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루님과의...크리스마스...연교를 위해 오랜만에 쓰게된 그분벨입니다. 함께 눈을 맞는 그분과 벨이.....주제?였는데...아니 그게, 함께 눈을 맞긴 합니다만...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마냥 밝은 이야기는 아니..긴하지만 아니 그렇다고 아주 어두운 얘기도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그렇습니다...(ㅈ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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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골자는 위의 썰과 공유되며, 콜드워 캠페인 스포 및 시즌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르단스크 항공에 발을 딛자 다소 포근하게까지 느껴지는 바람이 뺨을 스쳤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이 그 끝자락에 닿아 있는 것만 같았다. 계절과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찾은 이곳은 예전과 뭇 다른 풍경을 하고 있었다. 치열하고 황폐한 죽음 위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이전의 도시와 달리 누가 보아도 빼꼼 고개를 내밀어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마치 자신처럼. 검은 모자를 더욱더 깊게 눌러 썼다. 메이슨으로부터 전해 받은 위치까지 움직이려면 제법 부지런하게 가야 했다.

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몸 상태가 나쁘지도 않았다. 그저 여기까지 오기로 결심하기까지 수십 일이 걸렸을 뿐이었다. 아니 수개월이었던가. 제대로 마음을 먹은 뒤는 일사천리였다. 누구에게도-메이슨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조용히 움직였다. 어쩌면 지금쯤 저의 부재를 눈치챈 이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터였다. 저는 종종 몇 가지 활동으로 아무도 모르게 자리를 비우곤 했으므로. 신경 쓰는 이가 있다면 '그 남자'뿐이겠지. 고개를 저었다. 무심코 떠올린 남자를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지금은 그자가 중요하지 않았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그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내가 생각할 것은 오직 하나였다.

내가 도망쳐온 진실을 마주하는 것.

목표 지점에 가까워질수록 걸음은 더욱 속력이 붙었다.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는다. 겨우 결심이 섰건만, 아직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래서였나.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걸음을 뚝 멈췄다. 심장이 세게 뛰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돌아가려면 지금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도망칠 기회는 아직 남아있었다. 도망치자. 누구인지 모를 목소리가 왕왕 머릿속에서 멋대로 지껄여댔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자. 누구도 널 찾지 못하도록. 널 기억하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쳐, 83LL.

"아니야!"

나는 버럭 소리쳤다.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도망치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주변에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대로는 결국 들켜버릴 것만 같은 불안이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누구에게? 누구에게든. 무엇으로부터? 무엇이든.

왜?

결국 벌어진 입으로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었다. 금방 발작이 도질 것 같았다. 빌어먹을. 욕지기를 씹어뱉으며 모자를 벗어 머리를 한번 쓸어넘겼다. 포근하게도 느껴지던 바람이 다시 차가워진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제가 흘린 식은땀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캡을 쥐고 눌러쓴 뒤 주먹을 쥐어 왼쪽 가슴 위를 툭툭 두드려 심호흡했다. 이미 이 과정도 몇 번이나 겪었었다. 처음 메이슨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오히려 어떤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확히 일주일 뒤에 한동안 일으키지 않았던 발작을 일으켰을 때였다. 한달음에 달려와 제 손을 꼭 쥐고 그 단단한 눈으로 바라보던 메이슨을 보며 겨우 알아차렸었다. 나는 그 일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차라리 눈물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후회하고, 슬퍼하며, 울고 싶다고. 하지만 눈물은 나오질 않았다. 믿고 싶지 않기도 했고, 믿고 싶기도 했다.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았다.

길게 숨을 뱉었다. 나는 다시 걸음을 뗐다. 그리 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이대로는 아무것도 정할 수 없다는 사실 하나였다.

내 감정도, 내 바람도, 내…. 

나의 전부가.


"......"

나는 헤매는 법 없이 그것을 찾았다. 그것 앞에 섰다. 어떤 이름도 새겨지지 않은, 어느 것도 가리키고 있지 않은, 하지만 분명히 이곳에 존재하는.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았다. 수백, 수천, 수만 가지를 더 생각했었을 텐데. 정작 그 앞에 서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돌은 차갑고, 딱딱했다. 손끝이 금방 그 차가움에 물들었다.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당신의 죽음이.

다시는 당신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겨우 제 현실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 비통한 명제는 시린 냉기만큼이나 서럽게 제 몸을 떨게 했다. 부정하고 싶은데, 거부하고 싶은데 제겐 그럴 자격도 재주도 없었다. 당신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자신인 것만 같았다. 아니, 내가 맞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날개가 되겠다고 맹세했던 바로 자신이 당신을 죽게 했다. 어느 외압이나 고문, 세뇌가 있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분명한 사실일 터였다. 부족하고 어설픈 제게 곁을 내어준 당신을 배신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배신자.

그래서 이곳을 찾는 데 한참이 걸렸다. 도저히 당신을 찾아볼 낯이 없었다. 그것은 죄책감이기도 했고, 죄악감이기도 했으며, 죄장감이었다. 동시에 허황한 이기였는지도 모른다. 도망치면, 끝끝내 그러면 적어도 당신 앞에 배신자로 서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얄팍한 이기심.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당신 앞에 배신자로 서는 것이. 더는 내게 '괜찮다'고 말해줄 당신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일부러 회피 해온 것이다. 뻔뻔하지 않은가. 이 지경이 되어서도 당신이라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당신이 내게 너는 배신자가 아니라고 말해줄 것 같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야 당신은 나의 전부였다.

부모였고, 형제였으며, 둘도 없는 영혼의 반쪽이었음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배신했다. 차라리 죽었어야 했는데.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당신은...

"...죽었겠지."

여전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웃음이 나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도리어 오만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내가 없는 당신은 결국 이렇게 죽었을 것이다. 수백의 밤을 보내면서도 해보지 않았던 단 하나의 '가정.' 그래 내가 곁에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아차린다면 재미없는 농담이라고 비웃음이나 살 게 분명했다. 당신이 안다면 어떨까. 당신에게 묻고 싶었다. 나를 사랑해주었던 당신에게.

동시에 내게도 물어야만 했다. 당신이 없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고.

예전에는 의문조차 가져본 적 없었다. 나는 당신의 날개였다. 찬란한 페르세우스의 날개였다. 당신이 곧 내가 되고, 나는 곧 당신이 되었을 터였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라 여겼다. 거기에 죽음은 무의미했다. 죽음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하리라. 우리의 정신은 무결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나는 더이상 페르세우스가 아니었다. 그것을 모두 내던지고 도망쳐온 도망자에 불과했다. 목을 베었어야 할 메두사의 눈을 가리고, 그 뒤에 숨어버린 나약한 배신자였다. 그것이 퍽 슬펐다. 결국 나는 당신의 무엇도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당신을 뒤따를 수조차 없음에,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나는 홀스터에 꽂아둔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거의 평생을 손에서 떼어놓았던 적이 없는 그 물건이 지금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느리게 기울던 해가 달궈 놓았던 붉은 하늘이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문득 콧잔등 위로 차가운 것이 닿았을 때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아직 미미한 열기를 머금은 하늘에서는 되다만 작은 눈송이가 먼지처럼 희뿌옇게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다소 포근하게 느껴지던 바람은 이것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거기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내릴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눈송이가 제법 굵어졌다.

쓴웃음이 걸렸다. 이제야 겨우 당신을, 당신의 죽음을 마주할 용기를 냈건만 그 순간에 하늘에선 눈이 내린다. 얄궂었다. 다시 시선을 내렸다. 당신과 눈을 맞으며, 나는 처음으로 당신을 내 마음에 아무도 모르게 품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당신의 커다란 손을 처음으로 힘주어 잡았던 날을 떠올렸다. 당신과 처음으로 나란히 걸었던 날을 떠올렸다.

모두가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왜 여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었던 나를 소중하다고 말해주었던 당신은 제게 영영 끝나지 않을 겨울이었고,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내게 내리고 있었다. 당신을 배신하고, 당신에게서 도망친 내게 당신이 또다시. 시선을 내렸다. 당신의 묘비 위로 뜨거운 것이 툭 떨어졌다.

아아, 나는 어깨를 떨며 낮게 탄식했다. 이제야 겨우 나는 무엇이 가장 두려웠는지 알았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나는 총을 꺼내 들었다.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린 것은 이제 쉼 없이 턱 끝에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당신에게 비였다. 옷을 적시고, 몸을 둔하게 만들고, 상심에 빠지게 하는, 아름답지도 못한 궂은 비. 당신을 녹이는 비. 당신의, 비.

단발의 총성이 길게 울었다.




어둠이 금방 찾아든 검은 하늘은 쉼 없이 펑펑 쏟아내는 하얀 눈으로 반짝거렸다. 눈을 받고 있는 대지 역시 그랬다. 누가 잠들었는지 제대로 씌어있지 않은 묘비 역시 하늘에서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 위에 올려진 한 자루의 권총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인이 없는 묘비와, 주인을 잃은 권총 한 자루.

거기에서 멀어지는 두 개의 발자국이 천천히 함박눈에 사그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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