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닌니












그저 나재민을 약올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가 영호 속을 긁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말 같잖은 소리로 사랑 운운하는 것도 역겨웠으니까. 날 좋아한다니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서여주는 너희가 아닌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명령 불이행인 거 아시나 모르겠네.”

“전달 받은 거 없다고 했을 텐데.”

“센티넬이 그 소리도 못 들은 건 문제 있는 거 아닌가? 가서 진단 받아보실래요? 마침 닥터도 같이 내려왔잖아요.”

“진단은 그쪽들이 받는게 나을 거 같네요. 같은 말 반복하게 만드는 거 보면 귀가 안 좋아 보이거든요.”




그런데 이제노까지 있을 줄은 몰랐지. 부러 N팀 쪽은 보지 않아서 누가 빠졌는지 확인 못했다. 나재민만 남았을 줄 알았는데. 하긴, 이게 맞긴 했다. 능력이 사라진 나재민과 닥터, 홍주연 셋만 남는다면 만약의 사태에 누가 그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 마크가?




“꺼져.”




그들을 도울 리가 없다. 당장 찢어 죽이겠다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다. 마크는 나를 물려세우고 현관 앞의 나재민과 거실 창을 밟고 선 이제노와 대치 중이다. 저쪽 말로는 정재현이 현장으로 가면 우리를 N팀 숙소에 함께 데리고 있으라 명령한 모양인데, 마크는 전달 받은게 없단다.


감은 잡힌다. 애들이랑 한창 고기 구워 먹을 때 김정우가 찾아왔으니까, 그때 전달했겠지. 하지만 영호는 현장에 나갈 걸 숨긴 나한테는 물론이고 마크에게도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지금 전달했으니까 됐네. 그쪽 팀장이 전달했든 안 했든, 우리 형이 총괄팀장이야. 명령 들었으면 움직여.”




코웃음 치는 소리가 마크에게서 들렸다. 그들이 인상을 구기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웃어?”

“들을 가치가 없어서.”




나재민에게서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그림자 속에 숨은 그의 어디서 소리가 난건지 모르겠다. 가만히 서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서여주, 이리 와.”

“여주한테 명령하지 마.”

“명령이 아니라, …선생님이 여주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해요.”




이제노는 화를 내기 싫은지 감정이 실리던 목소리에 힘을 풀었다. 그의 말 때문에 마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툭, 마크의 등에 손을 올리자 그의 몸이 조금 전보다 바짝 굳는다. N, O. 그가 갈등에 접어들기 전에 의사표시를 확실히 했다. 나는 가고 싶지 않다고. 내 뜻을 알아 들은 건지 그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린다.




“낮에 찾아오던가, 굳이 이 밤에?”

“낮에 여주를 보내주기나 했어?”

“부르지도 않았잖아.”

“불렀으면 나왔을 거냐고.”

“너네가 부르는 건 안 가지. 닥터는 낮에 직접 오라고 해.”

“너 오라고 한 적 없어. 가기 싫으면 빠지던가.”




반말엔 반말로, 존대엔 존대로 응수하면서 마크는 두사람을 쳐냈다. 꺼지라고 몇 번을 말해도 제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게 더욱 긴장감 넘치게 만든다. 마음만 먹으면 문짝처럼 집 하나 거덜낼 수 있는 사람들이 나름의 도의를 지키기 위해 말로만 싸우는게 보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긴 누군가의 사유지다. 우리가 함부로 부수고 날뛸만한 장소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미 문이 거덜나긴 했지만, 이 이상은 정말 안 된다.




“여주랑 난 지금 한 몸이라 못 떨어져.”

“이 미친,”

“서여주. 나와.”

“여주 부르지 마요.”

“왜 저딴게 남은 거야? 제노한테도 발렸는데.”

“진짜 발리고 싶어?”




어째 말싸움이 점점 유치해지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하…, 여주랑 대화하면 안 됩니까?”

“어, 안 돼.”

“총괄팀장 명령이고, 명령 불이행시 강제 처벌 가능합니다. 거기까지 하고 싶지 않아서 말로 하자는 거고요.”

“할 수 있으면 하세요.”

“못 할 줄 알아?”




착각 아닌 거 같은데. 이제노는 나름 유치한 싸움에 끼어들지 않으려 하는 것 같지만 점점 말려드는 중이고, 나재민은 감정이 앞서고, 마크는 부러 두사람을 긁는다. 그의 소매를 당기자 시끄럽던 목소리가 멎었다.




“왜? 방에 있을래?”




마크는 언제 두사람에게 비아냥 거렸냐는 듯 다정하게 물어왔다. 그런게 아니라 정말 두사람이 덤벼들까 봐두려운 마음에 붙든 건데. 다칠까 봐 걱정되는 건 아니고, 숙소가 상할까 봐. 당장 저 문짝들 떨어져 나간 것때문에 오늘 밤 괜찮을지도 의문이다.




“정 팀장님이 내린 명령 맞아요?”

“…응.”

“진짜면 날 죽이겠다고 내린 명령일 텐데.”




정재현은 내가 왜 과호흡을 일으켰는지 누구보다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다. 이 방면에선 영호보다 나를 더 잘 알 사람이 정재현인데, 나와 마크를 홍주연 앞에 데려다 놓을 리가. 설령 내 증상이 영호에게만 국한된다 여겼을지라도 영호가 거절했을 시점에 알아차렸을 거다. 내 증상은 이제 빈즈 모두에게 영향을 받는다.


그런 사람이 나를 굳이 홍주연과 함께 두려고 했을 리 없다.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진심까지 폄하할 마음은 없다. 그는 진심으로 서여주에게 잘못을 빌었다. 때가 늦었을 뿐, 정재현이 가진 죄책감은 진짜였다.




“왜 놀래요? 정 팀장님이 내린 명령을 그렇게까지 이행하고 싶다면, 둘 다 정 팀장님 뜻을 알고 행동한 거 아닌가?”




안 봐도 뻔했다. 둘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거다. 자기네들 팀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저 좋자고 애처럼 떼쓰는 꼴이다.




“널 데려가는게 왜…, 죽인다는 거야?”

“진짜 몰라서 묻는 거예요, 아님 엿 먹어보라고 묻는 거예요?”




이제노는 눈치 빠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그냥 자기가 보고 싶은대로 보는 건가.




“다시 한 번 물을게요. 정 팀장님이 내린 명령 맞아요?”




질문 다음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진짜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는 화도 안 나고, 마크 말대로 꺼져줬으면 좋겠다.




“형은 알고, 우리는 모르는게 있어?”

“글쎄요. 그쪽들이 모르는게 너무 많아서 뭘 말하는지 모르겠네.”

“……….”

“정 팀장님은 직접 알아냈어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찾아낸 답이었고, 적어도 정 팀장님은 진심을 다해 내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도 같아. 형만큼 너한테 미안해 하고 있어.”

“그걸 왜 나재민씨가 판단해요?”




깊이를 측정하는 건 내게 달린 일인데, 왜 본인이 값을 매기는지 모를 일이다. 넌 거기서부터 글러 먹은 거야.




“서여주, 난—,”

“여주, 그만 불러요.”




이제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마크가 말을 잘랐다.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오히려 고마웠다. 둘과 더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으니까. 한결 같이 질리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여주 이름 닳아.”




능청스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는 마크. 어느 포인트에서 화가 난 걸까.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소리를 내며 각종 서랍장과 테이블 위 물건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흡사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이제노의 능력인게 분명하다. 역광인데도 불구하고 섬뜩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는 그는 분노에 찬 듯 보였다. 이러다 뭐 하나 날아오는게 아닐까 했는데,




“……….”

“열 좀 식히라고. 정신이 들어요?”




이제노 머리 위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뚝, 뚝. 바다에 빠지기라도 한 모양새다. 손등을 타고 내려 온 물줄기가 손끝에 매달려 고요히 부피를 늘리다가 이내 뚝 떨어졌다. 고요한 집안은 숨소리 한 번 잘못 냈다가는 곳곳의 둔기처럼 자리한 장식품이 날아 올 것만 같다.


식다 못해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이제노는 시퍼렇게 날이 선 눈으로 마크를 노려봤다. 자칫하면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다.




“아까워라.”




이어 우드득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코앞까지 날아 온 그건 다행히도 마크 손에 잡혀 산산조각 났다. 부서지기 전에 들린 기계음이 신경 쓰여 자세히 살피니…, 놀랍게도 도어락이었다. 문에서 강제로 뜯어낸 흔적마저도 마크 손에서 처참히 사라진 도어락은 제 기능을 상실한 채 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후부터는 난리였다. 화를 참지 못한 마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나재민이 침음을 삼켰고, 뭐가 날아들지 불안해하던 물건들이 허공에 뜨기 시작했다.




“그만해! 여긴 센터가 아니라고 했잖아.”




마크를 말리면 뭐하나. 그가 아무것도 안 하려 해도, 저쪽에서 우리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데.




“무슨, 여주야!”




소리를 듣고 달려 온 건지 홍주연이 와도 둘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재민 팔을 붙들고, 이제노를 불러봐도 두사람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마크를 향해 팔을 휘두르거나 꽃병이나 도자기 같은 위험한 물건을 던졌다.




“여주야, 너 괜찮아?”




세사람을 피해 주저 앉은 내게로 홍주연이 달려온다. 나를 감싼 홍주연은 조금 전의 나처럼 나재민과 이제노에게 그만하라고 외쳤으나 귀를 막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였다.




'네가 바라던게 이거야?'




저 증오스러운 둘을 어떻게든 내쫓겠다 마음 먹자 누군가 내 귓가에 속삭인다. 여성의 목소리라 홍주연을 돌아봤으나 그는 여전히 나재민과 이제노를 노려보며 그만하라 외칠 뿐이다.




'모두 널 사랑하길 바라?'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이 목소리는 한동안 듣지 못했던 그리운 목소리다.




'흔하잖아. 글 속 세상에 들어온 다른 세계의 사람이 주인공 자리를 꿰차는 이야기 말이야.'


“서여주.”




서여주다. 귓가에 숨결이 닿은 것처럼 간지러워 고개를 틀었다. 어둠 속에 흐릿하지만 그림자가 보였다. 그게 서여주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간혹 존재 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듯 환영으로 나타나곤 했으니까.




'네가 해. 네가 주인공이 되고, 저 애들의 사랑을 돌려 받는 거야. 지금의 너라면 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게 그것일까? 내가 서여주가 된 이유는 그때문이었던 걸까? 내가 너의 염원을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서?


어둠 속에서 한발짝 한발짝 내딛어 달빛 속에 선 그가 나를 내려다본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 온 그는 내가 몸을 일으키자 한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넌 참 이상해. 분명 날 싫어해야 맞는데.'


“내가…, 내가, 어떻게 널 싫어해?”


'그럼? 사랑해?'




당연하지. 내가 이 세계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넌데. 서여주를 향해 한발짝 다가가자 그가 두 팔을 벌린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 그를 품에 안았다.




“사랑해. 넌 내 유일한,”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무언가 내 머리를 세게 치고 떨어져 나갔다. 눈을 깜빡이자 환하게 웃는 서여주가 쓰러지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날 위해서 이 정도는 괜찮지? 나 사랑하잖아.'




아, 그래. 너 악역이었지. 홍주연이 크게 다칠 뻔 했을 때 머뭇거리던 순간, 네 도덕이며 윤리 같은 건 애진작 망가졌다. 저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는데, 남을 희생 시키는 것에 거리낌을 가질 리가 없다. 더군다나 이 몸은 본래 네 것이고, 네 몸에 들어찬 영혼은 너를 사랑하니 더욱.




“여주야!!”




흐트러지는 환영 위로 홍주연이 나타났다. 왜 하필 서여주 다음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일까. 구름이 개이고 맑아지는 하늘처럼 뜨끈한 열감과 함께 피부가 찢어진 건지 따끔한 통증을 동반했다.
















먼지를 털어내듯 자신의 소매를 쥔 손을 쳐낸 영호가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제 옆으로 쓰러진 사람에겐 시선 한 줌 주지 않고 출구를 찾았다. 요란한 굉음, 안개처럼 뿌옇게 시야를 가리는 먼지 틈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영, 먼지를 태우는 냄새 같은 것들을 무시한 채 건물을 나섰다.




“형!”

“이게 다야?”

“네. 나름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최측근 하나만 두고 있던데요.”




영호가 지성의 등을 토닥이자 그가 뿌듯하게 웃어보였다. 너스레 떨듯 엣헴 하고 어깨를 펴기도 했다. 새하얀 빛이 마담으로 불리던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와 그보다 열살은 어려보이는 남자 하나를 묶고 있었다.




“저쪽 팀장이 센터로 보내자는데, 어떡할까요?”

“그렇게 해. 어차피 이쪽은 더 뜯어낼 것도 없어.”




넵, 하고 짧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담겼다. 지성이 그들을 인계하는 걸 지나친 영호가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그들이 들고 나르려고 했던 자료들을 쥔 재현과 도영의 곁에 서자 그을린 냄새를 맡은 도영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도 장부?”

“네. 웃기죠?”




노란 파일이 박스 안으로 던져진다. 파일마다 비슷하고도 다른 코드번호가 쓰여져 있다. 가령 OG02-EG1212-1234D07 같은 것으로 말이다. 돈이 오간 정보는 있으나 익명이라 굳이 보유하고 있을만한 정보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들을 챙기려고 했다는 건 단순한 익명이 아니라는 거겠지.




“코드 풀 수 있어요?”

“풀어야죠.”

“센터에 마인더 있습니까?”

“마인더가 흔한 능력은 아니잖아요.”




모두가 아는 마인더가 하나 있긴 하다. N팀을 담당하고 있는 의사. 비록 레벨 C에 그치는 낮은 수치지만, 기억을 읽을 수 있으니 막 잡아 온 마담과 그의 측근의 머리통을 뒤지면 될 일이다. 문제는 그 의사가 현재 그들과 함께 부산에 있다는 것이다. 가이드가 있는 숙소로 저들을 끌고 갈 수 없으니까. 위험도를 최소한으로 낮춰야만 했다. 그걸 계산하고 재현 또한 없다고 우회해 대답한 걸 테다.




“번거롭더라도 텔레포터를 통해 오가야 해요.”

“그래야죠. 그나저나 괜찮겠어요? 순찰 돈다고 했잖아요.”

“아아.”




주어는 없으나 누굴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영호는 고개를 틀어 자신이 나온 건물을 돌아봤다. 군데군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부서져 내렸다. 순찰이라고 말을 하긴 했으나 진짜 순찰은 아니었다. 라조의 거점이 그곳이란 걸 특정하고 있었으니까. 이는 여주와 싸우고 영호 홀로 현장에 다녀왔을 적에 발견한 곳이었다.


순찰이라고 말한 이유는 단순했다. 여주가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했을 테니까. 센터에서 현장 회의를 하기도 전에 여주가 현장으로 가겠다 말했고, 영호는 말을 한 번 걸렀다. 그리고 오늘 여주가 주연과 해변을 달릴 때가 돼서야 재현과 현장을 공유했다. 처음엔 이 사실을 늦게 알려 준 영호에게 짜증이 올랐던 재현은 그의 시선이 여주에게 꽂혀있는 걸 보고서 또 납득했다. 이해하고 납득하고. 당연할 정도로 이유가 있는 행동들이 재현의 입을 막았다.




“현장은 수많은 변수가 생기잖아요.”




본래라면 당일은 일이 없는게 맞았다. 다음날부터 여주와 주연의 신경을 피하기 위해 소수로 팀을 짜서 현장 인근을 살피려고 했다. 하지만 영호는 되도록이면 일이 빨리 끝나는 쪽을 택했다. 영호가 발견한 건물은 지하를 합해 총 4층. 지하는 노래방, 1층은 약국, 2층에 치과가 있으며, 3층엔 DVD방이 있다. 건물이 작고, 각 층당 사업장 하나씩. 인근 주민들이 쉽게 드나드는 곳이었다. 자칫하다간 민간인이 휘말릴 수도 있는 위치. 단타로 세게 휘몰아 쳐야하는, 사람이 없는 밤 중이어야 하는 일이었다. 빠르게 일을 끝내고픈 마음도 있었고.




“여주도 이 정도는 이해할 거예요. 화내는 것보단 걱정을 택할 걸요.”




씩씩 거리면서도 팔을 벌리면 품에 안길게 뻔했다. 자신의 동생은 그런 사람이니까. 나오기 전에도 그랬잖아. 데려가라고 화를 내다가도 영호가 자신의 마음을 건네며 살살 달래면 결국 져주고야 마는 순한 아이다. 숙소로 돌아가면 여주가 어떤 얼굴을 보일지 선했다. 경악해선 입을 떡 벌리고, 울망이는 눈으로 화를 내겠지.




“이번엔 어떻게 풀어주지.”




행복한 상상을 이어갔다. 영호와 여주는 남매긴 했으나 덩치 차이가 꽤 많이 나는 편이다. 어릴 적엔 영호가 엄마 뱃속에서 키 유전자를 다 뺏어가서 자기는 작은 거라는 소리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영호가 괜히 콩알이라고 부른게 아니다. 그런 작은 몸으로 화에 못 이겨 파들파들 떨다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주변 사람들이 껑충 뛸 정도로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야아아악!!!!’




시뻘개진 얼굴로 펄쩍 뛸 때마다 영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서 동생 놀려 먹는게 제일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톡 치면 와르르 반응을 쏟아내는 귀여움을 보면서 저 애가 친구들과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지낸다는게 놀라웠던 적도 있다.




“여주는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면 금방 풀리잖아요. 숙소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편의점 하나 나오던데.”

“그보다는 체리 사오는게 나을 걸.”




재현이 한숨처럼 뱉은 말에 영호가 웃었다. 그의 말이 어느 정도 맞긴 했으니까. 하지만 뒤따라 나오는 말에 영호의 시선이 옮겨갔다. 곁에서 파일을 살펴보고 있던 도영의 말이었다.




“여주는 체리를 더 좋아해.”

“……….”

“체리를 으깨서…, 우유에 섞어줘요. 꿀 조금 섞어서.”




시선이 집요하게 도영에게 따라 붙었다. 영호에겐 시선을 일절 주지 않은 채 제 할 말만 하고 파일을 내려둔다.




“재현아, 이거.”

“뭐예요?”

“코드 제일 앞에 있는 번호는 지역 번호 같아. 여긴 02, 이쪽은 051, 여긴 053. 051이 많은 거 보니 확실해. 라조는 부산을 시작으로 뻗어가는 중이니까. 중간은 확실하진 않은데 하이픈을 제외한 주소같아.”




영호가 오자 내려두었던 파일을 예시로 든 도영이 코드 번호를 가리켰다. OG02-EG1212-1234D07. 가장 앞이 02라는 건 서울, 중간의 1212는 하이픈을 지운 주소지. 보통은 세자리수와 한자리수로 나누니 121-1일 거라는 추측을 내세우며 앞의 영문만 잘 파해쳐도 뒷자리에 대한 답이 나올 거라고 했다.


이건 뭐지? 영호는 단 한 번도 관심 주지 않은 N팀 중 한 사람을 지켜보았다. 여태 재민과 주연을 신경 쓴다고 다른 팀원들은 관심 밖이었다. 어차피 한 세트로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이니까. 그나마 재현은 나름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데다가 부딪힐 때마다 한 발 물러서거나 되려 재민을 영호 손에 쥐어주기까지 했으니 날을 세우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일 때문에 혹은 여주가 스스로 복수하겠대서 무시로 일관하는 중이기도 했다. 첫인상부터 말아 먹은 동혁도, 주연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정우도, 간혹 여주에게 송곳 같은 말을 뱉는 제노도 여주를 건들지만 않는다면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어떤 사람들인지 대충 보였으니까.


하지만 도영은 잘 모르겠다. 지금보니 머리가 좋은 것 같긴 하다. 재현이 형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팀 중 최연장자일 테고….




“김도영씨.”

“네.”

“우리 여주랑 싸운 적 있어요?”




도영의 입이 꾹 다물렸다. 싸웠냐고? 팀원 중 여주와 다퉈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한집에서 허물없이 지냈고, 가까울수록 다툼도 생기는 법이다. 그렇다고 상대를 증오한다거나 하는 류는 아니었다. 여느 집 형제끼리 혹은 친구끼리 생길만한 트러블이다. 물론 끝에는 아니었으나, 영호가 묻는 건 전자의 것이었다.




“여주가 엄청 좋아했던 사람인가 보네.”




그리고 이 수많은 다툼 중 도영만 여주가 체리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재현은 체리를 듣고 생각지도 못한걸 들은 듯 눈을 깜빡였으니까. 영호는 확신했다. 체리에 대해 아는 건 N팀에서 저 놈 뿐일 거라고.




“여주가…, 화해의 음료라고 알려 준 적 있어요. 알고 계시니까 만들기 편하시겠네요.”

“당연하죠. 내가 만들어 준 거니까.”

“……….”

“이건 나랑 여주만의 레시피라고.”




이 레시피는 여주에 대한 이야기를 동화처럼 알려주던 빈즈도 모르는 것이다. 아마 도영은 체리와 우유 비율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여주는 우유맛이 나지 않길 바랐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두가지 경우다. 여주가 도영에게 영호의 모습을 투영할 정도로 믿었거나 영호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랑했거나.




“서 팀장.”

“걱정마요. 당장 죽이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어깨 위로 오른 손이 허공에 떴다. 몸을 뒤로 뺀 영호는 여전히 도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영호와 눈을 맞추던 도영은 시선을 떨궈 파일를 꾹 쥐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는 듯 몸에 힘을 잔뜩 주고 긴장한 채로.




“정 팀장, 이 박스 전부 센터로 가져갈 겁니까?”

“하나만 제외하고요.”

“천러한테 말해 둘 테니까 이 사람 같이 보내세요. 어차피 센터에서 처리할 일도 있을 거 아닙니까.”

“…형, 부탁할게.”

“그래.”




제 잘못이 뭔지는 아나보지. 영호는 그대로 돌아서서 건물로 향했다. 그 앞에 천러와 대화 중인 지성과 N팀의 동혁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그쪽이랑 같이 가서,”

“천러.”




영호가 그를 부르자 세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동혁이야 그렇다 치지만, 너네는 왜? 영호는 천러와 지성의 반응을 익히 알고 있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던 천러가 놀라서 표정이 굳은 것과 자신의 왼가슴을 붙들고 마담과 그의 측근을 뭉갠 지성이 바닥을 굴렀다. 리액션 뭔데…? 동혁은 영호의 목소리에 놀란 것도 맞았으나 지성의 반응에 더 놀랐다.




“너네 뭐했어.”

“아, 아무것도,”

“박지성.”

“사고 쳤어?”




지성이 벌렁이는 가슴을 누르며 회피하자 천러가 그의 입을 막았다. 지성은 입을 열수록 감추고 싶던 비밀을 폭로하는 쪽이었으니까. 영호는 수상쩍은 두 동생을 두 눈에 힘을 주고 보았으나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천러가 턱을 긁적였다.




“그게, 얘네 너무 약해.”




거짓말은 작은 사고로 덮으면 그만이다. 이건 사고 축에 속하지도 않으니 괜찮을 거다. 최대한 생포하라고 했으나 어차피 마담이 잡힌 이상 큰 문제도 되지 않을 테니 천러는 말을 돌렸다.




“딱 한 번 때렸는데…, 죽었어.”

“몇명이나 남겼어?”

“여기 있는 사람이 끝.”

“자료는.”

“형이 가지고 내려 올 거야.”




급히 필요한 물건만 쓸어담아 센터로 보내고, 이후는 센터 측 사람들이 마저 회수할 거다. 영호는 자리에 없는 런쥔이 막 건물을 나오는 걸 보았다. 런쥔 주변으로 둥근 원을 그린 채 먼지와 연기가 일정 선을 넘어가지 못했다.




“런쥔아.”

“안에 정리 끝났고 이쪽 팀원이 마무리 지을 거예요. 이건 3층에서 가지고 온 자료고, 찾다보니 벽에 틈이 있어서 부쉈더니 금고가 있더라고요. 현금이랑 파일 하나, usb 하나 들었는 거 박스에 같이 담았어요. 자료는 지하에서 찾은 거랑은 조금 달라요.”

“—이건 정 팀장한테 넘길게.”




지하에서 찾은 건 의미 모를 코드를 가진 장부, 3층에서 찾은 건 간단한 신상정보가 적힌 계약서였다. 전부마담이 퇴폐업소로 유인한 피해자들과의 계약서. 사인 대신 지장을 찍어 둔 계약서가 가득 채워진 박스를 보며 영호는 아찔함을 느꼈다. 라조가 한국에 들어 온 건 한달이 좀 넘었다. 그런데 한박스를 채울 정도의 계약서가 쓰였다. 얄팍한 두께의 종이로 가득 채워진 박스는 센티넬이 아니고서야 들기 힘든 무게를 자랑했다. 만약 늦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한국의 부정한 조직들까지도 라조가 전부 먹어치웠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돈이 아니라 사람을 화폐로 쓰는 인간들이니까.




“천러, 넌 우릴 숙소로 이동 시키고 N팀 쉐도우 데리고 센터 다녀와. 연락하면 받고.”

“네에—.”

“치타폰은?”

“1층에 있을 텐데, 못 봤어요?”




영호의 시선이 런쥔의 뒤로 향했다. 그가 나온 건물의 1층에 위치한 약국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집중하니 인기척이 들리긴 하는데.




“지성아, 정팀장 불러서 대기하고 있어.”

“넵.”




약국 안으로 들어가자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밖과 벽 한장 차이로 소음이 멎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영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계산대 너머로 어깨를 뺐다.




“뭐해?”

“형, 2층에서 뭐 나온 거 있어?”

“약, 혈액, 마담의 측근. 그 밖엔 없는데.”

“저거 측근 아닐 걸.”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약을 유통하려면 의사보단 약사가 편하지 않겠어?”




받는 것도 전달하는 것도 의사보다는 훨씬 쉬울 거라는 치타폰은 약 더미를 뒤지다 계산대 위로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약사처럼 영호와 마주서서 약통 하나를 내민다.




“의사는 측근을 한단계 걸러 내려가야 하는 사람이야. 측근의 측근인 셈이지.”




영호가 웃자 치타폰은 질린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이따금씩 이런 식으로 팀원들 시험하길 좋아하는 영호는 현재 치타폰의 추리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마담과 함께 있었고, 마담이 그를 보호하려는 제스쳐를 취했다고 측근이라 말하던 지성보다는 이쪽이 훨씬 신빙성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찾을 건데?”

“발자국이 있으니까 찾아가야지.”




치타폰은 몇차례나 접어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종이 한 장을 펼쳤다. 계산대 위로 오른 약과 처방전 하나. 처방전에 쓰인 약물은 하나였다. Kalmia. 위의 치과에서 일부만 처방 받은 약이다. 그리고 빈즈가 쫓는 라조가 개발한 약물이기도 했다. 처방 받은 사람들은 전부 센티넬이겠지.




“남을래?”

“연락할게. 플라워도 같이 남겨 줘.”




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미아, 약을 타간 이들이 가져간 것은 꽃에서 이름을 따온 약물이다. 꽃말은 거대한 희망. 꽃에게 유감은 없으나 라조에 빗대어 보자면 웃기지도 않았다. 희망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는 약국을 벗어나 모두가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플라워는 남죠. 자세한 건 함께 남을 치타폰이 알려 줄 겁니다.”

“무슨 일이에요?”

“꼬리를 잡아서요. 플라워가 그나마 도움이 될 거 같길래.”

“괜찮아?”




재현이 정우를 돌아봤다. 이들 중 가장 가이딩 소모가 심한 팀원이라 걱정을 담아 묻는 말에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연락하라는 말에도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한 발 물러설 뿐이다.




“저 사람도 남아요?”

“형 혼자서 하기엔 자료가 많으니까 가서 돕기로 했어요. 한명 더 빠진다고 휘청일 인원도 아니니까.”

“지성이는?”

“최대한 빨리 끝낼게요!”




지성이 N팀을 눈짓하곤 코를 찡그렸다. 나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듯 했으나 애교만 부린 꼴이다. 팀원인 짬이 있다고 런쥔이 그 뜻을 알아차렸다. 저 팀이 못 미덥긴 하지. 천러와 함께할 테니 걱정 없을 거라며 런쥔은 이만 돌아가길 원했다. 현장에 올 땐 N팀에서 넷, 빈즈에서 다섯으로 총 아홉이 왔는데 돌아가는 건 천러를 제외하고 셋 뿐이다.

















💭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래망갑입니다~~ㅎㅎ 오늘 편 쓰면서 굉장히 힘들면서도 즐거웠습니다. 이제 진짜 라조 잡으러 가야하니까요!!


💭 첫 파트인 제노재민vs마크여주 쓰면서 다섯번 이상은 갈아 엎은 거 같네요. 그래도 결국 마음에 들게 나와서 다행입니다ㅎㅎ 홍주연은 혼자 두고왓냐!! 하셨는데, 의사랑 함께 있었습니다. 나름의 명분도 있었죠.


💭 그리고 여주가 다쳤는데 영호는 몰라. 일단 오늘 편에선 몰라. 아마 다음 편에선 알게 되겠죠.


💭 대충 예상하셨겠지만, 지성천러-동혁 셋이 같이 있던 이유 영호랑 재현이 케이크 가지러 가려고 궁리하던 거임. 동혁이가 너네 왔다갔다 하는 거 잠깐 얹혀갈게, 하는 거 천러가 시른데베베벱베 하던 중 영호 나타나서 화들짝 놀란 것.


💭 사실 오늘 편에선 더 이야기하기 힘든 것 뿐이네요ㅎㅎ 다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편은 아마 이번보다는 좀 더 빨리 올 거예요. 우리 얼른 또 만나요! 안녕!!




━⊱༻ 아래는 17화 예고편입니다. ༺⊰━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266 공백 제외
1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