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


결국 친언니의 결혼식엔 차로 데려다주기만 했다.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제니에게 지수는 미안해할 것 없다고 웃어줬다. 미안하단 생각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볼을 쓰다듬어주곤 차에서 내렸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지수는 뒷모습까지 완벽하게 예뻤다. 돌아보고 웃어주며 손을 흔들어줄 땐 다시 무작정 태우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그렇게 지수를 데려다주고 푹푹 한숨만 내쉬며 일을 했다. 옆에 떳떳하게 있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에 의기소침해있는 제니를 보고 쑥덕거리던 공방 동료들은 제니한테서 자초지종을 듣고 어깨를 토닥여주며 위로해줬다. 떳떳하지 말란 법이 어딨냐 그냥 옆에서 뻐기면 되는 거지, 그래 거기 가서 난동 한번 피웠어야 내일 없이 사는 김제니지, 결혼식장에서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한번 외쳤어야지 안 그러냐 쯧쯧 우리 애 간이 작아졌어요.. 아 진짜 짜증나니까 그냥 일이나 해요 우리. 제니의 말에 다들 장탄식을 내쉬었다. 김제니 너무 재미없어졌어.. 시시해.. 아 시끄럽다고요.

일개미마냥 작업만 하고 어깨가 축 처져서 집에 돌아왔다. 오늘 스케줄상 집에 지수가 먼저 와 있어서 거실엔 불이 켜져 있었다.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벗으며 다녀왔습니다, 습관처럼 중얼거리고 고갤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자기 어떠냐는 듯 웃고 서 있는 지수의 머리색이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레드 오렌지 같기도 하고 브라운 오렌지 같기도 하고, 오묘한데 아무튼 오렌지빛이 감도는 그런 밝은 머리였다. 아침에 봤던 검은 머리가 아니어서 놀랐다가, 또 바뀐 머리대로 너무 잘 어울려서 또 놀랐다. 제니가 눈이 동그랗게 커져선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 어! 하고 연신 놀라니까 지수가 생글생글 웃는다.


“나 어때? 예뻐?”

“완전 예뻐.. 분위기 엄청 다르다 언니 보니까 진짜 봄 같애..”


늘어가는 동거일과 함께 늘어가는 주접..

새롭게 예쁘다고 눈을 못 떼는 제니를 보다 지수가 웃어버렸다. 되게 뉴페이스 보듯이 본다 너. 지수의 말에 감탄과 설렘과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던 제니가 굉장히 어이없어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자기는 자긴데. 날 뭘로 보는 거야 진짜.. 나 진짜 상처받았어. 뭘 그런 거 갖고 그래?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구는 지수를 보고 제니는 또 충격을 먹었다. 언니 원래 다정했잖아.. 변했어? 제니의 말에 지수가 큭 웃는다. 귀엽게 왜 그래. 웃으며 볼을 만져주다 볼에 쪽 키스해줬다. 그런 지수에게 제니는 얼이 쏙 빠진다. 그리고 그게 얼굴에 확 다 드러난다. 저녁은 먹었어? 아니.. 언니랑 먹으려고 안 먹었는데. 그럼 저녁 먹으러 나갈래? 오늘 나 머리도 했는데. 그래, 그러자. 뭐 먹고 싶어?

저녁은 양고기로 정했다. 돌아가는 양고기 꼬치를 보다 눈을 들어 지수를 보면 정말 새롭다. 빨간 벽지의 양고기집이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중이 제 머릴 못 깎는다는데 지수는 자기가 어울리는 색깔은 또 귀신같이 알았다. 제니가 멍청한 표정이 되어 지수를 쳐다보고 있으면 꼬치에 열심히 마늘을 꽂고 있던 지수가 왜? 하는 눈으로 제니를 한번 쳐다보곤 다시 마늘을 꽂는 데 집중한다. 진짜.. 누가 서른 넘은 사람으로 보겠어요. 무슨 소리야? 확 어려보이는 것 같아. 그래 난 삼십대 안 할래, 제니 너만 서른 해.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언니 저 꿔바로우도 먹고 싶어요, 사주세요. 꿔바로우는 사줄게 근데 무슨, 언니래.. 제니는 지수가 시킨 대로 벨을 누르고 꿔바로우를 시켜놓고 괜히 좋은데 계속 아닌 척했다. 그런 제니를 보고 지수가 싱긋 웃는다. 내가 언니라고 하니까 좋아요 언니? 아니 그게.. 머리가 달라져서, 새로워서 그렇지. 연상 몰래 새로운 연하 만나는 느낌이라 가슴이 콩닥거려요? 아 진짜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자기 두고 한눈판 적 있어? 나 만나기 전엔 그랬다며? 진짜 괜히 말했다, 내가 내 무덤을 팠네.

빈 꼬치를 쌓아가며 때론 꿍얼거렸고 자주 마주보고 웃었다. 여유롭고 행복한 저녁이었다. 근데 아까 우편함 보니까 뭐 왔길래 뜯어봤는데 무슨.. 초대장이던데. 음? 그게 뭐야. 네 이름으로 돼 있어서 네가 알 줄 알았는데? 응? 근데 거기 네 이름이랑 내 이름이 같이 쓰여 있었어. 제니는 떠오르는 게 없어서 머리에 힘을 줬다. 그렇게 삼 초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아, 깨달았다. 그거 라리사가 보내준 것 같다. 뭔데? 뭐.. 말하자면 사교 파티 같은 거야. 라리사가 원래 봄쯤에 그런 거 해, 자기 생일 기념해서 시작했던 건데 연례행사처럼 하게 됐어. 클럽 대관하고 지인들 다 모아서 노는 거야. 처음엔 진짜 소소하게 시작했는데 점점 스케일이 제법 커져서.. 요샌 그 옆에 호텔룸도 다 잡아주나 봐. 우와. 플렉스네. 뭐.. 밤새우기엔 다들 늙은 거지. 그리고 채영이 돈이겠지만.. 어차피 걔 돈이 걔 돈이니까.

웬일로 이런 파티에 초대를 해줬대? 언니가 저번에 걔네랑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해서.. 보자고 했거든. 안 할 것처럼 계속 칭얼거리더니. 자기야 내가 자기 말을 이렇게 잘 들어. 으응 착하다 우리 애기. 아무튼.. 그랬더니 같이 놀자고 진짜 미안하다고 꼭 좀 전해달랬는데 그게 우편으로 왔나보네. 그렇구나. 리사 씨는 그냥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신경 쓰고 있었나 보네. 걔 은근 소심해. 걔네 둘이 우리 엄청 궁금해 했을걸. 우리 근황 얘기 안 했어? 뭐.. 그냥 잘 화해했고, 동거하게 됐단 얘기만 했어.

여긴 누가 오는데? 뭐 연예인들도 오려나? 그럴걸? 걔가 은근 발이 넓어. 애인도 채영인데 뭐. 근데 아무래도 댄서나 모델 쪽이 많지. 외국인도 많고, 바이나 레즈도 많을걸. 아니어도 일단은 퀴어프렌들리한 사람들이고. 재미는 있을 거야. 항상 괜찮은 디제이들한테 부탁하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물 좋다고 나름 유명해. 우와 신기하겠다. 왜, 나 두고 한눈팔려고? 뭐래,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뭐, 뭐어? 자꾸 그런 말 할 거야? 나 진짜 상처받아. 제니야 너 이럴 때 표정이 진짜 너무 귀여워. 치.. 상처주고 귀엽다고 하면 다야? 어어 제니야 너 입꼬리가 막 올라가는데? 표정이 막 풀리는데? 아니거든! 나 삐질 거야. 그럼 뽀뽀해줄까? 됐어, 방금 마늘 먹어놓고 무슨 뽀뽀야.. 너 나 사랑한다면서 그것밖에 안 돼? 실망이야. 그럼 언닌 내가 마늘 먹고 뽀뽀해도 받아줄 거야? 아니? 아 진짜!







리사가 주최한 파티는 제니가 생각한 대로였다. 너무 과하지도, 너무 시시하지도 않았다. 사람이 적당히 북적였고 디제잉은 트렌디했다. 작년도 재작년도 안 왔으니 2년 만이었지만 익숙했다. 물론 그때보다 규모는 더 커졌고 사람도 더 많긴 했다. 그러고 보니 대관한 장소도 훨씬 크고 럭셔리하긴 했다. 아는 사람들도 마주쳐 인사를 나눴고 옆의 지수를 소개해줬다. 처음엔 신기해하던 지수는 금방 적응했다. 테이블에 앉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지수를 보고 있으면 그 친화력이 신기할 뿐이었다.

리사는 이 파티의 주인공답게 메이크업, 헤어, 옷 전부 다 화려해서 바로 눈에 띄었다. 근데 그게 무색하게 지수를 보자마자 굽신굽신 아주 열심히 사과했다. 지수 앞에서 말은 똑바로 하는데, 손짓 눈짓 전부 다 어색해 보여서 제니는 리사가 진심으로 민망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혹시 지수 마음에 앙금이 남아있어서 안 받아주면 어떡하지.. 했는데 다행인지 아닌지 지수는 사근사근 웃으며 괜찮다고 해줬다. 지수가 그러니까 옆에 있는 제니까지 괜히 진땀이 났다. 웃는 눈인 것 같은데 또 웃는 눈 같지 않은 그 웃는 눈이.. 잠시라도 숨을 돌리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괜찮다고는 하는데.. 이제 진짜 잘하자? 말하는 것만 같은 그 눈 때문에 제니와 리사는 알아서 찌그러지고 찌그러졌다.

채영은 그보다 조금 더 늦게 나타났다. 아직 분위기가 설익은 것 같아서 춤추러 일어나기도 좀 그렇고.. 테이블에 앉아 지수와 칵테일이나 홀짝일 때였다. 채영은 아까 본 리사와 다를 것 없이, 파티에 진심인 사람들답게 풀메이크업 상태였다. 연예인이니 왠지 모를 광채가 나는 건 덤이고 왠지 축하공연이라고 노래도 몇 곡 뽑아줄 것 같은 인상이었다. 늘 그랬어서 당연하게 예상되는 일이긴 했지만. 리사는 다른 손님들을 보러 자리를 뜬 지 오래였는데 그냥 안부를 나누려고 채영이 제니와 지수를 찾아와준 듯했다. 그러니까 제니와 지수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는데, 채영이 지수 옆에 앉아온 거고..

그리고 테이블의 공기는 극도로.. 어색해졌다.


“그래서. 같이 산다고요? 정말로?”


정말로? 악센트는 ‘정말로?’에 가 있었고 아주 강한 표현은 아니었지만 제니에게도 뜨끔 와 닿은 그런 악센트였다. 힐끔 지수의 눈치가 보였다. 지수는 응, 한 달 돼가요 웃으며 말했지만 이번엔 또 왠지 채영의 눈치가 보이는 거였다. 나 왜 이러지? 나만 쎄한가? 아닌데 지금 둘이서 평소 느낌이 아닌 것 같은데..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느낌에 움츠러들려다 제니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겉으론 분명 멀쩡해 보이지만 어딘지 느낌은 칼같은 두 여자가 깜빡깜빡 제니만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와우. 축하해요, 언니들. 이거 축하할 일 맞죠?”


채영은 밝고 명랑하긴 해도 맘에 없는 말을 할 때면.. 쉽게 말해 영혼이 없어진다. 그리고 지금 묘하게 띠용때용대는 게 영혼 없는 정도가 아니라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일단 꾹 눌러두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안 돼 채영아 내가 얼마나 힘들게 요까지 왔는데.. 팩폭하려고 하지 마.. 불안불안해진 제니는 채영에게 나름대로 간절한 눈치싸인을 보내면서 얼른 말을 꺼냈다.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힘들게 지수 씨 붙잡았는데..”

“솔직히 언니가 제니언니 거둘 줄 몰랐거든요.”

“그러게요? 사람 사는 게 참 내 맘대로 안 되지.”


둘이서 칵테일을 홀짝이는데 제니는 마른침만 삼켰다. 이거 왜.. 둘이 딱히 그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왜 둘이서 기싸움하는 것 같은 느낌이지? 라리사 어디 갔어 차라리 라리사라도 있으면 좀 낫겠는데.. 제니가 괜히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샴페인이 담긴 것처럼 보이는 잔을 트레이에 대여섯 개 들고 다니던 것 같은 사람이 이쪽 테이블로 다가와서, 새 잔 드릴까요? 물어봐줬다. 이미 빈 잔이던 지수와 채영의 것은 가져가고 새 잔을 놓아줬는데, 제니에게도 주려던 건 제니가 사양했다. 오늘 칵테일 한 잔 이상 절대 마시지 말라고 했던 지수의 엄포가 떠올라서. 안 그래도 지수가 그렇게 쳐다보고 있기도 했고.

여전히 편한 분위기는 아니긴 했지만 지수와 채영은 새 술을 마시며 그럭저럭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스는 잘 다녀왔어요? 좀 된 얘긴 것 같긴 하지만.. 그때 언니들, 심각했으니까. 하긴 잘 다녀왔으니까 동거까지 하게 된 거겠죠. 네, 잘 다녀왔어요. 어디가 제일 좋던가요? 어디 하나 꼽기가 애매하네요. 다 좋았어요. 아테네, 산토리니, 크레타.. 다요. 제니언닌 어디가 제일 기억에 남았어? 음.. 아무래도 산토리니? 왜? 풍경이 예뻐서? 물론 예쁘기도 했지만.. 제니는 말끝을 흐렸다. 기억은 떠올리려 하자마자 금세 전부 스쳐갔고, 그때 극에서 극으로 달았던 감정들도 이젠 멀어진 일처럼 그렇게 스쳐가서. 지금도 마음 아픈 건 아니지만 그냥.. 그래서. 그런 제니를 채영이 빤히 쳐다본다. 지수도 술을 두어 모금 마시고 제니를 바라봤다. 어쨌든 잘 마무리된 기억이고 제니는 문제 삼고 싶은 것도 없었다. 제니는 말을 마저 이었다. 거기서 화해해서.. 그래서 가끔씩 생각도 나고 그래.


“화해를 한 거예요, 용서를 받은 거예요?”

“둘 다인 것 같기도 하고..”

“아. 커플은 아무리 싸워도 사랑싸움이라는데 그 말이 맞긴 맞네요. 지수언니 진짜 살벌했는데. 한국 속담에 부부 싸움은 물 베기라는데 왜 하필 칼로 물을 벤다는지 알겠다니까요?”

“뭐.. 부부가 칼로 물만 베는 건 아니긴 한데.”


간담 서늘.. 이혼 전적 있는 사람의 뼈있는 말..


“그래서 제니언니도 칼같이 벨려 그랬어요? 저 언니 멘탈 갈렸을 텐데.”

“겪은 게 있으니 이제 안 그러겠죠 뭐.”

“언니.. 언니 그렇게 안 보이는데 은근 무서운 사람인 거 같아요.”

“제가 무서울 게 뭐 있어요? 채영 씨가 절 무서워할 이유는 더 없는데.”


또 파지직..

꼭 그 문제에 있어서 채영은 뭔가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고 지수는 네가 뭔 상관이냐고 말하는 투였다. 말이 그치면 서로를 그런 식으로 빤히 쳐다본다. 제니는 두 사람이 불편해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얼른 말을 돌렸다. 채영아 근데 너 생일은 잘 보냈어? 연락도 못 했네. 저야 뭐.. 매년 비슷하죠. 팬들이 선물 많이 줬어? 네. 솔직히 어떻게 이렇게 꾸준히 챙겨주나 놀랄 때가 많아요 아직은. 아직은, 이라니. 왜 그런 말을 해. 인기란 건 꾸준하기가 어려우니까요. 조금만 삐끗하면 한물갔단 소릴 들을 연차고. 너 서른도 안 됐는데 무슨.. 그렇다 쳐도 서른이 먼 얘기도 아니잖아요 언니. 나 내년이면 서른이에요. 아니, 잘못 말했어. 나이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관리하기 나름이잖아. 그래도 다들 새로운 걸 원해요. 난 사람들한테 새롭기보단 익숙할 수밖에 없어서 항상 새로워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래서 계속 쉬지 않고 작업에 매달리지만.. 가끔씩은 지치죠. 요즘 지쳐? 네, 근데.. 기복이 있는 거니까. 또 괜찮아지고 그러겠죠. 기운 내, 해줄 수 있는 게 없네. 나랑 이렇게 술 마셔주고 얘기 나눠주면 그게 해주는 거죠. 아, 그리고 언니가 보내준 선물들은 우리 애들이 잘 쓰고 있어요. 특히 그 사료는 엄청 좋아해. 리오랑 루카가 그것만 먹으려고 한다니까요.

근데 언니들 진짜 좋을 때네요. 작년 가을부터 만났던 것 같으니까.. 이제 이백일쯤 되지 않았어요? 맞아요. 동거도 하고.. 진짜 신혼부부다. 좋겠다. 제니언닌 집에서 어때요? 잘해줄 것 같은데. 엄청 깔끔하고. 맞아요. 덕분에 집에선 제가 잘 쉬는 편이죠. 놀아달라고 하는 걸 좀 받아줘야 하는 것만 빼면? 뭐? 제니가 바로 쉭 돌아봤지만 지수는 태연했다. 같이 사는데 그것도 못해줘? 아 진짜 좀 너무할 때가 있어.. 나 청소시켜놓고 잠들어버린다니까? 다 하고 오면 놀아준다 그래놓고? 네가 나만 보면 놀아달라고 붙잖아. 아니 같이 살아도 집에서 보는 시간이 많지도 않으니까 그렇지..

채영아 네 생각은 어때? 어? 동거까지 하는데 나만 더 좋아하는 것 같잖아.. 근데 무슨 말인진 알겠어요 제니언닌 좀 집착하는 게 있어서.. 야 박채영 뭐? 왜요? 난 되게 돌려서 말했는데? 뭐, 뭘 돌려서 말한다는 거야 진짜 지수 씨 오해하게.. 내가 말 안 해도 지수언니도 알걸. 아니 더 잘 알 것 같은데. 사귀는 사인데 어떻게 몰라? 언니 그런 경향 있는 거. 무, 무슨 경향.. 그리고 사랑하는 방식이 좀 다른 거지 누가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고 그런 건 아니겠죠. 지수언니가 언닐 덜 좋아했으면 언니랑 동거를 왜 해.. 이미 찼지. 술을 홀짝홀짝 마시는 채영을 보며 제니는 이마를 짚었다.







파티를 연 게 리사인데 역시 채영이 아무것도 안 할 리는 없었다. 제니가 앉은 테이블에 찾아와 좀 떠들다 갔지만, 올 사람들은 거의 다 와서 붐비는 열한 시쯤 스테이지에 나타나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많이는 아니었지만 세 곡을 불렀다. 따지면 비공식 행사였는데 채영의 기량은 콘서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노래하는 채영은 확실히 프로였다.

채영의 무대가 끝나고 스테이지에 우르르 모여 있던 사람들이 슬슬 바로 가 술잔들을 쥔다. 음악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먹고 마시거나, 춤추거나 얘기하거나 했다. 사실 클럽이면 제니의 나와바리여야 맞는데,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지수랑 같이 있어서 그런지.. 아무래도 후자여서 그런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제니는 자꾸 안 어울리게 이런 데서 어색하고 쑥스럽고 그랬다. 그래서 지수랑 춤추러 나가도 리듬만 살살 타고 말았다. 게다가 주변엔 다 잘 놀다 못해 날고 기는 사람들이어서 더더욱 기가 안 살았다. 아무래도 현역들한테는 밀릴 수밖에 없지.. 하는 생각부터 하게 되니까 더욱 자신감이라곤 없어진다. 만나는 지인마다 제니 어깨를 툭툭 치면서, 예쁜 여자친구 앞에선 조신하기냐고 낄낄깔깔 놀려댔지만 그럴수록 제니는 더더욱 얌전해지고 말았다.


“왜 자꾸 어색해해? 쉬고 싶어?”

“아니.. 아니에요.”

“너 댄서였다면서. 나한테 끼 숨기는 거 아니야?”


끄응..

지수는 좀 궁금해하는 눈빛인데 지수가 그렇게 쳐다보니까 제니는 더욱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살다살다 김제니가 클럽에서 목석이 다 되는구나.. 루비제인은 정말 영영 못 쓰는 이름이 되는 거구나.. 제니는 발기부전 환자라도 된 기분이었는데 그런 제니를 보고 지수는 오히려 큭 웃었다. 귀엽다고 양쪽 뺨을 아프지 않게 쥐고 고개를 살살 움직여준다. 그러다 입술에 쪽 뽀뽀해줬다. 떨어지려는 지수를 제니는 꼭 껴안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키스하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괜히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는 않아서 자제했다.

바에서 마실 것 하나씩 집어 들고 앉으려고 빈 테이블을 찾아보는데 같이 일했던 친한 동료들을 발견했고, 자연스럽게 합석을 하게 됐다. 다들 지수보고 예쁘시다고 감탄해서 제니는 괜히 지수 옆에 더 꼭 붙어앉으며 지수의 손을 스르륵 잡았다. 와.. 김제니 쟤 지금 자기꺼라는 거지.. 아니 저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루비제인을 왜.. 내면도 아름답지 않으시고서야 저런 미친 고양이를 구제해주실 리가 없는데.. 수군수군.. 야 늬들은 어떻게 내 덕담 한마디를 안 해주냐? 야 루비제인이 덕담해달래 수군수군.. 지는 뭐 언제 덕담한 적 있냐.. 없을걸.. 양심없이 태어난 애잖아 쟤.. 으휴.. 야한 얘기나 안 해주면 그게 배려인 줄 알아야 되는데 쟤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어머? 저 그런 얘기 괜찮아요.”

“뭐, 뭐라는 거야 자기야..”


지수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제니는 수습을 해보려고 했는데, 이미 다들.. 음흉한 눈이 되어있었다.


“그럼.. 그 소문.. 진짜예요?”

“무슨 소문이요?”

“그 뭐더라.. 이상한 티부가 붙었는데.. 김제니 만지면서 제 아래가 얘 좋아해요, 해서 퇴치했더라는..”

“야씨 넌 그런 말을 왜..!”

“아아. 맞는 것 같은데.”


제니는 말 안 가려서 한다고 확 짜증을 내려고 했는데, 옆에서 지수가 순순히 인정해줘서 그만 벙쪄버리고 말았다. 다들 지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와악! 하면서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 그러셨구나.. 그 부분에서 김제니랑 맞으시는 거구나.. 그래서 커플이시구나.. 거기서 천생연분이셨구나.. 세상에.. 어머나..


“근데 그게 왜 소문이 돼요? 별거 아니었는데.”

“이 바닥이 좀 좁기도 하고.. 그게 좀 흔치 않은 일이었죠 아마?”

“고럼요. 한때 이 바닥 쓸었지만 과거를 등지고 홀연히 사라진 미친 레즈가 2년 만에 레즈전용 업소에 컴백했는데 데리고 온 여자가 딱 봐도 헤테로다? 그런데 헤테로가 그랬다? 어우 야..”

“인소도 그렇겐 안 쓰지.. 암.”


옛 동료들은 최대한 순화해서 말하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제니는 긴장돼서 가져온 주스만 벌컥벌컥 마셨다. 혹시라도 지수가 불편할까 봐 걱정이 됐다. 근데 지수를 보니까 그 예쁜 눈에서 호기심과 신기함만 반짝대는 게.. 좀 걱정이 다 쓸데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제니가 빤 쳐다보니까 지수가 제니를 돌아봤다. 지수는 어째 천진한 표정이더니 제니 귓가에 다가와 이렇게 속삭였다. 나 나름 알려진 레즈인가 봐. 지수는 진심으로 흥미로운지 큭큭 웃는데 제니는 하.. 웃음도 안 나왔다. 으응 언니 그거 아니야.. 언니 그게 재미있게 느껴지면 아직 레즈 된 거 아니야.. 속으로만 말했다.

마시고 먹고 얘기하다보니 슬슬 물을 빼고 싶어졌다. 제니는 지수를 두고 가는 게 썩 내키지 않았지만 지수가 괜찮다고, 얼른 다녀오라고 해서 혼자 일어났다. 너네 지수 씨한테 이상한 말 하지 마라. 엄포를 놨긴 한데 다들 비웃긴 했지만 하는 꼴들을 보아하니 알아서 지수한테 별말 못할 것 같았다. 얘네들은 어차피 레즈 생태계 상 지수 같은 여자한텐 나약할 거고, 뭐 이상한 말이 들어온대도 지수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그래도 왠지 불안해서 후다닥 볼일을 보고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서는데 누군가 슥 지나갔다. 사실 그건 제니와 부딪칠 뻔한 것도 아니고, 제니가 누군지 보려면 뒤돌아봐야 하는 각도였는데, 왠지 모를 느낌에 제니는 무심코 돌아보았다. 백금발에 가까운 긴 생머리는 뒷모습이어도 누군지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채영이었다. 채영은 클럽 밖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클럽 안은 좀 시끄러우니까 밖에서 전화하려는 걸까? 근데 이 시간에 누구한테 전화를? 라리사랑 싸웠나? 화가 난 느낌은 아닌 것 같았는데. 벌써 집에 가나? 라리사 혼자 두고 가진 않을 텐데.. 담배 피우러? 쟤 목은 진짜 아껴서 담배는 안 할 텐데. 근데 혼자서 밖에 나가면 좀 그렇지 않을까? 열두 시도 넘었는데..

제니는 조금 망설이다 채영을 쫓아갔다. 채영이 키가 커서 성큼성큼 갔는지 벌써 많이 멀어져서 제니는 조금 뛰어야 했다. 채영이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 제니는 채영아!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채영이 조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혼자서 어디 가?”

“언니 어디서 왔어요? 저 그냥 바람 쐬러요.”

“혼자?”

“네 뭐.. 잠깐 갔다 오려는 거라.”


제니는 기다릴 지수가 떠올라서 좀 고민됐지만 채영을 혼자 보내려니 마음에 걸렸다. 잠깐 바람 쐬려는 거라니까..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졌다. 그래서 채영에게, 그럼 같이 나가자고 했다. 그랬더니 정작 채영이 문을 열지 않는 채 제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다른 뜻은 아니고 옷차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아니나 다를까 언니 안 춥겠어요? 물어온다. 클럽 안은 살짝 더워서 짐이랑 도톰한 외투는 락커에 넣어둔 지 오래였다. 재킷을 입고 있긴 한데 나가면 춥긴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잠깐이라는데 뭐.. 가지러 왔다갔다하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서 제니는 그냥 괜찮다고 했다. 채영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문을 열어젖히며 나갔다.

나가서는 자연스럽게 벤치에 앉았다. 약간 길고 좁은 마당 개념으로 만들어둔 공간 같았는데, 양옆으로는 높은 건물이 가로막듯 있고 쭉 멀리 앞에 있는 철제문은 잠가놓아서 외부 사람들이 지나가거나 들어오지는 못해 나름 조용했다. 클럽 안에는 흡연 구역이 따로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도 담배를 태우는 곳인지 두어 군데 재떨이 기둥 같은 게 있긴 했다. 채영은 그냥 앉았고 제니도 옆에 앉았다. 앉고 나니까 삼월 말이긴 해도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라 밤공기가 춥긴 했다. 그래도 나오자마자 춥다고 하긴 좀 그래서 제니는 가만있었다. 그런 제니를 채영이 물끄럼 쳐다봤다.


“언니 춥죠.”

“아니?”

“감기 걸리려고 그래요.”

“아니라니까?”


채영은 프슷 웃는 것 같더니 걸치고 있던 숄을 넓게 펴서 제니의 어깨에 덮어주듯이 둘러주었다. 숄에서는 채영의 뿌렸을 향수 냄새 같은 게 맡아졌다. 안 춥다니까.. 하고 웅얼거리긴 했지만 그렇게 해주니까 확실히 따뜻하긴 했다. 챙겨주는 채영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챙겨준다고 나온 건 저인데 이렇게 되는 건 조금 멋이 안 살긴 했지만.

클럽 안에서는 조금 어두워서 몰랐는데 채영이 왜 바람을 쐬고 싶어했는지 알 것 같아졌다. 나와서 보니 채영은 술기운이 많이 올라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도 좀 울긋불긋하고 눈자위도 좀 그랬다. 술 많이 마셨냐고 묻자 주는 대로 받았더니 꽤 많이 마신 것 같다고 그랬다. 채영은 술을 잘하는 편인데 좀 취해 보일 정도니 많이 마신 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제니가 기억하기로 채영은 제니처럼 술버릇이 고약한 건 아니지만, 기분이 확 좋았다가 가슴이 훅 답답했다가 하는 식으로 오락가락하는 걸로 알고는 있었다. 아무튼 정신을 잃는 쪽은 아닌데 그래서 차라리 졸렸으면 좋겠다고 답답해할 때가 있곤 했다. 오늘도 그런 날인 것 같았다.

답답한 가슴속을 추스르는지 채영은 별말이 없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여서 제니는 그 정적이 불편하진 않았다. 그래도 옆에 있으니 말을 붙여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을 꺼냈다.


“혼자 나가고 그래, 밤늦게 위험하게.”


제니의 말에 채영의 입술이 웃는다. 치아를 보일 정도는 아니고 입술만 웃는 웃음이었다. 입꼬리가 둥글게 잘 올라가는 편이라 가볍게 그려지는 미소였다.


“걱정해주는 거예요?”

“당연히 걱정되지. 라리사라도 데리고 나가든가.”

“리사 오늘 주인공이어서 바빠요.”

“바빠도 그렇지.”

“언니도 지수언니 두고 나온 거 아니에요?”


끄응. 그게.. 두고 나올 계획은 아니었는데.. 제니는 괜히 찜찜해져서 바지주머니에 잘 넣어둔 핸드폰의 윤곽을 괜히 만져보았다. 전화가 오면 진동이 울릴 텐데 아직은 소식이 없었다. 너는 연예인인데.. 사람들 다 알아볼 건데 혼자 밤늦게 다니고 그러면 위험하니까.. 꼭 라리사가 아니어도 아는 사람은 끼고 나와야지.. 괜히 횡설수설하다보면 답지 않게 잔소리를 늘어놓게 된다. 채영은 그냥 웃으며 듣고만 있었다.

제니가 슬그머니 말을 그치면 다시 조용해졌다. 채영은 고개를 약간 들고서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는 것 같았다. 제니도 옆에서 괜히 숨이나 찬찬히 쉬었다. 밖이라서 확실히 공기는 선선하긴 했다.


“언니는 그 언니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


밤하늘을 좀 올려다보던 것 같던 채영이 툭 말을 건넸다.


“으응. 뭐, 그렇지.”

“그 언니는 언니한테 잘해줘요?”

“응.”


채영은 거기서 더 묻지 않았는데 제니는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말을 조금 더 덧붙였다. 같이 살아주는 것만 해도 고맙지 뭐.. 그 말에 채영이 제니를 돌아보았다. 채영은 별 뜻 없이 보는 것 같은데 제니는 쭈뼛 채영을 쳐다봤다 말았다. 어쩐지 채영이 좋은 말만 해줄 것 같진 않단 느낌이 들어서 그랬다. 채영이 딱히 그럴 이유도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냥 움츠러든다. 그때 그 일 이후로 둘이서 얘길 해본 적이 없으니, 아무튼 뭐라도 얘길 할 것 같긴 했다.

멋쩍어하는 제니의 옆얼굴을 쳐다보면서 채영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살짝 멍 때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제니에게 말을 건넸다.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해준다는 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다른 누가 대신해줄 수 없으니까요.”


언니를 보니까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채영의 담담한 말투는 어쩐지 살아온 시간이 느껴지게 했다. 이미 예전부터도 그랬지만 이젠 정말 더는 어린애처럼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사실 그 언니, 언니한테 어떻게 상처를 줬는지 조금은 알아서.. 좋은 사람 같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그 뒤론 그런 일 없었던 것 같고.. 언니가 행복하다면 됐어요.”


지수와의 관계는 지금 충분히 행복했다. 그러니 행복하다고 하면 되는데 어쩐지 말이 바로 안 나왔다. 채영이 건드린 부분이 뭐였는지 왠지 울컥 눈물부터 나려고 했다. 화해했고 잘 마무리하고 지나간 일인데도 잊히지는 않을 상처처럼 가슴 한구석에 덮여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만의 상처라고 하기엔 저도 지수에게 잘못하면서 남긴 상처가 있을 테고.. 그래서 그냥 시간에 빛바래져 괜찮아지게 넘겨두고 싶었다. 지수도 그런지 그때 일에 대해서는 농담으로라도 말을 꺼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채영이 언급한 거였다.

채영에겐 아주 조금이라도 약한 감정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채영을 못 믿어서라기보다 지수가 준 건 상처여도 혼자서 감당하고 싶어서 그랬다. 제니가 티 내고 싶지 않아서 말이 없는 시간이 길어지자 채영이 제니를 한번 살피듯 들여다본다.


“언니. 진짜 괜찮은 거죠?”

“응.”

“근데 왜 울 것 같은 얼굴이에요.”


아니라니까.. 라고는 했지만 제니는 채영을 똑바로 쳐다보거나 고개를 들지는 못했다. 그러는 제니를 바라보던 채영은 팔을 뻗는가 싶더니 안아주는 것처럼 제니를 자기에게 기대게 해줬다. 속상하게 그래요, 야트막한 한숨처럼 속삭이는 채영의 목소리에는 눈을 감게 된다. 채영의 품은 따뜻했고 무엇보다 편이 되어주는 위로였기에 고마웠다.

제가 뭘 알겠어요 두 사람 사이를요. 좋겠죠, 서로 사랑하는 덴 이유가 있겠죠. 너무 사랑하다보니까 서로 심하게 실수할 때도 있는 거겠죠. 지금은 사이가 좋아도 받은 상처는 별개일 거예요. 다른 사람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 봐야 의미도 없을 거고. 사랑한다는 건 견디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난 언니를 다는 몰라요. 그 언니는 더 모르죠. 나한텐 언니가 더 가까운 사람이니까, 언니가 그 언니 옆에서 자꾸 주눅드는 것 같아서 속상한 거예요. 그냥 그런 것 같아요.


“언닌 좋은 사람이에요.”


마음처럼 잘은 못 해줄 수 있어도요. 채영은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 제니를 올곧게 들여다보며 웃어주었다.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말 없는 순간이 살짝 지나간다.


“언니는 착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난 언니가 위축되지 말았으면 해. 언니가 아프고 힘든 거,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어. 언니는 사랑받아야 할 사람이니까.”


제니는 그렇게 말해주는 채영이 고마웠다. 고맙다고 하면 되는데 어쩐지 낯간지러워서 쭈뼛대고 있으면 채영이 제니의 뺨에 살짝 입 맞춰주었다. 옆머리에 가까운 쪽에. 그러곤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닦아준다. 사실 이렇게 가까운 스킨십은 처음이긴 했는데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채영은 원래 친한 사람들한테 종종 그랬다. 유독 제니한테만큼은 선을 좀처럼 넘으려들지 않곤 했을 뿐이었다. 방금 그건 술기운에, 오래 알고 지낸 사이로서 애정을 표시해주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기댄 채 조금 더 있다가, 그만 들어가야겠다고 제니가 말을 꺼냈다. 지수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채영도 별말 않고 같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제니는 숄을 벗어 채영에게 돌려줬다. 고마웠어, 하는 제니의 말에 채영은 웃으며 받아들었다. 술은 좀 깼냐고 물어줬더니 그냥 그렇다는 미적지근한 말이 돌아온다. 클럽 안으로 들어와서는 각자 갈 곳으로 자연스레 헤어졌다.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