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극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Melanie Martinez - Teacher's Pet

LUNA님 :)

드라큘라

Dracula
18




버스에서 내린 여주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 건물로 들어섰다.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던 일들이 모두 해결되니 출근하는 게 기뻤다. 대학교를 다닐 때 윤기와 마주치곤 했던 면역학 수업을 다시 듣는 느낌이었다. 그때보다 더 자주, 더 많이 부딪히게 되었으니 당연했다.

1층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여주가 윤기를 발견하고 발소리를 죽였다. 살금살금 걸었지만 이미 기척을 느낀 윤기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여주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며 제대로 걸음 했다. 윤기가 자연스럽게 여주의 등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발소리 들렸어요? 최대한 소리 죽였는데."

"아니. 냄새로."

"냄새요?"

"살냄새."



윤기가 씩 웃으며 말했다. 말은 바로 하죠, 피 냄새면서. 여주가 똑 부러지게 말하니 윤기가 검지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도 참기 힘들어요? 여주가 물었다. 윤기가 고개를 저었다. 사고 이후로 여주의 피 냄새는 더 이상 뱀파이어의 욕망을 자극하지 않았다.



"냄새는 계속 날 거 아니에요."

"나지."

"..."

"잃을뻔하고 나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게 됐을 뿐이야."



기분이 좋아진 여주가 미소 지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둘만 있던 복도에 누군가 나타났다. 여주가 황급히 윤기에게서 떨어져 섰다. 윤기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게 벌써 세 번째인 영업팀 직원이었다.

영업팀 직원이 여주를 발견하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예의상 웃던 여주가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윤기는 무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쪽만 보고 있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먼저 들어간 윤기가 15층을 눌렀다. 12층을 누른 영업팀 직원이 여주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여주씨 저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네."

"친해져야 밥 먹는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친해질 수 있어요?"

"어……. 제가 낯을 좀 가려서."

"제가 낯 안 가려요. 분위기 어색하게 안 하구, 여주씨 웃게만 만들 자신 있는데. 밥 한번 같이 먹어주면 안 될까요?"






"안 먹는다는데."

"..."

"굉장히 거슬리게 하네."



…네? 영업팀 직원이 멍청한 표정으로 윤기를 돌아봤다. 윤기가 턱짓으로 막 12층에 도착해 열린 문을 가리켰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린 직원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뒤를 돌았다. 윤기가 보란 듯이 여주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놀라 크게 뜬 눈은 금방 닫히는 문에 의해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여주가 대체 엘리베이터에서 왜 그런 짓을 했냐고 툴툴댔다. 윤기는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회사에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냐는 잔소리가 계속됐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여주가 윤기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윤기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여주가 모른척하며 직원들에게 인사했다. 쳐다도 보지 않고 제 자리에 앉는 여주를 보며 윤기가 헛웃음을 쳤다.

여주가 컴퓨터를 켜고 업무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저를 쳐다보는 수많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직원들 모두 여주와 다른 한곳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윤기가 있었다. 팀장실에 들어가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기대서서 여주를 쳐다보는 윤기가.



"…하실 말씀 있으세요?"



티 내지 말고 들어가라는 강한 뜻을 담아 여주가 물었다. 윤기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여주의 자리로 다가왔다.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그만의 묵직한 향이 또다시 여주에게 훅 들어왔다. 여주가 저도 모르게 의자를 뒤로 뺐다. 윤기가 여주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없는데요."

"..."



차라리 있다고 했으면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굳지는 않았을 텐데. 여주가 저도 모르게 눈을 굴려 직원들의 눈치를 봤다. 당연히 모두가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여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브레이크 없는 성격인 걸 잠시 잊었다. 교수와 학생으로 만났을 때도 이랬었는데. 남들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여주만 보고 행동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었다.



"…그러면 왜,"



윤기가 씩 웃고는 걸터앉은 책상에서 내려와 팀장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직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여주의 자리로 몰려왔다. 팀장님이랑 뭐야?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어질했던 여주가 말을 얼버무렸다.



"좀 전에 뭐 하신 거예요?"



직원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여주가 팀장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따졌다. 서류를 보던 윤기가 빙글 의자를 돌려 여주를 봤다. 입가에는 웃음기가 가득 묻어있었다.



"왜? 뭐 잘못했나."

"몰라서 물으세요? 제가 티 내지 말랬잖아요. 엘리베이터에서도 그렇고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고! 제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이미 팀장님이랑 사귀는 건 기정사실화됐다고요."

"잘됐네. 그걸 노린 건데."

"..."

"회사 사람들 넘어뜨리고 괴롭히면 싫어할 거잖아."

"그거야 당연하죠."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저를 위해서 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역시 똑똑하네."



칫. 여주가 입을 댓발 내밀었다. 그거 말하려고 온 거야? 윤기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렇기는 한데…. 여주가 말끝을 흐렸다.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코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왜…. 사람들 들어오면 어떡하려고요."

"다 들려. 가까이 오면."



윤기가 검지로 제 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윤기를 밀어낼 핑곗거리가 없었던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가 여주를 가볍게 안아 올려 책상에 앉혔다. 여주의 허리를 감싸 안은 윤기가 입술을 짧게 맞추고 떨어뜨렸다. 여주가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더니 윤기의 목에 양팔을 두르고는 다시 입술을 부딪혔다. 둘의 숨이 점점 가빠지고 힘에 밀린 여주가 반쯤 누운 자세가 됐다. 윤기가 여주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어 제 쪽으로 세게 당긴다.



"넘어져."

"..."

"…방해꾼들 왔네."



윤기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팀장실 바깥을 쳐다본다. 여주가 영문을 모르고 윤기를 따라 문을 쳐다봤다. 잠시 후 사무실로 들어온 직원들 때문에 소란스러워진다. 윤기가 아쉬운 얼굴로 팔을 풀었다. 여주가 걸터앉은 책상에서 내려왔다.



"종종 들어와."

"..."

"안 그럼 아까처럼 내가 갈 거니까."



장난스러운 말투에 여주가 인상을 썼다. 윤기가 웃음을 터트리며 팀장실 문을 열어주었다. 사람들 앞에서 또 곤란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소문은 퍼지고도 남았겠지만. 직원들이 팀장실에서 나오는 여주를 흘끔거렸다. 일들 보세요. 윤기가 웃음기를 싹 지우고 직원들에게 말했다. 여주가 고개를 절레 저으며 제 자리에 앉았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학술팀장 민윤기와 한여주가 사귄다는 소문이 회사에 쫙 퍼졌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던 둘이라 사람들의 흥미도도 매우 높았다. 여주에게 관심을 보이던 남직원들이 싹 사라졌다. 아마 이게 윤기의 계획이었으리라. 여주는 그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회사 내에 소문이 돌던데……."



팀장급 회의가 끝나고 이사가 불편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직감적으로 여주 이야기를 알아챈 윤기가 고개를 들었다. 오히려 눈치를 보고 있는 건 이사 쪽이었다. 누가 보면 소문의 주인공이 윤기가 아니라 이사라고 생각될 정도로.



"아무래도 사내 연애는 지양하는 쪽으로,"

"..."

"아니, 뭐. 공사 구분만 확실하다면야 크게 문제는 없겠지만."



픽 웃은 윤기가 짧게 목례했다. 당당한 태도에 몇몇은 헛웃음을 쳤다. 회의실을 빠져나오며 윤기가 코웃음을 쳤다. 별 같잖은 애송이들이 훼방을 놓으려니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 누구도 한여주를 향한 마음을 우습게 볼 수 없었다.



"한여주씨 어디 갔습니까?"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여주의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윤기가 앉아있는 직원 아무나를 잡고 물었다. 한여주씨요? 아까 거래처 전화 받고 나갔는데요. 직원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거래처요? 거래처 어디요."

"어, 어디였더라?"

"..."



윤기가 무표정으로 답을 기다리니 겁먹은 직원이 여주 책상에 올려진 명함 몇 개를 뒤적거렸다. 아! 직원이 명함 하나를 찾아 윤기에게 건넸다. 여기서 연락해 올 이유가 없는데. 윤기가 눈썹을 치켜뜨며 명함을 내려다봤다.



"모르겠어요. 거기서 전화 받고 나가시더라고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윤기가 명함을 계속해서 내려다보며 팀장실로 들어왔다. 회의록을 대충 책상에 내던졌다. 넥타이를 풀어 내리던 윤기의 시선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쪽지였다. 여주인가 싶어 쪽지를 들어 올린 윤기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황상준 - My Name (no rap ver.)

꼬오옥 틀어주세요





눈을 떴을 땐 어두컴컴했다. 여주가 잘 보이지 않는 흐릿한 눈을 선명하게 만들려 몇 번이나 감았다 떴다. 겨우 확보된 시야로 본 광경은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다 무너져가는 오두막이었다. 손목이 불편해 움직였다. 무언가로 꽉 묶여 피가 통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거래처 전화를 받고 나왔고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거기까지가 마지막 기억이었다. 주변이 캄캄한 걸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난 게 확실했다. 대체 누가 나를 여기에. 인상을 쓴 여주의 뇌리를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신생 뱀파이어.



"안녕? 일 년 만이지, 우리?"



텅 비어있던 공간에 태형이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태형을 보자마자 여주가 발버둥 쳤다. 그러나 손과 발이 두꺼운 기둥에 단단히 묶여 도망치기란 불가능했다. 태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 가려고 그래."

"..."

"네 남친 올 때까지 못 가, 너."



까슬거리는 밧줄에 긁혀 손목이 쓰려왔다. 여주가 인상을 쓰며 더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태형이 여주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고개를 돌리는 여주의 턱을 거칠게 제 쪽으로 당겼다.



"재미없게 복수하려나~ 아쉬웠는데 네가 마침 기억을 찾았지 뭐야?"

"..."

"본인을 기억도 못 한 채 죽어가는 걸 보는 것보다, 서로 애틋할 때 죽는 게 그 새끼가 더 괴로워하지 않겠어?"



태형이 얼마나 제 주위를 맴돌며 정보를 얻었을지 상상이 간 여주는 소름이 끼쳤다. 킬킬거리던 태형이 일어섰다. 일어서는 반동에 왼팔 옷소매가 힘없이 팔랑거렸다. 그때 잘려버린 팔. 여주가 없어진 태형의 왼팔을 힘껏 노려봤다.

…탈출해야 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여주가 주변을 둘러봤다. 누군가 아주 오래전 살았던 흔적이 가득한 오두막이었다. 그러나 묶은 밧줄을 끊을 수 있는 날카로운 물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여주가 중간중간 고개를 돌려 태형의 동태를 살폈다. 태형은 벽에 붙어있는 깨진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날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거든. 그 새끼 드라큘라잖아. 드라큘라를 죽인다면 이 세계에서도 내 위상이 좀 살아나지 않겠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못 죽일 거라고 생각해?"



태형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여주를 돌아봤다.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여주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태형을 쳐다봤다.



"네가 여기 온 지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어. 아직까지 찾지 못하는 거 보면 해볼 만한 싸움인 것 같은데?"



캄캄한 바깥이 태형의 말이 맞는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여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태형은 혼선을 주기 위해 곳곳에 여주의 냄새를 묻혀놨다. 아마 벌써 몇 번이나 헛걸음했을걸. 태형이 목을 젖혀가며 크게 웃어댔다.



"네가 지금 있는 그곳이 가장 좋은 자리야."

"..."

"네 남친 죽는 걸 구경하기에."

"지랄 마."



여주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한껏 올라가 있던 태형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태형이 순식간에 여주의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여주의 목을 움켜쥔 채 들어 올렸다. 묶여있던 탓에 손발이 빠질 것만 같은 고통에 여주가 몸부림쳤다. 태형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래, 이 냄새.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넌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야."

"……놔, …줘."

"그 자식 죽이고 나서 천천히 먹어줄게. 아마 내 평생 최고의 식사가 되겠지……, 컥."




"오랜만이네."



어디선가 나타난 윤기가 태형의 목을 잡아채 여주와 멀리 떨어진 벽으로 밀어붙였다. 태형이 인상을 쓰며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엄청난 힘에 밀려 빼낼 수 없었다. 윤기의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때 널 죽였어야 했는데."

"안 죽인 게 아니라 못 죽인 거지. 꼴에 자존심은."



가까스로 벗어난 태형이 목을 매만지며 읊조렸다. 그래, 못 죽인 거지. 윤기가 으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그때는 한여주와 한여주의 부모. 지켜야 할 사람이 셋이나 되었으니까. 지금은 여주 하나였다. 불리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때보단 나았다.



"한 팔로 사는 건 불편하지 않았고?"

"…개새끼가."

"우리 둘 다 페널티 하나씩은 가진 거네."



윤기의 말에 태형이 비열하게 웃으며 여주를 쳐다봤다. 그 앞을 가로막은 윤기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막 시작되려는 싸움에 태형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아니지."

"..."

"이래야 진짜 페널티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태형이 품 안에 숨겨두었던 단도를 꺼내 여주를 향해 던졌다. 단도는 여주의 왼쪽 가슴에 정확히 명중했다. 엄청난 힘에 밀리고,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여주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충격받은 윤기가 일초 만에 이동해 쓰러지려는 여주를 받아냈다. 칼에 맞아 뚫린 가슴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한여주."

"피, 냄새. 나잖아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윤기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뒤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났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급하게 지혈한 윤기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태형의 목을 움켜쥐었다.



"…네 손에 묻은 피 말이야. 그거라도 좀 닦고 오지 그래?"



윤기가 대꾸 없이 손에 더욱 힘을 쥐었다. 태형의 목선을 따라 금이 가기 시작했다. 팔을 잘릴 때와 같은 수순이었다. 목을 꺾어 윤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태형이 여주에게 달려드려 했다. 뒤에서 태형을 잡아챈 윤기가 그의 목 위로 올라탔다. 다리로 목을 졸랐고 양손으로 머리통을 잡고 뜯어내려 했다.

여주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몸을 꿈틀거렸다. 그 미세한 행동을 눈치챈 윤기가 여주 쪽을 봤다. 그 틈을 타 빠져나온 태형이 윤기를 넘어뜨렸다. 너도 똑같이 팔 한쪽 없는 채로 살아봐. 태형이 번뜩이는 눈으로 윤기를 내려다봤다. 윤기의 왼팔이 쩌적거리며 금이 가고 있었다.





"………미친 거야?"



태형이 제 등에 박힌 칼을 빼내며 여주를 돌아봤다. 여주가 제 가슴에 박힌 단도를 빼내 있는 힘껏 던진 거였다. 그리 깊게 박히지도 않았고 애초에 뱀파이어에게 타격감은 제로였다. 그러나 칼에서 묻어 나오는 여주의 피 냄새는 태형을 미치게 했다. 태형의 눈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칼에 묻은 여주의 피를 핥았다.

그 틈을 타 윤기가 태형의 허리를 꺾었다. 뒤로 반쯤 접혔음에도 불구하고 태형은 오로지 여주만을 보고 있었다. 혀에 닿은 여주의 피와 코끝을 찌르는 냄새는 그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했다. 허리를 꺾은 윤기가 이어 태형의 목을 꺾었다. 목과 몸이 분리되려 하고 있었다. 뚜둑거리고 갈라지는 끔찍한 소리가 오두막에 퍼졌다.

끔찍한 광경과 가슴에서부터 퍼지는 고통을 참지 못한 여주가 두 눈을 감았다. 이내 뺨을 감싸는 부드러운 느낌에 실눈을 떴다. 윤기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여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주가 윤기의 어깨너머를 바라봤다. 산산이 조각난 몸뚱어리를 보자마자 윤기가 여주의 얼굴을 당겨 제게 시선을 고정했다.



"…보지 말고 나 봐. 병원 가자."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 윤기가 여주를 안아 들려 했다. 여주가 윤기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냈다. …왜. 윤기가 여주를 내려다봤다. 이미 그 주변은 피바다였다. 나무판자와 윤기의 옷이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심장에 꽂혀버린 단도를 빼내 태형에게 던졌으니 여주에게 남은 시간은 일 분도 채 되지 않았다.



"……이미, ……늦었어요."



힘겹게 말을 뱉는 여주의 입에서도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말하지 마. 윤기가 울음을 참아내며 피가 멈추지 않는 여주의 가슴을 바라봤다. 염력으로 어떻게든 터져 나오는 피를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뱀파이어가 된 이후 가장 많이, 가장 오래 피와 맞닿아있었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여주가 품 안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나, ……봐요."



여주가 뚝뚝 끊기는 말을 뱉었다. 경련을 일으키는 손을 겨우 들어 윤기의 뺨을 쓸어내렸다. 윤기의 얼굴도 여주의 피로 범벅이 되었다. 여주의 피와 윤기의 눈물이 섞여 흘렀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속에서만 맴돌던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했지만 윤기의 얼굴이 점차 흐릿해졌다.



"제발. 눈 떠봐."



윤기가 축 늘어진 여주를 붙들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건 윤기의 수많은 계획에 전혀 포함되지 않았던 일이었다. 여주를 절대 다치게 만들지 않으려 했다. 나이가 들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동반자로서 여주의 곁을 지키려 했다.

더 이상 웃는 여주의 얼굴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분노와 슬픔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대로 세상과 등져도 된다고 생각했다. 한여주가 없는 세상이라면 살아있는 송장과도 같았다. 여주를 끌어안은 윤기가 괴로움에 울부짖었다. 그때 아주 미약하게나마 여주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숨이 끊기지 않은 거였다.



윤기가 여주를 빤히 내려다봤다.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되풀이되는 저주를 사랑하는 이에게 전달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여주를 만나고 처음으로 인간다워진 마음은 다른 말을 외치고 있었다. 함께하고 싶은 욕심이 윤기를 지배했다. 몇백 년, 아니, 몇천 년이 될지 모르는 세상을 같이 살아가고 싶었다. 영원히. 아주 오래도록.



"나 원망하지 마."

"..."

"………아니. 그냥 원망해."



윤기가 여주의 가슴을 세게 물었다. 칼이 박혔다 나온 구멍으로 드러난 심장으로 윤기의 독이 퍼졌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피를 참아낸 윤기가 여주의 몸에 박았던 송곳니를 뺐다. 뱀파이어의 독은 심장을 타고 여주의 혈관을 따라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갈기갈기 뜯긴 심장은 제 조각을 찾아 원형의 형태로 돌아갔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구멍으로 쏟아지던 검붉은 피가 멎었고 찢어진 피부는 바늘로 꿰매는 것처럼 연결되기 시작했다.

온몸을 순환하던 피가 말라가기 시작했다. 피부는 죽은 시체처럼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심장이 세차게 뛰다가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심장이 완전히 멎어가고 있었다. 죽어가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여주는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인간의 생을 끝내고, 뱀파이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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