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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한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른다. 비가 오는 날과 화창한 날에 다른 냄새가 나는, 늘 차갑고 서늘한 돌계단. 정운의 집으로 오르는 마지막 5계단을 오르면 시야에 화분과 화분 장식이 들어온다. 수해가 정운보다 먼저 집에 돌아오면 꽂아놓곤 하는 새 장식이 화분에 꽂혀있다. 계단을 오르다 말고 정운은 잠시 미소 지었다. 그러다 곧 복잡한 표정이 얼굴에 떠오른다. 내가 훨훨 나는 새를 잡아 가둔 건 아닐까. 새장 속의 새는 행복할까.

   거실 의자에 비딱하게 기대있던 수해가 퇴근하고 돌아온 정운을 보고 웃는다. 출장을 준비하던 지난번에 이어, 아예 그럴듯한 책상과 의자를 거실 한 켠에 가져다 놓았다. 진짜 사무실처럼 탁상 달력과 포스트잇 메모지까지 놓아둔 모습에 정운은 웃고 말았다. 불현듯 머릿속에 생각이 스친다. 이사 가야 하나...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잠시 생각에 잠겨 외투를 벗는 것도 깜빡한 채 서 있는 정운 앞으로 수해가 다가와 폭 안겼다. 잘 다녀왔냐는 인사와 함께 수해가 자신의 뺨을 정운의 뺨에 가볍게 부빈다. 어느샌가 둘의 인사는 서로 뺨을 맞대는 것이 되었다. 하루종일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생각에 빠져있던, 권수해 말고는 싹 잊게 만드는 애정이 어린 몸짓에 정운은 수해의 양 볼을 감싸고 뺨에 입 맞췄다.

   "오늘 출근 안 했어요?"

   "했지- 일찍 왔어요."

   쪽. 입맞춤 한 번, 두 번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표정이 풀려 녹아가는 수해를 보는 재미에 정운의 퇴근 인사는 자꾸만 길어진다. 요즘 출장을 안 가네. 물어볼까. 겨우 수해를 놓아주고는 외투를 벗어 걸고 저녁 준비를 하러 주방에 들어간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뒤 소파에 앉아 각자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정운은 e북을 읽고, 수해는 넷플릭스를 뒤적이고 있다. 정운의 어깨에 고개를 올려놓은 수해가 느릿하게 숨을 내쉰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 수해와 정운이 가장 좋아하는 일과 중 하나다. 책을 읽던 정운이 갑자기 생각난 듯, 수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해 씨, 요즘은 현장 안 나가봐도 돼요?"

   태평한 얼굴로 리모컨을 누르던 수해가 뜨끔한 표정을 짓는다.

   "어..."

   "또 뭐 숨기는 거 있지."

   "어, 아니..."

   정운이 수해를 한계까지 몰아붙여 고통에 가까운 쾌락을 주었던 그날 이후로, 수해는 정운에게 무언가 숨기는 게 어려워졌다. 이제 수해가 무언가 숨긴다 싶으면 반사적으로 그날의 일이 떠오른다. 그리고 정운도, 더 이상 숨기는 건 아무것도 없게 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기까지 한다. 수해가 몸을 비틀며 말이 없자, 정운이 채근한다.

   "아, 알아서 말해요. 뜸 들이지 말고."

   "요즘은... 그... 박재성 씨 사건 마무리를 해야 하니까. 정운 씨 지켜보고 있었지. 누가 해코지 하면 어쩌나 하고..."

   "나를? 어떻게? 전혀 눈치 못 챘는데."

   "... 다 방법이 있어요."

   수해가 살며시 시선을 돌렸다.

   "근데 정운 씨, 이제 미행이 안 붙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나한테 붙어야 하는데, 내가 정운 씨한테 붙어 있으니까 좀 당황한 거 같기도 하고."

   "음..."

   붙어 있다는 게 참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긴 하네. 정운은 수해와 지내는 최근의 일상이 어땠는지 떠올려보았다. 같이 장 보러 가고, 공원에 산책 가고. 카페에서 데이트 하고... 많이 친밀해 보였던가? 수해가 요 며칠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아서 몰랐다. 친밀이 문제가 아니라 집에 같이 들어와서 날이 바뀔 때까지 안 나오잖아. 음...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정운이 말이 없자, 수해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내가 미행하거나 뒷조사 하거나 하는 거... 괜찮아요?"

   턱을 감싼 채 한 곳을 응시하던 정운의 시선이 수해를 향했다. 비슷한 고민을 하던 중이었나.

   "수해 씨는 새장 안에 있는 새가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아요?"

   음... 잠시 뒷머리를 쓸어올리던 수해가 천천히 생각을 풀어놓았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새는 새장에 갇혀서 절망할 것 같지만... 새는 새장 안에 있을 때 오히려 안도할 거에요. 새장이 익숙하지 않을 땐 자기를 가두는 감옥처럼 느껴져 답답하겠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이 안에 있을 땐 그 누구도 자신을 괴롭히지 못한다는 걸 깨달을 거에요. 그걸 느끼고 나서는 새장이 견고하기를, 안전하기를 바라고 또 의심하지 않고 믿겠죠. 물론 자기가 나가고 싶을 때는 언제든 나가고 싶어서 문을 열어달라고 조르겠지만."

   조금 쑥스러운 지, 수해가 정운을 들여다보며 웃는다.

   "정운 씨 생각은 어떤데요."

   "나?"

   수해를 보고 씩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난 목줄 매는 거 좋아해요."

   정운이 몸을 굽혀 수해의 손바닥 밑으로 강아지처럼 머리를 들이민다. 아예 소파에서 내려가 무릎을 꿇고 앉은 정운이 작게 강아지 짖는 소리를 내며 쓰다듬어 달라는 듯 수해의 손바닥에 엉망으로 머리칼을 부빈다.

   아... 수해가 못 견디겠다는 듯 웃으며 정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해의 허벅지에 고개를 올려놓은 정운이 비스듬히 수해를 올려다보며 웃는다. 수해의 손 끝이 정운의 뺨을 스치며 내려오자 정운이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에 기대온다.

   "못 살아, 진짜."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던 수해가 눈썹 사이를 찡그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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