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명不明



친구들을 집에 가는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준 뒤, 이은재와 함께 걸었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손등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를 유지하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잡지 못했다.

"정말 거짓말이야."

서은재의 남자친구라고 말했던 것을 다시 한번 부정하자, 이은재가 마지못해 웃었다.

"알아, 바보야."

바보라고 칭하는 말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슬픔을 읽었다. 내가 서은재와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아는 목소리였다. 더 파고들자면, 우리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거란 것을 완벽히 간파당하고 난 뒤였다. 나는 악의 없는 손길에 헤집어진 마음이 얼얼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만 가겠다며 돌아서는 너의 곧은 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마음이 울렁거려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던 때, 핸드폰이 울렸다.

[이제 안 와도 돼]

발신인은 이은재였다.


이은재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교무실에 가 담임 선생님에게 이유를 물었다. 네가 아프다고 했다. 감기 몸살이라고, 누구보다 몸에 신경 쓰던 너답지 않은 병명이었다. 이은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네가 무리해서 아픈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널 알았다. 내가 아는 이은재는, 발레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름다운 춤을 추던 이은재는 감기 몸살에 걸려도 꼬박 몸을 움직이려는 사람이었다. 정말 아픈 걸 수도 있겠지만, 어제의 너는 그런 기색이 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헤어지기 직전 너의 표정이었다.

나는 교무실에서 나와 바로 가방을 챙겼다. 계단을 내려가며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은 들려도 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와르르 무너지기 직전의 마음처럼 부재중 전화가 가득 쌓였다. 나는 어느새 너의 집 앞에 도착했고, 문자를 남겼다.

은재야.

나 집 앞이야.

문자를 읽었는지, 아니면 읽지 않았는지 혹은 읽었는데도 모른 척하는 건지 생각이 복잡했다. 그 앞에 한 시간쯤 있다가 근처 약국에서 감기약과 따뜻하게 데운 쌍화탕을 샀다. 나는 쌍화탕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있었다.

문앞에 약 두고 갈게.

고민하다가 한마디 더 해서 문자를 썼다. 내일 보자, 꼭. 간절한 바람을 담은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문자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


다음 날, 이은재는 흰 얼굴로 등교했다. 아픈 게 정말이었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이은재의 곁에 갔고, 너는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안색은 좋지 않아도 기분은 좋아 보였다. 나는 네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직도 열이 있네. 많이 아팠어?"

"많이는 아니고 조금."

시원해서 기분 좋다. 이은재가 눈을 감았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손끝으로 건들고 싶은 충동을 참기 위해 노력했다. 그저 손바닥이 열에 뜨끈해지면 반대쪽 손을 들어 네 이마에 얹어주는 역할만 했다. 너는 몸이 좋지 않다며 계속 엎드렸고, 나는 보건실에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아니. 그냥... 손잡아줘."

그러면 괜찮을 거 같아. 이은재의 말에 나는 귀 끝까지 붉어지는 열기를 느꼈다. 책상 위에 올려둔 가느다란 팔의 끝을 찾았다. 너의 몸처럼 길고, 곧고, 하얀 손을 맞잡았다. 네가 또 한 번 시원하다, 중얼댔다. 나도 나를 모르길 바라던 때가 있고, 나도 모르는 나를 너만은 발견해주길 바라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게 지금이라고 믿었다.

"알고 있었어."

"......."

"은재 남자친구라는 말... 거짓말인 거."

네가 다시 한번 "알고 있었어." 하고 말했다.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그냥, 네가 너무 좋았다.

"어떻게 알았어?"

이은재의 하얀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영현아. 네가 날 불렀고, 그런 건 그냥 알게 돼. 네가 말했다.

"문자 봤어."

"봤어?"

"응. 약도 먹었고."

고마워, 너의 속삭임을 듣고 나는 낮게 웃었다. 다행이다, 나직한 안도를 들은 너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오늘 그래서 나온 거야."

"문자 보고?"

"내일 보자고 했잖아."

사실 더 쉬려고 했는데, 웅얼대는 말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나는 발끝까지 저릿한 느낌을 겨우 참았다.

"그래서 오늘 레슨 가야 해."

너는 처음으로 레슨이 기대되지 않는다고 했다.

"같이 가자. 나 때문이니까 학교까지 데려다줄게."

이은재가 고개를 저었다. 이마를 덮는 머리칼이 살랑였다. 오늘은 오지 마. 너는 꽤 단호했고, 걱정하는 내게 말했다. "은재랑 마주치는 거 싫어." 아마도 질투였다. "거짓말인 거 안다며." 나의 결백에 너는... "알아도 좀 그래." 투명한 마음을 드러냈다. 기분 좋은 질투에 나는 우리를 다시 정의했다. 너는 날 사랑하고, 나도 널 사랑한다고.


이은재와 교문 근처에서 헤어졌다. 끝내 널 데려다 줄 수 없어서 슬프면서도 좋았다. 그래서 너의 뒷모습이 노을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를 밟았다. 거리를 좁히지 않으려고 신경 쓰며 걸었는데도 곧 네게 발각되었다.

"이럴 줄 알았어."

벤치에 앉아 날 주시하던 너의 말에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 레슨 안 가려고."

"오늘?"

"응. 대신 한강이나 가자."

네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너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여기서 멀지 않은 한강에 갔다. 이름 모를 풀은 빽빽하게 자랐고, 그늘은 없고, 자전거가 가득했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물의 비릿한 냄새와 이름 모를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소음에 가까운 말소리를 배경 삼아 있었다.

무슨 말을 나누었더라. 그게 중요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날씨는 좋았고, 손끝은 계속 닿아 있었고, 우리는 서로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웃었다. 나는 자꾸만 입 안이 말라 입술을 핥았고, 너는 이따금 고개를 푹 숙였다. 벤치에 앉아 쭉 뻗은 발끝은 땅을 툭툭 건드려 팠고, 거기엔 무게가 거의 없었다.

"영현아."

"응."

"나 할 말 있는데, 말로는 못 하겠어."

어느새 너는 윤슬이 넘실대는 강의 어느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너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어서 너의 시선이 닿는 곳을 찾았다. 푸른 물결 위 금빛 태양의 반사판이었다. 아름다운 광경마저 너에게 댈 것은 아니라서, 나는 금방 눈을 떼고 네 옆모습을 응시했다.

"그러면 편지를 써."

"편지? 은근히 낭만적이다 너."

의외라는 말에 나는 그럴 수 밖에 없는 편견을 인정했다.

"그럼 너도 써줄래?"

"......."

"우리 둘 다 하고 싶은 말 있잖아."

네가 웃었다. 빤히 바라보던 옆모습이 아니라,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너의 얼굴선을 따라 햇볕이 강하게 비추었다. 까맣지 않은 선은 붉고, 금색이고, 환상 같았다.

"그리고 여기 와서 같이 읽어보자. 그러면 나 용기 낼 수 있을 거 같아."

항상 용기 내는 건 너였다. 누구보다 연약해 보이지만 가장 강한 너였다. 이은재의 말에 나는 손끝이 닿았던 네 손을 다시 잡아 깍지꼈다.

"그래, 그러자 그럼."

스물의 나는 그래도 되는 나이였다. 네 손을 잡고 놓지 않을 수 있다는 적당한 치기어림이 있었고, 내일 보자는 문자 하나에 정말 날 보러 나온 널 너무 사랑해도 되는 나이였다.


피사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