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비 올캐러 + 타츠미 

폭력? 소재?가 조금 있습니다.

썰 형식입니다.









마을 근처에 들어선 순간 네 사람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마을의 입구는 이제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평소라면 낌새를 눈치챌 것도 없이 먼저 마을로 달려갔을 니키가 문득 뒤를 돌았다.


“와아, 방금 공기가 달라졌슴다.”

“확실히 나도 느꼈구만.”


니키와 코하쿠가 반응하고 나서야 다른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 두 사람이 느꼈다면 린네와 히메루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 사실을 알기에 코하쿠이 시선이 다시 두 사람에게로 향한다.


“방금 저희가 지나온 게 그 ‘결계’인거져?”

“네. 시이나가 느낄 수 있다면 예민한 일반인도 알아챌 수 있겠네요. 자세히 보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니.”

“아, 존재감 한 번 정말 어마어마하네.”


그렇게 덧붙인 린네가 부러 어깨를 한번 으쓱인다. 육안으로도 관찰할 수 있다지만 자세히 보지 않아도 뻔했다. 저게 바로 이번 의뢰의 주인공인, 시이나가 말한 바로 그 ‘결계’일 터였다.

 




세간에는 마도학자 4명이 팀을 꾸린 것으로 알려져있는 ‘Crazy:B’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불로불사라고 알려진 ‘마법사’와, 마법사의 경지에 이르진 못했지만 그 경지를 향해 마법을 수학하는 ‘마도학자’들로 이루어진 세계관.

마법사란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확언하기 힘든, 살면서 한번 볼까말까한 존재였으므로 사람들이 실제로 교류하고 의지하는 쪽은 마도학자였다.


“너무 멀리까지 와서 배고픔다. 이렇게 먼 줄 알았으면 간식을 더 가져왔을 텐데…. 마을에 도착하면 일단 밥이라도 먹을 수 있겠져?”

“뭐, 일단 그쪽이 의뢰한 입장이니 밥은 주겠지? 일단 선수금은 확실히 챙겼으니 걱정 없다고, 캬핫. 이런 날로 먹는 의뢰가 들어오다니, 역시 나 님은 운이 좋다니까.”


대외적으로는 마도학자 4명이 꾸린 단체라고 되어있지만, 실제로 Crazy:B의 마도학자는 린네와 히메루 둘뿐. 코하쿠는 마법을 배운지 얼마 안 돼서 마도학자라고 하기엔 애매했고, 니키는 지망생이라고 하기에도 처참할 정도로 마법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굳이 마도학자 4명으로 이름을 올린 데에는, 마도학자가 무려 4명씩이나 보이면 나름 길드로 보일 수 있고, 어쨌든 겉보기에 조금 더 믿음직스러워보인다는 계산에서였다. 실제로 네 명의 이름을 올려도 린네와 히메루만으로 들어오는 의뢰를 해결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2주 전, 한동안 의뢰가 없어 손가락이나 빨고 있던 그들에게 반가운 편지가 한 통 왔다.


발신자는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외딴 마을의 촌장. 코하쿠는 이름도 들어본적 없다고 했지만 린네는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첨부된 지도를 본 순간부터 히메루는 아예 말이 없었음.


의뢰의 내용은 마물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결계’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정말 흔한 부류의 의뢰였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일수록 마물의 수가 많았고, 완벽한 결계를 칠 수 있을 만한 결계술사의 수도 급속도로 적어졌으니까. 바꿔말하면 보호 결계는 크레이지비의 주요 밥벌이수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한 일이었다.

예상을 벗어난 건 바로 그 다음 문단에서부터였다. 간만의 의뢰라며 신이 나서 편지를 읽고 있던 린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자, 최근 근처 마물의 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네네, 그러시겠죠~.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결계가 너무 강해져……. 응? 너무 강해?”


세 번이나 다시 읽어도 편지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공손하게 쓰인 편지는 아주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었는데, 결국 마물이 많이 나타나면서 결계가 너무 강해졌다는 거였다.


“뭐…. 자기네 마을 결계가 강하다고 자랑하는 건가여?”

“지금까지 결계 치러 사방팔방을 다 돌아다녔지만 결계가 강하다고 한탄하는 건 처음 보는구만. 간만에 제대로 된 의뢰가 들어오나 싶었는데, 또 허탕인가.”

“아뇨, 의뢰는 진짜일 거예요.”


그제서야 나지막한 히메루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니키와 코하쿠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낸 사람에게로 향했다.


“보통 거기까지 결계를 강화할 일은 없겠지만, 결계가 너무 강해도 확실히 문제가 될 수 있기는 해요. 정상적인 범주라면 마물의 출입만 막아야하지만….”

“아무것도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결계가 강해진다면?”


린네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히메루의 마지막 말을 받았다. 이미 가장 중요한 부분, 액수를 확인한 참이라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결계를 고치기 위해 다른 마도학자 길드에 부탁할 정도라면, 이미 그 결계는 통제권을 잃었다고 봐야겠지. 애초에 결계를 쳤던 결계술사는 이미 마을을 떠났을 거야.”


린네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편지를 휘휘 흔든다.


“의문이 있다면 결계술사는 떠났는데 어떻게 결계가 강해지냐는 거지. 그런 괴상한 수식을 유지할 정도면 평범한 수준의 마도학자는 아닐 거거든. 자, 여기까지가 린네 군의 추리인데 말이지. 우리 똑똑한 메루메루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린네의 날카로운 시선과 함께 니키, 코하쿠의 시선이 따라온다. 순식간에 세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히메루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었지만, 그마저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하아…. 결계술사가 누구인지는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요.”

“캬하핫, 그럴 줄 알았다니까.”

“이미 마을을 떠나서 결계를 수정할 수 없다면, 부수고 새로 지으면 그만이죠. 제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다면, 이쪽도 꽤 쉽지는 않겠지만.”


히메루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만큼 추가금으로 받아야겠죠.”

“아, 역시 메루메루랑 같이하길 잘했다니까. 말이 잘 통한단 말이지.”

“히메루는 딱히 아마기와 협업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죠.”

 

 






그렇게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야 두 마도학자와 두 일반인의 예상과 벗어난 일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결계를 친 사람이 아직도 번듯하게 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가 찬 코하쿠가 그럼 왜 그 사람에게 결계 보수를 부탁하지 않았냐고 하자, 촌장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결계를 완전히 부수고 새로 만드는 게 아닌 이상 그 결계를 친 사람과 만나보지 않을 수는 없었음. 전자도 불가능하진 않았지만 마력낭비가 압도적이었다. 대충 마법진을 수정해서 보수만 꿀꺽할 수 있다면 그정도 수고로움을 감당하지 않을 이유가 ―히메루를 제외하고는―딱히 없었음.


결계를 친 마도학자의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외곽에 있는 집이었다. 저택이라고 하기엔 조금 작지만, 일반 주민들이 사는 곳에 비하면 퍽 큰 편이었음. 2층으로 된 저택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오랜시간 공들여 관리한 듯 깔끔해보였다. 마도학자의 집까지는 촌장이 동행했기에 그가 가볍게 문들 두드리자, 몇 분 지나지 않아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선생님, 실례하겠습니다.”


보통 마도학자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만 한 덕에 오만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돈을 밝힌다는 인상이 태반인 탓에 마도학자에게 호의적으로 깍듯한 시민은 흔치 않았다. 때문에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독 공손하게 대답하는 촌장의 모습을 바라보는 린네의 얼굴에 흥미가 깃들었다.

촌장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바로 거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쪽에 서있는 단아한 남자 또한. 수정을 박아넣은 듯한 짙은 보랏빛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히메루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타츠미.”

 





집 안에 들어선 네 사람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자 이내 타츠미라고 불린 남자가 직접 차를 내왔다. 집에 손님이 오는 게 자주 있는 일인지 접객실이 따로 있었음. 실내는 저택의 외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하게 잘 정리된 가구가 전체적으로 따듯한 인상을 줬다. 이상적인 마도학자의 연구실이라고 말할 법했다.

촌장과 크레이지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앞에 찻잔을 내려놓은 타츠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히메루 씨?”


대답 대신 타츠미 쪽으로 시선 돌리는 히메루. 불편한 심기가 표정에서 훤히 드러났다.


“저희, 이전에도 만나본 사이인 거죠?”


하지만 그마저도, 타츠미가 말을 덧붙인 순간 험악하게 구겨진 표정에 비할 바는 못됐음.

 



그 뒤로 타츠미 본인과 촌장의 설명은 이러했음.

한 십년 정도 전에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된 마도학자 타츠미는 그 이후로 쭉 결계를 유지해왔음. 하지만 반년 정도 전에 비오는날 절벽에서 약초를 따다가 발을 헛디뎠는데, 그때 머리를 크게 다쳐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보통 사람이었다면 분명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정도의 치명상이었지만, 다른 약초꾼이 타츠미를 절벽 밑에서 발견했을 때까지도 살아있었음. 지난 십년동안 타츠미에게 받은 게 많았던 마을 사람들은 당연히 타츠미를 많이 도와줌.

그렇게 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다른 문제가 생겼는데, 바로 타츠미가 결계의 통제권을 잃어버렸다는 것. 본인이 만든 마법진이지만 이해를 못하니 제어할 수도 없음. 결계가 약해져도 문제였겠지만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문제가 됐는데, 바로 시간이 지날수록 결계가 점점 강해졌다는 것.


“그렇게 해서, 얼마 전 저희 이웃 마을에 결계를 쳐주셨다는 여러분께 의뢰하게 된 겁니다.”

“흠, 그치만 말야. 결계를 새로 만드는 것과 약하게 바꾸는 건 전혀 다른 문제란 말이지?”


팔짱을 낀 린네가 유독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탕 해먹기 위해 밑밥을 까는 거라는 걸 모르지 않기에 나머지 멤버들은 조용함.


“애초에 결계를 포함한 마법진에 뭔가를 ‘바꾼다’라는 개념은 없어. 마법진을 발동한 본인이 아니라면 말이지. 그러니까, 이건 저기 저 타츠미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마법진을 수정할 수 없다면 완전히 부수고 새로 만들어야 해. 근데 뭐든지 만드는 것보다 부수는 게 더 일이란 말이지. 힘 좀 들겠는데?”


마도학자의 ‘힘 좀 들겠는데’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곧바로 ‘돈 좀 들겠는데’라는 뜻으로 이해한 현명한 촌장의 시선이 타츠미에게로 향했다.


“저어, 선생님…?”

“흠, 아무래도 그렇게 되는 걸까요. 역시 제가 빨리 수식을 이해해야 할 텐데….”


난처한 표정의 타츠미가 눈썹을 누그러뜨린다. 얼핏 보이는 거실 탁자 위에는 ‘기초마법진개론’같은 책 따위가 굴러다니고 있었음. 그 책을 누가 썼는지 아는 히메루의 얼굴에 짜증이 서린다.


“…타츠미.”

“네?”

“따라 나와요.”


먼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히메루가 문쪽으로 향함.

 

 



 


“저어, 저거 안 말려도 괜찮을까여…?”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마당에 벼락 하나가 내리꽂혔다. 누군가 소중하게 돌봐왔을게 분명한 꽃나무 하나가 불에 타지도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가 워낙 많이 오는 탓에 천둥소리가 간간이 들리긴 했지만, 방금의 그 벼락은 자연적인 게 아니다. 세 사람은 종종 볼일이 있었기에 혼동할 수 없는 히메루의 마법이었다.


“괜찮아, 안 죽어.”

“아니, 진짜 죽을 거 같은데여?! 지금 히메루 군, 무지막지하게 저 타츠미라는 사람을 두들겨 패고 있다구여?!”


눈치 빠르게 촌장은 먼저 집에 보낸 린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함.


“안 죽는다니까. 저 녀석, 마법사거든.”

“흠, 역시 그런 겐가.”

“에, 저 빼고 다 알고 있었슴까?! 그보다 마법사란게 진짜로 있는 거였어여?”


어쩐지 코하쿠도 강건너 불구경하듯 팔짱만 끼고 두 사람의 대결, 을 빙자한 히메루가 타츠미를 두들겨 패는걸 보고만 있었음.


“시전자가 통제권을 잃고나서 더 강해지는 결계라니, 들어본 적도 없어. 그런 경우라면 아무래도, 시전자가 미리 그 경우까지 고려해서 마법진 수식을 만들었으려나. 일반적인 마도학자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냐.”

“오, 꽤 똑똑하잖냐, 코하쿠 쨩.”

“조금만 공부해도 이 정도는 알 수 있네만. 게다가 마을에 정착한 게 10년 전이라고 했잖아. 어떻게 봐도 엄청 젊어 보이는데. 마법사의 경지에 가까운 마도학자라면 늙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바꿔말하면 최소한 그 정도 수준은 된다는 거 아닌가.”


그 순간 한번 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번개가 타츠미를 강타했다. 일반인이라면 틀림없는 즉사다. 이렇게나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번개가 일으킨 흙먼지에 두 사람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광경에 흠칫 놀란 것도 니키 한 사람뿐이라는 듯, 린네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아까, 절벽 밑으로 떨어진 녀석을 다른 마을 사람이 발견했다고 했지? 저런 사람이 약초를 구하러 갔는데 이 근처였을 리가 없잖아. 우리도 오는 길에 봤잖아? 이 근방, 그런 깊은 산속에 인적이 얼마나 있다고.”

“그렇다는건….”

“최소 3일, 길면 일주일도 더 넘어서 발견했을 거야. 그때까지 숨이 붙어있었고 마을에 돌아와서는 기껏해야 응급치료 정도나 받았지. 불로(不老)까지야 뭐, 마법사의 경지에 가까운 마도학자라면 비슷하게 흉내낼 수는 있어. 하지만 불사(不老)는 택도 없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설령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저 ‘선생님’이라고 불린 작자는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멀쩡하게 제 발로 걸어 마을로 돌아왔을 것이다. 머리에는 다 말라 비틀어진 피딱지가 앉아있었겠지만.


“뭐, 그래도 기억은 온전하지 않다니, 흥미롭네. 메루메루가 저렇게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는 가.”


그 순간 다시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담장이 무너졌다. 표정이 더 울상이 되는 사람은 여전히 니키뿐이었다.


“그치만 이러다 진짜 집 무너지겠슴다! 마을까지 와서 노숙하는 건 사양이라구여. 게다가 집이 없으면 밥이, 밥을 먹을 수 없어~!”

“뭐어, 조금 심해 보이긴 하는구먼….”


흙먼지가 조금 걷히자 마당을 뒹굴고 있는 인영이 어렴풋이 보였다. 쿨럭이는 기침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희미했다. 조금 심한 것 같기는 하네.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린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림.


“어―이, 슬슬 그만해, 메루룽. 너도 보면 알잖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린네가 손을 휘젓자 흙먼지가 걷히고 풍경이 조금 더 또렷하게 보임.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상대는 이마에서부터 피가 흘러서 꼴이 말이 아니었음. 쿨럭이며 기침을 토할때마다 틀어막은 손 사이로 피가 흐르는 것도 보임. 마법사가 아니었으면 정말 끝장이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반격 한 번도 못하잖냐. 뭐, 죽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알겠지만 말이야.”

“……하.”

“그렇게 새침하게 굴지 말고, 사람을 이렇게까지 두드려 팼으면 일단 치료는 좀 해주라.”

“히메루가 왜요?”


그렇게 말하는 히메루의 얼굴에 적대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당한 대답에 구경하던 사람들마저 말문이 막히고, 짧은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낮게 헛기침하는 히메루.


“흠흠, 아마기도 알다시피 치유 마법은 히메루의 특기가 아니라서.”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라는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그 말을 내뱉을 정도로 구경꾼들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건 린네 군도 마찬가지라 유감이네~. 거기 선생님, 치유 마법 좀 쓸 줄 알아요?”

“……쿨럭,”

“근데, 역시 이 꼴로는 알아도 못 쓰지 않을까나?”


린네의 능청에 히메루가 쯧, 하고 낮게 혀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쓰러진 타츠미 쪽으로 다가온 히메루가 손바닥으로 타츠미의 얼굴을 누름. 안 그래도 바닥에 쓰러진 사람의 얼굴이 더 땅바닥에 쓸림.


“시전은 ‘내’가 할 테니까 주문이라도 읊어.”


몇 초가 흐르자 이윽고 두 사람이 있는 땅 위에 빛나는 마법진이 생김. 파란색, 마력을 제공한 시전자가 히메루라는 뜻이다. 하지만 문양은 다르다. 평소 히메루가 쓰던 수식이 아님.


“…흐음, 엄청 간단한 수식이네.”


마법진은 짧게 빛나고 사라졌지만, 눈치 빠르게 문양을 훑어본 코하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문이 간단한 만큼 효과도 별로 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남자가 피를 멈추고 어느 정도 의식을 회복할 정도는 됐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타츠미의 머리에서 손을 떼는 히메루.


“…불로불사는 선택의 문제가 아냐. 마법사의 심장에 얽힌 주문 때문이지.”

“콜록, 콜록…. 네, 저도 기록으로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만….”

“그래서 선택한 차선책이 이거라는 건가? 역겨운 위선자 자식.”


그 말을 내뱉는 히메루의 얼굴은 혐오를 감출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대로 등을 돌려 먼저 저택으로 들어가는 히메루.

 






어쨌든 정신을 차린 타츠미가 몇 번 간단한 치유마법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나서야 그쪽도 제 발로 걸어 저택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히메루는 그게 이미 제 집이라도 되는 마냥 거실 쇼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음. 기초마법진개론. 마도학자를 희망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거쳐갈,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책이었다.


“자, 메루룽이 뭣 좀 확인하느라 시간이 지체됐지만,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보자고. 아,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번거로우니까 그냥 마법사 군이라고 불러도 괜찮지?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고.”

“상관은 없습니다만, 이런 상태인 제가 마법사라는 호칭으로 불려도 괜찮을지…….”

“일단 메루메루의 번개를 몇 번이나 맞고도 죽지 않고 살아있잖아?”

“하지만 히메루 씨께서도 저를 정말 죽일 작정은 아니셨을테니까요.”


죽일 작정이었을텐데……. 두 사람의 대화를 바라보는 니키와 코하쿠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 마을에 설치한 마법사 군의 저 결계 말이야. 지금은 건드릴 수 없는 거지?”

“저도 몇 번 시도해보았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수식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럼 통제권을 잃었는데 결계가 점점 더 강해지는 건?”

“그것도 지금은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우와아, 마법사라는 거, 생각보다 뭔가 무능하네여.”


대화가 여기까지 치닫을 즈음에는 참지 못한 니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히메루가 드디어 심심풀이로 읽던 책을 탁자에 내려놓음.


“마법사는 환경과 공명해서 마력을 보존하죠. 타츠미가 쓴 마력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마법사는 다시 자연에서 마력을 흡수해요. 그런데 지금의 타츠미는 공명은커녕 이미 방출해버린 마력을 다시 회수하지도 못하고 있어요.”

“나도 메루룽 의견에 동의. 애초에 결계가 이렇게 무식하게 강해지도록 설계되진 않았을거야. 단지 그 시전자가 마력을 회수해가지 못하니까, 차선책이자 그나마 가까운 대상인 결계로 마력이 옮겨간 거지.”


팔짱을 낀 히메루의 시선이 타츠미 쪽으로 향했다. 아까처럼 적나라한 혐오는 자취를 감췄음.


“애초에 이렇게 빙빙 돌아갈 필요도 없어요. 타츠미가 본인 마력을 회수하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으음, 역시 제가 문제네요…. 혹시 더 빠르고 확실한 선택지는 없는 걸까요? 아까 보니까 히메루 씨께서도 대단한 실력자신 것 같던데.”

“당연히 부수는 건 문제가 안 되죠.”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히메루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만 타츠미의 결계가 무식하게 단단해서. 힘으로 밀어붙였다간 마을도 반절 정도는 같이 날아갈 거예요.”

“그, 그런…!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마을 사람들도 안전할 수 있는…….”

“흠, 시전자가 마법진을 수정할 수도 없고, 힘으로 부수지도 않으려면 남은 방법은 결계가 자연적으로 소멸하는 것뿐인데….”


린네가 말끝을 흐리자 두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한 명은 타츠미, 다른 한 명은 히메루. 자연적으로 소멸하는 방법은 뭘까요? 라는 타츠미의 물음이 이어지기도 전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띤 히메루의 말이 선수를 쳤다.


“아, 이해했어요. 타츠미를 죽이면 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거죠? 불로불사의 마법사를 처단한다. 과연, 구전동화에서 많이 보이는 권선징악이네요.”

“권선징악이라고 할 수 있나. 악이 힘을 모아서 선을 처단하는 것 같은데….”


코하쿠의 나지막한 말이 어쩐지 한숨처럼 들렸다.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 놓고 보자면 분명 그럴 것이다. 어떤 착한 마법사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설치해준 결계를 없앤답시고 마법사를 죽이고, 그 대가로 어마무시한 수고비를 청구한다…. 그 그림이 너무 생생하게 그려져 옆에 있던 니키가 순간 진저리를 쳤다.


“하아, 결국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오는군요. 촌장님과 마을 사람들께는 줄곧 도움을 받기만 해서 정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차라리 제가….”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요.”


방금과 달리 싸늘해진 목소리.


“어차피 죽지도 못하는 불로불사의 몸으로, 순교자가 되고 싶다는 소리 따윌 지껄이면 뒷마당이 불바다가 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 싸늘한 목소리에는 무엇보다 분명한 진심이 실렸다. 기억이 없는 타츠미조차도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아무튼 다짜고자 결계를 부술 수는 없으니 일단 시간을 갖고 지켜보자는 쪽으로 대화가 일단락됨. 타츠미의 저택이 꽤 넓은 덕에 크레이지비 멤버 네 사람이 지내는 데에도 무리가 없었음. 타츠미와 니키가 차린 밥상에는 마을 사람들이 나눠준게 분명한 농작물들이 가득했음. 정성으로 키운 게 틀림 없네여~ 라고 말하는 니키의 목소리가 어쩐지 행복하게 들렸다.

저녁을 먹고 결계를 확인한 뒤 마지막으로 거실에 모였을 때, 타츠미가 편지 봉투를 한아름 들고 나타남.


“저,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만. 히메루 씨는 혹시 토죠 ■■라는 분을 아실까요?”


타츠미의 목소리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에 일순간 당혹이 서렸다. 히메루 본인이 직접 말한 적은 없어도, 다들 지금까지 알음알음 쌓아온 눈치란 게 있었으니까.


“…갑자기 그 사람은 왜 찾는 거죠?”


게다가 히메루의 날선 반응이 쐐기를 박았다. 그 분위기의 변화를 눈치챈지 못한 건지 타츠미가 여전히 해사한 얼굴로, 편지 봉투를 책상 위에 와르르 쏟아부으며 입을 열었다.


“기억을 잃고 나서 집을 정리하다가 이런 편지들을 발견했거든요. 아무래도 예전의 제가 미처 발송하지 못하고 있던 것 같은데, 편지에서 얼핏 히메루 씨의 이름을 봤던 것 같아서요.”


탁자 위에 뭉텅이로 쏟아진 편지의 겉봉투에 쓰인 필체와 내용은 모두 같았다. 정갈한 손글씨로 발신인에는 카제하야 타츠미가, 수신인에는 토죠 ■■이라고 쓰여있었음.

히메루는 눈썹만 꿈틀할 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완벽한 무표정에 감정을 읽기도 어려웠음. 그걸 대신해 린네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편지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흠, 그 ‘토죠’라는 사람한테는 무슨 편지를 이렇게 많이 보냈는데?”


분명 떠보는 질문이었지만 그 의도가 타츠미에게는 크게 대수롭지 않았는지, 해사한 미소를 띠운 마법사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 아무래도 제가 흠모하는 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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