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청초한 목련 향이 지민의 집 근처 산에서 물씬 풍겨오는 3월. 어느새 한층 따뜻해진 날씨가 봄이 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호석님은 언제 오세요?”

구운 베이글에 치즈를 발라 지민에게 건네며 정국이 물었다. 

“아마 내일쯤 오실 거예요.”

“자꾸 어딜 그렇게 나가시지? 얹혀사는 건 난데.”

정국이 웃으며 지민의 입가에 묻은 치즈를 닦아주며 말하자 지민도 방긋 웃었다.

“우리가 너무 다정하니까 민망한가 봐요. 후후”

몇 달 만에 옛날처럼 말꼬리를 살짝 늘이며 귀엽게 말하게 되었고, 눈까지 휘며 자주 웃어주는 지민에게 점점 더 깊게 빠지고 애가 타는 정국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민은 애교까지 늘고 있어 가끔은 적응을 하지 못한 호석의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길 정도였다. 

“몇 시에 출발?”

“바로 나가야 해요. 청주까지 가야 해서.”

조금 아쉽다는 듯 지민의 코에 귀여운 주름이 잡혔다. 정국은 웃으며 지민의 코에 입을 살짝 맞춰 주었다.


“그럼 고등학생 연기하는 거예요?”

“우선 성인 되었을 때 장면을 다 찍고 난 뒤 학생 시절을 찍어야 해요. 머리 때문에.”

길게 자란 앞머리를 가리키며 정국이 말하자 지민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긴 머리가 좋은데”

“장군님이 그리운 건가.”

이번에는 삐진 척 정국이 말하자 지민이 빙그레 웃고는 정국의 볼을 잡고 입을 살짝 맞췄다.

“오늘 뭐해요?”

“나는 에세이 하나 부탁받은 거 있어서 글 작업할 것 같아요.”

“응,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정국이 식탁을 정리하고 나가자 지민은 자신의 방 책상에 앉아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봤다.

지민은 오랜 세월을 보는 자로 살았기에, 본다는 것이 제일 중요했고, 정인을 볼 수 없었기에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큰 욕망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보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정인의 성격과 정국의 성격은 아주 똑같으면서도 많은 부분이 달랐다. 하지만 그래서 지민은 더욱 그가 좋아졌다. 어린 시절의 목숨 같았던 사랑과는 조금 다른, 조금 포근하고 설레고 마음이 속까지 다정해지는 그런 느낌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지민은 정국에게 첫사랑과 두 번째 사랑을 하는 느낌이라고 말 하면 정국은 그럴 줄 알았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

지민은 그런 그의 미소가 또 좋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 두 사람의 알콩달콩 함에 호석도 늑대도 자꾸만 두 사람을 피해 다녔다.



지민이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쓰는 사이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정국에게 선 잘 도착했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여보세요. 호석 씨 어디예요?”

“집에 거의 다 와갑니다.”

“와인 한 병 사다 줄래요?”

“오늘 두 분...”

“아 뭐예요. 호석 씨 랑 둘이 한잔하려고요.”

“네. 하하. 금방 갈게요.”



지민은 오래간만에 호석과 둘이 다정하게 시간을 보냈다. 요즘 정국 때문에 호석에게 신경을 써 주지 못한 것 같아 마음에 걸렸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삶의 한 막이 마무리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호석이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민도 동의가 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의 은은한 조명에 비춘 호석의 얼굴이 약간 쓸쓸해 보였다.

“이상하게 자꾸 옛날 생각이 나요.”

호석의 말에 지민도 공감이 되는 듯 웃었다.

“나도 자꾸 그래요.”

“저 용서하셨어요? 평생 미워할 거라고 하셨잖아요.”

“응? 내가요? 언제..”

“우리 기도하는 날.”

“아..그 옛날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어요?”

“하하하 농담이에요. 그런데 솔직하게. 마음에 두긴 했어요.”

지민이 살짝 슬픈 표정으로 호석을 봤다.

“왜냐면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어서. 그래서 가슴에 남더라고요.”

“호석 씨, 옆에 있어줘 고마워요. 진심으로.”





*



“지민 님 서두르십시오.”

“네? 어디 가는데요?”

“급하게 기도를 하러 떠나야 합니다.”

“갑자기요?”

호석은 어전을 나서자마자 달려가 지민을 붙잡고 질질 끌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저 옷이 랑 좀 챙기고 장군 님하고 폐하한테도..”

“폐하께서 귀빈 마마의 꿈이 좋지 않다고 빠르게 기도를 하고 오라고 보내셨습니다. 필요한 건 제가 대충 챙겼습니다. 가시죠.”

“아…”


호석은 길게 말하면 자신과 가까운 지민이 눈치를 챌 듯해 무작정 지민을 말에 태워 봉황산으로 달렸다.

궁에서 봉황산 기도터 까지는 약 3일이 걸리는 길이었다. 가마도 타지 않고 잠도 제대로 못 잔 채 겨우 산에 도착했을 때 지민도 호석도 너무 많이 지쳐 있었다.

기도터에 간단하게 지어 놓은 숙소에서 요기를 하고는 지민은 쓰러져 누워 깊은 잠이 들었다. 호석은 오랜 승마에 쓸려 까진 지민의 허벅지에 연고를 발라주고 밤새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눈물을 계속 뚝뚝 흘렸다. 어마어마한 무게감과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긴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다음날부터 지민은 산에 있는 선녀탕에서 깨끗하게 목욕을 한 뒤 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조상들에게 나라가 잘 되기를 폐하와 장군님이 항상 건강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호석은 한 걸음 뒤에서 그런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 신이 있다면 이런 비극을 주지 않았을 것이고 신이 있다면 큰 소리로 고함을 치고 화를 내고 싶었다.

그렇게 3일이 지난 후 궁에서 떠나온 지 일주일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기도를 하고 있던 지민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지르고 벌떡 일어났다.


“아아아아아아!!!!!!!!!!!!!!!!!!!!!!!!!!!!!!!!! 안돼!!!!!!!!!!!!!!!!!!!!!!!!!!!!!!!!!!!!!!!!!!!!!!!!!!!!!!!!!!!!!!!”


어마어마한 절규와 함께 그 자리에 쓰러지는 지민을 보고 호석은 너무 놀라 달려가 그를 안았다.


“지민 님, 주인 님!!!! 왜 이러세요!!!!”

“아….아….장군 님이!!! 장군님 이!!!!”

지민의 부릅뜬 눈이 부들부들 떨리며 동공이 미친 듯 흔들렸다.

‘아아….장군님이 떠나셨구나…….너무 깊게…..사랑하여…..느끼시는 구나……’

호석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에 지민을 부둥켜안았다. 한참 발작을 하던 지민이 벌떡 일어나 기도터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했다.

호석이 그런 지민의 허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안됩니다.”

“놔요!!! 놓으세요!!!”

“안돼요. 주인님 안됩니다”

“놔요!!!!! 이거 놔!!!!!!!!! 장군님께 가야 해!!!!!!!!!!!!!!!!!!”

지민은 몸부림을 치고 호석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호석의 힘에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놔!!!!!!!!!!!!!!!!!!!!!!!!!!!!!!!”


지민은 목이 터져라 외치며 급기야는 호석을 발길질하고 때리고 깨물며 꼬집어 댔다. 호석은 온몸을 맞아 가면서도 지민을 놓지 않았다.  

“하룻밤만....하룻밤만 참으세요....제발......”

호석도 같이 울부짖으며 지민을 잡고 매달렸다. 한참을 악을 쓰던 지민의 몸은 며칠 간의 기도와 여행으로 약해졌기에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내렸다.


“아...왜 그래.....나 보내줘.....제발......”

“안 돼요 내일, 내일 가요.”

“알고......있었어?............그래서...........나 여기.....데려온 거야?”

“죄송해요....죄송해요.....”

“하아.......아........너 평생 용서 못 해.....”

“죄송해요......”

호석은 지민을 꼭 안은 채, 지민은 온몸을 기도터 밖으로 향한 채 쓰러져 누워 다음날까지 밤새 흐느끼고 또 흐느꼈다.




다음날 호석이 지민을 놓아주자 지민은 미친 듯 달려 산을 내려가 말을 타고 궁으로 향했다.

어마어마한 속도에 호석이 따라가기도 벅 찰 정도였다. 호석은 이를 악물고 지민의 뒤를 좇아갔지만 호석이 타고 있던 말이 지민의 말의 발굽에서 날아온 돌을 밟고는 발목을 삐어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호석은 그대로 말을 버리고 미친 듯 달려 지민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멈출 수 없었다.

넘어지다 달리고 넘어지다 달리고 지민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아도 호석은 토할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지나가던 마을에서 말 한 마리를 얻어 타고 미친 듯 내달렸어도 지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한참을 뒤 쳐져 있었기에 호석은 가슴이 타 들어갔다.


지민은 궁에 다다르자 그만 급하게 말을 세우고 말았다. 다 타서 뼈대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궁 앞에 자신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까만 재가 되어 타 들어가 널브러져 있는 처참한 지옥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지민은 말을 돌려 궁을 지나 광야로 달려 나갔다. 지민의 곁으로 시체들이 썩어가며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수많은 영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 보였다. 까마귀들은 축제라도 벌인 듯 모여 음산하게 울어 댔다.

“아.......흑흑....흑....흑”

계속 눈물이 나와 눈앞을 가렸다. 끔찍함에 몸서리가 나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체들이 쌓여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을 곳에 다다르자 지민은 말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장군님......장군님...........”

분명 그의 정인은 최 전방에 있을 것이다. 그라면 용맹하게 싸우다 떠났을 것이다. 지민은 그가 어디쯤에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지민은 자꾸 무릎이 꺾여 제대로 걸을 수 없어 몇 번을 넘어지다 걷고 넘어지다 걷고 하며 자신의 정인을 찾아 헤맸다.

“제발...영혼이라도....기다려줘요......”

“마지막 인사라도...하고 가 줘요.....”

“너무 늦게 와 미안해요.....”



그때 저 멀리 하얀 백호의 털이 가련하게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지민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백호를 만졌다.

이미 차갑게 굳어 딱딱 해져 버린 채 자신의 주인 옆에서 주인을 바라보며 잠들어 있었다.

“야옹아....폐하....”

백호의 발끝에 닿아 있는 윤기의 시신이 지민의 눈에 닿았다. 

지민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온통 상처투성이의 얼굴과 몸이 얼마나 큰 전투였는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하아.....폐하.....흑흑....”

지민은 윤기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더 많이 해줄걸, 뽀뽀 해달라며 조르는 폐하에게 입을 삐죽이며 싫다고 도망 다닌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지민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봤다.


순간 어지럼증이 돌아 혼절할 뻔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넘어졌다. 

자신의 정인을 보았다. 정인의 몸 만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지민은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정인의 몸을 만졌다. 손에는 아직 화용도가 굳게 잡혀 있었다.


“아....아........아...........”

지민은 말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몸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을 뿐이었다. 지민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하아아아......”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까마귀가 연한 그의 눈을 노리며 다가오자 지민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그의 머리를 품에 안고 새들을 날려 보냈다.


“아아아아아아!!!!!!!!!!!!!!!!!!!!!!!!!!!!!!!!!!!!!!!!!!!!!!!!!!!!!”


지민의 비명소리가 온 광야에 퍼져나갔다.

지민은 그의 머리를 잡아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하아...하아......”

지민은 금세라도 쓰러질 듯해 숨을 계속 고르며 버텼다.


“일어나봐요 당신 왜 눈 감고만 있어요 응? 내 사랑, 날 봐줘요....”

“흐흑흑..안돼요.......빨리 날............봐요.......아아........제발............웃어줘요.......그 어여쁜 눈으로......”

“제발......제발....제발........”

“사랑해요. 사랑해요.......사랑해요...아......제발.......”



“내 사랑..나의 은인....나의 생명...나의 낭군님.......”

“당신 없이는 나도..나도 더 이상 살 수 없어요.....흐흐흑

“제발....나도 데려가요..아.아......같이 가요....흑...흑...기다려요....”


“내..사랑..눈을 떠요....제발…”


“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지민은 잘린 그의 머리를 부여안고 며칠 밤을 울고 또 울고 앉은 채로 쓰러졌다 다시 깨서 울고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머리는 하얗게 세 버리고 눈에는 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가, 고통스러우냐.”

지민이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이미 눈에는 초점이 없이 영혼을 잃은 상태였다.

“어찌해줄까”

“죽..여 ....주시오.”

목이 깊게 잠겨 쇳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 자결을 하면 구천을 떠도느라 정인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지민이 멍 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쭈그려 앉은 노인을 바라봤다.

“그래도 좋으냐?”

지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계속 살면 너는 85세까지 살 터이고, 결국 시간이 엇갈려 정인을 만날 수 없겠구나.”

넋이 나간 지민이 힘 없이 웃었다. 모든 것을 놔 버린 듯한 웃음이었다.

“만나게 해 주랴?”

지민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어떻게…”

“영생을 주마. 환생하는 정인을 만나도록.”

“하....왜.....”

“네 울음이 내 마음을 울렸다고 치자.”


지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못 할 것이 없었다.

“대신 너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야. 그래도 괜찮은가?”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절대로.

노인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지민을 보고 웃었다.


“계약의 증표로 너의 눈물은 내가 가져가마. 절대로, 두 번 다시 넌 눈물을 흘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하겠느냐? 이 계약을”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웃으며 지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남은 생 잘 살아가 보시게.”

연기처럼 사라진 노인의 목소리가 지민의 귀에 계속 울렸다. 


‘이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꼭 찾아내야 한다. 꼭 다시 만나야 한다.’



지민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자신의 앞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호석이 엎드려 울고 있었다.

“호석, 나 도와줘요. 장군님 하고 폐하 묻어드리게.”

호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창백하고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지민은 그와 오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를 무척 사랑하지만 아직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탈진에 가까운 상태였고 맨손이었지만 손톱이 뒤집어지도록 땅을 파서 얕게라도 두 사람과 백호를 묻고 돌을 주워 위에 쌓았다.

호석은 끝도 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이제 지민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계약이 시작된 것이다.

호석은 지민을 부축해 그곳을 빠져나왔다. 지나쳐 오는 수많은 시체들도 다 가족이고 형제였기에 묻어주지 못하고 두고 오는 것이 두 사람의 마음에 큰 한이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주 길고 오랜 방랑을 시작했다. 영생을 얻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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