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는 잠시 서있다가 돌아온 길 그대로 다시 밟아 알현실을 나갔다. 가봐도 좋다 했으니 가면 되겠지.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사람이 없어 여기서 뭘 더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올 때는 어색하게 셋이 왔는데 나가는 건 혼자 훌훌이었다. 

릴리는 문을 나서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직 실내건만 환한 빛이 비쳐들어오는 게 보였다.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시야가 좁아져 있었는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아무 것도 안 보였는데 알현실에서 기묘한 만남을 끝내고 나오니 갑자기 온갖 게 다 보였다. 날씨가 좋았다. 

릴리 취향은 아니었지만 석재를 섬세하게 조각해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패턴을 이루는 석벽과 기둥도 나름의 멋이 있었다. 릴리가 폐속에 들어찬 공기를 길게 내쉬었다. 내내 정신이 없기는 했나 보다. 부조도 정원수도 눈에는 들어와도 생각에 자리하지 못했다.

그렇게 긴장했는데 막상 돌이켜 보아도 알현실에서 겪은 일은 생각한 것과 전혀 달라서 어떤 감상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 불쾌도 아니고 유쾌도 아닌 기묘한 기분만이 남았다. 

그래도 여기서 기대한 일은 일단 다 마치긴 했으니 되긴 했다. 릴리는 제 손등을 살짝 쓸었다. 

겉으로 보기에 큰 표식 같은 게 남지는 않았다. 가호를 받지 못해도 받았노라 말하면 남들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허풍이 들키면 오히려 곤욕일 테니 굳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제 뭘 하지? 같이 온 사람들을 기다리자니 대체 언제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이대로 혼자 돌아가면 되나? 

상의된 바도 없이 갑자기 덩그러니 혼자 떨어진지라 고민하는데 시종으로 보이는 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얼굴을 보니 여기까지 안내했던 시종이다.

"일행분을 기다리시려거든 구경이라도 하심이 어떨런지요? 황궁의 온실은 명성이 드높아 여기까지 올라온 김에 들르시는 손님들이 많습니다. 이색적인 풍광이 아름답지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니 일행을 기다리시는 동안 둘러보신다면 지루할 새가 없을 겁니다."

시종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마 여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다른 데 가있으라는 의도기도 하겠지만, 릴리 입장에서도 여기 서있는 것보단 온실 구경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릴리가 온실로 가겠다고 하자 시종이 길을 안내했다.

바닥에도 아귀를 맞춘 돌이 깔려 있었다. 모양을 맞춰 잘 다듬어뒀지만 미끄럽지는 않았다. 릴리는 시종을 따라 완만한 내리막길을 조금 걸었다. 

온실은 바로 근처에 있었다. 길 찾기도 어렵지 않아 길잡이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였다. 

릴리는 온실 앞에 도착한 뒤 시종에게 일행에게 자신이 간 곳을 알려달라 얘기한 후 그를 돌려보냈다. 혹시나 길이 엇갈리면 안 되니까.

중부는 연중 온화한 봄날씨라 각별한 시설은 필요 없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큰 규모로 만들어 놓은 온실이 신기했다. 하긴 황궁인데 아예 안 만들면 모를까 굳이 소담하게 지을 이유도 없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황궁에 있는 온실에 관해 이전에 들은 바가 있기는 했다. 아름답게 가꾸어 1년 내내 꽃이 피고 지는 정원이랬던가. 릴리는 잠시 앞에 서서 온실을 올려다 보았다. 유리로 된 온실은 소재 특성상 혼자 뜬 섬처럼 다른 건물들과 어우러지지 않는 모양새였다.

천장이 높았지만 고도가 낮은 곳에 있어 본궁을 위협하는 높이는 아니었다. 전체적인 형태는 복잡하지 않았는데 돌로 쌓아만든 것도 아닌 건물이라기엔 웅장한 크기였다. 릴리는 온실 자체에 마법이 작용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입구 앞은 물론이고 안으로 들어가도 지키는 사람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문은 손님을 환영하듯 이미 열려 있었다. 릴리는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갑작스런 구경이었지만 내부는 어떻게 되어있을지 기대심이 올라왔다.

온실 입구는 조금 좁고 길어 짧은 통로를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입구의 짧은 통로는 문을 두 개나 지나야 하는 구조였는데 지금은 둘 다 그냥 열려있었다.

바람이 통하게 되어있어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 열린 문을 지나자 바깥과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문을 방금 열어서 완전히 섞이지는 않았나 보다. 릴리는 온실을 효율적으로 설계했으리란 추측을 했다. 물론 릴리가 지닌 온실에 관해 약간의 지식이 이렇게 대규모 온실에도 통용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온실 안으로 들어서자 낯선 생김새를 한 사람 키를 훨씬 웃도는 식물이 시야를 가로막는 벽처럼 서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녹색 줄기가 위로 쭉쭉 뻗어나가 시각적으로 퍽 시원하게 생긴 식물이었다. 사람 대신 식물이 손님을 맞이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남동부에서 왔을까? 신기하게 생긴 식물을 구경하다 시선을 돌리니 자연스럽게 이어진 산책로가 눈에 들어왔다. 낯설지만 나쁘진 않았다. 릴리는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투명한 유리로 모든 부분을 감싼 온실은 릴리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이 사치스러운 건축물이었다. 햇살이 반짝이며 투과하는 모습 자체로도 장관이다. 모든 부분에 부지런히 손이 닿은 식물들은 완벽하게 가꾸어져 있던 바깥의 정원보다 의외로 훨씬 거칠고 야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릴리의 키를 넘는 수풀 정도는 흔했고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꺾어야 끄트머리가 보이는 것도 있었다. 다들 제 특징대로 한껏 자라난 모습이 보기 좋았다. 릴리는 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음에 아쉬움을 느꼈다. 

저 나무는 삽목을 했을까?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저쪽은 구근식물 같은데 다른 기후에서도 잘 자라려나? 온실 밖에서도 자랄 수 있을까? 열매와 꽃은 어떤 형태일까?

릴리는 이 온실에 자신이 혼자 있는지 아니면 다른 구경꾼들도 있을지 궁금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푸른 빛이다. 키를 넘는 식물들이 길 너머 시야를 막고 있어 소리라도 지른다면 모를까 산책로를 따라 걷는 동안은 도무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온실은 중간에 역시나 투명한 유리를 사용해 만든 격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지금껏 지나온 곳에서 벗어나 더 안쪽에 있는 구획으로 들어가자 물 속에 들어간 것처럼 더운 공기가 피부에 습하게 들러붙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두리번거린 뒤에 릴리는 그럴만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에 수로가 만들어져 관에서 아주 작은 구멍을 통해 물이 공기 중으로 뿌려지며 높은 습도를 유지하게 되어 있었다. 상부에 물탱크를 마련해둔 것인지 아니면 물을 끌어올리는 힘이 있는지 방식까진 여기서 알 수는 없었다.

첫번째 구획도 따뜻하긴 했지만 이곳은 특별히 온도를 더 올려놓은 것인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땀 때문인지 공기 중의 습기 때문인지 옷이 몸에 들러붙어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각별히 두껍게 입고 오진 않았는데 습도 탓인지 후텁지근했다. 

안쪽 구획은 좀전에 둘러본 곳보다 훨씬 화려하고 색이 짙은 식물들이 많았다. 큼직하게 자란 식물들 사이에서 릴리는 고랑으로 다니는 들쥐가 된 기분이었다. 밭에 주로 심을 법한 식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확실히 시종이 추천할만한 구경거리기는 했다.

그때 어딘가에서 푸르스름한 게 움직였다. 시야 언저리로 보이는 물결에 비친 햇빛을 본 것처럼 얼핏 잘못 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릴리는 곧 자신이 뭘 봤던 건지 알 수 있었다. 푸른 나비였다.

중력을 다르게 적용받는 것처럼 나비가 나폴거리며 날았다. 푸른 보랏빛이 날개를 움직일 때마다 신비롭게 반짝였다. 하얀 뼈대 사이에 완전히 투명한 유리창을 끼워둔 온실의 모습처럼 검은 무늬 속에 푸른색과 보라색이 오묘하게 휘몰아쳤다. 릴리는 팔랑이는 나비의 모습에 단번에 시선을 빼앗겼다. 

사람이 돌보는 곳에 사는 종류라 그런지 도망가거나 하지도 않고 오히려 릴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야생에서도 그리 경각심 없는 종류일지도 모른다.

팔랑팔랑 움직이는 날개의 아름다운 빛깔을 감탄하며 구경하는 릴리의 앞으로 나비가 날아왔다. 불규칙적으로 부는 바람이나 여러 와류가 있는 지점에 휘말린 것처럼 기묘하게 움직이던 나비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릴리는 나비가 생각보다 너무 커서 놀랐다. 

이미 충분히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었는데 릴리의 착각이었다. 나비는 릴리가 다 왔다고 생각한 뒤로도 계속 다가왔다. 

나비의 크기는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계속해서 커져서 날개를 펼친 폭이 릴리의 두 손으로 잴 수 없을 정도까지 커졌다. 나비는 거의 한 마리 새에 가까운 크기였다. 릴리는 그제야 뭔가 좀 생각하던 것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날개를 세로로 접었다 폈다 움직이는 것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다가온 나비가 바로 앞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자 릴리의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릴리가 본 어떤 섬세한 레이스보다 복잡하게 짜인 아름다운 빛깔의 날개에 햇빛이 가려 릴리의 얼굴이 그림자로 덮일 정도였다.

그렇게 커다란 나비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날개를 펴니 검은 무늬를 다시 따라 그릴 수도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보였다. 

"릴리!"

릴리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에 손목이 덥썩 잡혔다. 릴리는 피하지 않았다.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필리엔?"

릴리가 어떻게 더 반응하기도 전에 필리엔이 잡은 손목을 왼손으로 옮겨 잡아 자신 쪽으로 당기며 반댓손을 나비 쪽으로 내밀었다. 릴리는 그의 손이 하얗게 빛을 내는 것을 보았다. 

마법이다. 

릴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온실 전체가 한 걸음 움직인 것만 같았다. 필리엔이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릴리는 이 이상한 감각의 혼란 속에 비틀거렸을 터였다. 

겉으로 보이지도 않고 평소에 느껴지지도 않던 무언가가 먼저 움직인 후에 세상의 물질이 그것을 따라 흐르는 것을 릴리는 똑똑히 느꼈다. 뒤늦게 공기가 이동하며 바람이 불었다. 가벼운 바람이었지만 천장의 높이가 가늠되지 않는 온실 내부 전체의 공기가 움직인 거였다. 

나비는 둔중한 무언가에 밀려난 것처럼 순식간에 멀리 훅 밀려가더니 돌풍에 휩쓸려 허공으로 떠오른 마른 낙엽처럼 팔랑이며 아래로 떨어졌다. 도중에 날개짓을 해 겨우 추락하지 않고 날아올랐다. 

따뜻하고 습한 온실 속에서 짙게 자라난 식물들이 한번에 잎사귀를 비비는 바람에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솨아아 하는 소리가 났다. 릴리가 살면서 한 번도 본적 없고 상상도 해보지 못한 형태를 지닌 길고 넓고 두꺼운 이파리들이 몸을 떨며 몸에 맺힌 물방울들을 떨어냈다. 축축한 흙 위에 수천개의 은빛 물방울들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살면서 두 번은 보기 힘들 진귀한 광경에 릴리가 넋을 놓고 있는데 필리엔이 불쑥 릴리의 어깨를 감싸쥐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무척 놀란 얼굴로 살폈기 때문에 릴리는 역시나 그냥 어리둥절해졌다. 

"괜찮아요, 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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