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간의 데이트 폭력(가스라이팅), 가정폭력 묘사가 있습니다. 


#21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기억도 희미한 아주 어린 시절에는 나름 재잘거렸던 것 같다. 말이 없어졌던 건 그 남자가 다른 아빠들과는 다르다는 걸,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유치원에 들어가 처음으로 만난 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말하는 ‘아빠’는 낯설고 신기한 존재였다. 너무 신기해서 퇴근한 엄마에게 곧장 물어봤었다. 엄마, 아빠가 놀아주기도 하는 거야? 친구들의 ‘아빠’는 목마도 태워주고, 같이 공놀이도 해주고, 자전거도 태워주는 존재들이었다.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 뒤에 엄마에게서 나온 답은 ‘엄마가 전부 다 해줄게.’였고,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냥 아빠가 저럴 수도 있는 건지 궁금했던 건데. 엄마의 반응을 이해하게 된 건 조금 더 자라서였다.

그 남자는 내가 저의 유전자를 반이나 갖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그 남자의 머릿속에서 나는 사생아였고, 엄마는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워 애까지 낳은 여자였지만,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엄마가 버는 돈을 쓰고 다녔다. 집안일은커녕 일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몇 번이고 이혼을 권유했지만 엄마는 꿋꿋했다. 이유를 들은 적은 없어서 혼자 추측만 했다. 겉으로나마 멀쩡한 가정인 척 하고 싶었던 게 엄마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까짓 인간 하나 없어도 충분히 멀쩡한 가정이 될 수 있는데. 그놈의 엄마, 아빠, 자식 구성이 뭐라고.

첫사랑은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다. 입학한지 한 달이 지나도록 특별히 친한 친구 없이 겉도는 내가 신경이 쓰였는지 유난히도 잘 챙겨줬었다. 상담이라는 명목으로 불러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곤 음료수 한 캔을 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미숙한 학생에 대한 선생님의 당연한 관심을 다른 감정으로 착각해버린 어린 아이. 누구나 한 번 쯤 겪을 수 있는 흔해 빠진 이야기였고, 나 역시도 겪었을 뿐이었다. 선생님에게 받아서 먹지도 않고 모아뒀던 음료수 무더기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며 버렸다.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때렸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이유가 합당한 것도 아니긴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났던 과외선생님과 공부를 핑계로 늦은 시간까지 밖에서 데이트를 하다 집 앞에서 입을 맞췄다. 그걸 그 남자가 본 거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무차별적인 폭언이 쏟아졌다. 이따위 폭력이 태어나 처음으로 그 남자에게 받는 관심이라는 게 비참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아빠의 사랑을 원했을 뿐이었는데. 남자랑 키스 좀 한 게 뭐라고 뺨까지 맞았다. 서러웠다. 개새끼. 쓰레기 새끼. 다음 날 엄마는 내 부어오른 뺨을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딱 한 마디를 했을 뿐이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 세진아.

 

아무런 설명도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바로 알았다. 그래서 엄마를 껴안고 대답했다. 나는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좋아. 그거면 괜찮아. 드디어 엄마는 그 남자와 헤어졌다.

내가 원한 사랑은 보편과 달랐다. 세 번 쯤 사랑을 하고서야 깨달았다. 나름대로 빠르다고 생각했던 눈치는 타인 한정이었나 보다. 내 자신을 아는 데는 너무 느렸다. 깨달음과 동시에 참담함은 찾아왔다. 다시는 그런 사랑을 찾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수능이 백 일 남았을 무렵이었다. 잘 만나고 있던 삼십대 남자에게 입시를 핑계로 이별을 통보했다. 다정한 척 사랑을 주던 남자는 한순간에 돌변해 화를 내고 욕을 했다. 역시 다 똑같구나.

나는 엄마에게 먼저 성을 바꾸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 남자가 자기에게서 받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그렇게 주장해댔으니, 유일하게 하나 받은 성도 바꿔줘야지.

화창한 스무 살, 이세진은 배세진이 되었다.

 

 

 

“아들.”

“응.”

“엄마 재혼할까.”

 

입으로 가져가던 젓가락이 그대로 멈췄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엄마를 바라본다. 엄마는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 만나는 사람 있어?”

“응. 어쩌다 보니까 좀 됐어.”

 

엄마는 웃고 있었다. 엄마가 연애를 했다. 연애 끝에 결혼까지 생각했다. 이렇게 웃으면서. 더 볼 것도 없지 않을까. 엄마가 저렇게 웃는데.

 

“나는 좋아.”

“만나보지도 않고 좋다고 해도 돼?”

“엄마가 만난다는데 당연히 괜찮은 사람이겠지.”

 

엄마가 손을 뻗어 내 볼을 살짝 꼬집어 흔든다.

 

“그래도 만나 봐. 같이 살게 될 사람인데 너한테도 제대로 허락 받고 싶어.”

“내 허락은 무슨…….”

 

그렇게 말은 했지만 엄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도 아들 한 명이래. 이름이 뭔 줄 알아?”

“뭔데?”

“이세진. 신기하지?”

 

뜨끔할만한 이름이 엄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신기하네. 정말로 신기하긴 했다. 김세진도 박세진도 아니고 하필 이세진일 게 뭐람. 엄마는 이어서 간단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너랑 이름은 똑같은데 나머지는 다 정반대인 것 같더라고. 덩치도 좋고 성격도 활발하고. 아, 공부 잘하는 건 비슷하겠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는 엄마의 얼굴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엄마의 얼굴을 오래오래 보고 싶었다.

 

 

 

엄마에게 들었던 대로 이세진은 나와 정반대였다. 고작 몇 분 봤다지만 첫인상부터 느낄 수 있었다. 학창시절 내내 귀찮아했던 타입이다. 절대 싫은 건 아니지만 말을 붙이면 귀찮아지는, 그런 타입. 게다가 생각 없이 마냥 발랄한 것도 아니다. 계속해서 붙어오는 시선이 느껴진다. 무슨…… 탐색전을 저렇게 해. 체할 것 같다. 이건 탐색전이 아니라 사냥 같은데. 일부러 이세진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아주 잡아먹겠다. 그랬더니 별 필요도 없는 말로 말을 걸어온다. 꾸역꾸역 샐러드를 밀어 넣다가 사레에 들려 작게 기침을 했다.

 

“……형님은 무슨. 형이라고 해.”

 

부러 살짝 눈을 피하며 대답했고 이세진은 여전히 사람 좋게 웃었다. 그래봤자 다 보인다. 이빨 감추고 웃어봤자 그 아래의 발톱이 시퍼렜다. 그러니까, 이대로 가면 쟤가 내 동생이 될 거란 말이지.

훤칠하게 생기긴 했다. 거기에 성격도 나쁘지 않으니―내가 불편한 것과는 별개로― 학교 다니는 내내 여자애들이 들러붙어서 고백을 몇십 번은 받았을 것 같다.

이세진이 조금 불편하다고 엄마에게 재혼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정말로 싫은 거면 모를까, 그냥 내가 싫어하는 전형적인 타입일 뿐이지 엄마에게는 서글서글하게 잘 할 거다. 물론 나한테도 잘 하겠지만 내가 불편할 거고. 엄마한테만 잘 하면 된다. ……근데 쟤가 나 때문에 반대하면 어쩌지? 계속 저딴 식으로 쳐다보는 게 내가 마음에 들지는 않은 것 같다. 엄마한테 하는 거 보면 괜찮은 것도 같은데, 저런 애들이 뒤에서 달라지는 걸 너무 많이 봐왔다. 나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계속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말하지. 뭐라고 말할까. 분명 단둘이 남겨지는 순간이 1분이라도 있을 테니 그때를 노려야 했다. 그리고 역시나,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우리는 단둘이 남겨졌다. 시간이 없다. 나는 대뜸 말부터 던졌다. 내 초조함이 드러나지 않게, 늘 하던 대로 얼굴 위에 한 겹 더 두르는 걸 잊지 않았다.

 

“나는 만나기 전부터 엄마한테 결혼 찬성이라고 했어.”

 

그러니까 너도 찬성하라고. 우리 엄마가 마음에 안 차진 않을 거 아냐. 대충 이 뜻이다. 딱 봐도 눈치도 빠를 것 같으니까. 적당히 알아들어.

 

“초조해보이네요. 왜요, 내가 싫다고 할까봐?”

 

정확하게 간파 당했다. 이런 점까지 짜증이 났다. 역시 절대 내 취향은 아니다. 나를 속속들이 알려 하는 사람은 불편하다. 감추고 싶은 속내까지 까뒤집고 아는 척하는 사람은 더더욱.

 

“우리 엄마 유언이 재혼하라는 거였어요. 근데 십 년을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결혼하고 싶다는데 내가 뭘 말려. 어련히 좋은 사람 만났겠지.”

 

다행이다. 이세진의 입에서 내가 원했던 답이 나오자마자 나도 모르게 얼굴을 폈다. 그걸 이세진도 봤는지 입꼬리가 올라간다. 웬만하면 들키기 싫은 얼굴이었지만 상관은 없다.

 

“대신에 형.”

“……어?”

 

풀고 있던 마음이 순간 긴장으로 바싹 조여들었다. 나도 모르게 조금 바보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내 형 되면 나 과외 해주기.”

 

그러나 이어진 말은 같잖은 이야기였다. 못 해줄 것도 없긴 했다. 나는 분명 못 가르친다고 말했고, 거기에 괜찮다고 한 건 이세진이다. 괜한 시간을 들여 성적이 안 올라도 내 탓 아니라는 거지. 어쨌든 됐다. 곧 부모님이 돌아오셨고 나는 일어나자는 말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또 따라붙는다. 힐끔, 쳐다봤다가 이세진이 웃는 걸 보고 바로 눈을 돌렸다. 이세진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넣을 때까지도 이세진은 끈질기게 나를 쫓았다. 그만 좀 쳐다보지. 혹시라도 마음을 바꿀까봐 차마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떨어질 줄 모르는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식당을 나섰다.

 

 

 

이세진과의 관계는 생각보다 거슬렸고 생각보다 괜찮았다. 거슬리는 부분들은 전부 사소한 점들이고, 괜찮은 부분들은 큰 점들이라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남을 가리키는 것 역시 생각보다 괜찮았다. 내 실력이 괜찮았다는 게 아니라 흥미적인 부분에서였다. 어쩌면 이세진의 말대로 이세진이 베이스가 탄탄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괜찮았다.

이세진은 우리 엄마를 엄마라고 불렀고, 나 역시 이세진의 아빠를 아빠라고 불렀다. 한 가정이 됐으니 당연한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미 머리가 클 대로 큰 열아홉, 스물이 바로 호칭을 바꿀 수 있다는 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래도 빨리 아빠라고 불러야만 그 남자를 인생에서 완전하게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도, 엄마의 인생에서도.

나쁘지 않은 아빠와 나쁘지 않은 동생이 생겼다. 그냥 그 정도였다.

엄마도 아빠도 모두 바쁜 사람들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둘만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세진은 늘 내가 못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과외 받으라는 말은 결단코 거절했다. 끝까지 나랑 계속 하겠다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나 때문에 오를 성적도 떨어질 것 같으니 바꾸겠다고 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훨씬 괜찮지.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받았다. 받자마자 후회했다. 겨우 연락을 끊어냈던 그 새끼였다. 전화 잘못 걸었다고 끊어버렸어야 했는데, ‘이세진.’ 하고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서 몇 초를 우두커니 있었더니 타이밍을 놓쳤다. 바보같이. ‘이세진 맞구나.’ 제멋대로 결정을 내린 그 새끼는 본격적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듣지도 않고 끊어버리자니 번호까지 알아낸 그 새끼가 또 어디까지 알아냈을지 모르겠다.

 

- 나 아직도 너 못 잊었어, 세진아. 우리 제발 다시 시작하자. 응? 이번엔 내가 진짜 잘할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우리 헤어졌잖아, 형.”

- 말은 똑바로 하자. 네가 일방적으로 잠수탄 거잖아. 그걸 헤어졌다고 할 수 있어? 난 아니거든.

“다시 시작할 일 없어. 그러니까 연락하지 마……! 나 진짜 형이랑 대화하기 싫어…… 이렇게 목소리 듣는 것도 스트레스야. 끊을게.”

- 왜 그래, 응? 가족들 있어서 그래? 나중에 다시 연락할까? 내일 낮은 괜찮아?

“나중에도 연락하지 마.”

- 세진아.

 

그때 끊었어야 했다. 뒷말을 듣겠다고 생각하지 말걸. 이름을 불리니 또 본능적으로 멈춰버렸고 그런 내가 싫어서 죽어라 자책을 했다.

 

- 나 진짜 너 사랑했던 거 알잖아. 근데 어떻게 이래.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너 그렇게 연락 끊기고 내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미친놈처럼 살았어. 아니, 그걸 살았다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데 나한테 어떻게 그래. 너도 내가 좋다고 했잖아……! 네가 먼저 고백했잖아!

“야.”

 

내가 여전히 18살이었다면 저런 말에 또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너밖에 없다, 너 없으면 죽는다, 그때는 이런 말들이 다 진짜인 줄 알았고 이 사람한테는 내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어리지만 그때는 더 어렸으니까. 아무것도 몰랐고, 그저 어른의 사랑을 원하는 어린애였으니까.

 

“넌 네가 했던 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 ……형이다, 이세진.

“끊는다. 연락하지 마, 진짜. 번호 다시 바꿀 거야.”

- 야!

“그리고 나 이제 이세진 아니거든. 그러니까 형이 사랑했던 이세진은 그냥 묻어.”

 

이번에야말로 틈도 주지 않고 끊어버렸다. 입술을 깨물고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짜증이 치솟는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이 미친 새끼는 결국 집 앞까지 찾아왔다. 몇 번이고 전화를 해대길래 무시했더니만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집 앞이야.’ 식겁해서 창문으로 내다보니 진짜였다.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파트 앞에 서 있는 저 새끼를 보니 자연스럽게 그날이 떠올랐다. 그 남자에게 처음으로…… 그날, 그래 그날. 빨리 저 새끼를 쫓아내야 한다는 생각만 들어 급하게 슬리퍼를 꿰어 신고 뛰어 나갔다.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는 얼굴에 그대로 뺨을 갈기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미친 새끼야……!”

“입이 험해졌네.”

“다시 만날 생각 전혀 없고, 얼굴도 보기 싫으니까 그냥 가. 신고하기 전에.”

 

호흡이 가빠졌다. 진짜로 토할 것 같았다. 급하게 몸을 돌려 집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다. 엄청난 악력으로 팔이 붙잡혔다. 고개를 홱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팔을 잡아당겼다. 속절없이 끌려갔다. 뿌리치려고 애를 썼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세진.”

“내 이름 이제 그거 아니라고 했어.”

“연락 계속 피할래?”

 

그 새끼는 내 손목을 부러뜨릴 듯이 붙잡고 벽으로 밀어댔다. 진작 헬스 좀 다닐 걸. 우습게도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악착같이 몸부림쳤지만 그 새끼는 꼼짝도 안 했다. 짜증이 나서 눈물이 났다. 그게 또 짜증이 났다. 이 새끼 앞에서 울기 싫은데. 눈치도 없이 솟는 눈물이 짜증이 났다.

 

“형이 하는 거 사랑 아니라고 했잖아. 그거 집착이라고. 이제 그만 좀 해!”

“연락 무시하고 잠수타놓고 이제 와서 네 마음대로 생각하지 마.”

“내가 왜 잠수를 탔겠어! 말이 안 통하니까 그렇잖아! 지금도……! 좀, 놓으라고……!”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혹시나 엄마일까봐, 아빠일까봐, 황급히 고개를 돌려 인기척을 확인했다. 엄마도 아빠도 아니고, 다른 아파트 주민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세진이었다.

 

“저기요~ 이 밤중에 남의 집 앞에서 뭐하십니까?”

 

손목을 억누르던 악력이 사라졌다. 이세진이 그 새끼의 손을 잡아채 들고 있었다.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져 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하면 고여 있던 눈물이 증발이라도 하는 것 마냥.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이세진은 이상할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나를 쟤가 그렇게까지 따랐었나? 싶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저런 표정을 짓는 이세진은 처음이었다. 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같이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차가운 얼굴인데 분명히 화가 나 있었다. 됐다고, 그냥 들어가자고, 말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그 새끼가 더 빨랐다. 눈 깜짝할 새에 이세진이 주먹을 맞고 나가 떨어졌다. 입 안이 터진 건 물론이고, 살갗도 찢어져 있었다. 바로 이세진에게 달려가 떨리는 손으로 팔을 잡아 부축했다. 이세진은 이 새끼랑 아무 상관도 없는데. 아무 관계도 아닌데 괜히 나 때문에 봉변을 당했다. 자책감이 가슴을 짓눌러왔다.

 

“남친은 무슨…… 지가 딸리니까 하이스펙 남친 만들었을까봐 쫄았구만.”

 

이세진은 웃었지만, 절대 평소와 같은 웃음은 아니었다. 한층 더 차가웠고, 싸늘했다. 본 적 없는 표정이다. 이러다 뭔 일이라도 나겠다 싶어 이세진을 말리려고 했지만 눈 깜짝할 새에 이세진이 그 새끼에게 주먹을 날렸다. 나 때문에…… 절망적이었다. 사람을 죽였다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정말, 전혀, 이세진과 관련 없는 일 때문에 괜히 맞고, 괜히 폭력을 쓰게 됐다는 게 싫었다. 그게 또 내 일이라 더 싫었다. 들어가요, 형. 이세진은 나를 잡아끌었다. 우리의 집으로 돌아가자고. 나는 이세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내 일이니까 내가 마무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런다고 저 새끼가 여기서 그만둘지는 모르겠지만.

 

“형한테 그거 사랑 아니라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나도 딱히 형을 사랑한 적 없었던 것 같아.”

“…….”

“형을 사랑한 게 아니라, 형이 주는 사랑을 사랑했던 거야.”

“…….”

“다시는 연락하지 마.”

 

나는 이세진보다 앞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세진이 잡은 손목이 욱신거렸다. 어쩌면 다른 곳이 욱신거린 건 아닐까. 이상한 망상이 머리를 헛돈다. 그게 티라도 날까 나는 절대 이세진을 돌아보지 않았다. 나도 뭔지 모를 고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확인하기도 전에 이세진이 먼저 알까봐, 그게 싫었다.

 

 

새벽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깼다. 이세진이 이른 시간에 나가거나, 혹은 늦은 시간에 들어오는 소리였다. 언제부턴가 이세진은 아주 일찍 나가 아주 늦게 들어왔다. 가끔은 그 시간에 깨어있기도 했지만 아는 척하지 않았다. 일부러 이세진이 그렇게 다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과외 시간을 제외하고는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과외 시간마저도 이세진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갑자기 달라진 태도였다. 그리고 나는 그 분기점을 기억한다.

이세진의 소원. 내가 이세진을 안아준 날. 그날 이후부터 이세진이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차단했다. 괜히 생각했다간 모든 게 짜맞춰져서 하나의 결론을 내려버릴지도 모른다. 아마 틀림없이 내가 또 회피를 선택하게 될 결론이 될 거다. 이세진이 모른 척하고 있는데 굳이 내가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후회할 건데. 그 말에 담긴 뜻은 명백했다. 애써 생각을 지웠다. 나는 과연…… 이세진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걸까. 혹은 듣고 싶지 않은 걸까. 머리가 복잡했다.

우리가 형제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생각을 지워야 하지도 않았겠지.

이 생각 역시 금세 지워버렸다.

 

 

 

[결과 나왔어?]

 

하필이면 늦은 기말고사가 있는 날이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이세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중이라는 기계음만 나를 반겼다. 카카오톡을 보내 봐도 묵묵부답이다. 별 수 없이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중이라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분명 한 사람이랑만 통화하고 있는 건 아닐 텐데, 왜 나만 연락이 안 돼.

그래서 그냥 무작정 뛰었다. 연락이 닿지 않아도 얼굴을 보면 그만이다. 집까지 뛰어 들어가 이세진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노크를 해야 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실 문을 열고나서야 깨달았다. 노크라도 할 걸 그랬나.

 

“……어떻게 됐어?”

 

노크도 없이 남의 방에 뛰어들었다는 생각에 괜히 멋쩍어져 이세진의 눈치를 봤다.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든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세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다.

 

“어떻게 됐을까요?”

“야.”

 

이세진이 웃음을 터뜨린다. 이세진의 표정을 읽는 건 아직도 어려웠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웃을 정도면 역시 합격일까 싶으면서도, 늘 웃는 얼굴 뒤로 속을 감추는 놈이라 아닐지도 몰랐다.

 

“소원 들어줘요.”

 

합격도 불합격도 아닌 말에 순간 사고가 멎었다가, 곧 천천히 웃음이 폈다. 이세진이 말할 소원이 뭔지 생각하는 건 뒷전이었다. 어쨌든 ―이세진의 고집으로― 끝까지 내가 가르친 나의 처음이자 유일한 학생이 원하는 대학에 붙었다는 건 생각보다 더 큰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저번처럼 이번에도 소원은 나중에 말하겠지 안일하게 생각한 것도 없잖아 있었다.

 

“아무튼 정말로 축하하고, 소원은 나중에 말할 거야?”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멍하니 나를 쳐다보던 이세진이 내 볼에 손을 올렸다. 닿아오는 손이 시원해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볼을 쓰다듬던 손은 체온이 미지근해지도록 멈출 줄을 몰랐다. 시원한 체온이 좋아서 나 역시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왜 대답―”

“지금 말할래요.”

 

왜 이번에는 지금일까.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나는 눈만 깜빡였다.

 

“고백 하나 들어줘요.”

 

덤덤하게 말하는 이세진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입술로 향했다. 지금 이세진이 한 말을 곱씹으며. 이세진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 고백이 뭘까, 생각해볼 것도 없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아직까지도……. 절벽의 끝까지 온 순간마저도.

 

“그게 소원이야?”

“네.”

“뭔지는 몰라도 들어주는 건 그냥도 할 수 있는데……?”

“안 돼요.”

 

이세진은 떨고 있었지만 확고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래하지 않길 바란 순간이었다. 이제는 도망칠 곳도 없으니, 절벽으로 떨어지는 수밖에 없다. 나는 떨어지기로 결심했다. 너를 피해서…… 너의 사랑을 피해서.

 

 

 

나는 엄마가 요즘처럼 행복해하는 걸 처음 봤어.

……그래서 안 돼, 나는…….

나 행복하자고 그럴, 수가 없, 끅, 어…….

 

엄마의 행복이 평범한 가정이라면, 나의 행복은 결핍의 충족이었다. 내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게 이세진인 한, 두 행복은 공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포기하기로 했다. 엄마는 모른다. 엄마가 모르니까 괜찮았다. 내 마음 같은 건…… 이세진도 모르니까 괜찮았다.

 

 

 

이세진은 대뜸 군대에 가버렸다. 확실한 도망이었다.

내가 도망치기 전에 먼저 도망쳐준 걸 고마워해야할까. 나는……. 그래봤자 나는 이미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절벽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이세진을 지우고 몰두해낼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줄 아는 건 공부밖에 없었다. 고작 2학년이었지만 성적이 좋아서인지, 면접을 잘 봐서인지 괜찮은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조금이라도 마음을 돌리면 이세진이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왔다. 잘 지내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겠지. 원해서 도망친 곳이니 그러기를 바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니까.

이세진이 군대에 간다고 해서 평생 안 보고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휴가를 나온다고 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는데도 어제처럼 생생해서. 나는 아직 조금도 못 잊었는데, 이세진은 잊었을까봐 겁도 났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다는 반가움보다도, 보고 싶었다는 설렘보다도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이세진이 나를 잊고 잘 살았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나를 잊지 않았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마음을 품는 내가 싫었다.

 

“형.”

 

삼겹살을 먹는 건지, 찰흙덩어리를 먹는 건지 모르겠다. 먹는 데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안 됐다. 바로 옆에 앉은 이세진의 모든 행동이 신경 쓰여 죽고만 싶었다. 당장 바쁜 일이 생겼다고 뛰어나가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근데. 나를 부르면 어떡해. 젓가락이 삐끗했다.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삼겹살 한 점을 떨어뜨렸다.

 

“왜 이렇게 잘 안 먹어요~ 속 안 좋아요?”

“어? 아, 아니…… 아니, 어, 응. 속이 좀…… 요즘 바빠서.”

 

어떻게 이렇게 그대로일 수가 있을까, 너는.

 

“진짜요? 말을 하지. 그런 줄 알았으면 백숙 이런 거 먹으러 가자고 할 걸 그랬다.”

“……아니야. 너 휴간데 너 먹고 싶은 거 먹어야지.”

 

어떻게 이렇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 수 있을까, 너는.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힘겹게 대답만 한 탓인지 그 이상 이세진이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억지로 밀어 넣던 삼겹살마저 이제는 정말 체할 것 같은 기분이라 더 먹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정말로 체했다.

나는 그대로도 아니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 수도 없어서 도망을 택했다. 이세진이 도망친 걸로는 역시 안 됐다. 일부러 휴가 내내 학교에서 살았다. 별일도 없는데 새 프로젝트에 들어간 척했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우고, 학교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새벽에 들어가면서도 문소리가 들릴 걸 알았다. 나 역시도 이세진의 문소리를 한창 들었었다. 고요한 집에 들어오면 나는 굳게 닫힌 이세진의 방문을 잠깐 쳐다봤다가 한 박자 늦게 내 방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이세진의 휴가마다 그렇게 살았다. 제대하면 어떡하려고? 속에서 반문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무시했다. 글쎄, 진짜 어떡하지. 모르겠다. 지금은. 일단 마주할 자신이 없으니 피할 뿐이다.

이세진의 제대는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1년 6개월은 생각보다 짧다는 걸 실감했다. 열아홉의 이세진은 스물하나가 됐고, 나는 스물둘이 됐다. 그마저도 곧 우리는 스물둘, 스물셋이 될 것이다. 부질없이 빠른 시간이었다.

제대하면 어떡하려고? 드디어 그 질문에 대답할 때가 됐다. 당연히, 나는 도망쳤다. 언제까지고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언젠가는 마주쳐야 한다는 것도 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무슨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이세진이라면 그렇게 화를 내겠지만 나는 아직 이었다. 마음을 정리하는 것마저 뒤로 미루고 공부에 매진했더니 나는 아직 스무 살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숫자뿐이다.

무작정 짐을 싸들고 나가 외박을 했다. 학교에서 밤을 새운 건 아니고, 아무데나 방을 잡았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다가도 이렇게까지 할 일이지 싶었다. 사흘을 밖에서 지내고, 나흘째 새벽에 몰래 집에 들어가 다시 짐을 싸서 나왔다. 문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건지, 듣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이세진의 방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괜찮겠지. 그렇게 안일한 마음을 가졌나.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간이란 걸 동시에 깨달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세진이다. 이세진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싸늘한 얼굴로 나를 향해 걸어오는 이세진을 보며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쿵쿵, 거실 전체에 들릴 것만 같이.

 

“……왜, 왜, 아직도, 안, 잤……”

 

이세진이 코앞까지 다가와 나를 내려다본다. 꼴 보기 싫게 움츠러들었다. 이세진은 말이 없었다. 도망칠까. 바보 같은 생각부터 들었다. 어디로 도망치려고. 이미 절벽에서도 떨어졌는데.

 

“너 잡으려고.”

 

그대로 이세진에게 팔이 잡혀 끌려갔다. 깊은 새벽이라 소리를 지를 수도 없어 입을 틀어막았다. 방으로 끌려 들어간 나는 강제로 의자에 앉혀졌다. 무서웠다. 그렇게 피해왔던 이세진과의 대면. 나는 아직도 너를 못 잊었는데, 어떡하지. 아직도 너를 마주할 자신이 없는데. 스물하나가 된 네 앞에서 나는 아직도 스물인데. 어떡하지, 이세진. 정말 어떡하지…….

 

“형.”

“…….”

“왜 나 피해요?”

 

생각보다 더 직접적인 질문이 튀어나와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싸늘한 얼굴의 이세진을 보고 도로 숙였다.

 

“……그런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거짓말.

 

“그런 게 아니면 뭔데요. 휴가 나올 때부터 말 한 마디 안 걸고. 제대하고는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잖아요. 작정하고 거실에서 기다렸더니 나 보자마자 기절할 것처럼 굴고. 이게 나 피한 게 아니에요?”

“아니야……!”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고개를 들었고,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나는…… 난……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꺼낼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감히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엄마의 행복이 우선이라며 우리의 행복을 걷어찬 내가, 이제 와서 늘 너를 그리워했다고 어떻게 말할까.

 

“그럼 뭔데요? 연구실이라고는 하지 마요. 다른 때는 이렇게까지 바쁘진 않았다고 다 들었으니까요.”

“…….”

“역시 피한 거 맞죠?”

“……그래.”

 

작은 목소리로 어쩔 수 없는 수긍을 했다. 그러자 이세진이 벌떡 일어났다.

 

“내가 왜 대학도 안 가고 군대에 간 줄 알아? 알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은 알겠지. 내가 너한테 고백했으니까. 내 마음만 정리하겠다고 군대로 튄 거 아냐. 형한테도 시간을 준 거였어, 나는. 알아?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시간을 번 거였다고.”

 

입술을 깨물고 이세진을 올려다봤다. 알고 있었다. 당연히. 네가 나에게 고백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른 건 너뿐이었어, 이세진. 나는 아직도 그때에 멈춰 있거든.

 

“나는……! 죽어라 노력했어. 형이 엄마 때문에 안 된다며. 그래서! 엄마랑 아빠한테 평범하고 사이좋은 형제로 보이고 싶어서 노력했다고. 형 좋아하는 거, 좋아했던 거 다 지워내고 살고 싶어서 연락 한 번 안 하고 살았어. 자기 전에도 생각나고, 카톡이라도 한 번 해볼까 싶고, 여전히 너무 좋은데! 그래도 참았어. 형이 평범한 가족을 원하니까…… 일상을 원하니까 다 참았다고. 나도 형을 좋아하기 전처럼 살려고 결심하고 노력했다고.”

 

이제야 깨달았다. 우리는 너무 많이 엇갈렸다. 내가 스물에 멈춰있을 때, 너는 스물하나가 되어가며 참았다. 내가 그 시절에 멈춰 꽁꽁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때, 너는 나를 위해 자랐다. 내가 원한 엄마의 행복을 위해 혼자 자라서 참아내느라고…… 내가 공연히 겁을 먹고 자라지 않고 있을 동안에도 너는 계속 자랐다.

 

“나는 노력하고 있는데……! 왜 형은 피하기만 해?! 엄마가 넷이 지내는 걸 행복해한다며. 근데 형은! 나랑 연 끊을 사람처럼 굴잖아. 평생 안 볼 사람처럼 굴잖아! 나는 잊겠다고 노력하고 있는데……! 잘 안 돼도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노력하고 있는데! 형이 자꾸 날 피하니까 더 신경 쓰이잖아……! 왜 그래 진짜 나한테, 왜! 왜 이렇게 나를 끝까지 비참하게 만들어, 너는……!”

“나는!”

 

그대로인 건 네가 아니었다. 나였다. 네가 나를 위해 노력할 때 나는 그대로 멈춰 너를 피하기만 했다. 네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군 것도 나를 위해서였다. 전부…… 나를 위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물이 고였다. 흐려지는 시야가 짜증이 났다. 네가 안 보이니까. 떨리는 주먹을 들어 눈가를 닦았다.

일 년 반, 어쩌면 더 긴 시간 만에 처음으로 네 얼굴을 제대로 봤다. 누가 봐도 잔뜩 화가 난 너는, 고작 그 짧은 시간 만에 어른이 되어 있었다. 서늘한 눈에 상처가 깊은 게 뻔히 보여 다시금 마주할 자신이 사라진다. 내가 낸 상처였다. 내가 낸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할 수가 없었다. 도망칠 구석 하나 없이 몰린 마지막에 와서도 나는 비겁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입술을 달싹이자 볼품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네가 계속…… 보고 싶었, 거든. 근데 너는 이제 나한테, 아무 생각, 도 없는 것 같으니까…….”

 

침묵이 이어진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걸…… 확인하는 게 두려워서…….”

“…….”

“마주, 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인, 사할까 봐, 옛날, 처럼 태연하게 굴까 봐, 그게 두, 흡, 려워서, 나는…… 난…….”

 

감긴 눈 사이를 눈물이 비집고 흐른다. 도망치고 도망친 끝에 마침내 마주한 너에게 고하는 고백. 혹은 고해. 죄책감에 물든 울음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입을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솔직하게 말해. 너를 좋아한다고. 이제 다 왔잖아. 도망칠 곳도 없잖아. 그냥 인정해, 배세진. 나는 이제 내 행복도 원한다고. 그 말 하나만 하면 되는데. 나는…… 나는…….

 

“좋, 흑, 아해…….”

 

고해 사이에 고백을 섞어냈다. 한 번 터진 진심은 끝을 모르고 쏟아져 나온다. 좋아해, 이세진, 좋아해, 너를, 좋아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하염없이 고백을 쏟아냈다. 주저앉은 내게 닿은 온기를 눈치 챈 건 한참 뒤였다. 눈물에 젖은 축축한 입술 위로 축축한 입술이 닿아왔을 때에야 겨우 눈치 챘다. 이세진이 나를 안고서 울고 있었다. 함께 울고 있었다……. 서로의 결여를, 결핍을 끌어안고 우리는 함께 울었다. 빙빙 돌아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온 채.

 

 

#22

한참을 울고서야 가라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이러고 있는 우리가 웃겨서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배세진이 노려본다. 그래봤자 눈이 퉁퉁 부어 하나도 안 무섭다.

 

“형.”

“응.”

“나 아직도 형 좋아해요.”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명확하게 한 번 더 말하고 싶었다. 배세진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직도 두려워.”

“뭐가 그렇게 두려워요.”

“그냥…… 다.”

 

고개를 숙인 배세진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싸서 들어올렸다. 또, 또, 도망치려 들지.

 

“나 좋아한다면서.”

“……그래.”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클까, 두려운 마음이 더 클까.”

 

한 번 더 하면 알 수 있을걸요. 나는 한 번 더 배세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살짝 입술만 닿았다 떨어졌다. 눈을 감았던 배세진이 느릿하게 떴다.

 

“어때요.”

“……모르겠어.”

 

배세진이 내 목에 팔을 둘러왔다. 우리는 똑바로 눈을 부딪쳤다. 이번에야말로 둘 중 누구도 피하지 않았다.

 

“한 번 더 하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배세진이 속삭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웃음이 서린 세 번째 입맞춤은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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