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이야기는 성우 씨한테 미리 다 들었어요."

"..."

"편히 앉으세요."


다니엘 앞으로 커피 한 잔이 놓였다. 다니엘은 의자에 고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법률 사무소, 라는 이 곳은 규모가 꽤 큰 로펌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숨긴 채, 혹시 회사 관계자들 중 누구든 자신을 미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하며 이 곳을 찾았다. 이야기는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서류를 만지고 있는 변호사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다니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하고는, 정확히 어디까지 준비하신 거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요. 서류는 읽어보셨어요?"

"...네."

"혹시 빠진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겠어요?"


다니엘이 두 손을 모아 잡곤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이상하다 싶은 게 바로 그거다. 성우가 놓고 간 서류엔 도무지 빠진 내용이 없었다. 분명 큰 맘 먹고 성우에게 털어놓은 건, 회사와의 분쟁, 선배들과의 갈등... 그리고,


"없어요."


없으면 안 되는데...


"성우 형한테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빠짐없이 정리 돼 있었어요."

"성우 씨하고 관련된 사안 말씀하시는 거죠?"

"..."

"의아하실 거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나중에 성우 씨에게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희가 말씀 드릴 부분은 아닌 것 같아서요. 소송 전에 만날 일이 있을 거에요."


변호사와 상담하는 내내, 딴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남는 게 없었다. 어떻게, 성우 형이 다 알고 있지.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있지. 형은 그 일을 알게 됐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내가 직접 설명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형이 많이 힘들텐데. 많이 힘들었을텐데. 내가 실수했어. 내가 형한테 잘해야 했는데. 형을 귀찮아 해선 안됐는데. 그럼 좀 더 형한테 진실을 빨리 알려줄 수 있었을텐데. 누구한테 들은 걸까. 회사에서 말해줬나? ...회사에선 어떻게 알고?


"연애를 강제로 시키다니. 이런 발상도 가능하군요."


변호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니엘은 말없이 끄덕였다. 우습지만 그들의 계획이 어느 정도 적중한 것은 사실이었다. 연관 검색어는 물론 업데이트 되는 기사마다 서로가 언급되는 일이 예사였다. 강다니엘 ㅡ 옹성우 열애설 운운하는 곳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놀라운 속도로 두 팬덤을 더 확장 시켰고, **엔터테인먼트가 주워담는 이익도, 욕심도 날이 갈수록 치솟았다. 그 안에서 가장 바빴던 건 물론 다니엘이고.


"...회사에서 감시를 해대니까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연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 연기만으론 되지 않으니까 성우 형까지 끌어들였구요. 일단 진짜 커플이 되는 데는 성공한 거죠. 물론 연애가 맘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게 대중에게 어떻게 비춰졌는지 모르겠어요. 성우 형네 회사가 어떤 기획을 하고 마케팅을 했는지도. **엔터가 덕을 많이 봤죠. 이래저래.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면 되니까요.

"연애에 성공했다는 걸 입증은 한 거네요. 그래서, 정산은 받았나요?"

"아뇨."


다니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쉽게 줄 리가 없잖아요. 처음부터 완전히 믿진 않았어요. 각서라도 써둘걸 후회는 하면서도,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 한들 어차피 그런 말을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아시겠지만 연애도 이상하게 돌아갔어요. 우리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성우 형은 저 때문에 힘들어하다 병원으로부터 연기를 쉬라는 진단까지 받았어요. 아마 그게 티가 났나봐요. 금새 어그로가 달려들더라고요. 우린 친한 척 하는 거라고. 인기를 얻으려고 다니엘이 옹성우에게 접근했다는 둥, 반대로 옹성우가 다니엘에게 접근했다는 둥."


다른 악플은 단 한 번도 신경 써본 적이 없는데, 그건 좀 열받더라. 열받을 권리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회사에선 기다렸다는 듯이, 정산은 물론이고 성우 형 찌라시를 가지고 계속 협박했어요. 지금까지."

"오케이. 잘 알겠어요. 그런데 잠시만요. 성우 씨가 궁금해하던 게 하나 있어요. 대신 여쭤봐도 될까요?"

"형이요? ...뭔데요?"

"혹시 다니엘 씨가 직접 성우 씨 회사에 컨택한 적이 있나요?"

"..."

"없어요? 연애를 하는 동안에요."

"...있어요. 있는데, 아주 짧아요. 한 두 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정도..."

"음... 이 이상은 안 물을게요. 이것도 성우 씨하고 직접 이야기하는 게 좋겠네요."







성우네 회사에 제보를 시도해본 것은 성우와의 연애 초기의 일이었다. 요즘엔 잘 있지도 않은 공중전화를 찾아서 전화를 걸었었다. 그 쪽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 되려 놀라 몸이 안절부절 못했다. 혹시 어디에 매니저가 있을까봐. 회사에서 듣고 있을까봐. 숨이 자꾸 차올라서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마음이 채 가라앉지도 않아 들떠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OO엔터죠. 제보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옹성우 씨에 대한 거에요. 빠르게 말할 테니까 집중해주세요. 장난 전화 아니에요.


제보로 인해 무언가 해결이 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회사 측의 반응이 영 시원찮아 더 그랬다.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도 실망스러울만큼 미적지근했다. 정말, 장난 전화 아니에요. 조작도 아니고요. 믿어주세요. 몇 번 그러다 초조한 마음에 그 쪽에서 뭐라고 더 물으려는 말꼬리를 가로채고는 끊을게요, ㅡ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성우에게 공황 증세가 발생하고,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땐, 오로지 그것에 신경을 쓰느라 이미 제보에 대한 일은 잊었다. 그렇게 거의 1년이 흐르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 대답을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이야. 이별 통보 후 오랫동안 모습을 비추지 않던 성우가 갑자기 다니엘의 집에 찾아와 한 침대에서 같이 자고. 다니엘이 잔뜩 취해 곯아떨어진 사이에 자신의 흔적을 모두 치우고. 동시에 다니엘이 자주 쓰는 가방 안에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둔 소송 자료를 남겨 놓고 떠난 그 모든 행동들. 다니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게 계획적인ㅡ칫솔을 두고 간 것은 아마 실수였겠지만ㅡ행동이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가슴이 저릴만큼 신경 쓰이는 것은 다니엘 본인도 조금 당황스럽다.


"조만간 자리를 마련해 드릴게요. 그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으니깐요."

"형은..."

"네?"

"...성우 형은 어땠어요? 어때요? 요즘..."

"성우 씬 잘 지내고 계세요. 일도 자주 들어와서 활동 중이시라는 것 같아요."

"..."

"음, 아프신 데도 없구요. 씩씩하시던데요."


다니엘이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앉은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성우 씨는 덤덤하게, 차분하게 상담 받고 가셨어요."
























성우는 모습을 감춘 후 한 번도, 다니엘에 관한 전화를 걸지도 받지도 않았다. 속상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렇지도 않다. 씩씩하다니 그걸로 성우의 이야기는 다 들은 듯 하다. 그러나 휴대폰의 액정에 알람이 떴을 때 반응이 빨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다니엘을 매니저가 불렀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따라 나섰다. 대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니엘은 괜히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앞에 앉았다.


"PD님은 아직 안 오셨네요?"

"그 전에 잠깐 단 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

"뭔데요?"

"뭐겠냐?"


다니엘이 대표의 눈을 쳐다보자 대표가 휴대폰을 들어올려 보이며 말했다.


"성우 씨가 내 전화를 안 받네."


다니엘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대표님이 성우 형한테 전화를 왜 해요?"


대표는 그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 냉소적인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다니엘 앞으로 종이 몇 장을 툭 던졌다.


"너희들, 서로 연락이 뜸하길래 내가 직접 성우 씨한테 연락 좀 해봤지."


눈살을 찌푸리며 확인해보니 통화 내역은 물론 카톡 내용까지 해킹된 자료가 프린트 되어 있었다. 진절머리가 났다. 다행히 법률 사무소와 연락한 부분은 조회되지 않았다. 이제와 밝혀진들 별 일은 없겠지만.


"우리가 연락을 하건 말건 대표님이 무슨 상관인데요?"

"상관이 왜 없어? 옹성우 찌라시 퍼뜨려도 괜찮은가보지?"

"이거 다 범죄인 건 알아요?"

"니가 지금 그런 거 따질 입장인가?"


눈빛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던 다니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 사람들 앞에서 두통 정도는 일상이다.


"형 바빠요. 귀찮게 해서 좋을 게 뭐가 있어."


일단은 모르는 척 굽히고 들어간다. 당당하게 행동하면 분명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단 걸 눈치챌 테니. 눈치 빠른 변호사가 성우 근황을ㅡ기타 등등까지ㅡ알려주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가해지면 먼저 연락하겠죠."

"마지막 경고야."

"컨디션 좀 죽이지 마요. 이따가 일해야 하는데."


가볼게요. 다니엘이 일어났다. 사무실을 나오며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마지막 경고? 언제까지? 사실은 자기들도 무서운 거 아냐? 대기업 상대로 일 벌리기는 무서우면서 나는 눌러야겠고? 아아, 이제 알겠네. 이 사람들 진짜 속사정을. 피가 머리로 쏠리는지 얼굴이 뜨겁다. 곧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성우가 다니엘의 진짜 사정을 알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회사 뿐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다니엘의 제보를 믿고 조사를 해본 것인지, 또 다른 제보자가 있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 성우가 모든 걸 알고 일을 계획하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다니엘은 주머니 안에서 웅웅 울리는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에 비친 화면을 확인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거절 버튼을 누르고 텔레그램을 켰다.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요]

[네~]


앞으론 전화를 조금 피할게요. 변호사의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한 다니엘이 휴대폰을 닫고 주머니에 넣었다. 마침 광고 촬영 관계자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살갑게 인사했다. 뒤이어 회의실에서는 대표가 나와 그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다니엘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표의 웃는 얼굴이 우습고도 역겨웠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 곳에 조금의 의리도 없어. 무엇보다 당신들을 무서워한 적이 없어. 당신들은 나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용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반대로, 불쌍하고 가여운 건 당신들인 걸. 자기가 판 함정에 스스로 빠지게 됐으니. 조만간 당신들은 날 두려워하게 될 거야. 난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겁쟁이도 아니고, 멍청이도 아니거든.



























































앞으로 나아가려 하면 사람들과 몸이 서로 툭툭 치였다. 발걸음 하나 떼기가 어려웠다. 다니엘을 둘러싼 건 전부 기자들이었다. 다니엘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싶어했다. 오늘 아침 연예계에 한 발 터진 폭탄 하나가 그들에게는 특종 중의 특종이었으니까. 지나갈게요, 다니엘은 그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면서도 여유로웠다.


**엔터테인먼트의 만행. 연예계에 미친 영향. 횡령을 비롯한 온갖 비리들. 그리고 소속 배우를 향한 갑질. 소속 아이돌그룹의 사내괴롭힘. 견디다 못한 소속 배우 강다니엘이 그들을 고소 및 고발하기로 했다고. 아침 일찍 보도된 내용은 이랬다. 이것만으로 회사와 선배그룹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내 손으로 엿먹일 수 있다니. 솔직히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다니엘이 기자들 앞에 똑바로 섰다. 후레쉬의 번쩍임은 더욱 빠르고 거세졌다.



나를 봤겠지.




"강다니엘 씨, 정확한 입장은 언제 어떻게 밝혀주실 겁니까?"

"소송 진행하시는 건가요?"

"**엔터와 합의된 내용인가요?"

"강다니엘 씨! 한 말씀만,"


다니엘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기자들이 사옥 주변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 다니엘은 어깨를 한 번 쭉 털어내며 숨을 내쉬었다. 나를 봤겠지. 그 사람도... 형도 다 들었겠지. 날 지켜보고 있을까? 쿵쿵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알려진 그대로입니다."

"소송은요?"

"소송도 진행합니다."

"만약 패소한다면..."


사옥 안에서 직원들이 뛰어나왔다. 기자 무리를 발견하고 멈칫거리더니 다니엘에게 손짓을 했다. 너 들어와. 얘기 좀 해. 다니엘은 그들을 한 번 흘겨보고는 기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모습을 감췄다. 기자들의 목소리가 커져가지만 어쩔 수 없다.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은 두 손이 차가웠다.










앉아 있지도 못하고 서성이는 대표의 눈동자가 벌겋다. 다니엘이 사무실에 나타나자 성질을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올렸다. 당장이라도 손찌검을 날리려는 몸짓에 직원들이 잡아말렸다. 다니엘은 눈 깜짝 하지 않고 대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 때려보시죠. 그동안 회사 기둥 다 세워준 강다니엘이 뒤통수를 쳤는데."

"말하는 버르장머리, 이 개새끼가..."

"근데 뒤통수 먼저 맞은 건 저에요. 전 연기하려고 들어왔지 회사 기둥 세울 생각으로 들어온 게 아니거든요."

"..."

"성우 형하곤 헤어졌어요."

"저 새끼가 기어이..."

"처음부터 정산 제대로 해 줄 생각 같은 거 없었죠?"

"헛소리 하지 마. 뒤통수 친 건 너야."

"처음부터, 성우 형네 회사한테 덤빌 생각 없었던 거죠?"

"..."

"대답해봐요. 맞잖아."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다니엘을 돌려세웠다. 순식간에 멱살을 잡더니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다니엘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바로 다니엘의 멱살을 잡아 세우자 다니엘에게도 그의 얼굴이 보였다. 아이돌 가수인 선배들 중 하나였다. 그 역시 대표처럼 얼굴이 달아올라 있다.


"개새끼."

"..."

"니가 감히..."


다니엘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더 흥분한 듯 충혈된 눈으로 다니엘을 노려보며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준다. 다니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분이 어때?"

"...뭐?"

"억울해요?"

"..."

"내가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닥쳐, 개새끼야! 다시 한 번 주먹이 날아왔다. 흥분된 상태로 휘두른 주먹은 헛나갔다. 녀석이 주춤하는 사이 다니엘이 빠르게 녀석처럼 멱살을 잡아당겨 주먹을 휘둘렀다. 녀석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그 얼굴을 밟아놓으라고 속삭였다. 까딱하면 코뼈를 부러뜨릴 뻔 했다. 그러나 다니엘의 주먹은 녀석의 턱 언저리에서 멈췄다. 주먹은, 너무 세게 쥔 탓에 핏기가 없었다. 선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볍게 웃는 다니엘의 얼굴이 바르르 떨렸다.


"찍지 마시죠."


다니엘의 냉소적인 목소리에 직원 한 명이 슬그머니 카메라를 치웠다. 다니엘과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한다. 가소롭다. 다니엘을 가지고 놀며 재미 좀 보던 녀석들이, 결국은 다니엘의 손바닥 안에 있는 꼴이다.



내가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아직도 당신들이 내 위에 있다고 생각해?"



녀석은 꽤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그렇겠지. 아무렇게나 굴리고 놀았던 후배가 이렇게 반격을 한 건 처음이니까. 이렇게나 가볍게 제압이 될 줄은 몰랐을 테니까. 다리가 풀렸는지 주저앉고 만다. 사무실에도 적막이 돌았다. 모두가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다니엘을 쳐다본다. 그들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우스운 상황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통쾌하면서도, 한없이 우울한 감정이 다니엘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성우 형이랑 사귀라고 했죠? 그렇게 하면 밀린 정산을 해주겠다고."

"..."

"제가 어떻게 했을 것 같으세요?"

"..."

"성우 형을 시험했어요. 형이 날 정말 사랑하는지. 그 사람 앞에서 계속 연기하면서, 시험하고, 시험하고. 계속 시험만 했어요. 난 도무지 자신이 없어서."


다니엘이 대표 쪽으로 몸을 틀어 가까이 다가갔다. 대표의 굳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허무할 따름이다. 겨우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성우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이. 아니, 어쩌면 다니엘의 그릇도 어디다 내놓을 정도는 아닐지 모른다. 결국 상처를 준 것은 다니엘 자신이니까.


"내 연기 때문에 누군가 상처 입는 건 더이상 못 보겠어요."

"..."

"그래서 끝낸 거에요. 그 사람하고도. 그리고 당신들하고도."

"정산만 해주면 되잖아. 니가 원하는 건 결국 돈이잖아! 이렇게까지 했어야 됐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부터 시작인데 너 하나 때문에ㅡ"

"과연 당신들이 날 그냥 놔줬을까? 전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요. 지금도 봐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절 찍고 있었잖아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들인 걸 너무 잘 아는데, 제가 뭐가 아쉬워서 숙이고 들어갑니까?"

"..."

"저도 당신들 상대로 재미 좀 봐야겠거든요. 어때요. 그동안 저한테 한 행동들이 하나씩 생각나지 않아요?"

"..."

"난 당신들의 그 제안을 받아들인 걸 죽고 싶을만큼 후회해. 그 때의 난 그런 짓을 시작하면 안 됐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형 얼굴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 행동이 잔인했다는걸, 그동안 내가 그 사람 숨통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는걸, 이제야 깨닫는 내가 너무 싫고 역겹다고. 성우 형이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무엇 하나 당신들 하는 짓하고 다를 게 없었으니까."


헤어지자. 성우의 단호하고 깨끗한 그 한 마디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떠나던 그의 뒷모습은, 동경했던 그 모습 그대로 너무도 아름다웠다. 다니엘을 잃은 때야말로 성우는 완전한 것이다. 역시 형은 내 곁에 있으면 안 됐어. 연인으로든, 친구로든, 나는 형한테 필요 없는 것 같아. 더 행복할 수 있어, 형은. 다니엘은 여전히 대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평온한 투로 말했다.


"전화해도 안 받습니다. 법원에서 만나요. 대표님."














기자들의 어수선함이 덜한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다니엘을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용케 그를 알아보고 몰려들었다. 매니저가 손짓하는 걸 봤지만 못본 척 방향을 틀어 차 키를 꺼냈다. 이번에도 기자들은 다니엘 주변을 에워쌌다. 인터뷰를 지금 못해드리는 게 참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며 차 앞까지 왔다. 그 때 변호사가 기자들 틈에 끼지 못하고 서 있는 모습을 스치듯 발견했다. 형이 왜 여기까지 왔어? 생각하면서도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차 키 버튼을 누르고 바로 문을 열었다. 차에 올라타니 기자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휴대폰을 꺼냈다. 차 밖에 서 있을 변호사를 차창 밖으로 대충 찾았다. 시동을 켜니 기자들은 머뭇거리며 물러났다. 다니엘의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들은 다니엘을 포기하고 그의 매니저 쪽으로 우루루 몰려갔다. 매니저가 곤란해하는 얼굴을 흘깃 확인한 다니엘은 속도를 올리며 다시 변호사를 눈으로 좇았다.




어어ㅡ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벽에 차를 그대로 갖다박을 뻔 했다. 갑자기 밟은 브레이크 탓에 몸이 흔들렸다. 흩어진 정신을 붙잡고 핸들을 돌렸다. 출구에 무사히 다다랐다. 그러나 큰 사고를 면한 게 다니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원인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다니엘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 그는 더이상 없었다. 성우. 성우가...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차에서 내려 멀리 가지 못했을 성우를 찾아내서, 그래서,


ㅡ그래서, 뭐. 뭘 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 건 둘째 치고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당장 떠오르는 말 한 마디도 없는데. 주차장을 빠져나온 다니엘은 큰 길로 나가지 않고 차를 적당한 곳에 세웠다. 시동을 끄고 멍하게 앞을 응시했다. 이 상태로 운전을 계속 했다간 아까처럼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아서.


성우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말, 또는 시선. 뭐 하나 건네지도 못하고 그저 그의 앞에 서서, 그의 기척을 느낄 것이다. 겨우 고개를 들면 성우의 눈이 저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주저하던 다니엘은 성우의 손을 겨우 잡아볼 것이었다. 그래. 지금은 그저 성우의 손을 잡아보고싶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손을 잡으면, 어떤 무엇이라도 해볼 수 있는, 잔잔한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지금은 시동을 다시 켤 용기조차 나지 않는다. 차에서 내려 성우를 찾아낼 용기도 없다. 그의 앞에 설 용기가 없다. 형은 날 보러 와줬는데. 아마 그것도 다 용기를 내준 것일텐데. 주차장 기둥 뒤에 서서 다니엘을 지켜보던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마지막으로 봤던 얼굴과 같아서. 생각이 깊은만큼 눈빛도 깊은 형이다. 그 눈빛이 계속 저를 향했으면 했다. 그냥, 자꾸 그런 생각만 든다.













TV를 켜니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예능인데, 성우가 껴있었다. 그새 예능 고정 자리를 꿰찬 모양이다. 성우는 해맑게 웃었다. 정말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 잘생긴 얼굴로 허당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분량은 야무지게 뽑는다. 방송을 보는 내내 다니엘은 자기도 모르게 식식 웃었다. 원래 저렇게 밝은 사람이었나. 그랬지. 그랬던 것 같다. 맞아, 그랬다. 오랫동안 웃는 걸 못 봐서 그렇지. 원래 저런 사람이었는데. 처음 만난 날 지어주던 그 환한 미소처럼.


성우의 예능을 매주 챙겨봤다. 재방송도 자주 보고. 채널을 돌리다 성우의 CF가 나오면 멍하니 감상했다. 이 모든 게 강박적이지 않아 이상했다. 요즘은 웃을 일이 없어 더 그런지도 몰랐다. 이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성우를 만나고 비로소 웃음을 찾았던 다니엘이었으므로. 문득 실소가 나왔다. 한 번쯤은 형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나같은 남잘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그러니까 말이야. 그게 참 이상하지. 지금껏 성우의 반지는 물론 칫솔까지도 버리지 못한 지금의 자신 또한.


최근 게스트로 출연한 방송 촬영장에서 한 연예인에게 대시를 받았다. 그 순간이 생생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뻔뻔하게도 성우였다. 처음 성우와 이별했을 때보다도 더 선명하게 느끼는 것은 집의 빈 공간이다. 정말 꼴이 우습다. 자꾸만 마치 정말 사랑이라도 했던 사람처럼 군다. 오랜 잠을 자면서 꾼 꿈이 아닐까 하는 한심한 생각도 했다.


집을 오래 비운 다니엘이 며칠 만에 들어오면 성우는 자다가도 졸린 눈으로 다니엘에게 다가왔다. 조용한 발걸음이다. 수고했어, 라며 다니엘을 안고 싶어하는 듯 했던 두 팔. 어렵게 뻗은 팔을 가만히 거두곤 하던 그 모습. 다니엘에게도 전해져오던 그 아쉬움과 두려움. 그냥, 못 이기는 척 안아줄걸. 다니엘이 후회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사랑하는 척, 한다고만 생각했지. 형을 사랑해보려고 노력한 적은 없었어. 형이 그렇게 날 사랑하는데 난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않았어. 무서워서 그냥 피하기만 했어. 내가 먼저 시작한 일인데 말이야. 형을 끌어들인 건 나였는데 말이야. 형이 힘들어하니까 그만둬야겠다고만 생각했어. 결국 끝까지 피하기만 한 것 같아.


그렇게 힘들 거였으면, 어차피 줘야 할 상처였으면, 조금이라도 덜 주는 거였는데. 웃는 게 참 예쁜 사람인데 내 곁에선 한 번 제대로 웃어본 적도 없네. 다니엘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무기력하다. TV 속의 성우는 환하게 웃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다니엘도 따라 웃었다. 다행이다. 지금은 그렇게 웃어서. 그리고 고마워. 한심한 포기의 명분을 형이 대신 만들어줘서. 하늘에도 감사하기만 해. 형이 나 같은 건 금방 잊을 줄 아는 사람이라서. 그런 형이라서, 난 놓을 수가 없는가봐.

































"안녕하세요."


변호사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했다. 커피 포트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변호사는 차분하게 컵 두 개에 믹스 커피를 하나씩 넣고 물을 부었다. 곧 사무실 안에 달달한 커피 향이 퍼졌다.




그 애가 날 사랑하면 좋겠어요.




"기분이 어때요? 내일인데."

"하하, 아무 생각도 안 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길 테니까, 자신감 가져도 돼요."

"걱정은 안 해요. 겁도 안 나구."

"다니엘 씨하고는 연락 해봤어요?"

"..."

"뭐에요? 아직 안 해봤어요? 해야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성우가 머쓱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걔가 안 받아줄까봐요."

"안 받긴 왜 안 받아요. 기다렸다는 듯이 받을 거라니까요."

"그것도 이상할 거 같은데요."

"왜?"

"걔한테서 칼답 받아본 지가 오래됐거든요."

"..."

"이젠 다니엘이 안 받아주는 게 익숙해요."

"안 받아줄까봐 무섭다면서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렇게 계속 제자리에요. 빙빙."


성우가 웃으면서 허공에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변호사의 어깨가 축 쳐졌다. 며칠 전 다니엘의 회사를 찾았던 건 성우 때문이었다. 차라리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하고 싶다고 한 건 성우 쪽이었다. 그와 함께 다니엘을 찾아갔다. 그러나 다니엘이 모습을 나타낸 순간 성우는 돌아서버렸다. 왜 그러냐는 변호사의 말엔 늘 그래온 것처럼 멋쩍은 듯 웃었다.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을 땐 숨어버린 성우를 끌고 올까도 생각했지만, 멀찍이 기둥 뒤에 서서 다니엘을 훔쳐보는 그를 보면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주차장에서 나간 다니엘이 기어이 전화를 해오는 바람에 참,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도 난감했다. 형 무슨 일로 왔어요? 급한 일? ㅡ 아니, 아뇨... 기사 떴길래!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 번 보려고 잠깐. 하하. 잘 마무리 한 것 같으니까 난 그만 사무소로 돌아갈게요.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

"저라면 그렇게 못할 거에요. 성우 씨 같은 사람 또 없어요."


성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잠시 말없이 제 앞에 놓인 커피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우가 입을 열었다.


"그럼요. 알아요. 저도 가끔 제 풀에 죽을 정도였는데요. 그동안 모든 게 쉽지 않았어요. 다니엘 앞에선."

"..."

"그 애, 원래 잘 웃는 친구에요. 웃게 해주면 잘 웃어요."

"..."

"다니엘이 웃는 걸 보고 싶어요. 나로 인해 웃었으면 좋겠어요."

"..."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까... 결국 나 때문에."

"성우 씨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왜 성우 씨 탓입니까?"

"달리 누구를 탓하겠어요? 그 애가 나를 아끼지 않았으면 그렇게 힘든 선택 안 했을 거에요."

"..."

"제가 해봐서 알아요."

"성우 씨, 지금도 힘들잖아요."

"힘들어도 마음은 좋아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건데요."

"재판 끝나고 나면 어떻게 하실 거에요? 그 땐 굳이 떨어져 있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다니엘 씨한테 자리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했단 말입니다?"


성우의 눈꼬리가 조금 더 휘었다. 푸스스 소리를 낸다.


"걔는, 저한테 고마워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미안해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다니엘 씨는 잘 내색하지 않으니까."

"전 이상하게 아무 느낌이 안 들어요. 그 애한텐... 고맙다고 하기도 그렇고. 미안하다고 하기도 그래."

"..."

"진짜 힘들고 외로웠는데. 가끔은 그 애가 진짜 미웠는데... 그냥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니엘이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그래주길 바라는 것 같았구."

"그랬겠죠."

"저도 지금 그래요. 다니엘이 그냥 지금을 버텨주면 좋겠어요."

"..."

"저한테 고마워하지도 말고. 미안해하지도 말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주면 좋겠어요."

"..."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나면,"


마치 그 순간을 상상하듯 성우의 얼굴에 몽롱한 미소가 담겼다.


"그냥 웃어주면 좋겠어요. 그 애 웃는 걸 못 보는 게, 난 제일 힘들었으니까."

"..."

"그냥... 나를 더 힘들게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아니, 조금만 더 욕심 부려서,


"그 애가 날 사랑하면 좋겠어요."





















































다니엘은 운이 좋았다.



둘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흐른 시간에 비해 바뀐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니엘이 소속사와의 싸움에서 승소했고, 그 엔터테인먼트를 나오기까지 연예계는 떠들썩했다. 그 뿐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운이 좋았다. 그 기세와 인지도 때문인지 감사하게도 다니엘은 얼마 가지 않아 여러 곳에서 러브 콜을 받았다. 새로운 소속사를 결정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솔직히 재판 때문에 닳을대로 닳아버린 멘탈 회복이 필요했다.


재판을 해보자고 마음 먹은 것도, 재판에 승소한 것도, 전부 성우 덕분이다. 직접 감사 인사를 하고 싶지만, 만나기는 커녕 목소리도 듣기 무섭다. 변호사의 생각과는 달리 재판 전에도 둘은 만나지 못했고, 재판 중에도, 재판이 끝난 뒤에도 성우는 연락이 없었다. 물론 그와의 인연을 멈추기로 한 다니엘 역시 그랬다.


성우가 연결해 준 변호사는 다니엘이 다른 소속사를 알아보는 과정에도 협력했다. 변호사에게는 상담료를 통해 감사를 표현할 수 있지만, 성우에게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게 답답하기는 했다. 완전히 끊어내자고 결심했는데도 미련은 머릿속 곳곳에서 자꾸만 피어났다. 변호사는 어지간히도 둘 사이가 답답한 모양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그 이야기를 꺼냈다. 덕분에 다니엘은 성우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속사 일로 변호사가 다니엘의 집을 찾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와인을 잔에 따르고 나니 자연스레 성우가 떠올랐다. 와인 몇 잔에도 잘 취하던 성우가. 감상에 젖기가 무섭게 변호사가 성우 이야기를 했다. 그만두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늘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마냥 듣기만 했다. 변호사가 하는 이야기는 별 것이 아니었다. 성우의 근황, 성우가 요즘 느끼는 심리 같은 것들. 다니엘의 마음을 알면서도 괜히 부리는 변호사 형님의 오지랖이다.


와인을 입에 머금으니 진한 풍미가 다니엘을 자극했다. 마음을 굳혔다고 생각했는데 방심하면 감정은 어느샌가 축축해져 있었다. 미련. 성우에게. 성우와 함께 했던 시간에. 와인에 취한건지, 추억에 취한건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니엘, 그러지 말고 저랑 어디 좀 갑시다."

"됐거든요. 성우 형한테 데려가려고 하는 거잖아요."

"둘 다 진짜 왜 이래요?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에요?"

"아무도 괴롭힌 적 없는데 형 혼자 왜 그래요?"

"할 말은 많으면서 서로한테 안 하고 나한테 하니까 그렇죠."


앗, 실수. 변호사가 중얼거렸다. 다니엘이 도끼눈을 했다. 저 형, 일부러 저러네.


"성우 형이 나한테 무슨 말을 했다는 거네요, 지금?"

"다니엘 씨가 아니라 저한테 했다니까요?"

"말장난 금지."

"했어도 다니엘 씨한테 말할 생각 없으니까 궁금하면 직접 만나서 들으시죠?"

"해달라고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괜히 생각이 많아져버렸다.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 정신이 몽롱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도 해본 건데.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실수했어.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싶다, 성우 형.



"형. 그럼... 뭐 하나 부탁해도 돼요?"

"뭔데요?"

"형한테 말 좀 전해줄 수..."


다니엘이 말을 멈췄다. 괜한 짓이라 아니다 싶었다. 아니에요, 그냥 관둬요. 다니엘의 말에 간만에 화색을 띠던 변호사의 얼굴이 다시 싹 굳었다.


"말 전해주는 것도 싫고, 말 중간에 멈추는 것도 짜증나는데요."

"그러니까 관두잖아요. 잊어버려요, 잊어버려."

"무슨 말인데요? 들어나보자구요."


변호사의 재촉에 다니엘이 입을 벙긋거렸다. 어쩐지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했다. 다니엘의 말을 기다리던 변호사가 질색을 했다. 가슴을 탕탕 치며 탄식을 해댔다. 이렇게 염장질을 할 거면서 대체 왜 안 만나는 거야, 재판도 끝났는데. 조금 당황해버린 다니엘이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난 성우 형 남자로 좋아한 적 없어."

"네?"

"형도... 형도 알잖아요. 다 연기였다는 거."


변호사도 당황한 것 같았다. 분위기가 이상해 머쓱해진 다니엘이 괜히 와인을 들이켰다. 변호사는 헛기침을 하다 다니엘의 눈치를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왜 혼자 오버하고 그래요? 알고 있었는데."

"오버는 무슨..."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전해주면 되는데요?"

"아니에요, 진짜. 별 거 아니에요."

"둘을 위해서라면 내가 기꺼이 부엉이가 돼줄 수 있어."

"부엉이 필요 없다니까."


이 후로 기억이 없다. 기억나는 장면은 여기까지였다. 눈을 떴을 때 다니엘 자신은 침대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고 거실로 나가보니 완전히 빈 와인 병이 식탁에 놓여 있었다. 와인 잔 두 개는 싱크대에 있었다. 아마 변호사 형님이 넣어둔 것 같았다. 다니엘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잡고 휴대폰을 확인하니 변호사의 문자가 남아 있었다. 그 문자를 보니 어렴풋이 다니엘의 집을 떠나며 인사하는 변호사에게 손을 흔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니엘씨 와인 잘 마셨어요~ 일어나면 해장 잘 하고]


변호사의 문자를 확인한 후 메시지 창을 닫으니 문자 보관함이 떴다. 그와중에 낯선 메시지가 보여 다니엘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냉장고를 열어 숙취 해소 음료를 꺼내 마시며 그 메시지를 확인했다. 즉시 그대로 뱉을 뻔 했다. 그것은, 다니엘 자신이 취해서 모르는 사이에 발송한 문자 메시지였다.



[고마워요]



답장은 없었다.










형한테 말 좀 전해줄 수 있어요? 





















새 소속사에 정착하자마자 바로 새 드라마 캐스팅 제의까지 들어왔다. 조연이지만 마음에 드는 역할이었다. 마음이 가벼웠다. 일이 들어왔다는 것보다는 성우에 대한 잡념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만한 도구가 생겼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좋아, 일에 몰두하다 보면 잡념도 없어질 거다. 분명 성우 형도 내가 자주 방송에 나오기 시작하면 마음을 열겠지. 내가 잘 회복하고 있는 걸 보여주면, 성우 형도 안심하겠지. 시간이 모두 해결해 주겠지. 어쩌면 예전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정식으로 사과할 수 있는 날도 분명 오겠지...


드라마 관계자가 다니엘을 찾았다. 그가 건네는 대본을 받아들었다. 깨끗한 대본을 보니 처음과 같은 설렘이 느껴졌다. 그것은 좋은 영향을 주었다. 새 소속사, 새로운 동료, 그리고 새로운 출발. 심장이 뛰었다. 이런 설렘을 느껴보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어쩌면 성우에 대한 잡념은 어렵지 않게 떨쳐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관계자는 대본을 넘겨보며 눈을 반짝이는 다니엘을 바라보다 말을 건넸다.


"새 환경이라 낯설텐데 적응이 빠르시네요. 다행이에요. 새 출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었어요. 어서 새 작품 하고 싶었거든요."

"아니요! 그 역할 다니엘 씨 아니면 안 됐거든요, 저희도. 거절하시면 어떡하나 했어요~"

"감사합니다. 영광이에요, 진짜."

"다들 기대하고 있는 걸요. 다니엘 씨 만나기만 기다려요. 아, 나머지 배우 분들도 대충 정해졌어요."

"아, 진짜요?"

"조연 분들은 아직 논의 중이구요. 주연 쪽 분들만."

"아아, 동우랑 재희요? 동우는 어느 분이에요?"

"다니엘 씨 절친이라고 들었는데. 일에 대해선 다니엘 씨한테도 꽁꽁 숨기는가 보네요."

"네?"


다니엘이 대본을 내려놓았다.


"옹성우 씨요."

"..."

"동우 역할요. 옹성우 씨가 하게 됐어요."

"...네?"

"주연은 오디션으로 진행했는데, 성우 씨가 제일 맞는 것 같더래요. 실력이야 이미 충분히 입증됐고."

"저... 저어,"


눈 앞이 하얗게 변했다. 다니엘의 손바닥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방황했다. 말 그대로, 혼란 그 자체. 텅 비어버린 머릿속은 그 어떤 생각도 해내지 못했다. 간신히 떠오르는 것은 오래 전 주차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성우의 모습. 그리고 얼마 전 성우에게 보낸 한 줄의 문자 메시지. 잡념 해소는 무슨... 다니엘의 모습을 본 관계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되게 반가워하실 줄 알았는데..."

"아! 아뇨! 당연히 반갑죠. 놀라서요. 놀라서. 형이 동우 연기하는 거 상상하니까 좀 웃기기도 하고..."

"개인적으론, 진짜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쵸?"

"네. 잘 할 거 같아요. 형이야 잘 하겠죠. 아, 성우 형도... 알아요? 저 같이 하는 거..."

"모르실걸요? 오디션 진행기간이 다니엘 씨 캐스팅 전이기도 했구. 아마 성우 씨도 오늘 안에 아시겠죠?"


겁이 난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 가까워지니 겁이 났다. 그러나 더 빨리, 더 가까이서 그 사람을 살피고 싶어졌다. 괜한 용기는 내지 않을 것이다. 잔뜩 겁을 먹고, 잔뜩 긴장한 상태로, 그 사람을 만날 것이다. 더이상 연기가 아닌 온전한 내 모습 그대로.




"성우 형한테 빨리 연락해야겠어요."




아마 성우 씨도 오늘 안에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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