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용 결제창입니다. 본편 무료 감상 가능합니다.






10. 사랑은 초여름을 닮는다 (2)




나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김정우와 이마크를 발견했다. 김정우는 넉살 좋은 얼굴로 밴드부 애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이마크는 단호한 말투로 댄스부 아이들을 타이르고 있었다. 아마 딴 짓거리하고 있느라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을 받은 거겠지. 뭐든 정석대로 딱딱 해야 하는 이마크 성격상 다른 곳으로 나돌아다니는 댄스부 아이들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나는 잔말 말고 얼른 오라며 미련 없이 전화를 끊는 이마크를 대단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김정우처럼 넉살 좋게 반응하는 건 기대도 안 해. 몇 달, 아니 몇 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지내온 애들한테 저렇게 매정하게 구는 게 가능한가.




" 애들 서운했겠다. "

" 아… 그렇긴 한데. 이렇게라도 안 하면 도저히 올 생각을 안 해서… "

" 흐음… "

" 저번에도 그냥 냅뒀다가 한 시간이나 늦게 왔었거든. "




이마크는 내게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안 한다는 둥, 오늘따라 애들이 산만하다는 둥… 옛날 같았으면 내가 말을 걸든 말든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일관했을 이마크가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변명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갑작스레 속이 간지러워졌다. 참나… 갑자기 왜 이렇게 자기변호를 하고 난리래. 내가 뭐 안 좋은 말이라도 했나. 나는 우물쭈물 대는 이마크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사람 마음은 한 번에 접어지는 게 아닌가 봐. 어떻게 이런 별거 아닌 걸로도 심장이 뛰냐. 열이 오른 얼굴을 애써 숨기며 심술궂은 얼굴로 팔짱을 꼈다. 자켓도 없어진 마당에, 붉어진 손끝을 숨기기 위해선 팔짱을 끼는 것밖엔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 우리 여주, 안 추워? 자켓은 어디다가 버리고 왔어. "

" 우리 여주는 무슨… 팔 안 치우냐. "

" 여주 팔에 닭살 돋았어. 많이 추워? "

" 내 말을 뒷등으로도 안 듣네… "




내 한 쪽 팔을 껴안으며 내 옆쪽으로 바짝 붙어온 김정우가 헤실헤실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진정이 안 되던 심장 박동은 김정우를 보자마자 거짓말처럼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새로 온 벤츠보다 이미 지나간 똥차에 미련을 가진다는 게 이런 건가… 나는 시원스레 웃고 있는 김정우를 바라보다가, 이내 축 처진 얼굴을 하고 있는 이마크 쪽을 바라봤다. 김정우는 분명 잘생기고, 매너도 좋고, 눈치도 있고, 누구보다도 내 생각을 먼저 해 주는 앤데. 왜 나는 그런 김정우보다 이마크한테 더 눈길이 가냐.


… 어차피 이마크는 한겨울이랑 결혼하는데.




" 에이 씨발… "

" 헉. 여주 엄청 춥구나! 욕까지 하고. "

" 하나도 안 춥거든? 아직 저녁도 아닌데 춥긴 뭐가 추워. "

" 지금 여주 얼굴 거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일주일 있다가 온 얼굴인데? 완전 창백해. "




순간 몰려오는 빡침을 참지 못하고 욕을 읊조리자, 옆에 있던 김정우가 오바 부르스를 떨며 내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확실히 해가 지고 있어서 춥긴 했지만, 그렇게 소름이 돋을 만큼 추운 건 아니었다. 그냥 좀 선선하네, 이 정도? 하지만 나는 내 이마에 얹어져 있는 김정우의 손을 내치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김정우의 손이 사라져 버리면, 나도 모르게 원망 어린 눈길로 이마크를 바라볼 것만 같아서. 자기 미래도 모르고, 자기 미래 신부 얼굴도 모르는 이마크한테 괜스레 성질을 부릴 것만 같아서. 나는 두 눈을 꾸욱 감은 채로 얼굴에 맞닿아 오는 김정우의 손길을 느꼈다.




" 열을 재는 거예요, 사심을 표출하는 거예요. "

" 글쎄. 둘 다 아닐까? "




훅. 나는 순식간에 밝아지는 시야를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흐릿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자, 그곳엔 방금 마라탕 집을 나온 것 같은 이동혁이 서 있었다. 이동혁은 굳어진 얼굴로 내 팔을 쥐어 잡은 채였다. 난 또 누군가 했네. 이동혁은 김정우에게서 나를 떨어뜨린 걸로도 모자라 자기 등 뒤로 나를 숨기기까지 했다. 누가 보면 김정우가 나 잡아먹는 줄 알겠네. 김정우는 우리 부모님 못지않게 과보호를 시전하는 이동혁을 바라보다,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꺽꺽댔다. 우리 후배, 너무 귀여워서 어떡해? 김정우의 말을 들은 이동혁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동혁 특유의 개눈깔이 김정우를 향했다. 둘 사이에 낀 나는 그냥 울고만 싶었다.




" … 동혁아. 그거 겉옷… 여주 거 아니야? "

" … 아, 네. 여주 누나 거 맞아요. "

" 근데 그걸… "

" … "

" 왜 너가 입고 있어? "




김정우와 이동혁의 기싸움을 관전하고 있던 이마크가 돌연 말을 꺼냈다. 이마크의 시선은 이동혁이 걸쳐 입은 회색 자켓에 꽂혀 있는 상태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조금은 굳어진 표정. 조심스럽게 물어보긴 하지만, 이동혁 입에서 나올 대답에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반응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동혁은 이마크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문 채로 내 팔을 쥐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니 씨팔… 대답을 못할 것 같으면 그냥 모르겠다고 하던가. 왜 죄 없는 내 팔을 으스러지도록 잡고 난린데.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이동혁에게 잡혀 있는 팔을 작게 흔들어 보였다. 이동혁 무서워서 직접적으로 말은 못 꺼내겠고… 그냥 소심하게 SOS 요청 한 거였다.




" 아… 미안해요, 누나. 많이 아파요? "

" 팔 한 쪽 인공 팔로 대체할 뻔했다는 거 빼곤 괜찮아. "

" 그게 안 괜찮은 거 아니에요? "




나는 이동혁의 어이털린 말투를 대충 스루하며 자유로워진 팔을 내려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내 팔은 이동혁이 잡았던 곳만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무슨 춤만 추는 애가… 악력은 또 왜 이렇게 센 건데. 나는 벌게진 팔을 부여잡으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진짜 괜찮아. 별로 안 아팠어.




" 자켓은 내가 빌려줬어. 동혁이가 춥다고 하길래. "

" … 동혁이 몸에 열 많은데. "

" … 아… 그르냐? 아니, 뭐… 몸에 열 많은 사람이라고 안 추우라는 법도 없고… "

" 동혁이는 겨울에도 반팔에 패딩 입는데…"

" … 어… 그르냐… "




쩝. 나는 더 이상 변명할 말도 없어 그냥 입만 다물었다. 이동혁이 몸에 열이 많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요. 저번 생에서도 이동혁이랑은 기싸움만 존나 하면서 개처럼 으르렁댔던 것만 생각나는데. 나는 슬쩍 이동혁 쪽을 돌아보며 구조 요청 신호를 보냈다. 제일 그럴싸한 핑계가 춥다고 온 빌려준 거였는데, 플랜 A는 보기 좋게 까였다. 설마 이동혁이 한겨울에도 반팔에 패딩 입는 미친놈이었을 줄이야.




" … 살짝 감기 기운이 도는 것 같아서요. 곧 축제 준비도 해야 하고… 감기 걸리면 좋을 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누나한테 옷 빌려 달라고 했어요. "

" … 그래? "

" 네. "

" … 알겠어. "




동혁이 네가 그렇다면야, 뭐. 그런 거겠지. 아까까지만 해도 굳어진 얼굴로 말을 잇던 이마크는 웬일인지 싱겁게 나가떨어졌다. 내가 처음에 했던 말이 너무 개구라 같아서 그런 건지, 두 번째로 입을 연 이동혁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는 모양새였다. 하긴, 뭐.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있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엄마와 통화를 하러 간 박지성을 기다렸다. 고작 오후 5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안부 전화가 오는 걸 보면… 박지성네 부모님도 엄청난 아들 바보인 것 같았다. 누가 팔척 햄스터 아니랄까 봐. 어디서든 걱정 받고 자라네.




" 헉,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게 왔죠. "

" 괜찮아~ 우리도 이제 막 통화 끝냈어. "

" 다행이다… "




안절부절못하는 박지성의 모습에 김정우는 넉살 좋은 얼굴로 하하 웃어 보였다. 사실 밴드부 애들과의 통화는 진작에 끝나고도 남았지만, 그걸 박지성한테 솔직하게 말했다간 세상에서 제일 미안한 얼굴로 축 처져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우리는 박지성을 향해 태연스러운 미소만 남발하며 박지성의 팔을 잡아끌었다. 애들이랑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한다고. 박지성은 알겠다는 짤막한 대답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다가도, 이내 이동혁이 입은 회색 자켓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데구르르.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그거 겉옷… 여주 누나 거 아니야? "

" 오늘따라 내 옷에 관심 가지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

" 네 옷이 아니니까 그렇지. "

" 내가 입고 있으면 내 거지. "

" 어이없어! "




박지성과 이동혁은 유치찬란한 대화를 이어가며 저들끼리 앞서갔다. 여주 누나가 너한테 자켓을 왜 벗어 주는데? 넌 몸에 열도 많잖아! 내가 감기 걸릴 것 같아서 달라고 했는데, 뭐 불만 있냐? 거짓말하지 마! 너 한겨울에도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애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사람 몸 상태가 365일 똑같을 순 없잖아.


사회생활 스킬로만 만렙을 찍은 이동혁은 사회 초년생이나 다름없는 박지성을 좌우로 구워삶았다. 응, 어쩔? 내가 그러겠다는데 니가 뭐 어떡할 건데? 척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었지만, 박지성은 그런 유치한 말들에도 잘만 넘어갔다. 아주 그냥 애를 삶아 먹어라, 삶아 먹어. 나는 얼굴까지 붉히며 이동혁에게 왁왁 대고 있는 박지성을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물론 이동혁은 옆에서 박지성이 뭐라 하든 말든 엿이나 까 잡수소 표정으로 귓구녕만 후비작거리고 있었다.




" 애들 원래 저렇게 잘 싸워? "

" 장난 식으로 싸우는 건 많이 봤어도, 지성이가 저렇게 진심으로 짜증 나 하는 건 처음 봐. "

" 역시… 이동혁 말빨 스킬이 보통이 아닌가 보네. "

" … 그거 때문은 아닐 텐데. "




이마크는 호기심 어린 내 말에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 나는 슬쩍 슬쩍 이마크에게로 붙어 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말소리가 잘 안 들린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길이 좁다 하는 등의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아주 추잡스럽고 속이 뻔히 보이는 행동들이었지만, 이마크는 그런 내 행동에도 싫다는 내색 한 번을 안 했다. 오히려 조금 들뜬 듯한 얼굴로 내 쪽에 더 붙어오기까지 했다. 이거 지금 무슨 상황이냐. 나 이거 좋게 받아들여도 되는 거냐.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분명 과거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마크랑 죽어도 엮일 일 없게끔 하자고 다짐했었는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꼬라지는… 어떻게 해서든 이마크와 지독하게 얽히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았다. 아니 근데… 이게 정상 아니야? 어떻게 이마크 같은 얼굴을 냅두고 그냥 넘어가. 그냥… 눈 딱 감고 이마크랑 다시 잘 해보면 안 되나? 이마크한테 했던 말들은 다 취소하고. 아는 척 안 하고 지낼 거라든지, 친구로도 안 지내는 게 더 낫겠다든지…


그렇게 양옆에 이마크와 김정우를 둔 채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을까.




" … "

" … "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익숙한 얼굴에, 나는 멍한 얼굴로 옆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쪽으로 꽂혀진 상대방의 시선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던 것도 잠시. 나는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발걸음은 시내 한복판에 멈춰 선 지 오래였다.




" … 여주야? "

" 여주야, 왜 그래. "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안부를 묻는 이마크와 김정우의 행동에도, 쿵쿵 뛰는 심장은 도저히 진정이 되질 않았다. 나는 살짝 굳어진 얼굴로 푹 숙여진 고개를 천천히 들어 보였다. 나와 두 눈을 마주쳤던 시선의 주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 여주야. 어디 아파? 괜찮은 거야? "

" … "

" 약국 들렀다 갈까? "




나는 무릎까지 굽혀가며 나와 두 눈을 마주하는 이마크를 바라봤다. 이마크의 얼굴엔 온갖 걱정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나는 진심 어린 걱정을 내보이는 이마크를 향해 입만 벙긋거리다,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한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과거의 나에겐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이마크의 다정한 모습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나를 위하는… 그런, 이마크. 나는 살짝 떨려오는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있었던 상황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한겨울이.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이마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





무슨 정신으로 노래방까지 온 건지 모르겠다.


아까 시내에서 한겨울을 본 기억 때문인지, 아까부터 내 머릿속은 온갖 잡생각들로 시끄러운 상태였다. 원래 같았으면 한겨울은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야 이마크의 존재를 인식했어야 했다. 왜냐면 한겨울은 이마크와 같은 반이 되기 전까진 이마크와 그 어떠한 접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한겨울은 3학년에 들어서야 알게 될 이마크의 존재를 오늘 알게 되었고, 거기다 이마크에게 푹 빠진 눈빛까지 덤으로 내보였었다. 이마크의 시선이 내게만 꽂혀 있어서 다행이지, 혹여나 이마크가 한겨울과 눈이라도 마주쳤다면…




" 진짜 존나 싫어… "




원래의 전개대로 한겨울과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 운명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거스를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욕을 곱씹었다. 밴드부 애들과 댄스부 애들이 광란의 붐바야를 부르며 머리털을 흔들고 있지 않았더라면, 누구든 내 욕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겠지. 나는 낯가림 따위 개나 줘버린 채로 저들끼리 머리를 흔들고 있는 아이들을 감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얘들아… 존나 재밌게 잘 놀아 줘서 고맙다… 시끄럽게 붕방대며 시선까지 분산시켜주다니. 나는 노래방 테이블 위에 놓인 식혜를 홀짝이며 탬버린만 존나게 쳐댔다. 도저히 노래를 부를 기분이 아니었다.




" 여주야. 우리 듀엣 한 곡 부를까? "




아이들과 붐바야를 부르며 신나게 춤을 추던 김정우가 말 같지도 않은 제안을 해 왔다. 김정우의 표정을 보아하니, 김정우는 아까부터 내가 죽상을 한 채로 혼자서만 초상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발랄한 얼굴로 개 같은 제안을 해 오는 김정우를 어이 털린 표정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내 목소리 귀한 거 몰라? "

" 어차피 축제 때 보여 주기로 했잖아. 여기선 맛보기. "

" 내가 무슨 이마트 시식 코너냐. "




아이들은 김정우와 숨 막히는 티키타카를 하고 있는 나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몇몇 아이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밴드부 대표 커플 탄생이냐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뭐지? 얘네 나 한눈팔고 있는 사이에 소주라도 한 궤짝 마시고 왔나. 나는 테이블 위로 늘어진 수십 개의 콜라 캔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콜라 먹었다고 취한 건 아닐 거 아니야.




" 나 오늘 피곤해서 목소리가 잘 안 나와. "

" 지금 존나 잘 나오는 것 같은데? "

" 야 누가 은지 입 좀 막아 봐라. "




내가 신물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휘 휘 저으니, 잔뜩 신나 있던 아이들은 하나같이 은지에게 달려들며 은지의 입을 틀어막았다. 와하하, 여주가 너 입 좀 다물래! 아이들은 지금 상대가 누구든 지지고 볶고 할 희생양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어후, 내가 김정우랑 노래 부른다고 했어 봐. 다들 흥분해서 옷이라도 벗었겠네. 나는 바닥에 하나로 뒤엉킨 채 저들끼리 놀고 있는 아이들을 태평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이런… 물가에 내 놔도 존나게 잘 놀 애들 같으니… 나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댄스부 애들이랑 어떻게 노냐며 쑥스러운 표정을 짓던 밴드부 아이들을 기억해 냈다. 어떻게 놀긴 뭘 어떻게 놀아. 이렇게 잘 놀면서.




" 얘들아, 너무 격하게 놀지는 마. 다친다. "




나는 다정한 얼굴로 걱정 어린 말을 내뱉는 이마크를 바라봤다. 이마크는 지금 이 상황이 신나고 재밌는 것 같았다. 티는 별로 내지 않았지만, 중간중간 실없이 터지는 웃음이라든가, 핸드폰까지 꺼내들어 아이들의 모습을 찍는 행동들이 이마크가 신났다는 걸 깨닫게 했다. 이마크가 이렇게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나는 멍한 얼굴로 이마크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는 지금 존나 심란한데. 너는 뭐가 그렇게도 재밌냐. 하긴, 자기 미래도 모르는 앤데… 신날만하지. 나는 정이나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여주야. 사랑은 자해래. 나는 너만 보면 그 문장이 존나게 떠오르더라. 옛날엔 정이나가 그런 말을 하든 말든 이마크 덕질하기 바빴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정이나가 한 말은 존나 맞는 말이었다. 그래. 사랑은 자해다. 그것도 개 쩌는 자해. 나는 박수까지 쳐가며 아이들의 댄스파티를 환영하는 이마크를 바라보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리를 쭉 폈다. 계속해서 굽혀져 있던 다리는 찌르르하는 감각과 함께 저릿한 느낌을 몰고 왔다.




" 어, 너 어디 가냐. "

" 아… 나 잠깐 밖에 좀. "




사부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박지성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이동혁은 박지성이 나가든 말든 다음 곡을 선곡하기 바빴지만,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밖을 나간 박지성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내가 아는 박지성은 우리 학교에서 제일 낯가리는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 보나 마나 지금 이 상황이 혼란스러워서 잠깐 숨 좀 돌리려고 나간 거겠지. 나는 박지성을 따라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어차피 기분도 뭣 같은데, 여기 있으면서 분위기 좆창 낼 바에는 밖에 나가서 바람이나 좀 쐬고 들어오는 게 더 낫겠지.




" 누나는 어디 가요? "

" 나 잠깐 전화 통화 좀. "

" 아아. "




이동혁의 짤막한 질문에 연락처에 있는 재현 오빠 번호를 가리키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뜬금없이 재현 오빠를 판 건 미안하지만, 그냥 바람 쐬러 나간다고 했으면 이동혁은 백퍼 따라오고도 남을 놈이었다. 얼마 없는 쉬는 시간인데, 그런 귀중한 시간을 이동혁이랑 같이 보낼 순 없지. 나는 후끈한 열기가 가득한 방 안을 빠져나오며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다 져서 그런지, 바깥 상황은 초가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서늘한 날씨였다.




" … 어, 누나? "

" 지성이 하이. "




노래방 앞에서 바람을 쐬고 있던 박지성이 놀란 얼굴로 날 돌아봤다. 박지성은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에 놀라다가도, 이내 작게 기침을 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코까지 훌쩍이는 박지성을 바라보다 훤하게 벌어진 박지성의 후드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박지성의 후드티는 모자 쪽이 넓어서 그런가 다른 후드티들보다 넥 라인이 넓게 퍼져 있었다. 저러고 있으니까 옷 안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가지. 후드티 끈은 뒀다가 뭐 하냐.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달달 떨고 있는 박지성에게 다가가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추워 죽을 것 같이 굴면서 왜 후드티 끈은 안 조이고 있어. "

" 아… 귀찮은 것도 있고, 제가 리본을 잘 못 묶어서… "

" 진짜 애네, 애. "




더듬거리며 대답하는 박지성의 모습에, 나는 흡사 사촌 동생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하며 박지성에게로 바짝 다가갔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박지성이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헙. 나는 박지성이 숨을 참고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박지성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꺽꺽 웃었다. 아니 무슨 가까이 다가갔다고 숨까지 참냐. 박지성은 내가 웃는 걸 보자마자 살짝 불퉁해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내 입장에선 박지성의 그런 행동마저 애교스럽게 보였다.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박지성의 후드티 끈으로 손을 뻗었다.




" 바람 많이 부는 날엔 안에 뭐라도 받쳐 입고 와. 감기 걸리기 쉬우니까. "

" … "

" 혹시라도 후드티 끈 못 묶을 거 같으면 나 부르고. "




길게 늘어져 있던 후드티 끈을 리본 모양으로 만든 나는 벙찐 듯한 얼굴의 박지성을 올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방금 멘트 존나 멋졌다. 지성이도 감동해서 얼굴 붉힌 것 봐.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며 박지성과 가깝게 붙어 있던 몸을 조금 떨어뜨렸다. 내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박지성은 잠시 입을 벙긋거리며 내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박지성의 그런 행동은 얼마 안 가 금세 멈춰지고 말았다.




" … 둘이 뭐해? "

" 아… 아니에요. "

" … "

" … 아무것도. "




걱정스러운 얼굴로 노래방을 나온 이마크가 가깝게 붙어 있는 나와 박지성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박지성은 이마크를 발견하자마자 내 쪽으로 뻗었던 손을 후다닥 거둬냈고, 이마크는 그런 박지성을 바라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마크의 날이 선 질문에 작게 웅얼거리며 대답하던 박지성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보겠다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이마크와 나 둘 뿐. 나는 집요한 이마크의 시선을 피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마크는 어색한 얼굴로 자기 시선을 피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 이해 안 되면 다시 들어가지 그러냐. 나는 그냥 집 갈 건데. 내가 입을 삐죽 내밀며 바닥에 있는 돌멩이만 툭툭 차고 있자,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팔목을 잡아챈 이마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 … 집 갈 거야? "

" 아… 응. 머리도 아프고… 낮에 재현 오빠 그렇게 보낸 것도 마음에 걸리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재현 오빠랑 저녁이라도 먹을까 해서. "

" 집 데려다줄게. "

" … 어? "

" 집 데려다준다고. "




내 말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꺼낸 이마크가 결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내 팔목을 잡아챈 손에 미세한 악력이 실려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그냥 혼자 간다고 해도 내 말 안 들어 주겠지.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마크는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집이 어디냐고 물어왔다. 어차피 버스를 타야 하니 버스 정류장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을 뿐인데. 이마크는 그런 내 말에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렇게 이마크와 어색하기 그지없는 상태로 대화를 나누며 길거리를 거닐고 있었을까. 아까부터 따끔거리던 뒤꿈치가 심하게 아려오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종일 걸어 다닌 것도 모자라, 구두를 신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발 뒤꿈치를 만지작거리니, 내 옆에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이마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 괜찮아? 더 걸을 수 있겠어? "

" 아… 좀 아픈데. "

" 어… 정류장까지 10분은 더 걸어야 하는데. "

" 그냥 이렇게 된 거 택시나 타고 갈까… "




나는 통장에 있을 돈을 생각하며 속으로 자기 합리화를 했다. 어차피 성인 때 개처럼 일하면서 모아둔 돈도 있고, 택시 몇 번 탄다고 해서 통장에 구멍 뚫리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편하게 갈까. 그렇게 제자리에 선 채로 택시를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을까. 대뜸 내 앞 쪽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이마크가 자기 등을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 업혀.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 "

" … 뭐? 야, 아무리 길거리에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

" 그래도. 아픈데 참고 걸어가는 것보단 나을 거 아니야. "

" … "

" 얼른. "




나는 내 앞에 들이밀어진 이마크의 넓은 등판을 바라보다, 이내 이마크의 등에 몸을 기대며 두 눈을 꾸욱 감았다. 이마크는 익숙한 손길로 나를 업어들었고, 나는 몸이 데일 듯한 온기를 느끼며 죄 없는 아랫입술만 짓씹었다. 이마크의 목에 두른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어떡해? …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이마크의 목덜미에 얹어 두었던 머리를 푹 숙이며 쿵쿵대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버스 정류장까지 향하는 동안 이마크는 그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고, 나 또한 이마크에게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손끝에 피가 몰리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돌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번 생에서조차 이마크를 사랑하게 될까 봐.


운명이 정해져 있는 이마크를, 사랑하게 될까 봐.

… 그게, 그렇게도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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