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대만이 선물해준 단백질 셰이크는 요긴하게 먹혔다. 전용 보틀은 가게에 가져다 두었고 출근 할 때 일회용 팩만 들고 나오면 됐다. 전에 한번 출근길에 우유팩 작은 것을 들고 사와서도 섞어 먹어봤는데. 결과적으로 맹물에 타먹는 게 가장 맛있다는 결론이 났다. 아무튼 아침이나 점심을 거르기 십상인 저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그런가 늘 거북하던 속도 좀 편해진 기분이다.

보틀 용으로 나온 막대기형 수세미로 셰이커 바닥까지 깨끗하게 닦아내고 비눗기를 없애 건조대에 올려뒀다.

혹시 몰라 형 것도 한 개 챙겨 들고 나왔는데 괜찮다고 고개를 젓길래 방금 저만 하나 만들어 마셨다.


"옷은 못보던 거다?"

주방에서 나오는 저에게 형이 물었다. 가게 들어섰을 때부터 조금 부담스럽게 시선이 따라다녔기에 역시나 물어볼 줄 알았다. 그래도 이 옷에게 저의 옷장 자리 한켠을 내주기로 결심 했을 때부터 들었던 예상 질문 중의 하나였기에 태연하게 답하려고 했다.

"아~ 샀어. 전에."

"네가?"

말꼬리가 높이 올라간, 의아함이 풍덩 튀어오른 질문이 돌아왔다. 어라. 압박 면접의 시작처럼 태섭은 너무나 손쉽게 평정심을 잃기 시작했다.

"어. 왜."

제가 무안한듯 쭈뼛거리자 준섭은 풀썩 웃었다.

"아니. 어울린다. 옷 좀 사라고 할 때는 말도 안 듣더니."

"아. 뭐. 계절도 바뀌고."

계속 챗봇처럼 뚜벅 뚜벅 대답하는 저를 말가니 보던 준섭은 잠시 또 웃고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준섭이 퇴근하고 나서 그의 미소가 자꾸만 저를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계속 뒷머리를 잡아채는 켕김이 남아 결국 폰을 열어 검색창을 켰다.

B..AL.. 라벨과 팔뚝에 작게 붙어 있는 영문을 검색해보고 포스기 뒤에서 반사적으로 얼굴 짚었다.

비쌀 것 같긴 했는데. 태섭이 생각했던 금액보다 정확히 '0'이 하나 더 붙어있는 가격에 정말로 무안해졌다.

예전에 길 가다 보면 이거랑 같은 로고 적힌 신발이나 가방 든 남자들을 종종 봐서 유행인가보네… 했던 기억이 있었다. 발목을 조이는 스포티한 디자인의 삭스 슈즈를 가장 자주 보았고. 뭔가 각잡은 명품이라기 보단 캐주얼한 느낌이라 담담한 척 '샀다'고 했던 거였다. 

아무렴 아울렛이나 온라인 쇼핑몰 할인 기간에나 뒤적이던 저였는데. 느닷없이 이백짜리 니트를 입고 출근을 했으니. 준섭은 저보다 이런데 빠삭한 편이라 놀라워 할 만도 했다. 그나마 친구가 줬다고 하려다 제가 샀다고 둘러댄거였는데 이건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아.. 뱁새다리 찢어지겠다."

쯔쯔 혀를 찼다. 돌려주면 대만도 받기야 하겠지만 서운해 할 것 같았고. 저도 하루 지나 생각해보니.. 괜한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싫었다. 핑계 삼아 저가 밥을 사든 선물을 하든 뭐라도 하려고 계획 중이었다. 아무리 입던 거라지만 가격까지 확인하고 나니 진짜 맨입으로 받을 수는 없겠다. 태섭은 이런 쪽으로 센스가 영 없어서 머리만 헝클어뜨렸다.


부자 애인. 연예인 남친. 의식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던 단어들이 자꾸만 태섭의 자각을 일깨웠다. 모든 연예인이 돈이 썩어나게 많은 것도 아니었고, 저 역시 꼴에 사업을 하나 굴리고 있으니 엄청나게 기구한 형편도 아니었다. 그저 몇번 저희 집을 들이닥쳤던 자연재해 같은 사건들 때문에 방어적인 면이 굳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자꾸만, 어쩔 수 없이. 비교가 된다.

왜인지 목이 탔다.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흘러갔다. 오늘은 저도 '예쁘게'하고 출근했다. 이따 저녁부터 대만에게 요리를 해줄 생각 만만이었다. 한입만 더 먹어보자고, 좋아하는 음식은 뭐냐고 옆에서 꼬치꼬치 캐물을 예정이었다.

난 꿈 좀 꾸면 안 되나. 태섭은 니트의 보들한 면을 만지작거리며 비딱하게 웃었다.








적막하고 어스름한 실내를 징.. 징.. 반복적으로 울리는 진동음이 깨웠다. 잠시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기 시작하는 반복되는 소음에 태섭은 인상을 쓰고 눈을 겨우 떴다. 음… 방 안은 어두웠다. 암막 커튼을 쳐둔 원룸은 훈훈하고 편안하게 잠으로 이끌었다.

그 평온을 흔들어 일어나라 보채는 저의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부재중이 8건. 썰물처럼 훈기가 빠져나갔다.

몸을 순식간에 일으켰다. 잠들어 있는 이가 깨지 않도록 이불을 젖히지 않고 침대 밖으로 제 몸만 빼냈다. 손 안에서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어. 어?"

- 너 어디야.

제가 작게 속삭이듯 넋나간 목소리로 받아들자 준섭의 목소리가 차갑게 넘어왔다.

"나? 흠 나 친구…."

- 누구.

"그.. 가까운데 있어 왜?"

- 너 아까 집 간다 했잖아.

"…."

새벽 2시가 넘었다. 긴 숨소리. 형이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숨소리가 떨려온다. 아니, 그대로, 그 다음은 말하지마. 태섭은 이 기시감을 알았다.

- 아라 연락이 안 되는데.

찰캉 발 아래로 유리가 깨지는 듯한 기분에 휘청였다. 이어지는, 노기가 팽팽이 서린 목소리가 철썩 제 정신을 한번 더 일깨웠다.

- 연락이. 답장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근데 애가 집에 없는데 넌 어디냐고!!

왜그래. 숨소리 같은 대만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태섭은 고개를 돌렸다. 대만의 얼굴을 보며 태섭은 멍청이처럼 입을 어물거리다 대답을 했다. 목소리가 막혀 잘 나오지 않았다.

"갈게. 지금. 나 금방 가 십분이면."

뚝. 통화가 끊기고 주변에는 아무 소리도 남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바지부터 꿰어넣었다. 결국 대만도 부스럭 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형. 나 잠깐. 아니 집에 일이 생겨서 가볼게."

"문제 생겼어?"

"어. 어.. 좀 금방 확인하고 연락할게."

후뜰 후뜰. 저의 목소리는 웃음도 섞여있고 순서도 이상하고 덜덜 거리며 엉망이었다.

"데려다 줘?"

대만이 베드 테이블의 전등을 켰다. 여린 빛무리 아래 아직 졸음기가 가득한 얼굴이 제게 물었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아냐. 자. 택시 많아 지금 시간이면."

태섭은 외투까지 집어 들고 현관 쪽으로 갔다. 신발을 신다가 겉옷을 입다가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태섭아."

자신의 뒤에서 몸을 부드럽게 껴안는 두 팔에 감겨 들었다. 등 뒤에서 평균 체온보다 높은 듯한 단단한 신체가 닿았다. 공기가 탁 트였다.

태섭은 호흡 곤란처럼 숨을 몰아 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눈물이 날 것 같지도 않았다. 

"태섭아."

저를 그렇게 부르는게 대만의 목소리라 좋았다. 그를 멍하니 위로 올려다 보았다. 팔뚝에 힘을 넣어 저를 꽉 안아 주었다. 내 머리 냄새를 맡듯이 코 끝으로 부들부들, 숨을 들이켰다. 뜨거운 체온과 부드러운 살냄새가 저를 안정시켰다. 

그의 손을 놓고 뒤를 돌았다. 저가 머뭇거리자 대만도 저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냥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어… 땡큐."

"조심히 가라."

"응."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놓고 서 있는데. 대만이 들어가지 않고 현관문에 기대어 기다려 주었다. 까치집을 지어둔 뒷머리가 저를 빼꼼히 배웅했다. 문 안으로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 그는 손을 흔들어줬다.

아래로 아래로 하강하는 철 상자 안에서 이유 없이 아릿해져오는 속이 야속했다. 대만이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캐묻지 않아서? 아니 나 원래 파고드는 거 안 좋아하잖아. 갑자기 웬. 

태섭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덜덜 떨고 있는 것을 힘없이 쥐었다.









"아이구야아. 아이구야 우리 얼라 얼굴이 반쪽이 됐어 어어!"

"이모."

"희정이도 모른다한다. 자기 전화 안 받는대."

경찰서에는 준섭과 시장 이모가 와 있었다. 시장이모는 아라와 같이 키운 거나 다름없는 본인의 딸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 둘은 어렸을 적에는 자매처럼 같이 자랐고, 친구라면 친구 사이였다. 아직까지 얼마나 친한지는 모르겠으나 그 둘끼리는 가끔 연락도 하고 결혼한 희정이가 친정에 놀러오면 만나서 밥도 먹는듯 했다.

저가 연락 할 정신머리는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그냥 역하게 올라오는 속만 다스리고 있었다. 아마도 준섭이 희정이든 이모에게든 먼저 연락을 해본 것 같았다.

아라의 친구를 태섭은 잘 몰랐다. 그러나 준섭은 몇명 알고 있는 듯 했다. 옛날 언젠가 서울에서 아라와 대학 친구들에게 밥도 한번 사준 적도 있는 걸로 알았다.

한밤 중이라 답이 돌아온 사람도 있고 아직 읽지도 않은 친구도 있는 듯 했다.


태섭은 아라와 주고받은 마지막 카톡을 확인 했다.


                        [나 오늘 외박 해]

송아라 

[달재 오빠?]

                        [ㄴ]

송아라 

[ㅇㅇ~]

                        [너 어디야]


마지막 저의 메세지에도 읽음 표시가 나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왜 갑자기. 아무런 말도 없이..

태섭은 손가락 끝이 전기가 오르듯 저릿했다.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아라가 울면서 '저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다.' 말했던 엊그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준섭과 태섭은 피곤해 보이는 경찰 앞에 앉아 실종 신고 접수를 하려고 했다. 답변은 의외였다. '실종' 접수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준섭은 이미 저가 오기 전에 같은 말을 들었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실종자를 찾는다는 문자도 보낼 수 없다고 했다. 종종 그런 알림문자를 받았던 기억이 나서 얘기를 꺼냈더니, 없어진 사람이 노인이나 심신미약자에 해당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범죄 타겟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태섭은 망막이 분리된 것처럼 아연해졌다. 뇌는 꼭 부정적인 상상만 구체적으로 펼쳐가서 근래 읽었던 무차별 살인사건 기사 같은 것만 떠올랐다.

"단발 머리고 갈색. 키는 저 정도고요."

"좀 더 특정할 수 있게. 옷차림 이라던가."

"옷은…."

아라의 인상착의를 묻는 경찰의 질문에 입을 잠시 다물었다.

"마지막에 보셨을 때. 그게 언제죠? 오늘 아침이라던가. 그때 입은 옷이요."

핑. 또 한번 현기증 처럼 어지럽고 두통이 일었다. 마지막으로 본 아라는 이불 속에서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집에서 입고 있는 옷이야 뻔했다. 하… 한숨 쉬는 준섭의 눈치가 보였다.

"혹시 최근에 크게 싸운 적 있으십니까?"

"네?"

"혹시 동생분과 댁내 관계가 안 좋으신가요."

경찰의 말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성인 실종이라 하면. 95프로가 가출이에요."

"아니..에요. 근데… 동생이 없어지기 전에 저랑 좀 말다툼을. 하긴.. 했는데."

준섭이 저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게 느껴졌다. 왜 꼭 저의 잘못처럼, 변명처럼 주억 거려야 할지 몰라서 얼굴이 벌개졌지만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무릎에 올려둔 주먹을 쥐었다.

"아아~ 네. 심리적인 그런 걸 수도 있겠네요. 며칠 됐다고 하셨죠."

"하루 된 것 같아요."

"하루 안 됐어요. 아침에 집에 있었어요. 제가 보고 나왔어요."

준섭의 말에 어깃장을 놓았다. 저가 눈만 돌려서 형을 노려보았다. 준섭도 표정 없는 눈으로 저를 마주 보다가 경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조금 기다려 볼까요. 저희도 순찰대에 알려주신 인상착의 공유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그리고. 젊은 친구니까. SNS 계정이나. 그런데도 한번 알아보세요. 친구 집에 가있는 경우도 있고 그러니까."



핸드폰의 GPS 추적이나 금융 거래 내역 역시 '실종'으로 분류되기 전에는 받기 힘들 거라고 했다.

사람이 없어졌는데도. 다 큰 성인이 훌쩍 어디 떠나고 싶을 수도 있지 않냐는 말을 들어야 하는 통에 정말 미치고 팔딱 뛴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아라가 쓰는 카드는 두 종류였다. 제가 알고 있는게 전부라면, 하나는 대학교를 들어가며 만든 학생증 겸 체크 카드였고, 하나는 제 명의로 만들어준 가족 신용카드.

일단 급하게 모바일 카드어플에 들어가 최근 승인내역이 있는지 찾아봤다. 하지만 근 3주 전에 몇번 편의점을 다녀오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것 외에는 없었다.

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형이 방마다 열어봤었는지, 퇴근하면 늘상 닫혀있던 송아라의 방문까지 전부 활짝 열려있었다.

불이 꺼져있는 동생 방의 전등 불을 켰다. 틱. 맥없이 불이 들어오는 방을 둘러봤다. 아라가 외출 할 때 드는 가방과 전에 아웃도어 매장에서 사줬던 패딩이 없는 걸 보면. 외출을 하긴 했다는 것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침대 위에는 송아라 대신, 까만 화면으로 잠겨있는 아이패드만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송태섭."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준섭 형은 어디 제대로 자리 잡지도 않고, 그냥 식탁 옆에 걸터 앉듯 서 있었다. 

"너 나랑 얘기 좀 하자."

그 겨울로 돌려 놓는 목소리가 쿵 쿵 귓전을 울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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