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아암..."

쭈욱 기지개를 켜고 몸을 발딱 일으킨 당보는 더듬더듬 장포를 찾아 둘러 입고 밖으로 나섰다. 이 생활도 벌써 한 달이 넘어가니 동굴에서 눈을 뜨는 것도 제법 익숙했다. 물론 이런 돌산에서 할 것은 많지 않았으므로, 일과라 해봤자 별 대단한 것은 없었다.

"아무리 돌산이라지만 어떻게 풀 한 포기 안 날 수가."

돌바닥에서 자느라 굳은 몸을 쭉쭉 푼 당보가 굴 안을 흘끗 살폈다. 범 형님은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금방 다녀오겠소."

그리 말하자 짜증이 난 듯 청명의 꼬리가 홱홱 흔들렸다. 당보는 쿡 웃음을 삼키고 산 아래로 몸을 날렸다.

청명이 은거하고 있는 동굴은 거의 산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었고, 동굴에 가까워질수록 말 그대로 잡초 한 뿌리마저 찾아보기가 어려웠으니. 상식대로라면 산신의 주변으로 갈수록 생명력이 충만해야 하겠지만...

청명의 상태를 떠올린 당보는 고개를 저었다. 신에 대해서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청명은 영 좋지 못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읏챠... 어디 보자."

마을과 붙어 있는 쪽까지 걸음한 당보는 이윽고 가늘게 흐르는 강줄기를 찾았다. 우선 장포 안을 더듬어 수통을 채우고 목도 축이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이 부근도 식물이 영 비실거리고 짐승 소리가 나지 않는 걸로 보아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당분간 배를 채울 순 있을 것이었다. 일 다경쯤 되었을까. 운 좋게 식용 풀을 찾은 당보는 큰 이파리만 톡톡 뜯어내었다. 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흙을 대충 헹궈 내고 있으니 웃음이 흘렀다. 당가 출신인 게 이런 데서 도움이 될 줄이야.

"이래서 사람 일은 모른다는 거군."

하나를 돌돌 말아 입 안에 넣고 씹으니 풋내가 올라왔다. 요리를 해 먹는 것도 아니니 당연했다. 배라도 채울 수 있다는 게 감지덕지라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당보는 사천 사람이었다. 그러니 풀 따위를 뜯어 먹고 있으면 당연히 매콤하게 양념을 한 마파두부라던가 회과육이라던가, 술 같은 게 자꾸만 생각이 나는 거였다. 물론 지금도 돈이야 넉넉했으니 마음만 먹으면 마을로 가든 당가로 가든 해서 배불리 먹을 수 있겠지만.

마을에 들르는 날이면 짜증 난 티를 대놓고 내며 옆에 달라붙지도 못하게 하니 당보로서는 쫄쫄 굶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가져간 음식이나 술은 좋아하던데. 아무래도 사람 냄새가 싫은 듯했다.

"형님이 그리 질색을 하지만 않았어도... 에잇. 그럴 거면 뜯어먹을 풀이라도 좀 만들어주던가!"

나머지 풀떼기를 챙긴 당보가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당사자가 없다고 간이 아주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 산신은 그런 걸 하는 게 아닌가? 아무튼... 어휴. 얼른 올라가기나 해야지."

눈앞에서 볼멘소리를 하면 냉큼 그러니까 꺼지라고, 하며 쫓아낼 게 뻔했으니 여기서라도 해야지. 실컷 뒷담화를 한 당보는 걸음을 빨리 해 동굴로 돌아왔다. 조금 전에 깬 것인지 청명이 몸을 쭉 늘리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동굴 앞에 턱 주저앉아 뜯어 온 풀을 씹고 있으니 작게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사람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건 볼 때마다 신기하다니까.

"뭐 하냐?"

뚱한 목소리에 당보는 보란 듯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형님과 달리 저는 인간이라 먹고 살아야 해서요. 허기나 좀 면하는 중이오."

"왜 마을로 가 먹질 않고."

"허어."

당보가 허탈한 얼굴로 손을 툭 떨궜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거요? 마을로 내려갔다 오는 날이면 형님이 그 꼬리를 한시도 가만 두질 않잖소. 바닥이 패도록 쳐 대면서."

"진짜 그것 때문이라고?"

"그럼 뭐겠어요."

어깨를 으쓱 한 당보는 다시 풀을 입 안에 넣고 씹다가 슬쩍 미간을 구겼다. 아, 쓰다. 맛없어. 그나마 제가 당가 놈이라 이리 먹고 있는 것이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게 살짝 익혀 고기와 먹으면 기가 막힐 텐데... 고기도 조리도구도 없으니 안 될 일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당보가 꿀꺽, 입 안에 든 것을 삼켰다. 그새 청명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당보는 보란 듯이 으 하는 소리를 내며 혀끝을 빼꼼 내밀었다가 급하게 수통을 열어 물을 넘겼다. 입안을 한 번 헹구고 나니 나았다.

"표정이 왜 그래."

그리 말하는 청명의 쪽으로 몸을 쭉 눕혀 버리니 그가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맛없소..."

허벅지에 몸을 눕힌 채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가장해 웅얼거린다. 청명은 흥, 하고 콧방귀를 끼면서도 다리를 빼지는 않았다.

"독도 잘 처먹는 놈들이."

"에이. 그거랑 이거랑 같습니까? 끼니는 맛있어야지. 아, 물론 당가는 밥에도 독을 섞어 먹는 미친 놈들이긴 합니다만... 아무튼."

"아무튼으로 끝날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너도 당씨잖아."

그에 당보가 흐흐 웃었다. 언제 엄살을 부렸냐는 듯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다 지난 얘기니까요. 이 당보가 집안을 싹 갈아엎었으니. 이젠 먹고 싶은 놈들만 먹을 겁니다."

"이전엔 아니었나?"

"그럼요... 까딱 잘못했다간 집 안에서 뒈지기 딱 좋았으니까... 바보 같은 집안이었소. 행복해야 한다는 목적은 잊고 규율에 따르기만 급급해 희생된 이가 여럿이었지."

어쩐지 청명은 골똘해진 얼굴이었다.

"규율이란 건 조상이 남긴 것일 텐데. 네 마음대로 바꿔도 돼?"

"그리 말하는 이들도 많긴 했소만. 애초에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것일 테고. 백 년이면 강산이 열 번도 넘게 바뀔 세월인데, 규율도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지요. 선조들도 후손이 행복하기를 가장 바랄 테니. 막말로 사람 나고 집안 났지 집안 나고 사람 났습니까?"

그리 말하는 당보의 얼굴은 진심으로 편안해 보였다. 제가 천하제일인이니, 세가 태상장로니 하기에 그렇게 가진 게 많은 놈이 어찌 여기 눌러앉겠다는 건가 싶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정말 상관이 없었던 거다. 집을 엎을 때를 생각하는 듯이 키득키득 웃는 얼굴이 꼭 어린애같이 짓궂다. 청명은 괜히 심술이 나 당보를 휙 팽개쳤다.

"이제 좀 내려가."

"이미 던져 놓았으면서..."

바닥에 머리를 처박힌 채 꿍얼거리던 것도 잠시. 당보는 벌떡 일어나 흙먼지를 탁탁 털어냈다.

"그럼 수련이나 좀 다녀오겠소. 이따 봅시다."

그러고는 또 훌쩍 멀어져 버린다. 하여간 튼튼하고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청명은 땅을 박차는 단단하고도 가벼운 걸음걸이를 느끼다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본래 아무것도 없던 산이니 고작 사람 하나가 이곳저곳 들쑤시는 것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동굴로 돌아가 잠이나 잘까, 하던 청명의 머릿속에 당보가 했던 말이 자꾸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몰랐다.

-선조들도 후손이 행복하기를 가장 바랄 테니.

정말 그럴까. 청명은 느리게 숨을 뱉어냈다. 물론 혼자 생각해봐야 소멸한 자들의 대답이 들려올 리는 만무했다. 그러니 청명이 동굴 밖으로 걸음한 것은 단순한 변덕이었다. 인간 하나가 자꾸만 마음속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생긴 변덕 말이다.

동굴로부터 적당히 떨어진 자리에 청명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다란 바위가 기묘한 각도로 앞을 가리고 있어, 대충 훑고 지나가서는 발견하지 못할 만한 자리였다. 여기가 좋을 것 같았다.

'할 수 있을까.'

청명은 기묘한 두려움을 느끼며 정신을 집중했다. 바닥에 가만히 손을 대고 있으니 땅이 공명했다. 산신이란 땅을 돌보고 생명력을 널리 퍼뜨리는 존재. 그러니 본래라면 어렵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청명은 너무 오래 잠들어있었다. 썩어간다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흘려보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방치당한 땅은 맥이 뚝 끊긴 채 그저 비어있을 뿐이었다.

"후우..."

깊게 숨을 삼키며, 청명은 눈을 감았다.




"범 형니임!"

근처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멍하니 붉은 하늘을 바라보던 청명이 손 아래를 내려다본다. 단단한 바위뿐이었던 자리에 부드러운 것이 잡혔다. 해냈나? 하는 기대감도 잠시. 자세히 보니 색이 새카만 게, 멀쩡한 흙은 아닌 듯했다. 쯧. 청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형님!"

어떤 상념에 빠져들기도 전에, 예의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청명을 끄집어냈다. 저놈은 언제쯤 이 산에선 작게 말해도 다 들린다는 걸 알까? 우울 대신 그런 가벼운 투덜거림이 머릿속을 채웠다. 뒷짐을 진 채 몇 걸음을 걸으니 저만치 발발거리는 놈이 보였다. 어느덧 뒤로 삐죽 튀어나온 꼬리가 살살 흔들렸다.

펑.

"왁!"

순식간에 눈앞에 튀어나온 청명에 당보가 요상한 소리를 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쩐지 뿌듯함이 밀려든다.

"이런 게 진짜 천하제일이라고?"

괜한 시비를 흘리며 앞선 걸음으로 동굴을 향하니 당보가 뒤에서 뭐라고 꿍얼거렸다. 원래 고강한 무인일수록 예민한 법이라던가, 사람 기척은 다 읽히는데 댁은 읽을 수가 없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던가 하는 내용이었다. 청명은 대충 흘려들으며 웃음을 흘린다. 제 잠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워 몸을 반 바퀴 뒤집었을 때는 이미 범의 모양이었다. 당보는 맡겨놓기라도 한 듯 당연하게 청명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뭐야. 떨어져."

"춥소."

"어제 한서불침이라고 자랑한 건 기억이 안 나나 보지."

"...딱딱하게 구시긴. 몇 주째 돌바닥에서 자니 등이 배겨 죽겠단 말이오."

청명은 여전히 째려보는 듯한 눈빛으로 당보를 빤히 바라봤다. 그에 내내 아무렇지 않게 늘어져 있던 당보가 순간 몸을 움찔 했다. 격이 다른 존재로부터, 잊고 잊던 이질감이 밀려들었다. 마른침을 꼴깍 넘기려는 찰나. 바닥을 탁탁 때리던 청명이 조용해졌다. 들었던 머리도 바닥으로 톡 내려둔 채였다.

"너무 붙지 말고 기대기만 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몰라도. 청명은 조금 풀죽은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진짜 해도 되는 거 맞아? 당보는 곧장 치대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다가 조심조심 몸을 눕혔다. 편한 자세를 찾으러 뒤척일 땐 몸을 굳히기는 했지만, 그 뒤로도 청명은 큰 반발 없이 가만히 엎드려 있기만 했다. 따끈하고 단단한 범의 몸은 잠을 청하기 아주 좋았기에 당보는 금방 긴장을 풀고 눈을 감았다. 무심코 손끝을 움직여 쓰다듬는 털의 감촉이 매끄러웠다.

"좋은 꿈 꾸십쇼..."

그리 웅얼거리더니 금방 곯아떨어졌는지 몸이 축 늘어졌다. 청명은 고개만 살짝 돌려 웅크린 채 기대어 자는 모양을 바라본다. 겁을 집어먹을 땐 언제고. 금방 이리 무방비해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 표정.'

평소처럼 괜한 짜증을 부리려 한 것뿐인데. 당보가 저를 낯설게 보는 것이. 겁먹은 듯 구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다시 떠올리자 또 가슴팍이 꾹 조여드는 것 같아 청명은 몸을 살짝 뒤틀어 당보를 제 등 위로 올려 눕혔다. 좀 뒤척이는가 싶더니 으응...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늘어지는 걸 보면 편한 듯했다. 문득 아쉬움이 든다. 텃밭 만들기에 성공했더라면, 그걸 본 당보가 어떤 얼굴을 했을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잘 웃는 놈이니 분명 더 반짝반짝한 눈빛을 띄었을 텐데.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청명은 상념을 지워내고 눈을 감았다. 등판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심박은 익숙한 듯이 낯설었다. 그 때문일까, 아니면 좋은 꿈을 꾸라는 말 때문일까.

"청명아. 그리 용을 써서 되겠느냐."

청명은 아주 오랜만에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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