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무얼 기다리나 - 이영훈








아네모네

20화









지나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엎드린 태경의 티셔츠가 살짝 들어 올려져 있었고, 허리 아래쪽으로 길게 난 자상(刺傷)이 드러났다. 저도 모르게 지나가 손을 뻗어 두드러진 흉터를 매만졌다. 조금 움찔하던 태경이 이내 잠잠히 베개에 턱을 묻었다. 그리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지나를 올려다보았다. 태경이 말하지 않아도 지나는 이 상처가 언제 생긴 것인지 안다. 미국에서, 은수와 함께 사고가 났을 때. 추락하는 거대한 유리 조명이 은수를 보호하던 태경의 몸 위로 덮쳐 났을 상처. 그때의 태경은 생사의 기로까지 다녀왔다던가.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럴 거 없어.”

 

태경이 죽을 뻔 했다던 은수의 말을 떠올린 것이 표정에 드러난 모양이다. 크게 숨을 들이쉰 지나가 이내 태경의 티셔츠를 단정하게 내려 상처를 덮었다. 그 손을 끌어다 잡은 태경이 사이사이 깍지를 쥐었다. 지나가 침대 안으로 들어와 태경의 품에 안겼다.

 

“아파?”

“지금은 안 아프지.”

“예전엔, 많이 아팠어?”

“아니. 그 때도 뭐, 별로.”

“거짓말.”

“사실 기억 잘 안나. 하루 반, 이틀. 의식 없었대. 깨어나서는 한동안 마취약, 진통제. 무감하게 몇 주를 누워만 있었어.”

“다시는 그렇게 다치는 일 없으면 좋겠다.”

“그럴 거야.”

 

태경이 반대쪽 손을 뻗었다. 지나의 머리를 꼼꼼히 귀 뒤로 넘기며 말간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이런 얘기 그만해. 네 얘기 하자.

 

“별 일은 없었어?”

“아. 별 일…”

“있었어?”

“대전에, 엄마랑 피아노 학원을 같이 하던 엄마 친구 분이 계셔. 서울에 계시다가 이번에 다시 대전에 내려오셨거든.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지 운영하던 자리에 교습소를 차리려고 하시나봐.”

“현진이가 찾아준 네 건물?”

“응. 그 건물이 내 명의이기도 하고… 아줌마가, 그 피아노 교습소를 내가 맡아주셨으면 하신대.”

“……”

“서울 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아줌마랑 통화했어. 다음 주에 한 번 만나서 얘기해보기로 했거든.”

“……”

“자?”

“아니.”

“말이 없길래.”

“가고 싶어?”

 

태경이 복잡한 얼굴로 물었다. 대전의 그 교습소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피아노를 치는 지금의 박지나가 있지도 않았을 거라고. 지나뿐 아니라 지훈에게도 그 장소는 유년기에만 국한된, 엄마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나 마찬가지란 말을 지나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나한테도 고민되는 얘기긴 했어. 그래서 여기 오면서 계속 생각했거든.”

“……”

“그런데, 네가 있는 거야. 태경아.”

“……”

“네가 날 기다리고 있어서. 너 버리지 말라고, 그렇게 먼저 말해줘서…”

“가지 마.”

“……”

“앞뒤 안 재고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거면, 내 마음은 그래.”

“……”

“내 손 닿는 곳에 있어주라.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아. 그러니까, 가지 마.”

“응. 안 갈게.”

 

안 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럼 마음이 놓여야 하는데 어쩐지 태경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지나의 약점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지나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고작 가지말라는 태경의 말 한마디에 오랜 꿈도, 또 동생의 희망도 기꺼이 접었다. 그렇다면 지나는 반대의 상황에서도 똑같이 망설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게 태경 자신을 위한다는 판단이 서면, 그런 때에 지나는 언제라도 지금처럼 주저하지 않고 태경을 떠나는 것은 아닐까. 마치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정말로, 물거품처럼.

 

“지나야.”

 

태경이 손끝으로 지나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나가 가물거리듯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응.

 

“내가 널 사랑해서, 널 사랑해서 안 놔주는 사람이 하필 나라서. 그래서 너 힘들어?”

“아니.”

“그거, 거짓말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거짓말 아니야, 태경아.”

“그런데 너는 왜 나한테…”

“응?”

“…아니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느냐고. 욕심인 걸 안다. 태경이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미끄러지는 지나의 길지 않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계속해서 쓸어주자 곧 잠들 모양새로 지나가 태경의 품 안에 얼굴을 묻었다. 지나의 숨소리. 함께 있다는 사실 만을 실감하기로 하며 태경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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