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픽션입니다. 실제 역사적 배경을 묘사하고 역사적 사건들을 차용하지만 주 된 내용은 가상의 내용입니다.










10월의 햇빛이 이렇게도 뜨거웠나.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빛에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고 두 다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동혁을 따라 미친듯이 달리고 있었다. 

 




"전차를 타야 합니다. 마지막역에 내려서 인력거 타고 움직이면 그래도 시간은 벌 수 있을 거예요"

 




땀이 날 텐데도 내 손을 꽉 잡은 채 달리는 걸 멈추지 않는 이동혁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 머릿속에 있던 계획을 내뱉었다. 어차피 경성 시내에서 나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을테니 이동혁이 하자는대로 무조건 따를 생각이라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뒷문으로 나왔기 때문인지 큰 길가가 아닌 작은 골목길들만 시야를 가득 채웠다. 골목길 사이사이를 익숙하게 뛰어가는 이동혁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걸 멍하니 쳐다보며 뛰는데 자꾸만 마음이 불편하다. 


분명 내 시야는 앞에 뛰고 있는 이동혁을 담아내고 있는데 마음이 아직도 정재현 집에 그대로 있는 것 같다. 뒤돌아보고 싶은데, 고개를 돌릴 수가 없다. 이미 정재현의 집은 보이지 않는데도 혹시라도 내가 고개를 돌려서, 뒤를 돌아봐서 정재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아-"

 




머릿속에 정재현 얼굴이 가득해진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버렸는지 돌부리에 발끝이 걸려 그대로 휘청이며 넘어지고 말았다.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넘어지는 바람에 놀란 이동혁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고 놀란 그 얼굴을 확인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쳤어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가요 어서"


"다쳤는지만 보고..."


"이럴 시간 없잖아요, 나 괜찮으니까 가요 동혁씨"

 




그냥 넘어진 것 뿐이다. 크게 다친 곳도 없고 발목이 살짝 삐끗했지만 아예 걷지 못할 정도도 아니다. 가방을 품에 꽉 끌어안으며 몸을 일으키자 멍하니 날 올려다보던 이동혁이 금세 날선 눈을 하고서 몸을 일으키더니 내 손을 단단히 잡는다. 


정재현이 마당에 숨겨놨던 책을 나한테 넘겨준 걸 보면 이 책은 절대 순사들 손에 넘어가면 안 되는 물건일거다. 경청회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거나 앞으로 그들이 할 거사에 대한 계획이 적혀있다거나 하는 그런 중요한 물건이겠지


이 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발목 조금 삔 걸로 이 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다. 게다가 나재민의 집은 경성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있다고 했으니 나재민의 집까지 가는 시간도 생각하려면 어떻게든 빨리 움직여야하니까


날선 눈을 하고서도 여전히 내가 걱정되는 듯 이동혁은 뜀박질 대신 빨리 걷는 걸 선택했고 나는 미세하게 느껴지는 고통을 모른 척 하고 그를 따라 걸음을 빨리 했다. 그리고 이내 전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큰 길로 나가서 전차만 타면 그래도 어느 정도 순사들의 눈을 따돌릴 수는 있겠구나 생각하고 있던 그 때, 갑자기 이동혁이 날 제 품에 끌어 안듯이 하고는 건물 벽 옆으로 몸을 숨겼다. 

 




"순사들입니다"


"아..."

 




아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순사들이 움직인다. 순사들이 정재현을 찾는다. 순사들이... 가방끈을 쥐고 있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손바닥 안에서 가방 끝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 소리가 조금씩 멀어지고 나자 고개만 틀어 주변을 살피던 이동혁이 짧게 숨을 삼키며 다시 내 손을 잡아왔다. 움직여야 할 땐가보다. 아무 말 없이 날 쳐다보는 이동혁에게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가 망설임없이 벽 모퉁이를 돌아 전차가 멈추는 곳으로 향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덕분이었는지 때마침 극장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영화가 끝난 모양이다. 멀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진 덕분에 우리는 사람들 틈 속에 끼어들 수 있었고 무리없이 전차에 올라탔다. 


비어있는 자리에 날 앉힌 이동혁이 내 앞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가방을 꽉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앉아 있으니 발목이 더 아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참을만 하다. 지금쯤 혼자 있을 정재현에 비하면 이 정도 아픈 건 아픈 것도 아니니까

 




"...괜찮을 거예요"


"......"


"...별일 없을 겁니다"

 




머리 위에서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느리게 고개를 들어 이동혁을 응시했다. 가라앉은 두 눈을 보자마자 맥락없이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동혁은 지금 날 위로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괜찮을 거라고 별 일 없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건가. 


차마 그럴 거라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아서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품에는 정재현이 넘겨준 책을 담은 가방을 꽉 끌어 안은 채로 그렇게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고 또 끄덕였다. 


전차를 탄지 얼마 되지 않아 내릴 때가 됐다며 이동혁이 손을 내밀었다. 내 앞에 내밀어진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 손 위로 내 손을 맞댔다. 


경성에 온 뒤로 편하게 손을 잡거나 한 건 정재현이나 김도영이 전부였다. 아무래도 정재현은 내가 경성에 오자마자 처음 본 사람이니 나도 모르는 새에 의지하고 그러다보니 더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젠 이동혁의 손을 잡는 것도 자연스럽다.


무사히 도착해야 된다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어서 그런 모양이지, 

 




"인력거는 저 쪽"


"재민씨 집은 어느 쪽이에요?"


"삼각산 뒤쪽까지 가야 합니다"

 




경성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더니 집이 산 근처였나보다. 대답대신 저를 따라 걷는 날 힐끔 쳐다보던 이동혁이 이내 텅 비어있는 인력거 앞까지 다가가서는 제 옷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인력거 근처에서 쉬고 있던 남자에게 돈을 쥐어주자 그가 타라는 듯 고갯짓을 했고 이동혁은 날 먼저 인력거에 태우고는 그 뒤에 제가 이어서 올라탔다. 


인력거를 끄는 사람이 조선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우리가 하는 얘기를 알아듣거나 할까봐 인력거에 올라탄 뒤로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고, 조용히 허공만 응시하고 있는 날 살피던 이동혁도 이내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인력거는 꽤 한참을 달렸다. 시가지에서 벗어나 가정집들이 줄지어 있는 동네를 지나치는데 시야에 담기는 낯선 풍경들에 나는 마른 입술을 혀 끝으로 축이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경성에 온 뒤로 이렇게 멀리까지 나와본 적은 처음이라 언제 어디서 순사들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가방을 쥔 손바닥에 자꾸만 땀이 맺힌다.


서울이었으면, 그냥 서울 시내였으면 혼자 멀리 나와도 핸드폰 하나면 어디든 들어가서 연락도 가능하니까 걱정할 게 없었을텐데 지금은 아니니까. 연락을 쉽게 주고 받을 수도 없고 오로지 무사하길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한참을 달리던 인력거가 멈췄다. 아무래도 사람이 끄는 거다보니 중간중간 속도가 느려지기도 했지만 삔 발목을 이끌고 여기까지 그냥 뛰어왔다면 아직도 도착을 못했을 거리다. 


먼저 가볍게 뛰어내린 이동혁이 남자에게 돈을 몇 푼 더 쥐어주었다. 그리고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고 그의 손을 잡고 인력거에서 조심조심 내려와 여기까지 우리를 데려다준 남자에게 고맙다며 허리를 숙였다. 


그저 고마움에 건넨 인사였을 뿐인데 소스라치게 놀란 남자가 허공에 두 팔을 마구 저으면서 어쩔 줄 몰라한다. 그러더니 돈을 더 쥐어준 이동혁과 내게 고개를 몇 번 숙였다 들고는 빈 인력거를 들고 우리가 온 방향으로 다시 뛰어간다. 

 




"저 분은 조선인 인가요?"


"예. 그래서 더 놀랐을 겁니다. 누나처럼 허리까지 숙여서 인사를 하는 이들은 잘 없거든요"


"아..."

 




점점 더 작아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한 번 응시하다 이동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확실히 시가지에 비해선 인적이 드물다.


주변을 살펴봐도 사람이 사는 집이 그리 많지 않은 동네라 나도 모르게 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데 그런 날 알아차렸는지 내 옆에 바짝 다가선 이동혁이 내 손을 잡고 있던 제 손에 조금 힘을 주고는 걸음을 내딛었다. 


혹시 산을 타야하나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다행이도 나재민의 집은 그리 높은 곳에 있지는 않았다. 사람이 사는 지 아닌지 모를 빈 집을 옆에 둔 작은 건물 앞에 이동혁이 멈춰섰고 굳게 닫힌 문을 툭툭 두드렸다. 


고요함 속에 울려퍼진 두 번의 노크 소리, 그리고 그 소리 너머로 닫힌 문이 스르르 열렸다. 

 




"이동혁?"


"누나?"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들어가세요 누나"

 




문 앞에 선 나재민과 김정우가 놀란 눈을 하고서 나와 이동혁을 쳐다봤고, 팔을 뻗어 두 사람을 옆으로 밀어낸 이동혁이 날 집 안으로 살짝 떠밀었다. 


얼떨결에 등 떠밀려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신발도 벗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어야했고, 그런 내 뒤로 이동혁이 따라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내가 살던 원룸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다른 거라고는 신식과 구식의 차이인가. 반쯤 열린 방문 너머로 처음 보는 남자애가 모습을 드러냈고, 고요한 집 안을 보며 멍하니 서 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아, 나는 무사하다. 나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나재민 집에 도착했다. 이동혁 덕분에, 그리고 혼자 남은 정재현 덕분에

 




"누나!"

 




갑자기 주저앉은 나때문에 놀란 나재민과 김정우가 내 앞에 다가왔고 날 일으켜세우려 팔을 뻗은 김정우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재현이, 재현이가 정우야 재현이가"


"응, 천천히. 천천히 말해요, 괜찮으니까 천천히"


"흐으... 재현이가, 재현이가 혼자 남았는데, 나, 나를 동혁씨한테 보내고, 내가, 나 때문에 재현이만 혼자, 혼자 남았는데"

 




김정우와 나재민을 보고 나니까 안심이 돼서, 나도 이동혁도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왔다는 게 실감이 나서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설명을 해야 하는데, 지금 정재현이 혼자 있다고, 김도영이 제 집에 갇혀 있다고 얘기를 다 해줘야 하는데, 그래서 정재현도 김도영도 구해와야 한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서 말이 어그러진다. 


동아줄을 잡고 매달리듯 김정우 손을 붙잡고 엉엉 울면서 말을 하는데 나한테 손이 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김정우 대신 나재민이 서둘러 휴지를 갖고 와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어으, 어떡해, 재현이... 나 때문에, 동혁씨를 나한테 보내서, 나만, 나만 없었어도,"


"누나 진정해요. 그런 말이 어디있어, 형님 괜찮을거야 경청회 정재현이잖아. 그러니 일단 진정부터 합시다 응?"

 




인력거를 타고 오는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그 시간 내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를 무사히 보내느라, 그래서 나한테 이동혁을 붙여주느라 정재현이 혼자 남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내가 아니었다면, 정재현은 이동혁과 함께 도망칠 수 있지 않았을까. 총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나보다, 고작해야 사격 몇 번 해본 게 전부인 나보다 같이 손발이 잘 맞는 이동혁이 있었으면 정재현이 조금 더 괜찮지 않았을까 싶어서


주저 앉은 채로 쉴 새 없이 울고 있는 날 보며 한숨을 내쉬던 김정우가 제 손에 힘을 주더니 내 손을 다시 맞잡으며 날 일으켜세웠다.


그 순간 옆으로 살짝 휘청인 몸을 다급히 이동혁이 받쳐주었고 눈물에 젖은 휴지를 대충 옆에 버려둔 나재민이 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내 앞으로 뻗어진 나재민의 손끝이 눈가에 닿았고 내게서 옮겨져간 눈물이 나재민의 손끝을 적셨다. 

 




"발목은 어쩌다 그리 됐습니까"


"전차 타러 가는 길에 뛰다가 넘어지셔서"


"지성아, 거기 천 좀 따뜻한 물에 적셔 와"

 




따뜻한 아랫목이라며 자리를 내어 준 나재민이 그새 부어오른 발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 대신 대답한 이동혁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 김정우가 아까부터 가만히 선 채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남자애에게 심부름을 시켰고 남자애는 재빠르게 움직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도영이형 아버님께서 아셨어"


"...결국 그리 되었군"


"형님은 사랑채 창고에 갇혔고, 형이 아버님 몰래 보낸 하인이 우리 집에 찾아왔어. 종로서에서 정우형 집으로 찾아갈 거라고"


"형은 여기 와 있길 잘 했구나, 천만다행이야"


"내 집엔 아무리 뒤져도 나올 것이 없을텐데"


"해서 재현이형이 순사들 따돌리겠다고 먼저 가라고..."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는 이동혁을 보며 나재민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김정우는 무덤덤한 얼굴로 남자애가 가져온 천을 내 발목 위에 내려놓았다. 젖은 천이 따뜻하게 발목을 감싸는 느낌에 다시금 코 끝이 아려왔다. 

 




"아버님께서 아시는 얼굴이 나와 형님 뿐이라 다행이다"


"...그러게"


"헌데 동혁이 너는 여기 있는 것보다 집에 가는 것이 나을 것인데. 어머니 홀로 계시지 않니"


"어머니는 잠시 외가댁에 가 계시라 했어, 아마 지금쯤 경성역에서 기차 타셨을거야"

 




김정우는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의 손은 내 발목을 감싸는 천 위에서 떠날 생각을 않았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나재민의 걱정에 태연히 대답한 이동혁이 이내 몸을 뒤로 눕혀 바닥에 드러눕고는 눈을 감는다.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느라 고생한 이동혁을 쳐다보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금쯤 정재현과 김도영은 어쩌고 있을 지 걱정돼서,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나름 안전한 곳에 있는데 그 두 사람은 얼마나 무서울까 싶어서...


여전히 메고 있던 가방을 힐끔 쳐다보다 정재현이 건네 준 책이 생각나서 느리게 손을 움직였다. 가방 지퍼를 열고 정재현이 다급하게 집어넣은 책을 꺼내자 나재민과 김정우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재현이가 마당에서 이걸 꺼냈는데 중요한 거 같아서..."


"경청회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함께 했던 동지들이 적힌 서책입니다, 물론 게 중엔 밀정들도 있긴 했지만..."

 




내가 건넨 책을 받아든 나재민이 책의 겉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고는 낡은 옷장 앞으로 다가간다. 삐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옷장 안에 책을 넣고 다시 몸을 돌린 나재민과 허공에서 시선이 맞물렸다. 


내가 책으로 영상으로 그저 교육을 위해 배운 이 시대는 정말이지 끔찍하고 처절하고 비참하다. 나라를 되찾고 싶은 마음 뿐인 사람들이 앞으로 8년은 더 이렇게 마음 졸여가며 살아야 한다는 게 더 가슴 아프고 더 처절하게 느껴져서 나는 날 빤히 바라보는 나재민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이렇게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데 당신들은 이런 뜀박질을 수백 아니 수천번은 했겠지. 나는 고작해야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뛰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찬데, 당신들은 이 벅찬 숨을 대체 몇 만 번을 몰아쉬었을까

 




"구하러 가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으나 그럴 수 없으니 포기하셔야 될 겁니다. 이 인원으로는 무얼 해도 무립니다."


"...구하러 가겠다 생각 한 거 아니에요, 그냥..."


"......"


"그냥... 나는 고작 이 정도 뛰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당신들은 이 힘듦을 얼마나 많이 겪었을까 싶어서, 그래서 그냥..."

 




불편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결국 나재민의 시선을 피한 내 시선이 닿은 건 부어오른 발목이었고 김정우는 다 식은 천을 다시 남자애에게 건넸다. 찜질을 계속 할 생각인 듯한 김정우에게 괜찮다고 말하는데도 그는 내 말을 애써 못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경청회에 대해 모르는 순사들이 없고 이리 쫓기듯 하는 것도 처음이 아니니"


"...네"


"도영이형도 괜찮을 겁니다. 아버님께서 아들을 어찌하지는 못하실 테니까요, 전에 비해 감시는 늘어나겠지만 그 역시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고"

 




이런 날이 언젠가는 올 줄 알았다는 듯 김정우는 꽤 태연한 낯이었다. 이동혁이나 나재민보다 경청회에 속해 있던 시간이 더 길어서 그런지 확실히 조금 더 여유로워보이는 김정우의 말 덕분에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인다. 


그래.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김도영은 제 집에 갇혀 있으니 안전에 위협 받을 일은 없을 지도 모른다. 아비가 친일파라 제 아들이 독립운동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해도 자기 손으로 직접 아들을 순사들에게 넘기지는 않을테니까


가방을 내 손에 직접 쥐어주던 정재현의 얼굴과, 마지막으로 봤던 김도영의 얼굴을 곱씹고 있는데 내 눈 앞에 갑자기 적신 천이 내밀어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아까부터 조용히 앉아있던 남자애가 조심스레 내 앞에 팔을 뻗고 있는 게 보인다. 

 




"저기... 이거..."


"아, 고맙습니다."

 




얼떨결에 천을 잡고 인사를 건네자 놀란 표정을 지은 남자애가 이내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나재민 뒤로 가서 앉는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아 저 남자애가 나재민이 말하던 그 동생이구나

 




"일단 좀 쉬시지요, 예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으니"

 




나재민의 동생이 건네준 천을 발목 위에 덧대고 있는데 그 때 나재민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그가 움직이자 그때까지 눈을 감고 있던 이동혁이 눈을 번쩍 뜨고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뒤이어 김정우도 따라 일어선다. 


경청회 사람들끼리 뭔가 할 얘기가 있구나 싶어 일어나는 세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내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와 함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터져나왔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쉰 재현이 텅 빈 폐가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 채 눈을 느리게 감았다.


일본인들이 주로 다니는 길목이 아닌 곳이라 네온사인은 커녕 가로등도 몇 개 없는 곳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길은 일본인 순사들보단 조선인들에게 더 익숙한 곳이니 이 곳에서 숨을 조금 돌렸다 가면 문제 없을 것이다.


감았던 눈을 뜨자 텅 빈 집 안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누구의 집인 지는 모르겠으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속으로 짧은 인사를 대신한 재현이 순간 밀려온 고통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팔이 다시금 고통에 절여졌다. 그래도 이 만 하길 다행이다 싶어 숨을 몰아쉰 그가 제 셔츠 자락을 잇새로 물어뜯었다. 지익- 작은 마찰음과 함께 오른쪽 소매가 완전히 찢어졌고 찢어진 옷소매로 왼쪽 팔뚝을 빠르게 감았다. 


하얀 셔츠가 금세 붉은 피로 물들어가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덕분에 눈에 띄지는 않는다. 상처를 응시하던 재현이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깜빡였다. 날이 밝기 전에 삼각산까지 도착할 수 있으려나. 해가 뜨면 이런 행색은 의심 사기 십상인데...

 




"...무사히 도착했겠지..."

 




제 손에 노란 리본을 쥐어주고 뛰어가던 뒷모습을 떠올린 재현이 제 바지 주머니에서 샛노란 리본을 꺼내들었다. 작디 작은 리본 하나일 뿐인데도 보고만 있어도 왠지 마음이 놓여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올린 재현이 리본을 감싸며 주먹을 꽉 쥐었다. 


동혁과 함께 갔으니 지금쯤이면 무리없이 재민의 집에 도착했을 것인데. 삼각산 쪽은 경성 시내와 꽤 거리가 있기도 하고 그 곳은 조선인들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순사들의 눈을 피하기 좋다.


순사들이 그 곳까지는 순찰도 잘 돌지 않아 종종 재민의 집에 숨어있던 경청회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이번엔 자신들이 재민의 덕을 보게 됐으니


여주를 줄곧 믿지 않고 거부하던 재민도 어느 순간부터는 믿고 따르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 저 못지 않게 여주를 잘 챙기고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썩 좋지만은 않다. 


여주를 그렇게 보낸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같이 가지 않냐고 당황하던 그 얼굴이 자꾸만 눈 앞에 아른거려서 마음이 무겁다. 네가 경성에서 처음 만난 것이 내가 아닌 부잣집 자제였다면 조금 더 편히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나라를 잃고 벗도 잃고 가족도 잃었다. 일제의 총칼에 잃은 소중한 이들이 너무 많아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태극기를 들고 독립을 외쳐온 제 조상들을 따라 저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뛰어야겠다 마음 먹었다. 


소학교를 가고 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경청회에 들어간 이후로도 줄곧 제가 원하는 건 이 나라의 독립이었고 우리 땅을 되찾는 것이었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애초에 가진 것이 없었으니 더 그러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멀쩡한 몸뚱아리 하나 뿐이어서, 이 몸 하나로 독립운동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여겨왔다. 


헌데 언제부턴가 무서운 것이 생겨버렸다. 두려움이 없었는데 두려운 것이 생겨버렸다. 어떻게든 지켜야하는 것이 생겨버렸고 그와 함께 무서움과 두려움마저 자라났다.


너를 만난 뒤로, 네가 내 세상의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 그리고 너를, 

 




"...연모한다"

 




연모하게 된 뒤로. 


희망이자 봄 그 자체인 너를 내가 연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나는 지금 무섭고 두려워 여주야. 내가 너를 지키지 못할까봐, 내가 너를 아프게 할까봐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을 곱씹으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뜬 재현이 다시 긴 숨을 몰아쉬었다. 밖이 조용하다. 이젠 다시 움직여야 할 때다. 


주먹을 쥔 손을 조심스레 펼친 재현의 시야에 노란 리본이 닿았고, 그 리본을 소중히 주머니에 다시 넣은 재현이 조심스럽게 몸을 틀었다. 













재현이 입장에선 여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꿈꾸던 독립이자 희망이자 봄인 여주를 재현이가 밀어낼 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그건 재현이에게만 국한된 얘기는 아닐 지도...?


어쩌다보니 한 편이 좀 빨리 만들어져서 부랴부랴 가져왔습니다, 벌써 일요일 자정이 지났네요, 독자님들 모두 편안한 밤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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