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게 뜬 태양이 거실의 공기를 온난하게 데우고 살짝 열린 창문을 통해 아카시아 꽃향기를 잔뜩 품은 미풍이 흘러들어왔다. 베일처럼 얇은 커튼이 관상어의 지느러미처럼 흔들린다. 흐릿한 백색 물결 뒤편으로 길게 늘어진 금사슬나무 꽃송이의 실루엣이 언뜻언뜻 비쳤다. 까미유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매달고 커튼을 묶었다. 강렬한 햇빛에 반사된 잎사귀들은 오히려 흰색으로 빛났고 벌들은 이리저리 꽃가루를 옮기기에 한창이다.

창밖의 풍경만큼은 장인이 그린 수채화처럼 완벽한 봄이었다.

정원의 반대편, 거실과 붙어있는 부엌에서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까미유는 미동도 없이 단단한 남자의 등허리에 매여있는, 앞치마의 고정끈으로 만든 리본을 쏘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히-카-르도-. 제발 유치하게 굴지 좀 마. 우리가 열다섯 살도 아니고 언제까지 내 말을 무시할 거야?”

그 뒤로도 몇 마디 말을 더 붙였으나 히카르도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까미유는 욕지거리를 중얼대며 못생긴 강아지 쿠션을 끌어안고 고풍스러운 가죽 소파에 드러누웠다. 꽃향기에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뿐이다. 헝클어져 시야를 가리는 곱슬머리를 손으로 빗어 정리하고 대꾸 없는 동거인 대신 천장의 나뭇결을 노려보았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옹이의 흔적을 이어 새로운 형상들을 만들기를 몇 번, 그 사이 한숨도 여럿이었다.

히카르도 스스로가 말하지 않았던가. 더 이상 네가 홀로 내린 결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 제발 대비할 수 있도록 말을 해달라고. 그것이 이 동거를 시작하는 조건이었다. 비록 지금에 와서는 히카르도가 먼저 돌아섰지만 말이다. 까미유는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독선적인 과거를 애써 떨쳐내고 다시 한 번 대화를 시도했다.

“내가 말했잖아, 로커드 마틴이랑은 완전히 끝났다고.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었어.”

침묵.

이게 도대체 며칠째 이어지는 냉전인지 알 수 없었다. 몇 주가 되었던가? 어쩌면 몇 달일지도 모른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히카르도가 제게 이토록 차가운 적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굶주림이 일상이던 고아원에서도,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해내야 했던 카모라에서도, 심지어는 시뇨리아 광장 사건에 연루된 이후에도. 차라리 증오의 껍데기를 둘러쓴 사랑을 토할지언정 단 한 번도 냉담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까미유는 히카르도의 행동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보다 더 한 일도 넘어가 줬잖아. 왜 인제 와서 그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남아있었다. 돌이켜보면 그에게 못 할 짓을 많이 하기는 했다. 그 모든 걸 눈감아준 사랑에는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지만, 이왕 하는 김에 한 번만 더 눈감아줄 수는 없는 걸까? 고작해야 그의 조언을 듣지 않고 로커드 마틴과 접촉했다는 것뿐이지 않나. 그 대가로 이런 무시라니?

겨우 이런 일에 흔들릴 사랑이었다면 어째서 벼랑 끝까지 찾아와서 손 내밀었단 말인가?

“야!”

결국, 까미유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손아귀에서 찌그러진 강아지 쿠션을 그의 등에 집어 던졌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쿠션은 그의 넓은 등 정중앙을 맞추고는 추락했다. 히카르도는 화난 기색도 없이 가련하게 널브러진 쿠션을 집어 들었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쿠션은 제자리에 돌아왔고 히카르도는 단 한 번도 까미유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완벽한 투명인간 취급이었다.

까미유는 기가 차서 한숨을 뱉었다. 차라리 소리치고 주먹다짐을 하는 편이 나았다. 말을 하지 않으니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사과의 말은 가장 먼저 했다. 해명도 해봤고 상처받은 척 가증도 떨어봤다. 무엇 하나라도 통했으면 지금 이렇게 벽에다 대고 혼자 지껄이고 있진 않았겠지.

이런 무시를 통해 바라는 반응은 대체 뭘까? 그는 내가 울며 매달리는 꼴이라도 보고 싶은 걸까? 그가 한때 제게 그랬던 것처럼? 인제 와서 지난날 자기를 외면했던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아니, 모르겠다.

한참을 요란하던 물 끓는 소리, 베이컨을 굽는 소리가 멈추고 그릇이 달그락댔다. 까미유의 취향에 맞춰 흰색 레이스로 짜인 식탁보 위로 정갈한 그릇이 하나둘 놓였다. 직접 만든 유자 소스를 곁들인 녹색 샐러드와 바싹하게 구운 베이컨, 아스파라거스, 7번가의 베이커리에서 산 베이글과 치즈, 수란을 곁들인 에그 베네딕트. 별 것 아닌 듯했지만, 까미유는 저것들이 제법 훌륭한 맛을 낸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화해’를 한 다음 날 아침이었다. 메뉴는 기억나지 않지만, 날짜만큼은 확실했다. 모든 세력을 등지고 도주한 참이었기에 모든 것이 조악한 환경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식사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았고 따뜻한 빵조각이나 먹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날 아침 식사로 차려진 휘황한 음식들에 놀라고, 그 맛에 두 번 놀랐던 것 같다. 히카르도가 미식을 즐긴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지만 직접 요리하는 재주까지 있을 줄은 몰랐던 탓이다. 히카르도는 휘둥그레진 까미유의 시선에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며 능력자가 된 이후에 식당을 가기가 힘들어 직접 조리하기 시작했다는 고백을 들었었다.

그 순간만큼은 참 좋았다. 안타리우스, 로커드 마틴, 헤더 인더스트리, 카모라. 거미줄보다 더 복잡하게 얽힌 모든 세력을 배신하고 썩어 문드러진 히카르도의 손을 잡았으니. 궁지에 몰린 끝에 내밀어진 손은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히카르도가 그 모든 배신을 겪고, 증오를 불태우며 목적했던 것이 결국은 이 길에서 나를 건져내는 것이었음을 알았을 때는…. 그 미련함과 불변성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겠는가.

다만 언제나 달콤함은 순식간에 녹아버리고 역광 뒤에 숨죽인 현실이 들이닥치기 마련이다. 물이 맑아 바닥이 다 비치는 호수를 가로지르고, 침엽수가 빽빽한 숲을 내달리고 뾰족한 바위산을 넘어도, 어쩌면 바다 아래로 숨더라도. 도망친 곳에 평화란 없을 것이다. 제 탓이기는 했다. 그러나 도망쳤다는 것은 더 나은, 행복을 바라는 행동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수 없는 밤을 뜬눈으로 지새야 했고 매일같이 살점과 핏물을 뒤집어써야 했다.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이, 바람에 등 떠밀려 바다로 내몰린 부평초처럼 말라 죽어 가고 있었다.

까미유는 휘둘리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으며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욕심이 많았다. 하나를 손에 쥐면 나머지 아홉도 쟁취해내야 성이 풀렸다. 사랑으로 본성을 가린대도 한계가 있다. 히카르도는 마주 잡은 손의 온기로 충분했을지도 모르지만 까미유에겐 아니었다. 명예와 힘은 버렸을지라도 온전히 뿌리내릴 땅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은밀하게 내밀어진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게 잘못인가? 모르겠다.

히카르도의 태도를 이해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카모라 시절부터 이어진 거듭된 배신의 역사가 그의 인내심을 모두 갉아먹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라도 또 그들과 무슨 작당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달콤한 미소로 눈을 가리고 그의 등에 칼을 꽂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타당한 추론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진실로 결백했다. 로커드 마틴은 안타리우스보다 먼저 능력자를 만드는 약물의 대량생산에 성공해야만 했다. 왜 하필 그들이냐 묻는다면 먼저 타협안을 제안한 것이 로커드 마틴이었을 뿐이다. 안타리우스가 먼저 접촉했다면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최후의 보루로 쥐고 있던 연구 자료를 넘기는 대가로 로커드 마틴을 비롯한 미국 측의 추적 중단과 안타리우스의 시야를 가려주겠다는 확약을 받아냈다. 그로 인해 세상이 조금 더 지옥에 가까워지겠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모두 ‘우리’의 평화를 위한 일이었다.

그를 이해한다. 그러니까, 나는……. 염치없게도 히카르도가 일방적으로 대화를 피하고 나를 무시하는 행동에 화가 나는 거다.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가려 애써도 히카르도는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 그와의 만남을 거부하던 때의 히카르도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매달렸다.

오늘도 식탁 위의 음식은 1인분뿐이었다.

“히카르도, 정말로 내가 떠나길 바라?”

무슨 말을 해도 돌아오는 반응은 똑같다. 침묵, 무시. 까미유는 기가 차 헛웃음을 밭은 뒤, 걸음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

히카르도의 만행을 꼽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랐다. 커피를 내리면 싱크대에 부어버렸고 읽던 책은 내려놓기가 무섭게 책장으로 되돌아갔다. 옷장 속의 내 옷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신발도 모두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집에 자신의 물건이라고는 서재에 빼곡한 책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까미유는 이 완곡하고도 치욕적인 퇴거 요청에도 히카르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유는 복합적이다. 어제는 이제 손에 쥔 것이라고는 히카르도 하나뿐이라서, 오늘은 이런 식으로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일은 아직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이유는 애써 찾지 않아도 스스로 증식했다.

"바보 같아."

까미유는 그림자 속에서 중얼거렸다.

그림자보다 더 짙은 어둠이 내려 발아래를 삼키는 밤이면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앓는 소리가 샜다. 서느런 밤공기, 머리맡에는 흰 커튼이 나부끼고 그의 고통에 공명하는 벌레의 울음소리와 악다문 잇새로 새는 헐떡임이 소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복도의 나무 바닥이 걸음마다 삐걱대는 비명을 질러도 히카르도의 귀엔 닿지 않으리라. 까미유는 어둠이 검게 칠한 문에 이마를 기댄다. 살갗에 닿는 오래된 코팅의 끈적거림이 까미유를 좀처럼 움직일 수 없도록 옭아맸다. 시곗바늘이 넘어가는 소리는 일정한데 히카르도의 엷은 비명은 점점 더 속도를 높인다….

오늘도 그를 외면하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는 히카르도의 머리맡에 서고 말았다.

시퍼렇게 죽은 손은 뼈마디가 드러나도록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허리는 고통을 참기 위해 둥글게 말렸다. 옷깃 사이로 아직 변색되지 않은 살갗과 그 아래에서 피부를 찢으려 애쓰는 벌레의 윤곽이 보였다. 몸 안에 둥지를 튼 짐승은 양분이 필요하면 히카르도의 살점을 뜯어먹었고 충분히 배가 부르면 자유를 갈망하며 피부를 찢었다. 먹힐 것인가 제압할 것인가. 결국엔 기생충과 숙주의 주도권 싸움이다. 달빛이 히카르도의 등허리로 쏟아져도 그의 얼굴이 베개에 파묻혀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있는 것이라곤 상처 입은 들짐승 같은 앓는 소리와 날벌레의 날개가 부닥치는 소리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턱과 콧등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을 보면서 까미유는 그간의 행동을 참아 넘기기로 했다. 그가 제게 무슨 짓을 하건 자신이 그에게 주입한 불멸보다는 못할 테니. 사랑을 인정한 이후로 마주해야 할 과거가 너무나 많았다.

“까미유……,”

축축하게 젖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탓에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그 사이를 표류하는 제 이름만큼은 모를 수가 없었다.

“까미유.”

약간의 긴장과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나던 말.

“까미유.”

배신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나를 믿으려 애쓰던 말.

“까미유.”

거센 분노와 증오의 막을 둘러써도 그 속의 사랑이 비치던 말.

히카르도가 알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예나 지금이나 까미유는 히카르도에게 유난히도 물렀다. 그만큼 유별나게 잔인하기는 했지만. 사는 동안 끼미유로부터 이만한 애정을 받은 것은 히카르도가 유일할 것이다. 까미유는 입안에서 미래에도 그가 유일할 것이라는 말을 사탕처럼 굴려보았다.

그가 아무리 제게 화가 났더라도 고통에 제정신이 아닌 지금이라면 괜찮겠지. 까미유는 그에게 다정한 손길을 베풀기로 한다.

침대의 매트리스는 출렁임도 없이 까미유를 받아들였다. 모두 버리고 온 탓에 고통을 덜어줄 약물도 없고 그에게 직접 주사한 불멸 탓에 해방할 방법도 없으니 건넬 건 조악한 위로뿐이다. 그는 서늘한 손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뒤통수를 슬슬 쓸어주었다. “나 여기 있어.”하고 그가 사랑했던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달랜다.

고역스러운 시간은 세 시간쯤 이어진다. 히카르도는 까미유의 이름만이 저를 구할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거듭 부른다. 그러나 절박한 부름 외의 모든 것은 입안에서 뭉그러지고 뱉는 것은 벌레의 시체뿐이다.

히카르도는 이제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히카르도는 고통을 참는 것에 익숙했다. 슬픔과 통한, 분노. 너는 대체 무엇에 사죄하고 있는가? 그의 감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까미유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이렇게 날 찾을 거면서 왜 모른 척하는 거야?”

히카르도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제 이름만이 주문처럼 울려 퍼진다.

“까미유.”

나를 기어코, 붙잡은 그 말.

그 말이 까미유를 영영 히카르도의 곁에 묶어두었다.



*



히카르도는 집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반쯤은 아무 때나 들끓는 벌레 탓이고 반쯤은 이제 더 이상 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은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폭주의 빈도는 명백하게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달에 두 번, 일주일에 한 번, 매일 밤. 이제는 해가 떠 있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개 치곤 했다.

아카시아가 모두 진 자리에는 꽃대롱만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너른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이 모든 것을 지나치게 선명히 비추었다. 까미유는 원치 않아도 히카르도에게 몰아친 고통의 흔적을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었다.

벌레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너저분했다. 잘 차려진 식사는 벌레의 사체와 뒤섞여 곤죽이 되었고 그마저도 대부분 추락하며 깨진 그릇 사이로 흘러내렸다. 고통을 참기 위해 긁어댄 나무 바닥은 거스러미가 일어났고 피와 누런 진물로 얼룩덜룩했다. 단테가 노래한 지옥의 밑바닥이 이러했을까. 퇴화한 눈 대신 더듬이를 가진 검은 것들, 허리가 길고 많은 다리를 지닌 것들, 노랗고 푸른 체액을 가진 이형들. 한때 일상의 정취를 자아내던 장소에는 죽음과 생이 뒤집히던 찰나에 끌려 나온 악취와 피안개가 자욱했다.

투명한 유리 하나가 놓인 창을 넘기만 하면, 너머에는 열정적인 여름의 햇빛과 개암나무의 푸른 잎사귀, 허공을 점점이 수놓는 잠자리가 있는데……. 환한 사위가 돌연 비참했다. 까미유는 고개를 떨궜다.

어쩌면 이별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를 살리기 위한 연구를 진행해야 할까? 그러려면 히카르도의 곁을 완전히 떠나는 수밖에 없다. 이론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수많은 실험이 필요했다. 주어진 시간 내에 결과를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의 불멸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든 기적이었으므로. 매듭을 엉망진창으로 묶는 건 쉬워도 풀어내기란 어려운 법이다. 알렉산드로스도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풀지 못해 칼로 내리치지 않았던가.

…….

어쩌면 이젠 영영 끝내고 싶은지도 모르지. 기생충들이 숙주를 잡아먹은 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히카르도가 되살아났을 뿐. 까미유는 딱딱하게 굳은 몸에 다시 피가 돌고 근육이 부드러워지는 일련의 과정을 수없이 목격했다. 일그러진 얼굴이 풀리고 눈꺼풀이 말려올라고 제비꽃색 눈을 드러낼 때. 숨이 돌아오기 전 찰나의 공허함, 그 직후의 모든 것을 증오하는 그 표정이 불로 새긴 듯 잊히지 않았다.

“지긋지긋해.”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히카르도,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소리 내 물어도 굳게 다물린 입에선 대답이 없었다. 한때 멈추었던 변패는 어느새 목덜미를 넘보며 넘실댔다. 까미유는 흰 손을 들어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쓸어본다. 사람의 피부라기보다는 딱정벌레의 단단한 외피와 비슷하다. 피와 시체로 흥건한 바닥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하오의 햇살 눈 부시고 숨소리는 없는데 창밖의 종달새 지저귀는 소리만 아롱아롱 울렸다.

지금이야말로 가장 평화로운 한때다.



*



눈을 뜬 히카르도는 지친 몸을 일으켜 온몸에 말라붙은 액체들을 씻었다. 엉망이 된 부엌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지만, 곧 겉옷을 입고 옷깃을 세워 목덜미를 가렸다. 푸른 손을 가리는 장갑도 잊지 않았다.

“외출해?”

그의 무반응에도 익숙해졌다.

“같이 가.”

해가 기울기 시작한 바깥엔 쏙독새가 울고 있었다. 히카르도는 한참을 걷고, 기차에서 밤을 보내고 다시 얼마간 걷더니 둥그런 광장에 섰다. 네모난 벽돌로 그린 원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사방으로 거리가 길게 이어지고 가로수가 심어진 거리의 양측에는 다양한 건물들이 높게 서 있었다. 신화의 한 장면을 재현한 조각상을 가운데에 둔 거대한 분수 앞에서는 거리의 음악가들이 저마다의 곡조를 연주하고 꽃을 파는 소녀, 테라스에서 신문을 읽는 사내들, 저마다의 이유로 분주한 행인들이 가득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히카르도는 곧 고개를 들고 검은 머리의 소년에게 아는 체를 했다. 분명 그랑플람 소속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히카르도가 저 동양인 소년과 만난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까미유는 그의 옆에 서서 조금 낮은 곳에 있는 청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남자애는 여러 원색이 뒤섞인 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앞머리를 길게 내려 한쪽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머리칼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붉은 눈이 내장을 꿰뚫어 보는 듯 섬뜩했다. 그랑플람의 마인드리더는 분명 밀짚색 머리칼을 가진 청년이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사내애는 저를 살펴보는 까미유에게서 시선을 홱 하고 돌리더니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형씨, 저거 계속 저대로 둘 거요? 위험하다니까.”

“글쎄…….”

“저치한테도 못 할 짓이니까 얼른 해결 보쇼. 저러다가 눈 돌아가는 거 한두 번 본 줄 아나?”

소년은 답답한 듯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뒷머리를 헤집더니 까미유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가 입안으로 무어라 중얼대자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댔다. 갑작스레 치미는 토기에 까미유는 견디지 못하고 짐승에게 쫓기듯 내달렸다. 광장의 둥근 테두리의 금을 밟자마자 메스꺼움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몇 걸음 전진하자 젤라틴 위를 걷는 듯 어지럼증이 도져 벼락 맞은 망아지처럼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까미유의 흰 머리칼이 흩날렸다. 모든 것이 인위적이었다. 수십 미터 떨어진 이곳에서 소년의 붉은 홍채의 결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어차피 능력의 일종이겠지. 까미유는 가만히 서서 주위를 살폈다. 영향을 받는 것은 저 하나뿐인 듯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바람과 반대 방향으로 나부끼는 종잇조각들이 보였다.

찢을까?

까미유는 곧 고개를 저었다.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난 것이 불쾌하기는 하지만 히카르도의 대화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무슨 목적이 있어 나온 것도 아니었으니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시야에 높은 시계탑이 걸리기에 충동적으로 계단을 올랐다. 첨탑의 뾰족한 지붕 위에서 한껏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익숙한, 두 사람의 집이었다.

히카르도는 소년과 만남 이후로 고민이 많은 듯했기에 굳이 말을 붙이지 않았다.



*



히카르도를 완전히 떠날 생각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침묵에 지쳐 잠시 시간을 가질 셈이었다. 그가 제 말은 듣지 않으니 잠시 떠났다 돌아오겠다는 메모를 남기려 했을 뿐이다.

깨달음은 벼락처럼 내리꽂힌다.

맙소사, 히카르도. 내가 드디어 미쳤나 봐.

글을 쓸 수 없었다.

문자 그대로, 알파벳이 어떻게 생겼지? 펜을 쥔 상태로 단 한 글자도 적을 수 없었다. 단순한 도형을 그리는 것조차 불가했다. 모든 기호와 언어가 사라졌다.

까미유는 혼비백산한 낯으로 책장의 책을 모조리 꺼냈다. 그는 세계 각국을 누비며 야망을 펼쳤기에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는 물론, 영어, 불어, 독일어……. 드물기는 하지만 머리를 다친 사람이 모국어를 잊고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나쯤은 읽을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책을 꺼내는 손길이 점점 더 다급해졌다. 책장의 책은 모두 바닥에 쏟아졌다.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기어코 책상 서랍을 뒤집어엎어 자신이 썼던 보고서 따위를 헤집었다. 분명 자신이 쓴 글인데도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다. 이 기호의 나열이 무슨 의미인지, 기억하고 있는 내용으로 유추하려 해도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부옇기만 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어느 나라의 언어로 사고하고 있는 거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자를 적어 내리려 해도 그것들은 문자가 아니었다. 음성이 아니었으므로 소리 내어 읽을 수도 없었다. 나의 말은 소리가 아니라 의미 그 자체였다. 그것을 어떻게 문자로 풀어쓴단 말인가?

내가… 언어로 말을 하고 있기는 한가?

혼란의 한 가운데서 공포 소설의 한 장면처럼 서재의 문고리가 돌아갔다. 소란을 눈치챈 히카르도가 온 모앙이다. 어차피 엉망이 된 책을 치우고 말겠지만, 그마저도 반가웠다. 아니, 불안했다. 까미유는 시체처럼 휘청이며 히카르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깨달음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광충은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지? 시계탑의 꼭대기에는 무슨 수로 올라갔나. 히카르도를 위로할 때 문이 열렸던가?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건? 지금이…… 몇 월이지?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드, 들어봐, 히카르도. 내가 미쳤나 봐. 글이 기억나지 않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광충도 없어. 기억이, 그러니까, 기억이 뒤죽박죽이야. 너랑 싸운 지 얼마나 지났지? 어제였나? 아니면 지난달이었던가?”

까미유는 물에서 막 건져진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잘은 호흡이 단어 사이사이로 흩어졌다.

“히카르도, 내 말 안 들려?”

산꼭대기에 잘못 놓인 빙하처럼 불안했다.

“대답해!”

비명 같은 고함에 맞춰 사방의 유리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까미유는 흠칫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분명 방금까진 오후의 햇볕이 따뜻했다. 아무리 정신을 놓고 있었더라도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밖은 이미 빛 한 줄기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히카르도는 놀란 기색도 없이 그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까미유는 무릎을 굽히고 그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히카르도, 날 봐.”

까미유는 확신했다. 그는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냥…,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거다.

어떻게, 이걸 이제야 알아챌 수 있는 거지?

“내가… 보이긴 해…?”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까미유는 저도 모르게 히카르도의 양팔을 움킨 손에 힘을 주었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붙잡았던지 팔뚝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픈 기색이 없었다. 촉각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의 곁에서 나는 은근한 시취, 그 사이의 흐릿한 설탕 냄새, 모든 것이 또렷했다.

히카르도는 끝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까미유의 무릎이 바닥에 닿기 직전, 그의 입에서 기대조차 않았던 대답이 나왔다. 누군가 뒷머리를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고개가 젖혀졌다. 역시 그럴 리 없지. 내가 미쳤어도 그는 제정신이겠지.

“까미유.”

잠시간의 안도.

히카르도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까미유는 초조해졌다. 그의 입매가 한참을 씰룩댔다. 붙들린 두 팔 탓에 얼굴을 가리지 못해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 적나라했다. 뱃속에서 지옥의 불길을 꺼내 뱉어내듯 고통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영혼이니 사후세계니, 이런 말을 하면 너는 비웃겠지만, 세상에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는 영혼들이 많다고 한다.”

침묵.

“네가 죽은 지 5년이 지났다.”

“나 지금 장난 칠 기분 아니야.”

그의 턱이 단단하게 다물렸다. 얼굴로 열이 몰리는 것을 애써 참는 듯 눈 주위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히카르도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눈물 흘렸다.

“…보고 싶어.”

“지금 여기에 있잖아!”

까미유는 혼란스러웠다. 죽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가정하자 여태까지의 불가능이 하나둘 이해되기 시작했다.

까미유의 혼란이 걷힐 여유도 주지 않고 히카르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떠올리는 듯 더듬더듬. 그의 불안에 동조하여 벌레들이 날개를 비볐다. 까미유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신을 붙들고 있던 힘이 사라지자 히카르도는 즉시 바닥으로 무너졌다. 푸른 손이 엉망으로 젖은 얼굴을 가렸다.

“너는 로커드 마틴과 최후의 협상을 하러 갔다가 안타리우스와 손을 잡은 그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나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알고서…….”

열기 섞인 숨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진다.

“네 벌레가 탐났겠지. 치유사를 만들기 위한 실험의 재료로 사용된, 조각난 시체들을 이제야 모두 모았다. 너무 오래 걸려서 미안하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까미유는 그의 고백 앞에서 부정 말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뜻 가로등이 모두 꺼진 밤거리가 고장 난 영사기처럼 떠오르다 픽 꺼지기를 반복했다.

“네 죽음을 확인하고 나서부터 기현상이 시작되었지. 물건이 허공에 떠다니고 네 책들이 펼쳐져 있어. 그랑플람의 영매사를 찾은 건 정확히 반년 뒤다. 그는 네가 내게 들러붙어 있다고 했지. 산 사람 곁에 죽은 자가 머무는 것은 좋을 것 하나 없다고 제가 처리 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만류했다. 너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이…….”

히카르도는 헐떡였다.

“그런데 나는 흔들리는 커튼이 네 손짓인지 바람인지 구분할 수 없어……. 내 곁에 있는 것이 너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지 구분할 수 없다. 이상하지. 나보다 죽음을 많이 겪고, 죽음과 함께 사는 이가 없을 텐데. 나는 너를 볼 수 없다니.”

까미유는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곳까지 물러났다.

“나는 네 말을 들을 수 없다. 네 모습을 볼 수도 없어.”

그만 듣고 싶었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스산한 바람이 불고 종이 짓밟히는 소리 소란하다.

“너는 죽었어. 네게 이 말을 처음 하는 게 아니다. 과거에 매여있는 건 나 하나면 충분해. 이제 쉬어라, 까미유.”

히카르도는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굽은 목 위로 푸른빛이 기어왔다.

“아니, 이제 그만 나를 쉬게 해줘.”

“아니, 난 그렇겐 못 해.”

까미유는 시계의 톱니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



“히-카-르도-. 유치하게 굴지 좀 마. 우리가 열다섯 살도 아니고 언제까지 내 말을 무시할 거야?”

 





제목은 malcolm is dead에서 따왔습니다.

영화를 안 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영화제목은 이만 줄입니다.

아래는 버리는 내용이라 안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원래는 까미유 입장-히카르도 입장-엔딩이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더라고요..

210501(재업)

 




이르게 뜬 태양이 거실의 공기를 온난하게 데우고 살짝 열린 창문을 통해 아카시아 꽃향기를 잔뜩 품은 미풍이 흘러들어왔다. 바람은 거실을 통과해 정원의 반대편, 거실과 붙어있는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히카르도의 짧은 머리칼을 한 번 흔들고 지나갔다.

냄비에는 식초가 든 뜨거운 물이 보글보글 끓고 옆의 프라이팬에서는 기름 끓는 소리를 내며 베이컨이 구워지고 있다. 커다란 손이 계란 두 개를 깨서 물에 담그고 국자로 휘휘 젓는다. 히카르도는 완벽한 수란을 위해 정확한 타이밍을 노려 계란을 건져냈다.

난데없이 쿠션이 날아와 등에 꽂혔지만 히카르도는 개의치 않았다. 오랫동안 이어진 기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까미유가 죽은 직후엔 복수에 미쳐서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당황하기도 했다. 이 집에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히카르도 저 혼자뿐인데 명명백백한 타인의 생활감이 남아있었으므로. 홀로 능력자의 암살시도로 착각하여 허비한 날이 꼬박 6개월이었다.

그러나 기현상의 이유를 알게 된 후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아쉬울 따름이었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고르라면 자신일 텐데도 그의 목소리 한 조각 들을 수 없고, 그림자 한 조각 볼 수 없으니. 한편으로는 그의 죽음이 끊임없이 떠올라 고통스럽기도 했다.

식탁 위에 놓인 일 인분의 음식은 제 입맛에 맞았지만 그런데도 속이 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텅 빈 반대편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쉰다. 어느새 이 집엔 까미유의 물건이 사라지고 자신의 물건으로만 채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의 흔적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다음은 그가 이곳을 떠나길 바라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요, 산 자는 살아야 한다.

히카르도는 매우 바빴다. 안타리우스, 로커드 마틴, 헤더 인더스트리. 그들을 무너트리고 싶은 세력이 어디 한 둘이던가. 그들과 발맞춰 작전을 수행하고 까미유의 시신을 회수하기란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이따금 쉬는 날이면 히카르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과거의 흔적이 흐릿하게 남은 집에 틀어박혀 침잠할 뿐이다. 요리는 습관적이었으나 맛을 느끼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복수는 곧 끝난다. 몸을 좀먹는 푸른 변이가 머리끝까지 번져 벌레에 삼켜질 날만을 기다릴 뿐이다. 벌레는 더 자주 폭주하고, 더욱 강력해져서 이따금 그들에게 지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숨이 아주 끊어지는데 되살아나고선 다행인지 불안인지 모를 감정에 잠겨 있곤 했다. 그러나 변이는 진행되었고 히카르도는 이 푸른빛이 머리를 집어삼킬 때가 소생은 없는 끝이리라 믿었다.

죽음을 두려워하기에는 너무도 많이 겪었다. 다만 영문도 모른 채 홀로 남겨질 까미유가 나의 부재를 어떻게 이해할지가 두려울 뿐.

살아서는 그렇게 쉽게 나를 떠나더니 죽어서는 왜 이렇게도 끈질긴지 몰랐다.

밤이 깊으면 어김없이 벌레들이 소란을 피운다. 히카르도는 피부 아래 들끓는 벌레들을 억누르려 애쓰며 숨을 들이켠다. 전신에 퍼진 신경의 가닥가닥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격통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몸이 아프고 홀로 외로운 밤에는 어쩔 도리 없이 못다 한 말들이 목구멍을 가로막는다. 히카르도는 말을 누르고, 누른다. 그러다 보면 응어리들은 녹아서 눈물로 쏟아진다. 통증 때문에 흐르는 생리적인 현상이라고 되뇌어 봐도 결국 본인의 생각이고 본인의 감정이다. 그는 하염없이 슬프다. 깎아내고 억눌러도 바래지 않는 하나의 단어만이 잇새를 비집고 나온다. 언어가 되지 못하고 입안에서 뭉그러지는 문장들을 혹시라도 네가 들을 일이 없기를 바란다.

너를 앞에 두고 말하기엔 너무도 낯부끄러운 말들이다.

네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때 들려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말을 삼킨다. 이제 와서는 말할 수 없다. 그에게 얼마만 한 미련으로 남겠는가.

격통에 혼곤한 날이면 언뜻 흰 손이 보인다. 상처투성이인 그 손을 어떻게 몰라보겠는가. 흔들, 흔들. 오전의 흰 시폰 커튼처럼 물결처럼 흔들린다.

고역스러운 시간은 세 시간쯤 이어진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히카르도는 흰 손을 붙들고 수백 번 같은 이름을 부른다. 고백할 것이 많았다. 벌레가 몸속을 진탕 뒤집어 놓는 날이면 머릿속이 흐무러져 온갖 감정들이 쏟아지곤 했다. 까미유를 미워하기 힘들어 그가 내린 모든 선택의 원인을 증오했다. 삶에 후회하는 건 또 얼마나 많던지. 만약 까미유를 따라나섰다면, 만약 까미유와 함께 도망치지 않았다면, 그가 제 몸으로 실험하게 두지 않았다면, 카모라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러나 절박한 부름 외의 모든 것은 입안에서 뭉그러지고 뱉는 것은 벌레의 시체뿐이다.

히카르도는 그가 곁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으므로 히카르도는 대답하지 않는다.

쌍충 바레데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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