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드는 미로 실험을 설계하면서 많은 단계에 걸쳐 꼼꼼이 점검했다. 미로 안에는 위험을, 공터 안에는 상대적 안전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숲과 작은 개울과 연못이 그렇게 조성되었고 심어지는 식물도 주의에 주의를 거듭 기울였다. 약간의 독성이 있는 것은 시련을 위해 남겼지만 독성이 지나쳐 한 번에 실험체들을 죽일 수 있는 것들은 배제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들 역시 몇 종류만을 골랐다. 다행히도 미로 밖은 사막이었다. 즉 위키드가 처음에 배치해놓은 식물과 박스를 통해 올려보낼 것들을 제외하면 바람이나 물에 실려 올 새로운 종자들은 없다는 뜻이었다. 위키드는 생존과 적절한 '시련'을 위한 요소들을 배치했고 거기에 실험체들의 정신 건강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공터 안에는 꽃이 없었다. 열매를 맺기 위해 피는 꽃들은 관상용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공터인들은 꽃을 보면 곧 열매가 열리겠구나 반가워했을 뿐, 거기에 다른 의미를 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쫓기듯이 3년을 살아남기 위해 일하고 미로를 달려서 나오니 사막과 폐허가 된 도시를 달려야했고 잠깐 만났던 '멀쩡한' 도시는 곧 폐허로 화했다. 친구들을 잃고 잃으며 도착한 끝이 파라다이스였다. 


파라다이스. 토마스는 그 이름이 무척 웃기다 생각했다. 파편이 되어 떠다니는 과거의 지식 중에 걸리는 뜻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선한 사람들이 사후에 가는, 죄인들은 가지 못하는 곳이라 생각하면 제가 웃겼고 낙원이라 생각하면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야했다. 토마스는 잠시 멈췄던 일손을 다시 놀렸다. 공터에 있던 짧은 시간보다도 더 바빴다. 이래서 -가 나에게 그런 소릴 했으려나. 생각하며 느슨해진 천막을 단단히 다시 묶었다. 


플레어 바이러스가 없을 뿐,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해야했다. 제 스스로 처음부터 삶을 꾸려나가본 적 있는 남녀 공터인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 외의 면역인들은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그들은 제대로 선택할 시간조차 얻지 못하고 떠나온 문명 사회를 그리워했다. 그것이 이미 파괴되었음을 알아도 그랬다.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믿기 어려운 것이다. 혹은, 믿고 싶지 않거나. 


타버린 오두막은 그래서 효과적이었다. 돌아갈 길이 없음을 보여주는 데 그보다 좋은 게 없었다. 다른 길을 찾아 제 고향을 찾으려던 사람들이 몇 있었지만 실행한 사람은 없었다. 대신 그들은 저들이 갖고 있는 문명의 향수를 공유했다. 일하면서 같이 노래를 부른다거나, 나무토막이나 그릇 등으로 원시적인 리듬을 타거나 제각각 자기가 읽었던 이야기들을 공유하는 식이었다. 공터인들은 살아남는 데에는 이력이 나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그런 것에는 둔했다. 그들은 제가 모르는 것에 순순히 귀기울였다. 시간이 좀 지나 당장의 생존을 확보하자 그것을 즐기기도 했다. 인간이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 즈음이었다. 누가 시작한 건지 몰랐다. 그렇지만 오두막이 불탄 자리에 하나 둘 꽃이 심어지기 시작했다.





"왜 심는 거야?"





막 새로운 꽃을 심는 제 또래의 여자아이에게 묻자 여자아이는 그냥-하고 복잡한 얼굴로 웃었다. 토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문득, 근래 들어 자기가 살게 된 천막, 내지는 어설픈 오두막 주변에 작은 꽃을 가져다 심는 사람들이 늘었단 게 기억나 토마스는 다시 물었다.





"장식이야? 이런 데에?"





여자 아이는 토마스의 말에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거리다 아아-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냐. 좀 달라. 장식이라면 장식인데...음..그보다는 기리는 마음 같은 거라 해야하나."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 토마스는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여기 왔지만 우리 부모님은 못 왔잖아. 내 친구들도 많이...그리고 아마....지금쯤 돌아가셨겠지.."





그녀의 말끝이 떨리며 미간이 찌푸러들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는 건 누구에게나 반갑지 않은 일이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른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무덤에 꽃을 가져다놓는 게 맞는데 어딘지도 모르고 찾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가까운 곳에 가져다 놓는 거야. 보면서 떠올릴 수 있는 곳. 사실...어디를 봐도 떠오르긴 한데 여기만 오면 생각나거든. 아마 다들 그래서 여기에 심어놓고 있는 거 아닐까."





토마스는 대답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기가 잃은 소중한 사람들을 추억하고 싶은 법이니까. 토마스에게도 있었다. 트리사와 척과...




바삭.




발소리에 고개를 돌린 토마스는 민호와 눈이 마주쳤다. 파라다이스로 온 이래 옛날보다 부쩍 과묵해진 민호는 토마스와 여자아이와 발치의 꽃들을 흘끗 봤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관심없는 일에 항상 그렇듯 신경쓰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밤이었다. 여느 때처럼 총성이 섞인 악몽에 소스라쳐 일어난 토마스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문득 프라이팬의 코고는 소리 만이 들린다는 걸 깨달은 토마스는 고개를 들었다. 민호의 침상이 비어있었다. 이 시간에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민호는 들어오지 않았다. 슬슬 걱정이 되어 토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보름달이 가까운 밤이라 불빛이 거의 없었음에도 주변의 사물은 제법 또렷이 보였다. 밤이라 서늘한 공기에 어깨를 좌우로 크게 움직이며 토마스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이 밤에 민호가 갈만한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여기저기 대중없이 걸음을 옮기던 끝에 문득, 저 먼 언덕 위에 있는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토마스는 걸음을 멈췄다. 먼 발치였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민호였다. 이 밤에 대체 저런 곳에서 뭘 하는 걸까. 토마스는 잠시 고민을 하다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언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풀이 우거진 길이라 소리를 내지 않는 건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풀벌레 소리가 토마스의 신발이 풀을 스치며 내는 소리를 감췄다. 


왜 저런 곳으로 간 거지? 민호가 선 언덕 위에서는 바다가 보였다. 단지 그뿐, 바다로 내려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망이 좋은 곳도 아니라 처음 위치를 확인한 이후로는 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혼자 뭘 하는 걸까, 생각하던 토마스는 문득 민호의 발치가 이상하게 밝다는 걸 깨달았다. 토마스는 걸음을 멈추고 민호의 발치로 시선을 옮겼다. 착각이 아니었다. 확실히 밝았다. 처음엔 빛무리 같아 보이던 것들이 바람에 흔들리자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노란색과 하얀색의 아주 작은 꽃들이 한무더기로 어우러져 달빛에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거기에 꽂힌 민호의 시선을 보자 머리속에 선명하게, 언제 잊고 지냈었냐는 듯 떠올랐다.




-뉴트.




단지 이름만으로도 아파 토마스는 입안으로 삼키며 완전히 걸음을 멈췄다. 


민호는 단지 거기에 그렇게 서 있었다. 소리도 흔들림도 없이. 그럼에도 토마스의 귀에는 밤의 파도와 바람 소리에 섞인 또 다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토마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올 때보다도 더 조용히 토마스는 걸음을 옮겨 다시 언덕을 내려갔다. 언덕에서 완전히 시선을 떼기 전 돌아본 그림자는 여전히 그대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조용한 등이 소리없는 울음 같아 토마스는 눈을 감았다. 까맣게 아픈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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