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송안함 완결까지의 스포일러 있음. 대관식 전... 2부 시작할 즈음의 시점입니다.

※ 퇴고 안하고 바로 올려요......... 뭔가... 말이... 아다리가 안맞을 수 있는데... 재미로만 봐주세요 ^^*...

※ 정진+프란이지만 CP적 요소는 없고... 장르는 "SF"입니다. 캐붕 및 기만적 표현 다수 존재......

정진이 프란 불러서 컴퓨터 고치는 이야기..........







어둠은 색이 아닌 인지의 영역이었다. 결론을 내린 프란 화이트는, 그럼에도 방향 감각을 잃은 발을 부지런히 놀렸다.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무언가를 걷어찰 수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큼직한 보폭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언젠가 그의 친우인 훌륭한 비행사, 첼레스테스는 프란에게 이렇게 물었다. 위아래를 구분할 길이 없어, 상승과 추락에 모두 리스크를 가지게 된 비행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느냐고.

“앞으로 나아가면 안 되는 건가?”

“틀렸어, 프란.”

왜냐면, 무한한 검정 속에선 하늘과 바다, 평지와 산 역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지. 첼레스테스는 농담처럼 답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기체는 빽빽한 수풀에 몸을 내던질 수도, 날카로운 절벽에 그대로 처박힐 수 있었다. 오직 빛의 공급 부족만으로 그런 일이 가능했다. 프란은 뒤늦게도, 노련한 비행사의 경험담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공감했다. 이토록 절박하게 명암을 구분할만한 광원이 필요한 적이 없었다. 궤도를 잃은 인간이 도달하게 될 곳은 과연 어디인가를 자문하면서.






세상이 흑백으로 멈추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최초일지도 몰랐다. 주변의 소음과 움직임이 모두 멈추었다는 감각은 뒤늦게 찾아 왔다. 세를 들어 사는 골방 아래층 펍의 떠들썩함이 집중력에 묻혀 사라질 때야 종종 있기야 했지만, 이다지도 썰렁한 적은 거의 없었다. 프란은 묘한 기이함을 느껴 방을 나섰다. 늘 만석이었던 펍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색을 잃고 돌처럼 굳어버린 공기와 자질구레한 식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체 없이 거리로 뛰쳐나가자, 현상은 확정되었다. 

이곳에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살풍경은 어떤 의미로 완벽하게 이상적이어서, 프란 화이트라는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실수인 것처럼 느껴졌다. 프란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안경다리를 재차 고쳐 잡았다. 룬데인은 각종 마수의 폭발적 출현으로 전례 없는 영웅담의 배경이 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현 상황 역시 마수나, 혹은 그에 준하는 판명 불가의 힘이 개입한 결과라고 받아들였다. 왜 자신만이 예외인지는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없었지만. 프란은 일단, 각종 정체불명의 사건사고의 중심이었으며 그 장본인 역시 판명 불가한 위인을 찾아가기로 했다. 오늘은 평일이니, 한창 수도방위대학교의 수업을 마친 아세르 교수가 어디에 있을지는 뻔했다. 값이 나가는 와인 한 병을 에테르 낭비로 차게 식힌 후, 연구실에서 저 좋아하는 고양이와 나누어 마시고 있을 광경이 절로 그려졌다.

그런데, 흔들림 없는 목적지로 걸어가는 프란은 한 번 더 인지부조화를 느껴야만 했다. 색채를 잃은 시야가 명도 역시 점차 잡아 삼키고 있었다. 점점 어두워졌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걸음을 거듭할수록, 앞이 뿌예지더니 어느새 프란은 홀로 암흑 속에 놓이게 되었다.


프란은 한참을 걸었다. 가장 먼저 이상증세를 보인 건 시간 감각이었다. 눈꺼풀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 속. 이곳에 얼마나 오래 갇혀 있었는지, 걸었는지, 숨을 쉬고는 있는 건지. 볼 수 없으므로 판별해낼 수 없었다. 어둠이 너무 짙어 오감이 기능을 잃고 있었다. 살갗에 스치는 천의 촉감도 희미해졌다. 육체는 밤에 잡아먹히고, 정신만이 분리되어 떨어져나온 게 아닐까 하는, 지극히 비과학적인 생각에 이르렀을 즈음, 발치에 뭔가 단단한 게 채였다. 반가운 통증이었다. 타격감은 구세주와 같은 빛을 불러왔다.

그리고, 비명도.


“악!”

“?!”


아주 환하게 밝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위적인 빛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였다. 갑작스러운 번쩍임에 밀려들어 오는 시각의 정보 값이 혼란스러웠다. 흐린 시야를 몇 번이고 재정비하고 나서야 프란은 눈앞의 기다란 인영을 파악할 수 있었다. 먹을 칠한 듯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 훤칠한 키에 단촐한 셔츠와 면바지를 입은 사내는 정강이를 걷어 차인 듯 끙끙 앓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의 다리를 시원하게 걷어찬 가해자는 프란 자신임이 자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미안합니다.”

“아뇨, 아뇨…. 드디어 도착했군요. 인사 대신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드디어?” 

남자의 말 한 마디에서 다양한 단서가 포착되었고, 결론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반성의 시간은 아주 짧았고, 뇌는 드디어 활약할 기회를 얻었다는 양 팽팽한 긴장으로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초면인 검은 머리칼의 남자는 이미 자신을 알고 있다. 어쩌면 모든 기현상의 원인 역시. 남자는 어정쩡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시선이 닿는 것은, 그가 기대고 있던 거대한 기계였다.

프란은 기계에 눈길을 한번 주고, 지체 없이 입을 뗐다.

“당신은? 이곳은? 그것은?”

“자, 잠깐. 육하원칙에 의거한 모든 걸 물어볼 셈입니까?”

“필요하다면.”

“좋습니다. 내 이름은 □□□. 하지만 들리지 않겠군요.”

분명 입술이 멀어지고 성대가 울리는 것을 보았으나, 귀로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원은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대답을 계속하라는 듯 프란은 말없이 사내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곳은, 글쎄요. ‘휴지통’? 이렇게 말해도 당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리고 이 기계는…” 


컴퓨터, 라는 건데요.

남자의 어색한 대답에 기계의 이름을 학습한 프란은 그 앞에 허리를 굽혀 쪼그려 앉았다. 단단한 유리의 사방을 금속 프레임이 감싸고 있는 사각형의 고철 판이 바로 빛의 근원이었다. 유리창엔 밝은 녹색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문장의 맨 끝에 얇은 직사각형이 깜빡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움직임은 포착할 수 없었다. 고철 판의 뒤로는 두꺼운 금속 박스가 몇 개 더 보였고, (아마 에너지를 공급하는 용도로 추정되는) 선 여럿이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관찰을 마친 프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란 화이트입니다. 당신이 절 이곳으로 불렀습니까?”

“그걸 어떻게……, 아닙니다. 맞아요. 당신을 특정해 부른 건 아니지만.”

“무슨 뜻입니까?”

“이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는, 그러니까, 당신이 사는 세계에 ‘컴퓨터’는 없겠지만. 가장 ‘컴퓨터를 잘 고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는 했거든요.”

검은 머리 남자는 그 ‘컴퓨터’라는 기계의 윗면을 세게 한번 탕! 소리 나게 내리치며 말했다.

“이거, 고장이 나서.”

탕탕… 빈 소리가 넓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처음 보는 기계를 고쳐야 할 위기에 처한 프란은 남자를 아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겠지만, 그 전에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풀어주어야 할 의무가 수상한 남자에게는 있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소리가 사라져서 집을 나와보니 모든 생명체가 사라져있고, 건물과 물건은 색을 잃은 채 멈추어있더군요. 내가 혼자 움직일 수 있던 건 방금 들은 대로, 당신의 영향력인 것 같고.”

“역시 그렇게 됐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남자는 말을 멈추고 얼굴을 굳혔다. 어쩐지 이야기해주기에 앞서 들떴다기보다, 참으로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프란은 순식간에 낯을 바꾼 그이의 슬픔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보여 불안했다. 프란의 경험에 따르면,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인간이 처한 상황들은 하나 같이 비슷해서….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남자는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만약 당신이, 그리고 당신이 살던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쓰이는 연극이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지는 몰라도, 산 사람 앞에서 하는 말 치고는 비약이고 과장이군요.”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만, ‘믿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도, 탈출구도 없는 때가 오기 마련입니다.”

프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참을 걸었으니 머리보다 몸이 먼저 직감했다. 이 광활하고  끝이 어디일지 모르는 아공간에 존재하는 물체는 자신과, 남자와, 이 기계뿐일 것이다. 탈출구가 없는 때. 그것은 은유가 아닌 현재의 실제적인 묘사였다. 아직도 빛의 반대 방향은 깊도록 검었다. 프란은 다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에게는 어쭙잖은 위로보다는 있는 그대로 말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을 것 같군요. 맞습니다. 진실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어서, 타인의 이해나 공감을 구태여 갈구하는 녀석이 아니니까. 설명을 계속해 볼까요. 당신이 사는 세계와 당신은 누군가가 써 내려간 이야기입니다. 소설 속 세상이라는 뜻이에요. 이 ‘컴퓨터’라는 기계는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 중 가장 다양하고 복합적인 일을 수행해낼 힘을 부여받았습니다. 단순노동을 대체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 사고의 일부를 이양 받은 기계의 최종목표는…”

“인간처럼 생각하는 것이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이 기계가 갓 생겨날 적에는 이걸 움직이게 하기 위한 명령어를 한 줄 한 줄 입력해주어야 했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주기로 한 겁니다. 우리는 그걸 인공지능이라 불렀고,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욕심, 편리를 향한 아집 같은 것이 한 데 뒤섞여서 바로 이런 게 생겨버렸습니다.”

남자는 아직도 깜빡이는 화면 속 녹색 직사각형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의 왼손 검지에는 무색의 얇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프란은 그의 외양, 어투, 호흡의 속도를 재어 가며 사소한 단서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자동기술 시스템이요. 하나의 세계와, 그 안을 채울 수억의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기계는 획득했습니다. 이야기는 인물과 세계 사이의 갈등을 빚어가며 다음 장으로, 다음 장으로 나아갔습니다.”

“갈등이라, 듣기 좋은 표현이지만 실상 나의 세계에서 겪은 마수의 출몰과 전쟁이 그에 포함된다면 퍽 유쾌하진 않습니다.”

프란은 순순히 제 불쾌감을 드러냈다. 감정 표현은 그에게 흔치 않은 일이었으나, 오히려 낯선 상황에서 불거지는 종류의 것이기도 했다.

“이 시스템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더 똑똑해졌습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인물들의 발자취를 쫓아갔습니다. 그리하여 현재에선 아직 진행되지 않은 미래의 일까지 쓰기 시작했습니다.”

“미래의 일?”

“예, 미리 현재가 아닌 다음의 일을 쭉 적어보는 것으로, 앞으로의 전개를 파악해보려는 듯이요. 당신이 있는 현재 진행형의 타임라인 이후, 스토리는 파국을 맞기도 하지만 결국 화해를 하고, 갈등이 해소되고, 이상적인 결말을 마주합니다.”

“이상적인 결말이 있다고 미리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야 할 타이밍인가요.”

“스포일러하려던 건 아닌데. 음, 하지만 바로 거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기계가 예측하기에 이상적인 결말을 얻은 세계는 한 가지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짐작이 가십니까?”

프란은 이 허황한 이야기를 꽤 진지하게 듣고 있던 모양인지, 둥글게 말아 쥔 주먹 안쪽에서 땀이 고인 것을 느꼈다. 손을 펼쳐 땀을 대강 셔츠에 문질러 닦고, 짧은 고민의 답을 내놓았다.

“현실의 세계는 이야기일 수 없겠다는 것이겠지요. 극이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정답입니다.” 원하는 답을 들은 모양인지, 남자의 얼굴엔 조금의 경탄이 깃들었다. “왜 그녀가 당신을 이리로 보냈는지 알 수 있겠군요.”

남자가 말하는 ‘그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 사악한 일의 주모자임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프란은 코웃음을 쳤다.

“반영구적 평화를 가지게 된 세계는 그 이전 8번이나 있던 이야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적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결말 이후엔 더 이상 핵전쟁이 없고, 에테르가 기계 전반을 대체하게 되어 에너지 부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남자는 설명했다. 전기나 연료, 광물과 석유가 필요 없는 세계를 상상해보라 하였으나, 프란에겐 잘 와닿지 않았다. 기술의 어떤 면은 영원히 발전할 수 없게 될 거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미친 과학도들이 날뛰지 않는 이상, 기술력 발전의 가장 큰 요인은 어찌 되었거나 ‘사회의 필요’에 의한 것인데, 필요 없는 기술은 다른 차원의 미래에서 엿보고 오지 않는 한 구현해낼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 프란은 불에 타 없어진 과학 학교의 설계도들을 떠올렸다.

“크고 작은 갈등은 계속될 테지만, ‘이야깃감’으로 쓸 수 있는 거대한 절망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결말이 이야기를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그게 이 자동기술시스템이 원하던 것이었으니.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인류는 어느 새 개개인이 아닌 하나의 군집으로 자리 잡게 되고, 그 시점에서 진행이 멈춥니다. 바로 이 화면처럼요.”

갈등이 없는 이야기는 멈추어야 한다. 녹색 점이 깜빡였다.

“미래를 앞서 보고 온 시스템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이야기를 ‘편집’하던 저 역시 이 세계의 끝맺음이 그런 방식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요. 때문에 이야기 속에 간섭할 권리를 잠시간 부여 받아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겁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기는 ‘휴지통’이에요. 원고가 맘에 안 들면 버리는 공간 말입니다. 결론을 다시 상기해보자면, 당신이 살던 세계는 존속되기 어렵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는 뜻이었다.

프란은 고개를 떨구었다. 이성 중시의 시대에서 전쟁을 겪은 많은 과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절망 속에서 빛을 찾기 마련이었다. 근시대 폭발적으로 발전한 비행 산업에 뛰어든 첼레스테스만 보아도 그러했다.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그것은 기계와 산업에 국한된 상식이 아니라, 서사와 요소에 해당하는 격언이기도 했다. 프란은 일순간 이성과 합리에 패배를 선고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다. 그는 2레벨의 마법사로 살면서도 신은 없다 믿었으며 그것을 증명하려고 했지만 사실 그 신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각형에 금속에 갇힌 기계라고 하니 남다른 감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절대적인 작가와, 신과, 기계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인류란, 지금껏 피와 눈물로 얼룩진 자신의 역사란, 정말로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이야기에 불과하단 말인가? 존재론적 위기는 사람의 정신을 위협했다. 프란은 주변의 인물들을 떠올려냈다. 꽃향기가 나는 부모, 기계 팔의 스승, 지긋지긋한 왕세자, 먼지를 뒤집어쓴 전장의 기자들, 그리고, 흑맥주를 나누어 마시던 어느 밤의 친우들…. 텍스트와 전기 자극으로 이루어진 가상 존재는 호흡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게 될까 두려웠던 것도 같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인간은 희망을 바라게 된다. 이 경우, 프란에게 희망이란 서사의 부정합성이었다. 너무나 행복하고 평화로워 종말을 맞이해야 했다는 이 결말엔 어쩐지 흠결이 많았다.

“그렇게 끝낼 수 있었으나, 당신은 절 여기로 불렀죠. 해결 방법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프란은 조금은 막힌 목소리를 다듬어 소리내었다. “내가 만약 세계를 쓰는 신이라면, 신이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전제로 말해보자면, 이야기의 존재에 불과한 나를 이곳에 불러내지 않았을 것 같군요. 초월적인 지능을 가진 기계 자아가 존재한다면 그 인물에게 진실을 알려줄 이유가 없거니와, 문제의 해결을 물어보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그 또한 맞는 말입니다. 내 생각엔, 그게 바로 이 시스템의 오류인 것 같아요.”

“시스템의 오류.”

“아직까진, 그러니까 미래를 예상해보기는 했지만, 지금까지의 시간대에서 시스템은 글 속의 인물들이 저자의 영향력을 벗어나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유와 권리를 박탈했다는 것으로 들립니다만.”

“틀린 말이 아니므로 정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걸 삶이라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극의 내용이라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기는 해야겠죠.” 남자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썩 내키지 않는다는 어조였다. “8번째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만든 기계가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고, 똑같은 제2의 인류를 재창조해낼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제 말의 뜻은 이런 겁니다. 인공 자아가 인류를 모방하여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면, 결국 인간이 했던 실수를 똑같이 번복하게 되는 것이지요. 자유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 절대적인 신의 통치 아래 무력한 신민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

그러나 살아 움직이게 된 것은 무엇이든 결점을 가지고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프란에겐 생명을 얻은 기계 역시 그 절대적 진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쓰지 않으면 됩니다. 대신, 그 기계의 시스템을 고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당신 말이 옳아요. 지금이 분기점입니다. 인물들에게 신의 영향력을 벗어날 잠깐의 틈을 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고치면 되는 일입니다. 제가 편집자의 권한으로 미리 써둔 초고를 휴지통에 버렸으니, 그렇게 집필이 끊긴 세계엔 암흑이 가득하겠군요. 당신이 본 것처럼요.” 

그제서야 프란은, 자신이 거리로 나와 본 것이 단순히 ‘멈추어진’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세계의 시간은 착실히 흐르고 있었을 터였다. 단, 버려진 이야기는 그 누구도 이어 쓰지 못하므로 색채와 생명을 박탈당한 것이었다.

프란이 조금 멍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남자가 어설프게 미소 지으며 힘주어 말했다.

“리부트(reboot)하기 위한 명령어가 있습니다. 단, 편집자인 저는 아직 그 세계에 마법으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나는 2레벨 마법사고, 진언이 아무리 괜찮은 것이라 해도 내 마법은 변변찮을 텐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 에테르를 빌려줄 수 있습니다.”

마침내 안경을 고쳐 쓴 회색 머리의 혁명가는 아주 잠깐, 편집자의 조력자가 되기로 한다. 허점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프란 화이트의 특기였으므로. 프란은 검은 머리의 남자가 손바닥에 적어준 문장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읊었다. 맞잡은 손에서 흘러나오는 에테르의 유량은 넘쳐흘러 바닥을 적셨다. 그즈음 에테르가 자신의 형체를 이루기라도 한 듯 남자의 모습이 덩어리로 뭉쳐 흩어져 갔다. 그의 이름은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그 애틋한 얼굴이 제가 아는 누군가의 것과 자꾸만 겹쳐 보이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프란의 목소리가 떨렸다.


[빛이 있으라.]


그리하여, 세상에 10번째 빛이 스며들었다.








사족 시작!!!! 

정수읠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 / 아이작 아시모프 <최후의 질문> / 필립 K.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 할란 엘리슨 <나는 입이 없다 그러나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 아서 C. 클라크 <유년기의 끝>

을 전부 짬뽕!!!!한 글입니다. 출처를 밝혔으므로 아시모프 파쿠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며.... 해당 소설 알고 읽으시면 재밌는데,,,,,,구태여 안 읽으셔도 상관은 없으나 저 소설들의 내용을 다 아시면 왜 상기 본문에서 저런 소리를 하고 계시는지 이해가 가실 거예요 ^__^*.... 꺄~

대강 내용을 해석하자면... 9세계의 신은 인공지능 칼리오페라는 설정. 너무 발전해버린 인공지능 칼리오페가 아서에게 운신의 자유를 주지못했고, 그렇게 미래예견을 한 결과 미래가 망할 것 같아서 편집자 김정진을 부름. 정진씨는 컴퓨터 잘 고칠만한 사람 좀 보내줘봐요! 했고 프란이 왔습니다. 9.5번째 세계는 휴지통에 초고를 버리고, 컴퓨터를 리부팅해서 9교(찐.최종.파이널.).hwp로 다시 시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뭐지...

탐라에서 문송안함 SF를 보고싶다고 어느 분이 말씀해주셨는데!!!! 그때부터 너무 이 스토리가 써보고싶었어요. 그러다가 바다선인장님께서 정진프란 보고싶다는 말을 해주셔서 갑자기 또 섞어찌개 끓이기 시작.... 문송SF를 처음 말씀해주신 분께... 이 자리를 빌어 좋은 소재를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는 일하고 있고 주로 💜가 떠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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