 건물 안의 기척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그때서야 문을 떠나 아까 안내받았던 소파에 거칠게 주저앉았다.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이제 확실해졌다. 맞은편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은 시로에는 입안이 바싹 마를 정도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 크러스티의 모습은 광전사 크러스티, 그의 알려진 별명 그대로의 모습이었으니까.


신체적 조건을 놓고 따지자면 시로에의 ‘인챈터’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심지어 레벨을 당시 최고였던 90까지 올려놓은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1대1에서는 소용 없는 이야기였다. 크러스티는 시로에와는 다르게 최전방에서 적을 자신에게 유인하면서 싸우는 가디언이었다. 후방지원타입인 시로에와 레벨은 같다고 해도 HP는 거의 두 배 이상의 차이가 났다. 그러니 안 그래도 기본 조건이 시로에보다 위에 있는 그가 작정하고 그의 서브직업까지 살린다면 시로에는 당연하게 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들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로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그런 크러스티였지만, 이상하게도 냉정을 잃고 난폭하게 눈을 빛낸 채 시로에의 앞에 있었다. 아무 말 없는 정적이 무겁게 그들을 눌러왔다. 어쩔 수 없는 두려움에 시로에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런 그에게 크러스티가 아름다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제가 왜 이렇게  화가 나서 왔는지 궁금하다는 얼굴이네요, 시로에 군.” 

옳은 말이었지만 시로에는 차마 긍정하지는 못했다.
“크러스티씨가 호감을 얻고, 제가 반대역할을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
“당신이 며칠 전 <원탁회의>에서 했던 말인데. 기억하고 있겠죠?”

기억 못할 리 없었다. 그것 때문에 시로에가 처리할 서류가 늘어 지금 이상태가 된 것이었으니까. 동쪽의 <대지인>과의 관계를 결정할 수 있는 사건이고, 무엇보다 크러스티를 엮은 일이기도 했으니 조금의 문제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로에는 잠도, 휴식도 줄여가며 있는 대로 정보를 끌어 모으고 시뮬레이션을 했다. 그것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났다는 건가? 시로에는 크러스티가 저 말을 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크러스티가 그런 것 조차 이해해주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알 수 없는 혼란에 여전히 입을 다물고 머리를 풀가동시키는 시로에에게 크러스티가 다가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압감에 숨이 막혀왔다. 심지어 크러스티는 MP를 소진시키면서까지 기세를 더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로에에게는 위압감보다도 의문이 더 강하게 찾아들 뿐이었다. 왜? 크러스티는 명백하게도 자신에게 화가 나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크러스티는 시로에의 시야에서 벗어나 그의 등 뒤에 섰다. 시로에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싶었으나, 그의 존재감은 시로에의 몸을 굳히기에 충분했다.

“<대지인> 측에서 그러더군요. 우호관계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그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공주와 혼인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입니다.”
“네?”

혼인? 예상하지 못한 그의 말에 시로에가 당황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시로에를 크러스티가 양 어깨를 내리눌러 제지했다. 몸이 굳을 정도로 강하게 누르는 그의 힘에 시로에는 고통을 느꼈지만 그것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크러스티의 기운이 너무 날카로웠다.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을 것 같아요?”
“글…쎄요?” 

가까스로 대답하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거절했습니다. 아주 정중히요. <원탁회의>까지 들먹이면서, 저를 제외한 10개 길드의 동의를 얻기 전까지는 안 된다고 말이죠. 난 자신이 있었습니다. <원탁회의>에는 당신이 있는데 내가 그 혼인을 하게 될 리가 없잖아요?”

혼인이라는 단어를 말하면서 시로에의 어깨에 얹혀있는 크러스티의 손에는 더 힘이 들어갔다. 무시할 수 없는 아픔에 시로에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잘못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런 시로에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크러스티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쪽에서 뭐라고 했는지 맞춰볼래요?”
“윽!”

그가 말을 할수록 강해지던 공기의 압박은 크러스티가 말을 끝냈을 때 절정에 달했다. 마법사이지만 공격보다는 후방지원에 특화된 인챈터, 시로에는 물리적 심리적 압박에 점점 자세가 무너졌다. 무거워지는 공기와 함께 어깨의 손은 힘을 더욱 더해갔고 결국 시로에는 무의식중에 그의 손목을 잡았다. 고통의 원인을 없애려는 생각이었지만 그걸 알면서도 크러스티는 조금도 힘을 빼지 않았다. 시로에가 감히, 시선을 맞추게 두지 않았다.

크러스티가 하고 싶은 말의 요점을 두고 일부러 주변부의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아챘으나, 그가 던지는 말들의 유기적 관계를 파악 할 수 있는 정보가 시로에의 머릿속에는 없었다. 아무리 최근 과로를 했다고 해도, 그가 저만큼이나 화낼 일을 잊었을 리가 없을텐데.


시로에가 당황해하는 동안 크러스티는 겨우 시로에에게서 손을 떼고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겨우 떨어진 크러스티를 두려움을 담아 바라보면서 시로에는 몸을 소파에 더욱 밀착시켰다. 티 테이블을 자신의 뒤에 두고 시로에의 바로 앞에 선 크러스티는 거대한 체격이 아니더라도 나오는 기운만으로도 시로에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었다. 시로에는 코앞에 선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크러스티는 소름 돋을 정도의 다정한 웃음과 목소리로 자신의 연인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일주일후에, 그러니까 당신이 <원탁회의>에서 아까 그 소리를 했던 그 회의가 끝나고 나서 <대지인>들로부터 대답을 들었어요.”

마치 위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뾰족하게 가시를 세워 시로에를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시로에는 눈에 보일 정도로 떨고 있었다.

“<대지인>들이 결혼에 대해 의견을 묻자 <원탁회의>에서 결혼을 축하한다는 편지가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맨마지막에 당신의 서명이 적힌 편지가. 그것을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네? 그럴 리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로에의 가는 목을 부드럽고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한손으로 감싸 쥐고 크러스티가 웃었다. 시로에는 어릴 때 뭣도 모르고 검색했다가 보게 된 귀신사진보다도, 지금 눈앞의 사내가 짓고 있는 미소가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크러스티는 시로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의 서명, 당신의 필체. 다 당신의 것이었어요.”
“…러, 스티… 손…!”
“당신, 이 말이에요. 당신이 축하편지를 보냈습니다, 내 결혼에. 제 ‘연인’인 당신이. 이걸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주길 바라십니까?”
“……!”
“제게서 벗어나려면 겨우 그 정도 속박으로는 한참 부족하네요. 정치적 목적의 결혼이라.”

기도를 압박하는 강한 힘에 시로에는 호흡을 잃어가고 있었다. 시로에가 아무리 양 손으로 크러스티의 손을 떼어내려고 노력해도 우위를 점령한 그를, 압도적인 힘으로 자신을 누르고 있는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시로에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크러스티는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인지 손에서 조금도 힘을 빼지 않고 있었다. 변명을 듣기 싫어서인지 말을 할수록 힘이 조금씩 더해지던 그의 손길에서 시로에가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시로에의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되어버렸을 때가 되어서였다. 그런 시로에를 싸늘하게 바라보는 크러스티는 이제 거짓된 웃음조차 짓고 있지 않았다.

“나한테서 멀어지고 싶어요? 그러려면 날 죽여야 해요. 아, 우리는 <모험자>라서 신전에서 계속 부활하죠?”

크러스티가 눈을 사납게 빛내며 으르렁댔다. 시로에는 그의 행동이 맹수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둘 중 하나에요, 시로에 군. 제가 당신에 대한 기억을 잊을 때까지 저를 죽이는 걸 반복하든가, 당신이 포기하든가.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쉽게 떠나줄 사람은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막혔던 호흡이 그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돌아오며 뿌옇게 흐려졌던 시야와 멀리 느껴지던 청각이 서서히 정상궤도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잔뜩 기능저하가 된 눈과 귀를 통해서도 시로에는 크러스티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제어가 안 될 정도로 화가 나있었다. 제대로 된 감각으로 다시 확인할 필요도 없이 아주 확실하게.


하지만 시로에는  억울하고 당황스러웠다. <원탁회의>의 참모처럼 되어버려 거의 모든 서류 작업을 그가 하기는 했다. 물론 시로에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성격이었으니 큰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 저런 내용의 서류를 처리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언제 그런 걸 했지? 시로에는 멍하게 크러스티를 올려다보았다. 크러스티는 여전히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나를 정치 같은 걸로 공주에게 묶어두고, 심지어 당신은 나와 대척점에 서겠다고요?”
“아니라고 말해도 부질없는 변명이겠네요.”
“그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받는 담당을 하겠다고 자처하며 저에게의 접근조차 거절하려는 당신을 제가 왜 믿어야합니까? 이미 일은 되돌리기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늦어도 다음 달이면 레이네시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겠죠. 그렇지 않으면 <원탁회의>와 <자유도시동맹 이스탈>간의 관계는 이전보다 더 악화될 테니까요.”
“제가 한 게 아니에요…….제 기억 속에 없는 일이고, 무엇보다 저는 당신을 좋아…!”

‘좋아하고 있는걸요.’라는 답지 않게 솔직한 말이었지만,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시로에는 억지로 소파에서 일으켜졌다. 강제로 눈높이가 맞추어지고, 가까이서 보게 된 크러스티의 눈은 격렬한 분노, 그것 외의 감정을 담고 있지 않았다. 시로에는 그의 이런 행동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을 자신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 두려움을 배가시켰다. 몸이 거칠게 덜컹거리는 충격에 다시 말문이 막혀버린 시로에는 온몸 가득 혼란을 안고 크러스티에게 소리쳤다.

“저도 몰라요. 저는 그런 기억이 없단 말이에요! 제가 왜 당신을 레이네시아 공주님과 결혼하게 부추겨야 하죠?”

시로에도 순간적으로는 공포보다도 억울한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목소리의 크기를 줄이지 않았다. 억울해. 난 모르는 일이란 말이야. 시로에는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로 눈물을 흘렸다. 일으켜진 몸은 잡아올리는 손이 사라지자 소파에 주저앉혀졌다. 몸을 통제 할 수가 없었다.


크러스티는 시로에가 처음으로 겁이 날 정도로 잔뜩 빠져버린 사람이었다. 당연히 잃어버리기 싫었다. 소유하고 싶고 항상 곁에 있고 싶고.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 자신을 죽일 것처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영문 모를 크러스티의 오해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심지어 크러스티는 시로에가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오해였다. 그것이 시로에의 감정을 잔뜩 헝클어놓았다. 평소에는 민첩하게 돌아가던 머리도 지금만큼은 소용이 없었다. 소파에 앉아 크러스티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시로에였다. 하지만 시로에를 보는 크러스티는 여전히 얼굴에 긍정적인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말이죠, 필사사씨.” 


크러스티는 시로에를 서브직업으로 부르며 자신의 매직백에서 정갈하게 접힌 편지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망설임 없이 시로에에게 던졌다.
“계약을 물리지 않겠다는 온갖 약속을 하고나서야 겨우 <대지인>들에게서 받아온, ‘당신’이 보낸 편지의 원본입니다. 그걸 보고도 당신이 그걸 쓰지 않았다고 저한테 변명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크러스티의 아름다운 웃음에서 한껏 날을 세운 냉기가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것을 오롯하게 받아내는 시로에는 그 냉기를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편지를 받아들자마자 시로에는 패닉상태에 빠졌다.


그 종이는 적어도 이 아키바 거리 내에서는, 자신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최고급의 종이였다. 시로에는 손으로 편지를 만지는 동시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과거의 대규모 전투, 그 이벤트에 참가한 몇 명 안 되는 게임 유저들. 그리고 소수였던 대규모 전투 참가 유저 중에서도 더 극소수인 필사사. 전투 이후 그들이 받은 교환, 거래 불가의 귀속 아이템을 이용해서만 만들 수 있는 종이. 그것이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종이였다. 시로에가 아니고서는 지금 그가 손에 쥔 종이를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요리사가 아닌 사람이 요리를 하려고 하면 형체 없는 까만 숯이나 물컹한 무언가가 되는 것처럼, 특수 종이의 제작과 그 종이위에 글씨를 쓰는 것은 필사사의 고유 능력이었다. 그가 손에 든 물체는 여러 의미로 시로에가 손수 종이와 잉크를 만들어 그 편지를 썼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크러스티는 시로에에게 이렇게나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종이를 받아들고 내용을 읽기도 전에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시로에를 크러스티가 현실로 끌어 올렸다.

“시로에 군, 변명 해봐요. 다시 반박해보란 말입니다. 당신이 그 편지를 쓰지 않았다고, 나를 그 공주와 결혼시켜서 당신에게서 떼어내려고 한 게 아니라고!”
“나는, 내가 이런 게…아니에요.”
“그럼 이 아키바 거리에 당신을 제외하고 가능한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내 결혼에 대한 소식을 알 만큼 대외적인 지위가 높고, 예전에 대규모 전투에 참여해서 그 종이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아이템을 얻었던 그 필사사를, 내 앞에 데려와요.” 

크러스티는 이미 결론을 내린 모양인지 그가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시로에를 몰아붙였다.
“아니면 당신이 종이와 잉크를 만들어 누군가에게 선물했고 그 사람이 우연히 그 공주의 결혼소식을 알아서 축하의 편지를 썼다고 할까요?”
“…….”
“당신과 필체가 아주 흡사한 그 사람이? 심지어 서브직업 중에서 그리 흔하지 않은 필사사의 직업을 ‘당신과 같은’ 최고레벨로 올려놓은 누군가가 말입니까?”

시로에는 크러스티의 말에 그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모두 불가능한 것임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크러스티는 시로에의 침묵을 진실이 탄로 난 것에 대한 묵비권으로 이해했다. 시로에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기억이 이렇게까지 부정확하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재해> 이후, 시로에는 단 한 번도 죽음을 맞이한 적이 없었다. 시로에에게는 인위적인 기억의 공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만약 죽은 적이 있다고 해도 이런 중요한 일을 잊지는 않을 것이었다. 자연적으로 잊었다고 하기엔, 시로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를 잊을 만큼 건망증이 심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억력이 좋은 편에 속했다. 그런 그였기에, 도대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시로에가 혼란스러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지 크러스티는 시로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시로에의 무너진 얼굴을 보면서도 크러스티는 자신이 배신당했다고 생각 했다. 가장 믿고 있던 사람이 자신을 그저 체스판의 말처럼 이용해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난 당신한테서 그렇게 쉽게 떨어져나갈 사람이 아닙니다.” 

크러스티는 선언하는 것처럼 시로에에게 말했다.
“당신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내가 그렇게 시로에 군의 마음대로 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렇게 말하고 크러스티는 시로에를 소파 사이에 있는 작은 티 테이블에 엎드리게 했다. 이길 수 없는 힘의 차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등을 내준 상태. 그것만으로도 시로에는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크러스티는 오히려 그것을 반긴다는 반응을 보였다.

“좋은 방법이 있어요, 시로에 군.”
“하지, 하지 마세요. 크러스티씨. 무서워요….” 

자신의 두려움을 처음으로 입 밖에 낸 시로에였지만 크러스티는 그것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차라리 그 공포를 가지고 날 봐요. 무서워서라도 날 못 벗어나게, 그렇게라도 하란 말입니다.”

전쟁터에서처럼 잔혹한 즐거움을 담고, 하지만 여전히 유려하게 웃으면서 그가 시로에의 하의에 손을 댔다. 서류작업에 몰두하느라 간편한 평상복 차림이었던 시로에는 갑자기 느껴지는 손길에 깜짝 놀라 그를 막으려고 했으나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보통 상태에서도 질 수밖에 없는 사람을,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참 기대되는군요.” 

이미 크러스티에게는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당신이 이 방의 출입제한을 유지하면서, 당신 동료들에게 무의식중에 텔레파시를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또 그러면서도 저를 받아낼 모습이 말입니다.”
“싫어요, 크러스티씨. 제발…. 이러지 마세요.”
“당신이 어디까지 버틸지, 정말 기대돼요.”

이런건 안 돼. 최후의 발악으로 몸을 한껏 뒤틀어보는 시로에였지만 이미 판은 결정되어버렸다. 시로에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자신이 완전히 져버렸다고. 난폭한 손길에 사라지는 자신의 하의를 느끼며 시로에는 제발 자신이 무의식중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기를 바랐다. 절대, 안 돼…. 그렇게 되면 다시는 크러스티씨와 만날 수 없어…. 시로에는 이런 상황에서 조차 그와의 결별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손을 대는 크러스티를 말리지 못한 채로 시로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 상황이 끝나고 꼭 저 편지에 대해 제대로 조사해서 크러스티의 오해를 풀고 말겠다고. 그러면,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시로에는 정신력으로 끝까지 버텼다. 자신도 문제이지만 이 모습을, 너무나도 명백히 크러스티가 자신을 강간한 것으로 보이는 이 모습을 누구에게도 들킬 수 없었으니까. 크러스티는 결국 편지를 들고 온지 세 시간 반 만에 자신의 길드캐슬로 돌아갔다. 시로에는 차갑게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떤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렇게나 소중하게 자신을 여겨주던 그를, 그렇게나 자신이 사랑하던 크러스티를 저렇게까지 몰아버린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편지에 대한 것을 아무리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시로에를 한없이 우울하게 만들었다.


생전 겪어본 적 없는 아래쪽의 통증은 시로에에게 너무 큰 고통이었다. 인터넷도 없는 상황에서 도대체 지금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몰라 시로에는 어쩔 수 없이 아까 전 그가 벗긴 자신의 하의를 찾아 입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냈다. 그러자 골반 뼈 사이가 벌어진 것처럼 미묘한 불편함을 만들어내고 있어 앉기도, 서기도 곤란했다. 양 손목은 그가 자신을 계속 움직이지 못하게 하느라 잡고 있었기 때문인지 푸른 멍이 들어있었다. 다리는 서 있는 것도 고작이라는 것처럼 계속해서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만큼 온 몸이 엉망이었지만 지금 시로에의 머릿속을 차지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시로에는 그의 눈을 바라보고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했다. 두려움에, 공포에 눌려있느라 그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크러스티씨는 어떤 눈빛을, 표정을 했을까. 아마 나를 원망했겠지. 미워했겠지. 어쩌면, 증오했겠지. 시로에는 또 울적해졌다. 하지만 더 이상은 혼자 우울해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여기는 길드원들이 돌아와야 할 장소이고 벌써 시간은 꽤나 지난 상태여서 해가 지려는 기미가 보였다. 더 이상은 그들을 억지로 밖에 있게 할 수 없었다. 시로에는 옅어지는 의식을 계속해서 붙잡으며 방을 정리했다.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크러스티의 분노가 이렇게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힘들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시로에는 머릿속으로는 최대한 크러스티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목소리도, 손길도, 눈빛도…. 그를 생각하면, 잠시 후에 텔레파시를 사용해야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분명 엉망이 될 것이었다.


가까스로 감정을 갈무리하며 그는 텔레파시 창을 열었다. 맨 처음은 냥타씨였다. 시로에가 딱히 순번은 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그의 무의식이 그런 선택을 한 것 같았다.

[시로에냐냥?]

시로에가 가까스로 목을 가다듬은 것이 소용없어졌다. 크러스티가 아닌 타인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듣자마자, 가까스로 정리한 감정이 산산히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소용없었다. 이렇게 조금만 방심해도 시로에에게는 크러스티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양 손을 잡아채고 끔찍한 폭력을 행사했던 그가, 그러면서도 오히려 더 상처받았을 그가 시로에에게 계속해서 떠올랐다. 크러스티씨…. 마음속으로 그의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도, 감정이 북받쳐 올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대답을 하기위해 입을 열면, 분명 볼품없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말 테니까.

[…시로에?]

시로에는 다시 한 번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안 돼, 안 돼. 관계를 밝히기 싫다고 한건 나야. 내 욕심이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그걸 깰 수는 없어.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시로에가 말을 뱉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냥타씨…. 어디에요?”
[목소리가 왜 그러냐냥. 무슨 일 있냥?]
“무슨 일은요. 그냥 방금 전까지, 크러스티씨랑 좀…대화를 오래 하느라 목이 쉬었나 봐요.”

시로에는 자신이 크러스티라는 이름을 말하는 것이 거북했다. 뭔가 말하면 안 될 이름을 말하는 기분이었다. 위화감이 상대방에게도 전해진 것인지 냥타는 시로에의 말이 끝나고 일정한 간격을 둔 후에 의도적으로 시로에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지금 나는 시장이다냥. 돌아갈 때 목에 좋은 차를 사 가겠다냥.]
“꼭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아, 그것보다도 오시는 길에 <초승달동맹>에 들러 아카츠키를 데려와 주시겠어요?”
[알겠다냥. 우리가 갈 때까지 …있어라냥.]

있어라. 그냥 단순한 동사일 뿐이었지만 시로에는 이미 자신의 이상을 그가 간파했다는 것을 그 말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역시 냥타씨는 속일 수 없는 걸까. 하지만 냥타씨는 내가 크러스티씨랑 어떤 관계인지 모르니까 괜찮지 않을까…. 시로에는 그렇게 자신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냥타씨가 자신의 억울함을 들어줬으면, 내 편이 되어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던 것 같기도 하다. 괜찮냐냥? 따뜻하게 물어오는 냥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속 포근함조차, 지금의 시로에에게는 필요한 것이었다.

“아니요…. 안 괜찮아요. 하나도… 괜찮지 않아….”

결국 시로에는 울음을 터뜨렸다.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서 몸을 웅크리고 펑펑 울었다. 억울하면서도 무서웠다. 크러스티씨. 이 세계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항상 변수를 계산하고 사는 시로에였기에 이번 일은 더 당황스러웠다. 크러스티씨랑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크러스티씨가 다시 나를 예전처럼 바라봐줄까? 다시 마주앉아 웃을 수 있을까? 전장에서 서로를 믿고, 싸울 수 있을까…? 시로에의 머릿속에는 온통 크러스티 뿐이었다. 자신의 몸에 대한 걱정도, 심지어 길드원들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그냥 크러스티가 보고 싶었다. 용서받고 싶었고, 그가 더 이상 화내지 말고 진심으로 웃으면서 자신을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울고 있던 시로에에게 텔레파시가 하나 걸려왔다. 시로에는 무시하려고 했지만 당황하다가 실수하는 바람에 그 텔레파시를 아무런 준비 없이 받아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낭패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로에?]

냥타씨였다. 시로에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울음으로 얼룩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로에. 길드원들한테는 아파서 먼저 자러 들어갔다고 할 테니까 방에 들어가라냥. 너 지금, 상태가 너무 안 좋다냥.]

다정하게 말해오는 냥타에게 결국 이기지 못하고 시로에는 감사합니다…. 하는 대답을 했다. 냥타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말투로 조금 후에 목에 좋은 차를 가지고 들어갈 테니 샤워를 하든지, 잠을 자든지 하고 있으라고 하고 통신을 끊었다. 시로에는 바닥에서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HP는 여전히 가득 찬 상태였지만 시로에는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걸음을 옮기자 다리는 몸의 무게를 버텨내지 못하고 열 발자국만에 무너져 내렸다. 갑자기 쓰러진 자신의 몸에 빠른 대처를 하지 못한 시로에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머리를 바닥에 강하게 부딪히며 무거운 고통이 느껴졌다.


눈물이 났다. 그렇게나 흘려댔는데도 눈물은 여전히 나왔다. 방금 전 부딪힌 머리가 아파서는 아니었다. 그냥 다시 크러스티가 생각나서, 이유 모르게 미안해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워서. 하지만 울면서도 시로에는 반자동적으로 몸을 일으켜 자신의 방으로 몸을 옮겼다. 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킬 수는 없다는 집념으로. 크러스티씨….여전히 그의 머릿속에는 차갑게 뒤를 돌아 자신에게 떠나버린 가디언의 모습뿐이었다. 방에 들어가 침대를 보자마자 시로에의 몸에서 한꺼번에 힘이 쭉 빠졌다. 꼭 옷만 남은 것처럼 흐느적대는 몸은 침대까지 닿는 것이 고작이라는 듯 침대에 몸이 닿자마자 의식을 놓아버렸다.





<D.D.D.>의 길드원들은 초긴장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의 길드마스터인 크러스티의 기분이 눈에 보일정도로 나쁘다는 것. 남을 불편하게 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는 크러스티답지 않게 한없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바라만 보고 있어도 느껴진다는 것. 그 사실에 당황한 길드원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오늘 전투에 나갈 일이 없어서 그러는 건가? 하지만 요즘 기분이 꽤 좋은 것 같았는데. <원탁회의>에서 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그들이 수근 대는 것을 크러스티라고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 뿐이었다.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그것이 밖으로 티가 나는 것을 제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시로에에게 화가 났고, 결국에는 자신에게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굳이 광전사의 기운까지 끌어와서 자신보다 명백히 약한 소년을 강간했다. 그 사실이 계속해서 크러스티를 자극하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두고 온 그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크러스티의 행동에 시로에는 당연하게도 반항했다. 강하지 않은 힘으로 때리기도 하고, 싫다고 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밀치기도 하면서. 하지만 크러스티는 시로에의 행동이 왜, 언제 멈췄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내뱉은 과거의 자신에게도 환멸감이 들었다.

‘당신이 나를, 배신했잖아요.’

작정하고 시로에를 상처 입히기로 한 듯이 말에는 잔뜩 날이 서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그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크러스티는 그 이후로 시로에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참아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로에는 자신이 어떻게 해도, 가쁘게 숨을 쉬며 몸에서 힘을 빼려고 노력하는 것 이외에는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웃기는 일이었지만, 크러스티는 그것이 더 화가 나서 그를 몰아붙였다. 그는 시로에가 울고, 자신에게 애원하기를 바랐다. 잘못했다고, 자신의 진심은 그것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자신에게 말하길 바랐다. 하지만 시로에는 크러스티의 무자비한 폭력이 끝나기 전까지 약한 신음소리 외에는 소리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때 당시에는 머릿속에 시로에를 아프게 해야겠다는 잔인한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생각해보니 그것은, 시로에가 무언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인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작은 방에서 도망치듯이 뛰쳐나왔다. 소년이 상처받을 것을 알았지만 더 이상 시로에와 함께 있다가는 자신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에게서 도망쳤다. 비겁한 짓이었다.


결국 자신은 시로에를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 소년은 그런 상황에서조차도 자신을 다 참아냈는데, 크러스티는 그 편지에, 정황적 시나리오에 휘말려 그를 강간했다. 심지어 이것이 그와 가진 첫 관계라는 것이 크러스티의 기분을 더 악화시켰다.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 것이 얼마만인지. 시로에를 잔뜩 상처 입히고 나서야 크러스티는 감정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는 그 사실이 그를 자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젠장.”

크러스티는 자신의 침대 위에 앉아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 편지는 정말 시로에가 쓴 것이 맞을 것이었다. 아무리 그를 믿고 있는 누군가가 본다고 해도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까 시로에에게 따진 것처럼 이 아키바거리 안에서 그를 제외하고 그 종이를 만들고 편지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까. 


하지만 조금만 더 얘기를 들어봤어야 했다. 그가 억울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고, 정말 당황스러워 하며 겁을 먹었으니까. 시로에가 조악한 3류 소설 같은 변명을 말했어도, 그거라도 제대로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크러스티는 그러지 못했다. 감정에 이성을 빼앗겨 그에게 찾아가 시로에를 작은 방 안에 물리적으로 가두고 정신적으로 압박하며 수치스러울 폭력을 가했다. 시로에가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을 알고서 오히려 그것을 더 이용해 몰아붙였다. 다시 아까의 모습이 생각나자 크러스티는 이마를 찡그리고 눈을 감았다. 시로에는 지금 울고 있을까,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면…아예 나란 존재를 생각하지 않고 있을까? 마지막 말이 자신에게 아프게 다가오는 것에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크러스티는 자신의 무기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길드 분위기가 이렇게 유지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럴 때는 괜히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사냥을 하는 것이 옳았다.






“시로에, 괜찮냥?”

방문을 노크하고 냥타씨가 들어갔다. 다른 길드원에게는 큰 걱정 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마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건물 자체에서 좋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시로에는 아픈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길드원들은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일과로 돌아갔다. 그것을 시로에가 원한다면, 그대로 해 주는 것이 맞을 테니까.

“시로에?”
“…….”
“시로에!”

냥타가 침대 옆의 작은 서랍장 위에 들고 온 그릇을 올려놓았다. 아까 목이 아프다는 핑계를 댄 것에 대한 차와 토마토 스프였다. 그러면서도 몇 번이나 시로에를 불렀지만 그는 냥타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고 그저 누워있었다. 많이 지친건가? 침대에 널브러져있는 시로에를 냥타가 작게 흔들었다. 하지만 자는 사람의 몸과는 무언가 다른, 조금 더 힘이 빠진 느낌으로 시로에의 몸이 흔들렸다. 냥타는 놀라서 계속해서 시로에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깨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시로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기절 한 건가? 아니면… 의사가 아닌 냥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이 세계에서도 의사라는 것이 필요하던가? 냥타를 더 당황하게 만든 것은 시로에의 정보창이었다. 시로에의 정보창은 열리지 않았다. HP, MP, 상태이상 여부 그 어떤것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어?”

나오츠구가 냥타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시로에의 방에 들어왔다. 시로에를 두고 당황하고 있는 냥타의 모습에 나오츠구는 적지 않게 놀랐다. 웬만하면 그는 저렇게까지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방금 전까지 나오츠구는 냥타의 말대로 평소처럼 생활하려고 했지만 건물 전체의 기운 자체가 심상치 않아서 영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냥 방에 누워 있기로 결정했다. 시로에는 똑똑하고 좋은 친구였지만 항상 자기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나오츠구는 이번 일도 또 그런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시로에가 과부하가 걸려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던 중 냥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오츠구는 불길한 기운을 애써 떨치려고 하며 그의 방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불길한 건 언제나 잘 맞는 법이라고.

“지금, 지금 당장 마리엘씨에게 가야할 것 같다냥.”
“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시로에가 이 상태인데 시로에의 정보창이 열리지 않는다냥.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냥. 대 신전으로 가지 않은걸 보니 죽은건 아닌 것 같은데, 일어나지를 않는다냥.”

냥타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나오츠구에게 시로에를 넘겨주었다. 충격이 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시로에의 몸은 역시나 비이상적으로 힘이 빠져있었다. 축 늘어지는 시로에를 등에 업으면서 나오츠구는 생각했다. 앞으로는 억지로라도 시로에에게서 짐을 나눠 받아야겠다고. <원탁회의>의 일이든, 길드의 일이든 시로에가 혼자 떠맡아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이번에야 말로 그의 좋지 않은 습관을 고쳐줘야겠다고.
시로에의 방이 소란스러워지자 평온을 가장하고 있던 건물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각자의 방에 흩어져 있던 아이들은 모두 2층의 중앙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입 밖으로 무슨 말을 내면, 그게 현실이 될까봐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불안에 휩싸여 서성이고만 있다가 냥타와 나오츠구가 방에서 나오자 아카츠키가 긴 침묵 후에 겨우 입을 열었다.

“주군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우리도 잘 몰라. 우리는 일단 마리엘씨에게 갈게. 무슨 일 있으면 그쪽으로 와.”

짧게 끊어지는 말은 다급한 상황이라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것에 더욱 불안해했지만 냥타와 나오츠구의 입장도 그들 못지않게 곤란했다. 일단 자신들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몰랐으니까. 죽음조차 사라진 이곳에서 의식불명이라는 이 현상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마리엘에게 가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을 가지고 나오츠구와 냥타는 바쁘게 발을 움직였다. 시끄러운 소리들과, 뜀박질로 인한 흔들림에도 여전히 시로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로에는 몇 주 동안 볼 수 없었던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오츠구와 냥타는 무언가의 방법이 있길 바라며 <초승달동맹>으로 향한 것이었지만, 사실 그들 또한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의 <모험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었다. 회복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린다고 해도 죽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극단적으로 들릴 수는 있겠으나, 대 신전에서 부활한 후 멀쩡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논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시로에를 무작정 대 신전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어렴풋하게 떠올랐을 뿐이었다.

“어떻게…해야 할까요.”

헨리에타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나오츠구와 냥타또한 그러게, 하는 기계적인 말대꾸만 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퀘스트나, 스킬, 이벤트에서도 캐릭터의 정보창이 열리지 않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이유였다. 정보창을 통해 캐릭터의 능력 전반을 알 수 있는것인데, 그것을 막아버리면 서로의 무엇을 보고 파티를 맺겠는가. 그렇기에 그들이 더더욱 초조해하는 것일터였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시로에라면 그리 불가능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막연한 믿음 아닌 불안이 시로에를 ‘죽이는 것’으로 문제를 끝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마리엘과 헨리에타는 조용히 <초승달동맹>의 몇몇 회복계 직업들을 불렀다. 말이 새어나가지 않을 정도로 가깝고, 레벨이 높은 몇 명을 고르다보니 작은 길드 내에서는 부합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치료를 위해서는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한 생각으로 모두는 시로에의 상태창을 열기위해 노력했으나 클레릭인 마리엘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여전히 그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마리엘은 예쁜 얼굴을 찡그리고 입술을 짓씹었다.

“일단은…다들 흩어져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혹시 아이템중에 관련 아이템이 있을 지도 모르고…그렇지?”

마리엘은 초조하게 말을 끝맺었다. 상태창을 걸어잠그는 스킬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다. 그렇다면 무슨 아이템의 효과일테니, 그것을 해제하는 것 또한 아이템이리라. 아니 적어도 방법이라는 건 존재 하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부가 설명이 없이 그 정도는 알아챘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조용한 침실에서 홀로 평온히 누워있는 것은 시로에 뿐이었다. 만약 저것이 그의 마지막이라면, 홀로 악역이 되기를 자처했던 자에게는 걸맞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크러스티는 크러스티대로 머리가 복잡했다. 도끼를 들고 홀로 사냥에 나섰으나 몇 십, 몇 백 마리의 몬스터를 베어 넘기고 그 잔해들을 잔뜩 뒤집어썼음에도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이렇게나 폭력적인 자신이, 처음으로 혐오스러워졌을 뿐이었다. 내려찍는 도끼에 또 다시 몇 마리의 초록색 슬라임이 엉겨 붙었다. 기분 나쁜 액체를 털어내기도 전에, 상승해버린 그의 위협수치를 향해 슬라임들이 다시 무더기로 달려들었다. 불에 뛰어드는 나방같군. 크러스티는 다시 한 번 가볍게 도끼를 휘둘렀다. 하지만 역시나, 생각의 매듭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능수능란하게 상황을 빠져나가는 것은 현대 일본인의 기본 소양이라고 배워왔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도시동맹 이스탈>과 협상을 할 때도 (적어도 겉으로는) 당황하지도 불쾌하지도 않게 이야기를 끝마칠 수 있었다. 심지어 ‘시로에의 편지’라는 것을 받아낼 때에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랬던 성정이, 대체 왜 시로에의 앞에서는 발휘되지 못하는 것인지. 그를 계속 눈에 담아왔던 주제에, 약한 <인챈터>를 지키고 싶다고 생각해왔던 주제에 결국 그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상처를 입힌 것은 자신이었다. 크러스티는 바닥에 도끼를 내리꽂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 상태에서 과연,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용서 받을 수 있을까.

“잘못은 잘못대로 다 해놓고…, 여전히 내 생각만이라니.”

구역질나는군. 크러스티는 결국 의미 없는 칼부림을 멈추고 그리폰을 불러냈다. 이미 그의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은 한바탕 썰려나간 이후였다. 사뿐히 그리폰 위에 타고, 크러스티는 결국 조심스레 해결하려던 생각의 타래를 싹둑 잘라버렸다. 무엇을 해도, 어떻게 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스스로의 잘못에서 피하지 말아야 했다. 그래. 더 이상 핑계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 정답이겠지.





하지만 가까스로 정면 돌파를 생각한 크러스티가 마주하게 된 현실은, 그의 생각보다도 처참했다. 일단 <기록의 지평선>에 찾아갔지만, 연장자라고 부를만한 멤버는 아카츠키 혼자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그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고 그저 ‘주군은 지금 만날 수 없다.’ 라고 반복했다. 크러스티는 무언가 불안함을 느꼈다. 이것은 종종 전장에서 발휘되던, 직감이라는 종류의 것.

“이유는 말 해줄 수 없나?”
“…내게 그럴 의무는 없다. 돌아가.”

아카츠키는 크러스티의 그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밀어내는 태도만을 취했다. 크러스티는 언뜻 그녀의 뒤를 넘봤으나 시로에를 따르던 작은 소년소녀들까지 그 뒤에 서있는 것을 보고는 등을 돌렸다. 무력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해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시로에에게 용서를 구하는 태도가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역시 물러서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결국 크러스티가 기다린 것은 일주일에 한번 열리는 <원탁회의>의 정기회의였다. 시로에는 책임감이 강했고, 자신이 온갖 문제에 손대지 않으면 불만족하는 사내였기에. 자신과의 관계와는 상관없이 자리를 채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의에 나가기 전, 타카야마에게서 들은 소식은 크러스티를 의문에 들게 했다.

“다시 말해주겠습니까, 타카야마 여사?”
“로드께서 떠나고나서 한 번의 임시회가 열렸었습니다. 요청자는 <초승달동맹>의 마리엘님. 안건은 ‘아키바의 활성화에 따른 회의 횟수’ 였습니다. 자세한 것은 테이블 위의 서류에 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발명러시 등의 이유로 회의는 2주에 한번’이 되었습니다.”
“그럼 적어도 다음주까지는….”
“네, 회의가 없습니다. 로드께서 원한다면, 마리엘님과 같이 임시회를 소집할 수는 있겠지요.”

크러스티는 머리를 짚었다. 거대한 길드캐슬, 자신의 집무실에서 수 없이 들어온 그녀의 보고인데도 오늘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대체 이렇게나, 타이밍 좋게 모든 일이 맞아 들어갈 수가 있나? 게다가 임시회를 소집한 주체가 마리엘이라는 것도 의문이었다. 그녀는 확실히 <원탁회의>를 구성하는 길드 중 한곳의 길드마스터였지만, 앞에 나서는 것은 거의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적어도 크러스티 본인이 알기로는 그래왔다. 그러던 그녀가 처음으로 권한을 발휘해서 모은 임시회,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더 적게 열리게 된 정기회의라.

“불참자는 있었습니까?”
“갑작스러운 임시회의였기에 몇 분 있었습니다. <흑검기사단>의 아이잭님, <그랑델>의 우드스톡님, 그리고 <기록의 지평선>의 시로에님.”

타카야마는 묵묵히 명단을 읊었다. 하지만 역시, 그에게 가장 걸리는 것은 마지막 이름 시로에였다. 왜, 라고 물어도 그녀는 대답할 수 없다 알지 못하는 것이니. 타카야마는 크러스티와 시로에의 관계를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묻지도,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현상’처럼 대할 뿐이었다. 애초에 사생활의 문제였기에 딱히 신경을 쓸 부분도 아니었다. 하지만 크러스티는 처음으로 조금 후회했다. 타카야마에게 알리고, 시로에에게 감시를 붙여놨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약간은 섬뜩한 가정을 하면서.

“알겠습니다. 길드의 문제는 없었나요?”
“길드 자체의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길드 자체가 아닌 다른 문제는?”
“…당신의 문제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마이로드.”

타카야마의 대답에 크러스티가 놀란 얼굴로 응수했다. 그녀는 절대로 먼저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크러스티도 타카야마가 자신과 시로에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걸 눈치 챘지만, 그녀가 관련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냥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먼저 그 선을 넘었다는 것은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크러스티는 조용히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타카야마는 굳이 말을 늦추지 않았다.

“마이로드, 저는 굳이 사생활을 들추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만, 한가지 확인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타카야마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로드가 떠나계시던 일주일동안, <원탁회의>의 수뇌부 몇몇에게 묘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기록의 지평선>의 시로에님이, ‘죽었다’는 내용의 소문이.”
“죽었…다?”

이 세계에서 참으로 쓸모없는 소문이었다. <모험자>는 축복받은 신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죽어도 대신전에서 살아나고, 애초에 잘 죽지도 않는 존재이지 않은가.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쓸모없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 묘한 두려움을 갖게 했다. 보통의 죽음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죽어있게’ 만드는가?

“자세히…알 수 있겠습니까.”

타카야마는 입을 닫았다. 아무리 크러스티의 최측근이라고 해도 그녀는 길드마스터가 아니었다. 즉, 원탁회의의 정식 멤버가 아니었다. 대강의 소문들이야 흘러 들어오는 법이었지만 그 이상의 자세한 맥락이나 상황들이 들어올만한 위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한계를 알면서도 크러스티에게 그러한 질문을 한 것은, 시로에의 상태에 크러스티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심 이상의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타카야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세히, 라고 말할 것은 아닙니다만 그가 죽은 것은 로드, 당신이 사냥을 떠난 날이라고 하더군요.”
“…….”
“<기록의 지평선>에 로드께서 다녀 온 이후, 그 일이 생긴 것이라는 말입니다.”

크러스티는 당연하게도 짐작 가는 것들이 있었다. 자신이 한 일들이 있으니, 그 이후에 시로에가 스스로를 ‘죽인 것’이 아닐까. 크러스티의 두루뭉술하던 죄책감이 결국 그를 가득 짓눌렀다.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저 그 말 한 마디 만으로도 상황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마이로드.”
“당신의 예상이 맞습니다, 타카야마 여사.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아마도, 아니 확실히 제 탓입니다. 그날…제가 한 일이 시로에군을 그렇게 만든 것이겠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찾아가 봐야죠. 그는 그렇게 짓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전까지 예의상으로라도 미소를 띠고 있던 크러스티의 얼굴은 형편없이 무너져서, 보기 힘든 무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러한 얼굴을 한 크러스티를, 타카야마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저 시로에님은 지금 <초승달동맹>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는 말을 얹어주었을 뿐이었다.





<초승달동맹>에서는 그곳대로 나름의 비상사태였다. 냥타와 나오츠구까지 있는 마당에 그가 들어와서 난장을 피울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그가 그만큼이나 예절이나 격식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있지만 본능적으로 막아서게 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엘은 그러면서도, 차마 길드홀에 출입제한을 걸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절박함 뿐 아니라 깊은 자책이 들어있었기에.

“들어가게 해주시겠습니까.” 

크러스티는 참담하게 말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냥.”

그를 막아서는 것은 냥타였다. 길드마스터도, <초승달동맹>의 길드원도 아니었지만, 그가 그러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이나 눈치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니까.


냥타는 시로에가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도, 그것이 크러스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애의 초창기부터 분위기가 바뀌어버린 그를 못 알아채기에는 냥타가 살아온 시간도, 시로에를 알고 지내온 시간도 너무 길었다. 하지만 시로에가 자신들에게조차 관계를 숨기고 싶어하는 것도 알았기에 시로에보다 더 능숙하게 사실을 숨겨왔을 뿐이었다.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초승달동맹>의 길드홀은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크러스티가 냥타를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면 하는 묘한 공포감을 주는 것이 크러스티, ‘광전사’였다.

“제발, 시로에군을…봐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분위기가 무너진 것은 크러스티로부터였다. 크러스티는 평소의 포커페이스도, 어투도, 자존심까지도 버린 것처럼 초연하게 굴었다. 크러스티의 주변에는 우울함만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냥타는 아무리 그래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카츠키에게서, 시로에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그라는 것을 들었을 때, 냥타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복수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텔레파시로 들은 시로에의 목소리는, 그리고 길드캐슬로 돌아가서 보게 된 시로에의 모습은 그만큼이나 엉망이었다.


그렇게 시로에를 망가뜨린 그를, 대체 왜? 왜 받아줘야만 하는가?

“…나를 너무 바보취급 하지 않는 게 좋다냥. 내가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는 않다냥.”
“시로에군이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보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크러스티의 말에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지난 이주동안 그 누구도 굳이 소리내어 말하지 않으려던 단어가, 그의 입을 통해서 튀어나왔다. 냥타는 보기 드물게 짜증을 담은 손짓으로 레이피어를 잡았다. 참 염치가 없는 족속이군. 하지만 크러스티는 그것을 보면서도 굳이 대응하지 않았다. 그들이 저렇게 시로에를 ‘죽게’ 내버려 둔 데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 곳을 노려서 자신이 들어갈 틈을 만들면 된다.

“시로에군에게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아서, 지금까지도 손대지 못하고 있는게 아닙니까. 제가 보면, 혹시 다른게 있을지도….”
“당신이 드루이드나 칸나기만 됐어도 내가 그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냥.”
“하지만 반장님. 혹시 모른다, 는 말은 정말 아무도 모르니까 쓸 수 있는말 아니겠어?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통했으니 일단 들여보내긴 해 보자구요.”

나오츠구의 말은 의외였다. 크러스티는 오히려, 그가 자신의 앞을 더욱 막아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오츠구 또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으며 말을 덧붙였다.

“여차하면 같이 쫓아내면 되니까. 그쵸, 반장님?”

크러스티는 애써 그 말을 듣지 않은 척 했다. 어쨌든 자신을 들어가게 해 준다는데 굳이 말을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뒤에서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마리엘과 헨리에타는 그제서야 2층으로 올라가는 듯 했고, 냥타는 레이피어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것을 그의 허가라고 받아들이고, 크러스티는 드디어 <초승달동맹>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그 앞에, 시로에가 어떤 상태일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였다.



2층, 마리엘의 방 옆에 있는 작은 방에 누워있는 시로에는 정말로 죽은 것처럼 보였다. 숨을 쉬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로 미동도 없었다. 크러스티는 시로에를 보는 순간 숨을 멈췄다. 자신의 충동이, 어떠한 결과로 돌아왔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니 차마 손조차 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냥타는 그를 오히려 앞으로 밀었다. 그것이 그를 더 괴롭게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어서였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다냥. 그의 상태창을 열어봐라냥.”
“상태창?”

그게 뭐 어쨌다고, 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크러스티는 입을 다물었다. 상태창이 열리지 않는다? 크러스티는 당황에서 몇 번이고 공중에 헛손질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상태창은 새까맣게 보여질 뿐 HP도 MP도 상태이상 여부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그래서다냥.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는거다냥.” 

냥타가 다시 평정을 찾은듯한 목소리로 이었다.
“HP문제인지 MP문제인지 중독인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것도 없다냥. 섣불리 조치했다가 그 반동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냥.”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네요. 그때 이후로. 2주전이나 지금이나 평온하게 잠들어있을 뿐이에요.”

헨리에타의 차분한 목소리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아, 그래. 2주전. 시로에를 몰아세우고, 겁탈하고, 남겨두었다. 알량한 자존심의 상처를 내세우며 몬스터를 잡으러 갔었다. 그것의 결과가 이것인가. 살아있지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 그의 상태라는 말인가. 크러스티는 작게 실소했다. 이 상황이 해결된다고 해도,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용서라는 단어를 써도 될 만큼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제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군요.” 

크러스티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주변의 그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시로에군은 유능하니까, 아마 이렇게 된 건 그의 의지겠죠. 그 어떤 아이템도, 스킬도 이런 상태를 만든다고 들어본 적이 없지만 아마 그라면, 그런 능력을 만들어서라도 이렇게 됐을 테니까요.”

크러스티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문 앞에 고정되어있던 발을 움직였다. 냥타는 잠깐 고민하다가 굳이 그를 막지 않기로 했다. 크러스티가 지나가는 걸음마다 짙은 자책이 새겨져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제 몸을 조각내고 싶습니다. 생각도 못할 만큼 작게, 살아나면 또 다시, 몇 천번이고.” 

크러스티는 시선을 시로에게게 두고 말을 이어갔다. 섬뜩한 내용들이었지만, 말하는 이는 평온했다.

“언젠가 내가 당신을 잊겠죠. 그러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 그것뿐인 것 같으니까요.”

크러스티는 시로에가 누운 침대 앞에 가만히 섰다. 그리고 고민했다. 내가 건드려도 되는 걸까. 혹시 손을 대면 그가 거짓말같이 깨어나는 건 아닐까. 깨어나면, 어떤 눈으로 나를 볼까.


크러스티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시선을 밑으로 내리자 손목의 옅은 멍자국이 보였다. 몸의 기능이 멈춘 것일까, 모험자의 신체에 남아있는 자국이란 오히려 장식 같다는 기분을 들게 했다. 하지만 이런 자국을 만든 건 나군요. 크러스티는 조심스레 손을 내렸다. 그때와는 다르게 약하게, 부드럽게 스치는 듯 그를 건드렸다.

그리고 그들이 기다리던 ‘상태창’은 놀라운 형태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 무언가의 메시지창과 함께였다.

“미안해요.”

마리엘이 무의식중에 눈앞의 글을 읽어 내렸다. 단 한마디의, 겨우 네 글자의 말. 그리고 나타난 상태창. 그들은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시로에는 <인챈터>였다. 후방에서 지원하는 지원가였고, 덕분에 방어구도 가볍고 HP보다는 MP가 훨씬 많은 직업이다. 그런 그의 MP가 0을 향해있었다. HP라고 별로 나은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절반 이상이 깎여있었고, 레벨이 높아지고 난 후에는 언제 본 것인지 생각나지도 않는 여러 개의 상태이상이 그에게 나타나 있었다. 갑자기 띄워진 그것들에 당연히 <초승달동맹> 건물은 시끄러워졌다. 그렇게 열려고 노력하던 것을 크러스티만이 열수 있다는 것에도 놀라움이 일었지만 그것보다 더 문제인 것이 있었다. 상태창 열어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시로에에게 여러 명의 지원가들이 붙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원인을 모르고, 상태이상을 저렇게 중첩해서 ‘본인에게’ 걸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조차 해본 적이 없으니까. 결국 무거운 침묵 속에서 마리엘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있었다.

“이건 우리끼리 고민한다고 알 수가 없어. 더 이상은 지체하지 말자. 로데릭이라면 적어도 이게 아이템효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상황인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들은 그녀의 주장에 첨언하지 않았다. 마리엘은 그렇게 길드홀을 떠났다. 헨리에타는 그녀를 따라 나서려고 했지만, <초승달동맹>의 길드홀을 그냥 둘 수는 없었기에 차마 따라갈 수 없었다.


헨리에타는 다시 그의 상태창을 응시했다. 어떻게 저 꼴이 될 수가 있는 거지. 심지어 누군가의 공격이 아니라, 스스로 저 상태가 되기를 원했다고 가정한다면. 아니 이제는 가정이 아니었다. 미안해요, 그 메시지를 준비할 수 있었다면, 저 상태 또한 자신이 의도한 것이었을 테니까.

“엉망진창이군요.”

다시 찾아온 적막을 깬 것은 크러스티의 말이었다. 그의 말이 시로에의 상태를 이야기한 것인지, 그의 목소리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크러스티는 다시 한 번 시로에의 손을 쥐었다. 미안하다니, 대체 뭐가 말입니까. 시로에군.






로데릭은 마리엘에게 끌려오면서 잠깐 동안,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고 숨겼다는 것이 불만스럽다가도, 시로에의 상태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나 엉망이 된 책사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로데릭은 조용히 그의 상태를 살폈다. 시로에는, 여전히 조용했다.

“말하자면…상태이상 중첩이 맞군요.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라면 할 수 있었겠죠. 우리는 모르는 방법으로요.” 

로데릭의 말은 아무 방해 없이 이어졌다.
“레이드에 쓰이는 물약 중에 ‘신의 가호’라는 게 있었을 겁니다. 힐러들 힐량이 부족하던 예전에나 쓰던 건데, HP가 반 이상 깎이는 순간부터 그 피해를 MP로 돌리는 거였죠. 일단 그걸 사용하고, 그 위에 중독 상태를 일으키면서 지능을 높이는 ‘포이즌리프 원액’을 또 사용한 것 같네요.”
“중독 상태는 HP를 깎기 제일 편한 방법이니까…그렇겠군요.” 

헨리에타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기절, 이동방해…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부가효과가 있는 모든 약을 쏟아 부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레벨에 이런 HP피해를 입히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 피해는 전부 MP로 갔을 거고, MP가 0이 되면서 기절한 것 같네요.”

로데릭은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방안에는 눈물을 흘리는 마리엘과, 말을 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멍하게 서있었을 뿐이었다. 놀랍게도, 디테일하고 정교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에게 로데릭은 한 가지를 더 말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신의 가호’는 MP가 0이 되면 다시 HP를 깎습니다. 그러니까…아마 시로에군이 죽지 않고 있다는 건, 자동으로 채워지는 HP와 MP까지 생각해서 무언가 조치를 취했겠죠. 몸의 시간을 멈춘 것처럼 보일 정도니까요.”




미완

퇴고없는 함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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