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 쓰는 썰

* 나이차이 7살






윙의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녤의 간호 아래 윙은 금세 나았음. 집에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간호한 녤 덕분에 윙네 엄마는 보양식이라고 진한 닭백숙 하나 만들어주고는 의무를 다했음. 윙을 깨우고, 재우는 것도 녤이 했고, 씻기는 것도 녤이 했고, 먹이는 것도 녤이 다 했음. 윙은 녤이 깨우면 일어났고, 씻으라면 씻었고, 먹이는 대로 먹고 재우면 잤음. 완전 갓난아기로 돌아간 기분이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녤이 붙어서 다 해주니 기분이 썩 좋아 계속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


윙이 다 나은 후에는 녤과 윙 사이에 있던 알 수 없던 무언가도 함께 털어진 기분이 들었음. 실제로 녤은 그 이후로 예전과 다른 게 없었음. 정말로 윙이 바라던 만큼 예전으로 돌아가 주었음. 아침마다 데리러 왔고, 저녁에는 똑같은 시간에 전화했고, 조금 늦는다 싶으면 데리러 왔음. 윙 친구들 사이에서는 신데렐라 왕자님이 부활했다고 소문이 돌았음. 윙은 녤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아지는게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음.

마침 친구들이랑 저녁 약속이 있어서 학교 앞에서 모였음. 저녁 대신에 술안주로 배를 채우기로 하고 술집으로 들어가 앉았는데 윙이 앉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녤 얘기가 나옴.


- 너네 왕자님 활동 재개하셨다며? 화해했냐?

- 지난 번에 엠티 때 분위기 장난 아니던데. 박지훈 우는 줄.

- 왕자님이야말로 장난 아니었지. 키 봤냐? 어깨 봤어? 

- 솔직히 남자가 봐도 좀 멋있긴 하더라. 그 때 여자애들 다 뿅가가지고 밤새도록 왕자님 얘기만 하던데? 잘생겼네, 몇 살인지 알고 싶네, 전화번호를 따겠네. 

- 야, 그만 얘기해.

- 어이구, 니네 왕자님 얘기하니까 싫으냐? 왜? 

- 놀리지 말라고.


윙은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는 옆에서 자꾸 깐족대는 친구놈의 입에다가 기본으로 세팅되는 뻥튀기를 한움큼 집어넣음. 친구놈은 뻥튀기로 입막음을 당하고도 좋다고 윙을 놀렸고, 다른 친구들도 이 때다 하고 겁나게 놀림. 왕자님네 공주님됐네, 뭐네 하면서 윙을 놀리니 윙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함. 윙이 원래 놀리면 곧이곧대로 반응해서 놀리는 맛이 있었고, 친구들은 그걸 다 아는데 윙만 그걸 몰랐음.

곧 안주가 세팅되고, 소주랑 맥주도 함께 놓임. 친구들은 오늘은 마셔야하는 날입네 하면서 술을 따라줌. 윙 몫의 술을 주면서는 오늘 마시면 니네 왕자님 행차하시냐? 하면서 또 윙의 속을 긁는 것도 잊지 않음. 윙은 안주로 나온 돈까스를 껌처럼 질겅질겅 씹으면서 눈을 가늘게 뜸. 한 번만 더 하면 명치를 후려갈길 기세였음. 친구놈들은 키득키득거리면서 왕자님 얘기를 계속함.


- 근데 진짜 궁금한데, 너랑 왕자님이랑 무슨 사이?

- 뭐가 무슨 사이야.

- 친형도 아니라매. 

- 아닌데.

- 그 왕자님 몇살이냐? 직장인?


아, 왕자님 소리 좀 그만해. 윙이 결국에 한마디 하기는 했는데 친구들은 들은 척도 안했음. 오히려 자기네들이 이제까지 추측했던 왕자님 얘기를 하나씩 꺼내면서 열을 올리기 시작함. 추측은 여러가지였음. 사실은 같이 사는 사촌형인데 윙네 엄마가 윙을 끔찍이도 아껴서 사촌형을 시켜서 윙을 보디가드하게 만들었다에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윙네 엄마를 좋아하는 녤이 윙한테 점수 딸려고 지극정성으로 구는거다라는 기상천외한 얘기까지 터져나옴. 윙은 그 친구놈의 명치에 주먹을 갈기는 걸로 대답을 대신함.

윙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게 싫었음. 따지고 보면 애초에 엠티에서 녤과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도 이런 게 싫었던 탓임. 녤이 자기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입에 오르내리는게 마음에 들지 않음. 녤을 흥미롭게 본다던가 그런 류의 눈빛, 관심 전부.


- 그니까 우리가 이상한 추측 안 하게 좀 말해보라고. 우리만 이러는 줄 아냐? 우리 과 여자애들 얘기는 더해. 너 들으면 까무라칠걸?

- 됐어, 듣고 싶지도 않다. 

- 니네 왕자님 감싸고 돌지만 말고 털어놔봐, 친구야. 몇 살이라고?

- ...스물일곱.

- 직장인? 

- 어.. 


대박 멌있네, 하는데 윙은 영 표정이 좋지 않음. 여기서 얘기하면 분명 이 놈들이 여기저기 다 얘기하고 다닐게 뻔했음. 이건 뭐 녤이 공유재라도 된 느낌임. 윙은 부루퉁한 얼굴로 안주를 집어먹음. 친구들이 윙이 집어먹는 걸 보고 잔을 들기에 짠하고 홀짝 마심. 원샷함.


- 친형 아니면 뭐임? 얘가 말한 대로 사촌형?

- 아니.. 이웃집 형.

- 이웃? 옆집 사는 그 이웃?

- 엉..


친구들의 반응이 한결같았음. 요즘은 이웃이라고 해도 남이었고 친하기는커녕 인사도 안 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윙의 왕자님이 그냥 이웃집 형이라는 거에 놀랄 수밖에 없었음. 근데 윙은 오히려 그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음. 윙과 녤이 그토록 친한 게 단지 이웃이라는 관계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음. 친구가 빈 잔을 채워주자마자 전부 비웠음.


- 그냥 이웃집 형이 맨날 전화하고 데려다주고 데리러오고 한다고? 그게 돼?

- 안 될 건 또 뭐야.

- 흔하진 않지. 


그런가. 홀짝 마시다가 고개를 갸웃함. 윙은 처음부터 녤이랑 잘 맞았기 떄문에 친해지는 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해봤기 때문임. 윙의 핸드폰이 울림. 마침 녤의 전화였음. 친구들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왕자님이구만? 하면서 또 놀리는데 발동을 걸기 시작함. 윙은 조용히 좀 하라며 검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누르면서 전화를 받음.


[ 어데고.]

- 학교 앞에, 맨날 오는 데.

[ 밥이가, 술이가. ] 

- 둘 다?

[ 하나만 해라, 이 돼지야. ]

- 지금 뭐라고?? 

[ 많이 무라꼬, 많이 묵어야 키도 크고 이쁘게 자라는 기다. ]


윙이 민감하게 구는 단어를 무심코 말한 녤이 허둥지둥 얼버무리려는게 목소리만 들어도 보여서 윙이 정색하던 것도 싹 지우고 킥킥 웃음. 그러다가 옆에 친구놈이랑 눈이 딱 마주침. 그 친구놈은 무언가 엄청 놀리고 싶어하는 눈이었지만 그냥 무시했음.


[ 술 마이 마셨나. ]

- 어... 아니, 별로.


윙은 녤이 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손장난을 하던 술잔을 슬쩍 멀리 밀었음. 친구들은 그게 빈 잔을 채워달라는건 줄 알고 쪼르르 술을 따라 잔을 채워줌. 


[ 니 거짓말 몬하는 거 알고 그러나. 빤한데. 벌써 몇 잔 걸쳤는데. ]

- 얼마 안 마셨어.

[ 째깐한게, 술이나 퍼 마시고. ]

- 안 째깐한데..


친구들이 뭐라고 쑥덕쑥덕하기 시작함. 그러거나말거나 윙은 전화하는데 온통 신경이 쏠림. 집증하느라 앞머리를 매만지기도 하고 돌돌 말기도 함. 통화가 길어지니까 기다리는 것 같던 친구들도 자기네들끼리 술 따르고 먹고 그랬음. 


[ 통화 오래 하는 거 아이가. 몇시쯤 파하는데, 델러 갈까? ]

- 한 두시간 있다가 일어날래. 

- 야, 뭔 소리야? 오늘 달릴 거야!

- 너네나 실컷 달리세요, 난 일어날 거거든!


수화기 너머에서 녤이 웃는 소리가 들림. 알았다, 이따 델러가께. 전화를 끊자마자 친구놈들이 난리를 쳤음.


- 달달~ 하다?

- 뭔 소리.

- 한~ 두 시간~ 있다가 지훈이 일오날랭. 그니까 데리러 와죠. 아라찡?

- 야, 내가 언제 그랬어! 


윙을 따라하겠답시고 혀부터 짧아져서는 마지막에는 귀여운 척 한다고 지 손가락을 물면서 윙크질인데 도저히 못봐주겠어서 아예 빈 뻥튀기 그릇을 냅다 던짐. 다른 친구들도 그건 오바다, 하면서 윙 편을 들어주는 바람에 따라했던 놈만 바보가 됨. 괜히 따라했다가 봉변을 당한 친구놈은 온 몸으로 나는 억울하오 항변을 하기 시작함.


- 야, 얘 전화하면서 몸 배배 꼬는 거 봐! 뭐가 달라, 뭐가! 

- 달라, 임마! 지훈이랑 너는 비주얼부터 달라! 얘는 종족이 엘프고 너는 드워프거든! 어디서 윙크질이야, 윙크질은! 토나오게! 

- 내가 이렇게 나고 싶어서 났냐, 내가! 씨, 마셔, 야, 마셔!


결국 고 친구놈 주도 하에 일동 원샷하게 됨. 윙도 한 번에 술잔의 술을 입 안에 전부 털어넣음. 크으, 쓴 맛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니 자연스럽게 미간을 구기면서 소리를 냄. 안주로 나온 튀김을 얼른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음. 고소한 맛에 그나마 표정이 풀림. 


- 그래서 왕자님 행차는 두 시간 후로 예정?

- 왕자님 소리 좀 그만하라고.

- 이따가 사인 받을까? 왠지 사인받아야할 것 같지 않냐? 옷에다가 사인 받고 울 과 여자애들한테 팔면 못 받아도 십만원은 먹을 듯.

- 콜콜! 

- 너네 자꾸 이러면 나 그냥 간다?!


윙이 참지 못하고 소리치니까 그제서야 잠잠해짐. 물론 잠잠해지면서도 이젠 얘기도 못하게 하네 하고 투덜거리는건 빼놓지 않았음. 윙은 이제 얘네 앞에서는 절대 녤 얘기는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마음 먹음. 




시간이 지날수록 비워진 초록색 병이 한 병, 두 병 쌓임. 텅 빈 병이 다섯병쯤 놓였을 때 윙 전화가 다시 울림. 윙은 윙한테 기대면서 테이블에 엎어지다시피 한 친구놈을 밀고 폰을 들었음. 액정에 녤 뜬 거 보고는 얼굴에 헤실헤실 웃음꽃이 핌. 알코올이 들어가서 웃는 얼굴이 나사가 풀려보이긴 했음. 전화를 받으니까 녤 뒤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바깥인 것 같음.


[ 이제 인나야지, 어데 술집이고. ]

- 으흥흥, 어디게.


콧소리까지 섞어가며 웃으니 녤이 헛웃음을 흘림. 벌써 그만키로 취했나. 윙은 뭐가 하나 빠진 것마냥 웃었음. 윙이 얘기하는 소리에 정신차린 친구놈들이 어어~ 왕자님이다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음.


[ 어딘지나 말해라. 델러 가께. ]

- 야, 여기가 어디였지?

- 여기~? 


친구가 불러주는 대로 녤한테 얘기해주니까 녤이 가까운 데에 있었는지 금방 오겠다면서 전화를 끊었음. 윙이 전화를 끊으니까 친구놈들이 난리가 남. 왕자님 납신다~ 여자애들 불러! 사인 받는다매, 옷 벗어, 거따가 사인 받게! 별 소리를 다하면서 손을 휘적휘적 하다가 젓가락이 떨어지고 물컵이 떨어지고 난장판임. 윙이 비척비척거리면서 일어나려고 하니까 옆에 놈이 붙잡음.


- 야, 벌써 가게?

- 어...갈래.

- 야이씨, 왕자님 온다고 친구를 버리냐? 연애가 먼저야, 우정이 먼저야!


윙이 일어나다말고 뚝 멈춤. 다른 애들이 코웃음을 침. 이 새끼 취했냐.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툭툭 치는데 한 번 풀린 입이 자꾸 나불나불댐.


- 나도 연애 하고 싶다아! 연애! 나도 이씨, 맨날 꽁냥꽁냥하게 전화하고, 시간 되면 데리러 가구 할 수 있는데.. 박지훈이는 되고 나는 안되는 건 뭐냐...

- 얼굴, 새끼야, 얼굴.


옆의 애들이 취해서 흐물흐물거리는 친구놈의 뒤통수를 퍽퍽 침. 넌 안 돼, 임마. 윙은 눈만 끔뻑끔뻑함.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음. 그러다가 누가 어깨를 확 잡아서 파드득 놀람.


- 엄마야! 

- 하이고야, 내가 더 놀랐다. 뭐 이리 놀라노, 죄 졌나.


녤이었음. 윙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마냥 녤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어버버거렸는데 친구들이 일어나서 녤한테 인사하는 덕분에 어물쩡 넘어감. 친구들은 안녕하심까, 형님. 하고 깍듯이 인사함. 녤은 어색해서 안 그래도 되는데, 하고 웃어줌. 녤이 테이블 한 번 스캔하더니 빈 병이 꽤 있는 걸 보고 윙한테 속삭임.


- 마이 마시지 말라고 했을긴데.

- 내가 마신 거 아냐, 쟤네가 마신거야.


녤이 윙의 코를 꼬집고는 인사하고 나와라, 하면서 먼저 나감. 윙은 인사랄 것도 없이 애들한테 간다 빠빠이, 하고 손을 휘적휘적 흔들고 따라 나옴. 친구들은 녤이랑 윙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한마디씩 함. 어깨 지림. 다리길이 지림. 목소리 지림. 

윙이 나가니까 녤이 마침 지갑에서 카드 꺼내서 카운터 직원한테 건네주는 중이었음. 날이 따뜻해서 흰 티에 베이지색 롱재킷, 청바지만 입고 나왔는데 그것만으로도 태가 났음. 윙이 녤을 쳐다보다가 뒤늦게 깨달음.


- 계산하는 거야?

- 어 .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녤이 윙의 어깨를 팔로 감싸 데리고 나옴. 술기운이 돈 탓인지 바깥 공기가 시원하고 좋았음. 녤이 윙한테 얼굴을 훅 들이대더니 냄새를 킁킁 맡음.


- 하이고, 술냄시. 낼 학교 안 가나. 

- 얼마 안 마셨다니까능.

- 혀 꼬부라지는 거 알고 말하나.


아닌데~ 윙이 말을 늘어뜨리니 녤이 으이구, 하면서 윙 뒷머리를 흩뜨림. 윙이 녤을 따라 졸졸졸 가다가 녤 재킷을 훅 잡아당겨서 녤이 뒤로 끌려감. 와. 녤이 돌아보니 윙이 마침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파는 데를 가리킴. 사주라. 녤이 아무 말 없이 지갑을 꺼내면서 직원한테 감. 바닐라랑 초코 섞인거 하나 주세요. 윙한테 물어보지 않아도 윙의 취향을 알고 있어서 윙이 뭐라고 안해도 알아서 척척이었음. 녤이 와서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는데 윙이 받지는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함. 


- 받아라.


이상하게 아까 친구들이 했던 말들이 뒤죽박죽 섞이더니 끊임없이 맴돌기 시작함. 한 번 맴돌기 시작한 단어들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면서 혼란스럽게 만들었음. 왕자님, 연애, 그런 시덥잖은 농담들이 갑자기 신경쓰여 미치겠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얼른 아이스크림을 받아 한 입 크게 물었음. 녤 말마따나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았음. 



Cindy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