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을 깬다. 팔을 감싸는 추위에 몸이 떨려 이불 안으로 숨어들었지만, 곧 알람이 울릴 것 같은 기분에 이불에서 벗어난다. 눈을 비비고 무거운 눈꺼풀을 올린다. 휴대폰의 잠금 화면을 풀고 미리 알람을 해제한다. 알람보다 일찍 일어나 몸이 무겁다. 하지만 알람 소리에 기분 나쁘게 일어나는 것보다는 이게 나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씻고 교복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오니 엄마랑 아빠가 현관을 나서고 있다. 나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며 여러 상황을 생각한다. 기분 좋은 웃음으로 말을 건다던가 엄마에게 안겨, 아빠에게 장난을 치며 어리광을 부리는 그런 상상. 정작 현실에선 그럴 용기가 없어 가벼운 인사가 전부다. 

부모님은 평소에 늘 하던 “갔다 올게, 아침밥 꼭 먹고 가.”, “차 조심 해.”, “공부 열심히 하고.” 같은 말들을 툭툭 던지고 현관을 나선다. 나는 두 사람이 떠나간 현관을 바라보다 TV를 켜고 식탁으로 걸어간다. 오늘 같은 날은 한 번쯤 그런 소리를 듣고 싶다.

 

 

“안아, 학교까지 태워다 줄까?”

 

“…”

 

“…”

 

“아니, 괜찮아. 버스 타고 가면 돼.”

 

“그래도...”

 

“엄마랑 아빠 운전이나 조심해.”

 

“… 에휴.”

 

 

원맨쇼는 생각보다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밥맛이 뚝 떨어지고 눈에 힘이 풀린다.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지 않고 밥그릇만 툭툭 쳐대다 TV 쪽으로 몸을 돌린다. 일기예보에서는 오늘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가을 날씨로 접어든다고 말한다. 처음 내리는 가을비 치고는 꽤 강한 빗줄기라는 말과 함께 온종일 내릴 것이라고 기상캐스터는 예상한다. 안 그래도 꿀꿀한 기분인데 비까지 내린다니 몸이 더 쳐진다. 기상캐스터에게 바통을 넘겨받은 아나운서는 가을비 이후 펼쳐질 가을의 풍경에 대해 기대된다는 듯 한마디 한다. 나는 TV를 끄고 대충 밥을 먹는다. 휴대폰으로 영상을 틀고 소리를 최대 크기로 높여놨지만 어느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지 귓가에 부딪치는 빗소리가 거슬린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본다. 회색빛 하늘이 바다와 만나는 지평선은 음울하기 그지없다. 몸속 저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본다. 하지만 그 덕분에 불편한 느낌이 온 몸을 지배한다. 그 불편함 때문에 또 한숨이 차오르고 나는 또 한숨을 꾹꾹 누른다. 그런 반복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평소에는 좋아하던 노래도, 아무렇지 않아 하던 버스 좌석도, 학교까지 가는 길도 모두 다 지겹고, 지루하고, 싫어진다. 당장이라도 버스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는 상상을 나래를 펼치다 소리 없는 헛웃음을 짓는다. 정신을 차리려고 해봐도 자꾸만 몸이 쳐진다. 고개가 숙여지고, 팔과 다리에 힘이 빠진다. 잠들고 싶다.

 


“아...”

 


멍해진 머리와 감기는 눈에 순응하고 있을 때 문득 한 생각이 떠오른다. 무시하고, 모른척한 생각. 떠오르면 애써 다른 쪽으로 집중해 넘기려던 생각. 그것은 푸른 눈과 겹쳐지는 유해이다.

 

 

“…”

 

“…”

 

“…”

 

 

나는 또 다시 생각을 돌려보려 하지만 지금 이 버스 안에는 ‘푸른 눈과 유해는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단이 없다. 생각이라도 멈추자는 방안이 떠오르지만 자꾸만 한 낮의 푸른 눈, 한 밤의 유해 이런 식으로 둘의 모습이 겹치고 섞인다. 뜨거운 숨을 살짝 뱉는다.

분명히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아니, 푸른 눈은 사람이 아니고 유해는 사람이다. 둘 다 전혀 다른 존재다. 하지만 유해는 푸른 눈일 때가 있다. 푸른 눈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유해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둘 다...

버스가 멈추고 몸이 앞으로 살짝 쏠린다. 그 덕에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이 버스에 타고 다시 출발한다. 나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어둡고 칙칙한 비구름과 바다를 바라본다. 뭔가 이상하다. 내 눈에 뭐가 낀 걸까? 아니면 눈에 이상이 생긴 걸까?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다의 칙칙한 색들 사이로 밝은 빛의 색이 반짝인다.

긴장한 탓에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시선을 돌린다. 온 몸에 열이 오른다. 그 때문에 등에 당장이라도 땀이 흐를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척 듣는 노래의 음량을 올리고 버스 기사 아저씨가 앉아 있는 곳을 집중해서 바라본다. 조금씩 멀미가 올라오지만 지금 나에겐 이렇게 멀미가 나는 게 제일 편할 것이다.

 




좋지 않은 상태로 학교 주변 버스 정류장에 내린 나는 다른 교복들과 마찬가지로 우산을 펴고 학교로 향한다. 학교로 향하는 동안 회색빛 물웅덩이를 몇 번이나 마주친 나는 그때마다 푸른빛, 초록빛이 나는 물과 바다 위로 뛰어올라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유해 아니, 푸른 눈을 떠올린다. 차라리 푸른 눈과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조금 속력을 내 학교로 걸어간다.

교실 안은 습한 공기가 가득하다. 불쾌한 냄새와 기분 나쁘게 그림자 진 구석들. 흔히 학교괴담이라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의 배경이 될 만한 충분한 자질을 갖춘 듯 보인다. 덕분에 기분 나쁨이 한계치를 찍으려 한다. 아주 잠시 창밖을 째려보다 아이들의 수다 소리에 내 한숨 소리를 묻어간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다.

종이 울리고 아이들의 수다 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교실 뒷문이 열리고 모든 눈이 그곳을 향한다. 유해가 조용히 눈치를 보며 교실로 들어서는데 담임선생님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시름을 놓은 듯 천천히 자신의 자리인 내 옆으로 걸어온다. 그리고 그때 교실 앞문이 열리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온다. 유해는 재빠르게 자신의 자리에 앉지만 담임선생님은 유해가 이제야 교실에 들어온 걸 아는 듯 계속 유해를 바라보며 조례를 시작한다. 유해는 애써 담임선생님의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필사적으로 담임선생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유해가 교실로 들어왔을 때, 내 눈에 가장 띈 것은 유해가 조금 젖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혹시나 유해의 머리칼에, 혹은 다른 곳에 묻은 물기가 며칠 전에 봤던, 푸른 눈에게서 봤던 그런 색을 띠고 있을지 몰라 불안하다. 

하지만 숙제를 보여 달라며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유해를 나는 무시할 수 없다. 유해와 얼굴이 마주한다. 왠지 모르게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유해는 작게 무슨 말을 하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목소리의 크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은 유해가 소리를 치더라도 내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귀가 내 심장박동 소리로 꽉 찼기 때문이다. 나는 유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보지도 않고 가방에서 숙제가 있는 문제집을 유해에게 건넨다.

담임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유해가 먼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앞을 바라본다. 나는 한 박자 늦게 앞을 바라본다. 유해는 내가 기억하는 유해와 같다. 짙은 검은색 머리칼에 옅은 갈색빛 눈동자, 살짝 그을린 피부. 유해는 혼자서만 햇빛 아래에 있는 것 같다. 나는 교실 창으로 시선을 옮긴다. 유해에 비해 나는 이런 칙칙한 날씨에 잘 동화돼 있다. 힘없는, 무기력한, 멍한, 초점 없는, 창백한 그런 비 오는 날에 어울릴만한 수식어가 내 얼굴에서 보인다. 심장의 소리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온다. 속도도 크기도. 기분이 나빠진다.

 

 

‘나 유해한테 열등감 같은 게 있나?’

 

“…”

 

‘진짜 싫다. 아니 뭐, 유해가 남자라면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특징을 가진 건 사실이긴 하지만 유해랑 나는 친구잖아...’

 

‘그런 걸 느끼는 게 한심하다 진짜. 나중에는 아주 질투도 하겠네.’

 

 

다른 감정일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심장병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이것 밖에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을 제일 먼저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유해에게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을 반증하는 꼴이 아닌가 싶어 몸이 축 처진다. 비록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긴 했었어도 내게 그렇게 잘해준 유해에게 대체 무슨 마음인지. 한숨을 내쉰다.

 

 

“무슨 일 있어?”

 

“어? 아니.”

 

“근데 왜 한숨을?”

 

“그냥... 비 와서.”

 

“비? 비 싫어해?”

 

“아니, 비가 싫은 건 아니고... 비 때문에 만들어지는 그런 분위기가 싫어서.”

 

“정말?”

 

“응.”

 

“난 비 좋은데.”

 

“왜?”

 

“그... 아니, 보기도 좋고 분위기가 좋잖아.”

 

“이런 분위기가 좋아?”

 

“어, 안 좋아? 씻기는 기분, 그림 속에 들어간 기분이잖아. 그리고 세상이 좀 더 짙어지기도 하고, 가사나 시가 온 곳곳에 펼쳐진 느낌이기도 하고...”

 

“되게...”

 

“?”

 

“되게 좋아하나 보네?”

 

“응, 비 내리는 거 많이 좋아해.”

 

“의외다.”

 

“왜?”

 

“그냥... 유해 넌 되게 밝고, 활기차고 그래서...”

 

“그래서?”

 

“맑은 날을 더 좋아할 줄 알았지.”

 

“사람은 굉장히 다채로운데 여러 면이 있는 거지.”

 

“…”

 

“?”

 

“… 너 오늘 좀 새롭다.”

 

“그래? 너도.”

 

“나, 나? 내가 왜?”

 

“그... 아니. 느낌이 그래서.”

 

“…”

 

“…”

 

“근데 아까부터 왜 자꾸 말을 하다 끊고 다시 해?”

 

“그냥이라는 말 안 쓰려고.”

 

“왜? 전에 내가 했던 말 때문에?”

 

“응.”

 

“…”

 

 

어느새 조례는 끝나 있고 아이들은 다시 떠들기 시작한 지 오래다. 나는 말없이 유해를 바라보다 내 속에 담긴 무거운 숨을 내뱉고 미소를 지어 보인다. 유해는 갑자기 미소를 짓는 나 때문에 물음표를 잔뜩 띄우는 것 같지만 나는 1교시 준비를 위해서 교과서를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나 사물함으로 향한다.

방금 그 미소에 대해서 유해가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을 했지만, 낯부끄럽고 민망해지는 그런 대답 보다는 유해가 자주 쓰는 그 ‘그냥.’이라는 표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거기에 차마 하지 못하는 그런 감정이나 말을 담아두면 나머지는 유해가 알아서 해석해주지 않을까.





많은 우산들과 함께 비가 내리는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다 보니 정말 유해가 말한 대로 어느 작품 속으로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든다. 내가 주인공은 아닐지언정 ‘배경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도 나쁘진 않네.’라는 생각을 하며 질척거리는 운동장을 걷는다. 몇씩 짝지어 있는 아이들이나 나처럼 혼자 걷은 아이들을 바라보다 휴대폰을 바라본다. 재생되던 곡을 멈추고 갑자기 생각나는 곡을 튼다. 살짝 기분이 좋아지려던 찰나 앞서가던 누군가와 부딪혀 나는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나보다 작은 키의 남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의 이름표에는 ‘우들녘’이라고 적혀있다. 나는 그 이름을 보고 당황해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내 앞의 남자에게 사과를 한다.

 

 

“제대로 보고 다녀.”

 

“미안...”

 

“이런 비 오는 날에 여기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냐.”

 

“야!!! 김 안!!!”

 

 

누군가 달려와 내 등을 민다. 나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기운다. 손에 든 핸드폰에 진흙이 묻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옷, 가방 같은 것들이 더럽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그 짧은 시간에 여러 번 충돌을 하다 중심을 잡기 위해 왼발을 앞으로 내민다. 하지만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내민 왼발이 미끄러지고 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아픈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런 날에 넘어지면 너무 찝찝하고, 빨래도 귀찮아진다. 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넘어진 바닥은 축축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온기가 느껴진다.

나는 살며시 눈을 뜬다. 우산을 쓴 유해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손으로 내 등 뒤를 만져본다. 진흙이 묻은 사람의 피부가 느껴진다. 나는 재빨리 유해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넘어진 자리를 바라본다. 그곳에는 아까 내가 부딪혔던 우들녘이 넘어져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들녘이는 내 손을 잡지 않고 일어나 자신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낸다. 나는 얼른 내 우산을 땅에서 집어 그의 머리 위에 씌운다.

 

 

“미안... 나 때문에 네가 말렸나 봐...”

 

“아니, 괜찮아. 너 때문이 아니야.”

 

“어?”

 

“너 때문이 아니라고.”

 

“근데... 내가 네 위에 있었잖...”

 

“내가... 너 넘어질까 봐 일부러 끼어든 거야.”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안이 네가 넘어질 때, 쟤가 너 받쳐주려 한 것 같은데?”

 

“아... 고마워.”

 

“…”

 

“…”

 

“왜?”

 

“아니, 얘가 고맙다고 하잖아.”

 

“그래서...?”

 

“… 쟤 좀 이상한 애 같은데?”

 

“자기 몸 날려서 도와준 사람한테 무슨 소리야.”

 

 

들녘이가 말없이 자신의 옷을 털고 우산을 집는 동안 나는 그를 바라만 봤다. 일관성 있는 무표정한 얼굴. 찝찝하거나 불쾌해서 인상을 지어도 될 텐데 그는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커다란 눈동자에 앳된 얼굴. 명찰 색을 보니 우리와 같은 학년인데, 믿기지 않는다. 그나마 남들보다 짙은 다크써클 덕분에 조금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다.

내가 들녘이의 모습을 관찰하는 동안 갑자기 유해가 내게 귓속말을 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한다. 유해의 귓속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나는 ‘유해에게 무슨 일이 있나?’라고 추측만 한 채 다시 들녘이를 바라본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살짝 뒤를 돌아보자 담임선생님이 우산을 쓴 채 거친 숨을 내쉬며 다가오고 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누구를 향해 고개를 돌려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 들녘이의 손목을 꽉 잡고 담임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안아, 유해는?”

 

“뛰어서 가던데요?”

 

“뭐?”

 

“아까까지 있다 갑자기 뛰어서 가던데요...”

 

“아 진짜... 이거 면담해야 되는데 왜 자꾸 피하는 거야? 그래야 부모님 면담 시간도 잡지... 안이 너는 유해가 왜 저러는지 알아?”

 

“네...? 아뇨, 저는 잘...”

 

“이게 자꾸 미루다 미루다 아주 고3 올라가겠네.”

 

“…”

 

“내일은 내가 절대 안 보내준다.”

 

“일 열심히 하세요...”

 

“그래, 너도 집 조심히 가라.”

 

“…”

 

“…”

 

“저기 놔줄래.”

 

“아, 미안... 네가 갑자기 가 버릴까 봐...”

 

“가면 안돼?”

 

“그건 아닌데... 보답이라도 하고 싶어서...”

 

“필요 없어. 너 때문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니까.”

 

“그래도!”

 

“… 괜찮아.”

 

“그래도... 옷 그렇게 된 건 그렇잖아. 우리 집 가까운데 거기서 빨고, 내 옷 빌려줄 테니까... 씻고 가.”

 

“…”

 

“…”

 

“… 너 포기 안 할 거지?”

 

“어...”

 

“…”

 

“…”

 

“… 그래, 가자.”

 

“응.”

 

 

들녘이와 나란히 서서 걷는다. 그의 교복은 반쯤 젖어 있고, 다 털어내지 못한 흙이 곳곳에 조금씩 묻어 있다. 들녘이의 어깨에 묻은 흙을 털어주기 위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들녘이가 나를 바라본다. 짙은 고동색의 커다란 눈 안에 내가 다 담겨진 느낌이다.

 

 

“근데.”

 

“?”

 

“너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나?”

 

“어, 원래는 엄청 조용하고 안 나서고 귀찮은 일 피하고... 뭐 그렇지 않아?”

 

“어... 그렇긴 한데”

 

“… 그냥 들은 거랑은 달라서.”

 

“누가 내 이야기를 해?”

 

“고2 여름방학 직전에 전학 왔었던 애니까... 애들 입에 안 오르는 게 이상하지 않아?”

 

“그건 그렇네...”

 

“그래, 근데 집이 어디 쪽인데?”

 

“아... 그게 내가 아직 여기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동네 이름은 잘 모르겠네...”

 

“집 가는 길은 아는 거지?”

 

“그건 알지...”

 

 

들녘이의 말이 내 안에서 없어지지 않는다. 나는 살짝 들녘이의 얼굴을 바라본다. 들녘이와 눈이 마주쳐 어색한 미소를 보여준다. 들녘이의 얼굴을 보고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더 죄책감을 느끼게 든다. 

학교에서 우리 집은 꽤 먼 거리다. 죄책감이 들 정도로 꽤 멀다. 나는 들녘이에게 거짓말을 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게 도리라는 생각 때문에?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이유 때문에? 뭐가됐든 들녘이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지금 이건 내 성격과 거리가 멀다. 아무리 도리에 맞아도, 무슨 이유가 있어도 괜찮다는 사람을 굳이 집까지 데려가는 건 원래 내 성격상 맞지 않는다. 거기다 거짓말을 해서까지 방금 만난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절대 내가 아니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나는 왜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왜 이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들녘이를 집으로 데려가는 걸까.

나는 들녘이의 눈치만 본다. 들녘이는 저 멀리에 있는 버스 정류장 쪽만을 보고 걷는다.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진다. 들녘이가 도착 할 때까지 우리 집까지의 거리가 멀다는 것을 눈치채지 않기만을 바란다.



?


다들 크리스마스는 즐겁게 보내셨나요? 저는 즐겁게 보냈습니다.

즐겁게 보내지 않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세요! 내년도 있고 새해에는 좋은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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