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즈가 6번지는 언제나 경찰 사이렌 소리와 함께 밤을 시작했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다급해지는 발걸음 소리들과 경찰들의 고함소리가 커졌다.

몸을 낮추며 조심스럽게 걷던 바이는 앞에총을 들고 경계태세인 경찰을 발견하고는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 뒤 있는 힘껏 뛰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나자 경찰들은 일제히 바이 쪽을 쳐다보았고, 멈추라는 신호와 함께 공포탄을 쏘는 소리가 들렸다. 바이는 미끄러지듯 옆 코너로 돌아 배관을 재빠르게 타고올라가 비상 계단으로 매달려 올라갔다. 총알이 한 발 계단에 빗맞아서 팅기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바이의 몸이 고꾸라졌다. 다행히 이미 옥상으로 올라온 뒤였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바이는 주위를 황급히 돌아보더니 그나마 뛰어들어 내려갈만한 곳을 발견해서 생각과 동시에 몸을 던졌다. 둥글게 몸을 말던 바이는 땅 표면에 닿자마자 몇번이나 굴렀다. 그리고 사이렌 소리와 경찰들의 소리가 멀어질때쯔음 바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움직이려다가 헛디뎌 굴러떨어지듯이 미끄러진 바이의 온몸은 이미 엉망징창이었다. 언제 어떻게 다쳤는지 모를 오른쪽 허벅지와 왼쪽 팔에서는 아릿아릿하고 불타오를듯이 열감이 느껴졌다.

"젠장!"

바이는 신경질 적으로 허리춤에 차고있던 잭나이프를 던져버렸다. 실수해버렸다. 바이와 마일로는 작은 마트를 털려고 했을뿐 누구를 다치게하거나 경찰과 무리하게 대치상황을 만들려고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말하는 '용기'만 보여줄 셈이었다. 그랬는데...정말 단지 그것 뿐이었는데.

눈을 깜빡일때마다 마일로의 표정이 떠오른다. 마일로는 작은 권총하나를 들고 있었다. 조악한 조립식 사제 권총인데다가 총알도 없었다. 그냥 위협을 하려고 했을뿐인데 마트 주인이 매대 아래에 있는 총으로 마일로에게 갈겨버렸다. 바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해하며 얼타다가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바이는 지금도 꿈꾸는 것 처럼 얼얼한 느낌에 현실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고 가슴만 미친듯이 쿵쾅거렸다. 마일로가 어덯게 되었는지 바이는 짐작이 가질 않았다.

아무래도 죽, 죽었겠지?

바이가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쓰레기통 옆에서 괴롭게 머리를 쥐어뜯는 것 뿐이었다. 울음이 왈칵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꾸욱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그도 그럴것이 바이는 이제 겨우 16살. 고등학생이었다. 물론 만 열여섯의 고등학생이 강도짓을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성인도 감당못할 그런 짓을 하고 친구까지 잃었으니 바이는 제 정신일 수가 없었다. 

바이는 자기가 어떻게 집까지 갔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바이는 비틀거리며 집까지 절뚝거렸다. 

토네이도나 비바람이 몰아치면 패스츄리처럼 한겹 벗겨질 것 같이 생긴 집이었다. 실제로도 비가 오면 항상 바이 방은 물이 뚝뚝 새기도 했고, 집 대문 조차 너덜너덜거려 문의 구실을 한다고 보기가 어려웠다. 바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만신창이가 된 바이를 보던 양아버지는 혀를 쯧 한번 찼다.

"대체 뭐하고 다니는거냐?"

"...."

바이의 심상치않은 표정에 양아버지 벤더는 바이를 불러세우더니 어깨를 잡고 몸을 샅샅히 살피기 시작했다. 바이의 오른쪽 허벅지에는 피가 새어나와 청바지가 거의 보라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젠장! 바이올렛! 무슨짓을 한거니?"

벤더의 걱정스럽고 화난 표정에 바이는 고개를 떨구고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도 못했다. 대답대신 울음이 터져나왔다. 울음때문에 숨도 못고르고 헐떡이던 바이가 입을 힘겹게 열었다.

"저는...그냥 그들에게 ...용기를 보여주려고 했을 뿐이에요."

바이가 가까스로 대답하자 벤더의 좌절과 절망이 어린 시선이 바이의 가슴을 더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벤더는 절뚝거리며 주먹을 벽에 꽂았다. 주먹이 쿵하고 울릴때마다 먼지가 파스스 하고 떨어졌다.

"...바이올렛!"

벤더는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괴로운듯이 얼굴을 찌푸리고는 바이를 향해 다그쳤다.

"바이올렛,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건지 알고 있는거냐? 갱단에 들어가려고 하다니 제 정신이야?"

벤더는 바이와 눈높이를 맞추려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눈물 범벅인 바이의 얼굴을 닦아주며 한숨을 쉬고 덧붙였다.

"괜찮다, 그냥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이제 조용히 살면돼. 오늘 있었던 일은 악몽을 꾼거라고 하자. 알겠니?"

그리고는 바이를 꽉 끌어안아주었다. 어릴때는 정말 크고 단단했는데, 어느새 살짝 야위어지고 아픈다리를 절뚝이는 벤더의 품에서 펑펑 울었다.

"마일로, 마일로가 총에 맞았어요. 어쩌죠, 저는, 저는 그냥 도망쳤어요...!"

벤더는 대답하지않고 더 꽉 바이를 끌어안았다. 괜찮은 걸까? 바이가 벤더 품 속에서 펑펑 울면서도 마일로에대한 생각이 떠나가질 않았다. 소란스러웠는지 잠에서 깬 파우더도 빼곰 고개를 내밀다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이와 벤더에게 안겼다.

"내가....미안하다..."

바이는 왜 벤더가 자기에게 사과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않았다. 사과해야할 사람은 자기 자신같은데 되려 미안해하는 벤더의 옷깃을 꽉 쥐었다.





  바이가 갱이 되려고 했던건 지긋한 가난때문이었다. 퇴역 군인 벤더가 아픈 몸으로 바이와 파우더를 키우고 있었지만, 어린 바이의 눈에도 벤더는 더 이상 누구를 부양하기엔 버거워보였다. 바이는 돈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스치듯 갱단에 들어가면 돈을 두둑히 받는다는 이야기도 들었었고. 적어도 굶지않는다는 말에 바이는 혹했던 것이다. 바이는 그 어린나이에 자기가 가장이 되기를 자처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이는 친구만 잃었을 뿐이다. 바이는 움직일때마다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까 일어났던 일을 상기했다. 바이는 마일로에게 전화를 할까했지만 마일로가 전화를 받지않으면 현실감이 더 밀고들어올 것 같아 그만두었다.

어쩌면 살아있을 수도? 마일로가 죽었다고? 말도 안돼.

자정이 지나도 바이는 귀신이라도 본듯 창백하게 질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앞뒤로 흔들어대며 깨어있었다. 바이의 침대 스프링만 삐걱거리는 소리 빼고는 고요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가로질러 갑자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바이는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물고기처럼 튀어오르듯이 벗어나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갔다. 바이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빼곰 내밀어보았다. 장정 몇 명이 벤더를 양손을 머리에 올리게한 뒤 무릎을 꿇리고 총을 겨누고 있었다. 바이의 시야에는 어떤 사람들의 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무릎을 꿇은 벤더의 눈은 볼 수 있었다. 벤더는 입에 청테이프가 붙여져 있었고 벤더의 눈과 바이의 눈이 마주쳤을때 벤더는 재빨리 눈짓으로 파우더의 방을 가리켰다. 바이의 동공은 미세하게 떨리며 벤더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벤더는 바이가 뭐라고 했는지 눈빛으로 알아들은듯 했지만 여전히 벤더의 눈은 바이와 파우더의 방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바이는 조심스럽게 파우더의 방으로 향하는 순간, 귀를 찢을듯한 총소리가 한 번들리더니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누군지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바이는 굳이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까 빨간 머리애 찾아봐."

바이는 그 목소리가 누군지 귀에 박혔다. 바이에게 '용기'만 보여주면 갱단에 들어올 수 있게해주겠다던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바이의 몸에는 힘이 다 빠졌지만 파우더의 방문을 보다가 발자국 소리가 나자 바이는 재빠르게 파우더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이들어 자고 있는 파우더를 어깨에 걸치듯 안아들고는 파우더 방의 커다란 창문을 열고 창문쪽으로 뻗어나온 나무가지를 붙들었다.

"파우더, 내 목을 감싸. 매달려."

"언니, 왜? 나 졸려."

아직도 잠에 깨지도 않은 파우더의 목소리가 바이를 더 다급하게 만들었다. 

"우리 지금 나가야돼. 파우더."

"아빠는?"

파우더의 물음과 동시에 파우더의 방문이 열려 바이는 두 눈을 꽉 감고 창문에서 뛰어내리듯 나뭇가지에 매달렸다. 평소같았으면 식은죽 먹기였을텐데 지지할 수 있는 허벅지가 상처를 입어 오로지 팔과 나머지 한쪽 다리로 지지해야했기때문에 평소보다 더 힘들었다. 다쳤던 허벅지에서 다시 찢어지는 열감이 느껴져 바이는 고양이처럼 손가락을 세워 나무를 꽉 잡으려고 했지만 파우더까지 업은 상태라 그대로 쭈륵 미끄려졌다. 나무와 마찰하며 미끄러진 탓에 손바닥의 피부가 다 벗겨져버렸다. 어찌나 빨리 미끄러졌는지 두 사람은 땅바닥에 닿자마자 그대로 튕기듯이 뒤로 나가 떨어졌고, 바이는 몸을 일으켜 엎어진 파우더를 일으켰다. 파우더는 아직 잠이 덜깼는데다가, 엉덩방아를 찧어 아팠는지 울기시작했다. 울면 혹시라도 들킬까봐 바이는 재빨리 파우더의 입을 손으로 막고는 파우더의 귓가에 다급하게 속삭였다.

"아빠...아빠랑 우리 맥도날드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빨리가자. 아빠가 기다리셔. 가서 아이스크림도 먹자."

바이가 파우더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파우더 창문 쪽에서 굉음이 들리더니 강렬한 불꽃이 보였다. 바이는 본능처럼 파우더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으나, 총성에 놀란 파우더는 바닥에 더 웅크렸다. 

"파우더!"

다급하게 바이는 파우더를 불러보았지만, 파우더는 미동이 없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는 울기 시작했다. 바이가 파우더를 아까처럼 안아올리려고 파우더를 꽉 잡으려는 순간 바이네 집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느릿느릿 여유를 부리며 오는 괴한들때문에 바이는 오히려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농담 따먹기라도 하는지 쑥덕거리다가 낄낄거리기까지 했다. 

"오늘 내로 도망갈 수 있겠어?"

누군가가 크게 낄낄거리며 바이를 향해 소리쳤다. 바이는 파우더를 자신의 몸 뒤로 숨기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괴한들을 노려보았다.

"좋은 눈빛이야."

'용기'를 보여달라고 했던 그 남자가 바이에게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굉장히 왜소한 사람이었지만 굉장히 중압감이 있었다. 얼굴에는 잔 흉터가 많았고 왼쪽 눈에는 화상을 입었는지 굉장히 큰 흉터가 있었다. 왼쪽 눈은 의안인지 눈빛이라고 하기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마치 플라스틱이 반짝이는 것처럼 안광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상했다. 그 남자의 목소리는 정말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낮고 속삭이는듯한 조용한 목소리였는데도 귀에 정말 박히는 것처럼 들렸다. 그 남자는 점점 바이에게 다가왔다.

너무 무서워서 바이는 목소리가 안나올거라 생각했는데 그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 올 수록 목소리가 점점 크게 나왔다.

"살려주세요. 파우더만이라도 살려줘."

물론 두려움에 가득찬 목소리라 떨렸지만, 바이에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흠."

그 남자는 고민하는듯이 하늘을 잠깐 쳐다보더니 자신의 턱을 오른손으로 매만졌다. 

"그건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란다."

소름끼칠정도로 다정한 말투에 바이는 흠칫 놀라며 파우더를 자신의 몸에 숨기려고 몸을 펼쳤다. 파우더가 등 뒤에서 얼굴을 묻고 우는게 느껴졌다. 

"넌 굉장히 '용기'있는 아이로구나. 정말 깊게 감명받았단다. 그래서 네 용기가 한번 더 필요해."

그 남자는 바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와 동생이 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

그 남자가 느릿느릿하게 말을 하며 바이의 턱을 검지로 살짝 톡 건드렸다. 바이는 그 남자가 무슨 말을 할지 마른침만 꼴깍 삼키며 그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가족을 버릴 수 있는 용기. 가장 중요한 용기지."

두려움에 가득찬 바이를 향해 그 남자는 낮게 속삭였다. 바이는 자신의 등에 파고드는 파우더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안돼요!"

하지만 바이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바이와 파우더를 가리켰다. 그러자 사람들이 바이와 파우더를 억지로 떼어놓았고, 바이가 그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바이의 주먹은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그냥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해 주먹에 몸이 끌려가는듯이 휘청거렸기때문이다. 결국 누군가가 바이의 옆구리를 강타하자 바이는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고, 파우더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그리고 그 남자는 마치 신호탄을 쏘듯 하늘을 향해 총을 겨누었고 곧 벼락이 치는듯한 총성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바이에게 다가와 달궈진 총구를 뺨에 갖다댔다. 뜨겁게 달궈진 총구는 바이의 피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뜨겁니? 뜨겁겠지. 다음 번에는 총알이 네 볼을 뚫을지도 몰라. 이러면 용기가 좀 생기겠지." 

그리고는 뺨에 맞대고 있던 총에는 쇠가 철컥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이!"

파우더가 발버둥치며 바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지만 바이는 꼼작할 수가 없었다. 

"네 동생이랑 나랑 같이 갈래? 아니면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뛰어갈래?"

바이는 정말 평소에도 동생을 끔찍히도 아꼈다. 아마,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한다고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았다. 그 남자가 저 말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바이는 이미 오늘 하룻동안 무려 두 명이 자신의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았다. 죽었을거라 생각을 하고싶지 않았지만 싫든 좋든 그들은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천둥같은 총소리는 천둥소리가 아니라 정말 생명을 앗아가는 총성이었다. 바이의 머리속이 하얘졌다.

동생을 버리라는 건가...? 

그리고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발끝부터 턱까지 치고올라오는 생존 본능이 바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다시 장전하는 듯이 쇠붙이가 딸깍 거리는 소리가 나서 바이는 두 눈을 꽉 감았다. 

파우더가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뒤로한채,  바이는 이를 악물고 뛰기 시작했다. 바이가 뛰기 시작하자 뒤에서는 파우더의 목소리보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상하게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화상을 입은 볼도, 나무에 까져버린 손바닥도, 다시 피가 나기 시작하는 허벅지의 상처에도 바이는 아프지가 않았다. 그냥 끝까지 어둠을 향해 달려가는 기분이 들어 그저 꿈꾸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살며시 눈을 다시 떴을때는 정말 시야가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밤이라서 더 어두워졌다기보단 시야가 좁아져서 잘 보이는 것에 가까웠다. 그 느낌이 들고 얼마지나지 않아  땅이 마치 바이의 눈앞에 바로 다가오는듯이 가까워졌다. 세상이 옆으로 붙어있는 것처럼 기울어졌다. 비가왔는지 아스팔트에는 건물에서 나온 빛이 번져가고 있었다. 그제야 흙먼지가 섞인 비냄새가 났다. 차가운 비가 바이의 볼에 떨어질때마다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지만 신음소리 한 번 못내고 바이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근처에 커다란 세단 차가 와서 멈췄다는 사실도 모른채 바이는 정신을 잃었다.






바이의 몸은 무거웠다. 정말 지독한 꿈이었어. 악몽도 그런 악몽이 없지. 

악몽을 꾼 뒤 찝찝하고 불안한듯 뛰는 심장과는 다르게 따듯하고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둘둘 말기 시작했다. 몸은 나른하고 이곳저곳 안쑤시는 곳이 없는데 이상하게 정신은 불쾌할정도로 맑았다.

그래서 이상하게 눈을 뜨기가 싫었다. 바보같지만 이상하게 눈을 뜨면 지금까지 꿨던 꿈이 현실이 될거라는 말도 안되는 불안함이 바이를 집어삼켰기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바이는 눈을 뜨지않고 계속 뒤척이기만 했다. 

곧 있으면 아빠가 나를 깨우러 올거야. 그때까지만 자자. 어젠 피곤했으니까. 마일로때문에 그런 꿈을 꾼거겠지.

바이가 몸을 계속 뒤척이자 영국 억양을 쓰는 여자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니?"

낯선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이는 놀란듯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집이 아니었다. 사실 그건 바이가 정신이 들때부터 알고 있었다. 바이네 집에는 그렇게 좋은 냄새가 나고 바스락거리는 이불이 없었기때문이다. 바이는 눈을 뜨자마자 주위를 살폈다. 시야에도 다 담기지도 않는 넓은 방과 고급스러운 매트리스, 바이가 눈에 담는 것 모두가 비싸고 고급져 보이는 것 밖에 없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바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바이는 자신이 왜 이런곳에 있는지 말문이 턱 막혀 침대에 옆에 앉아있는 여자를 볼 세가 없었다. 


"넌 레인즈가 아이지?"


다정했지만 약간 비웃음이 섞인 어조에 바이는 그제야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빛을 받으면 푸른 색이 나는 짙은 머리, 매섭고 날카로운 눈매, 오똑한 콧날, 창백할정도로 흰 피부 붉은 혈기가 도는 입술. 모두가 정갈했다. 고급스럽고 비싼 것만 있는 이 방에 어울릴만한 여자였다.

"여긴 어디죠?"

"흠."

그 여자는 못마땅한듯이 바이를 흘겨보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었는데, 좋은 의미의 미소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차갑고 매섭게 바이를 바라보았기때문이다. 마치 바이가 실수라도 한듯이 한참이나 바이를 빤히 쳐다보기만했다.

"내가 먼저 너한테 질문을 했어. 대답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너야."

다소 위압적이고 차가운 목소리로 바이를 향해 나무라듯 말했다. 바이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그 여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내가 허락했을때만 나에게 질문 할 수 있어. 그건 너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래. 네가 모르니까 친절하게 설명해준거지만 다음부터는 유의하도록해."

그 여자는 굉장히 친절한 어투로 말했지만 표정은 정말 딱딱하고 사무적인 표정이었다. 

"네...알겠어요."

바이는 순순하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 여자에게 급류에 휘말리듯 말려버렸기때문이었다.  사실 그 여자는 바이와 나이도 얼마 차이나보이지도 않았는데 확실히 바이나 그 여자 또래에서와는 다른 위압감이라던지 카리스마가 남다르긴했다. 

"넌 이름이 뭐니?"

"바이올렛이요."

바이의 대답에 그 여자는 한참이나 아무말 없이 바이를 빤히 쳐다보기만할 뿐 말을 잇지않았다. 고요함에 가까운 적막에 바이는 마른 침을 삼키고 눈을 굴렸다. 그리고 바이는 힘겹게 입을 뗐다.

"질문 하나 해도 되나요?"

바이의 말에 그 여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은 누군가요?"

여자는 바이의 질문에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그저 미소만 지으며 창밖을 꽤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이가 다시 입을 떼려고 할때 쯤 그 여자가 툭 내뱉었다.


"너의 후원자, 케이틀린 키라먼."

백합조와요

헉객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