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오랜만이군.”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광채가 남성의 뒤에 덮였다. 사실, 형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남성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대신, 남성의 낮은 목소리만이 온 사방을 덮으며 울려 퍼졌다. 동굴에라도 들어가 있는 것인 양, 넓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난 당신을 몰라요. 만난 적도 없어요. 오랜만이라고 하지 마세요.”

 

 검은 도토리가 뒷걸음질 쳤다. 부른 건 다람인데, 웬 이상한 남성이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다람 씨 도대체 어디 갔어요, 하고 도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성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요망하고, 문란한 검은 도토리. 하얀 다람쥐를 홀린 버릇 없는 도토리. 붉은 눈을 한 까마귀를 유혹한 더러운 도토리. 내 소유에 손을 대다니, 정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군.”

 “저는 그런 적 없어요! 다람 씨는 날 좋아한단 말이에요. 다람 씨가 날 얼마나 아껴주고 사랑해주는데…… 평범한 데이트라곤, 소개팅을 했던 날과 기묘한 15일, 단 이틀뿐이었지만, 그래도 나를 좋아하는 멋진 다람쥐란 말이에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붉은 눈을 한 까마귀 같은 건 몰라요.”

 

 황금빛 한가운데로 도토리가 날아올랐다. 통, 하고 튀어 오른 검은 도토리는 이내 픽, 쓰러지고 말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성은 안타깝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내 말에 흥분하여 주제를 모르고 달려드는 모습 또한 검은 도토리가 경솔하다는 걸 잘 나타내준다네. 자네는 한 참 멀었어.”

 “난 존댓말 쓰는데, 당신만 반말 쓰지 마요! 자꾸 그러면, 나도 반말할 거야, 금빛 멍청이야!”

 

 도토리는 빛을 향해 몇 번이고 날아올랐지만, 남성에게 도달할 수 없었다. 

 검은 밤하늘에는 여전히 악투르스와 스피카와 데네볼라가 총명히 빛을 밝히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남성이 거느리는 황금빛이 세상을 드리우고 있었다. 

 도토리는 힘을 잃고 그 앞에 고꾸라졌다. 남성은 가만히 도토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토리가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고, 애처로운 눈빛의 검은 도토리와 황금빛의 남성의 눈이 마주쳤다. 도토리는 그때를 노려 지금껏 시도했던 도약 중에서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날아올랐다.

 

 “호오. 이제 보니, 아주 대단한 도토리로군.”

 

 남성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고, 도토리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두 눈을 멀게 하는 아득한 빛에 휩싸여 꿀꺽 삼켜졌다. 도토리의 비명이 들렸다.

 

 “아주 맛있는 식사가 되겠어.”

 

 검은 도토리를 삼켜버린 황금빛이 점점 검게 물들었다.

 

 

...

 

 

 일을 마친 대령은 로코코 시대의 문양이 그려진 의자에서 일어났다.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최면을 거는 일이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이번에도 성공적이었다. 

 대령은 자신의 백금발을 만지작거렸다. 검은 도토리는 생각보다 힘겨운 상대였다. 힘을 보충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 무언가. 먹을 만한 것 말이다.

 그때, 누군가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나.”

 

 대령이 대답하자마자 천천히 문이 열렸다.

 

 “제2행성, 098133 로마노프입니다.”

 

 붉은 눈의 까마귀가 들어오자 대령의 얼굴에 옅은 빛이 돌았다. 로마노프는 건실하고 빈틈없는 몸을 자랑하는 검은색 제복 차림이었다. 어깨에 내린 붉은 술이 제2행성 관리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대령은 그를 손짓으로 불렀다. 로마노프의 붉은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로마노프가 다가오자 대령은 거침없이 그를 소파 위에 밀어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그 위에 올라타 로마노프의 단정한 옷매무새를 거칠게 풀어버렸다. 멋들어진 해군 중위 모자가 힘없이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고 하의마저 벗겨 던져버렸다. 환각술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으나 로마노프는 몸을 덜덜 떨었다.

 

 “떨 것 없어, 로마노프 중위. 평소대로 하면 된다네. 평소대로.”

 “대령……님.”

 

 싱긋 웃는 대령의 눈은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웠다. 대령은 로마노프의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옷을 벗기게 했다. 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던 로마노프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대령의 하얗고 보드라운 목선과 아름다운 가슴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절대자의 음성이 귓가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럴 때는 이름으로 불러주면 안 되겠나, 로마노프? 조금 전에 검은 도토리의 꿈속에서 그를 삼켰다네. 자네가 사랑하던 검은 도토리 말이야. 도토리에게 하던 것처럼 내 이름을 불러주게나, 로마노프. 아프게 하지 않을 테니.”

 

 로마노프는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를 느끼며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백금발과 흰 피부를 가진, 어여쁜 남성이 있었다. 로마노프는 대령의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레빈.”

 

 레빈이 빙긋 웃으며 붉은 눈의 까마귀를 한입에 삼켜버렸다.

 

 

...

 

 

 엄청난 속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점점 가속도가 붙어 도대체 시속 몇 킬로미터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운전면허를 따던 스무 살의 겨울을 떠올렸다.

 

 “다람 학생은 액셀러레이터를 잘 못 밟네요. 그러니까, 속력을 잘 못 낸다는 말입니다. 면허를 따려면 속력을 내야 해요. 도로 주행에서는 적어도 시속 60킬로미터 이상으로 운전을 해야 하니까요. 다람 학생, 놀이기구 같은 것, 잘 못 탑니까?”

 

 맨투맨 레슨이었던가. 아무튼, 나를 가르치던 운전면허 학원 선생이 나에게 물었다. 녹색 모자를 쓴 선생은 그 나이 또래에서는 보기 드문 채식주의자였다. 녹색 모자 정 가운데에 ‘Save Our Planet’이라는 영문자가 적혀 있었다. 

 나는 ‘Save’라는 문자에 눈을 두고서(선생은 나보다 키가 작았기에 모자가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이었다) 대답했다.

 

 “그…… 어…… 네. 잘 못 타는 편이기도 아니기도 그렇기도 하기도 합니다.”

 

 대답을 애매하게 넘기려다 실패한 나는 멋쩍게 웃음 지었다. 뒷좌석에 앉은 학생이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이 방긋방긋 웃었다.

 

 “에이, 그럴 수도 있죠, 뭐. 다람 학생처럼 키도 크고, 잘생기고 몸도 좋은 사람이 그런 사소한 걸 무서워할 수도 있는 법이죠. 와, 이럴 때면 세상이 참 공평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선생님, 다람 씨는 그런 면에서도 매력적이라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대답하던 선생에게 뒷좌석에 앉은 학생이 대꾸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이번에도 도로주행 시험을 다시 신청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이 다시 한번 싱긋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예 오늘 연습을 해 봅시다. 빠른 속도를 무서워하지 않게 될 때까지 연습하는 겁니다, 다람 학생!”

 “예…… 예?”

 “자, 자. 정신 똑바로 차리시고, 자, 갑니다!”

 “자, 잠깐. 잠깐만요……!”

 

 내 오른발 위에 선생의 왼발이 얹어졌고 운전석의 속도기가 30, 40, 50, 60을 넘어가더니 이윽고 130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SAVE!

 

 “눈 뜨셔야죠, 다람 학생! 운전자가 눈을 감으면 어떡합니까?”

 


 번뜩 눈을 떴다.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 날개를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속력을 낮추기 위해 몸부림치는 하얀 다람쥐는 검은 눈을 부릅뜨고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인생, 아니, 다람쥐생에서는 훈련이 기적을 만들기도 하나 보다. 땅으로 곤두박질치던 하얀 다람쥐가 가슴을 넓게 펴더니 곡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그러자마자 두 발로 꽉 움켜쥐고 있던 도리가 펑, 하고 터지더니 검은 도토리로 변했다. 나는 손을 뻗어 검은 도토리를 잡아 입에 넣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눈 패딩을 한 손으로 낚아챘다. 

 잠시 숨을 고르고, 하얗게 새어버린 런던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폐허가 된 런던 위에 조그마한 집 하나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

 

 

 “하아, 읏, 잠깐……”

 

 로마노프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가슴을 탐하는 백금발의 남성, 레빈은 정신없이 로마노프의 몸을 맛보고 있었다. 대령과 관계를 가졌다는 걸 들킨다면 동료들에게 질타를 받을 게 뻔했다. 안 그래도 대령의 총애를 받는다고 그들에게 소외당한 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자신의 생애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음이 틀림없었으니까. 로마노프는 손을 뻗어 대령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몇 분간 키스를 나누던 두 사람은 가쁘고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대령의 붉게 물든 두 뺨이 몹시 사랑스러웠지만 검은 도토리만큼은 아니었다. 로마노프는 대령의 몸을 애무하며 도토리를 생각했다.

 

 “다른 생각 하면 이대로 죽여 버릴 거라네, 로마노프.”

 “레빈.”

 

 평소에는 모든 이의 절대자로 존재하는 대령이 로마노프의 몸에 홀려 신음을 내뱉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로마노프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레빈의 흰 살갗은 그야말로 절경이었고,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붉은 눈의 까마귀가 신음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레빈, 하아, 대령님.”

 “네 생명이 힘을 다할 때까지 너를 탐하고 즐길 것이야, 로마노프.”

 

 레빈이 로마노프의 입술을 깨물자 로마노프의 눈동자처럼 붉은 피가 흘러나왔고, 레빈은 새빨간 액체를 빨아먹었다. 대령은 자신의 힘이 점점 돌아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

 

 

 오랜만에 연구를 마친 세라는 와이파이가 연결되지 않아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몇 년간 연구에만 착수했던 세라는 휴대폰을 바꿀 시간이 없었는지 구식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다. 거의 10년 전에 나온 모델 아니야, 그거? 눈으로만 그렇게 묻던 마르크는 세라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난 이해가 안 돼.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인터넷 연결에 집착하는 거지? 세라 너도 말이야. 넌 열다섯에 런던으로 왔으니 한국과 런던에서 산 날이 거의 비슷하면서 말이야.”

 “인터넷은 무조건 빨라야 한다고, 마르크. 이건 저주야. 이건 저주라고!”

 

 런던 상공에 연구실이 둥둥 떠 있는 것보다 와이파이가 연결되지 않는 게 저주라니. 마르크는 세라에게 어이없다는 눈길을 보냈다.

 연구실에는 흰 가운과 낡은 티셔츠 몇 개가 있었고, 작은 단칸방인 연구실이 집을 대신했고, 먹을 양식은 없었으나 세라가 개발한 식량대체 알약이 음식을 대신했으므로 의식주가 모두 갖춰진 것은 맞았다. 연구실에 딸린 작은 화장실도 있었으니 배변을 하는 데에도 문제는 없었다. 물론 땅으로 이어지지 않은 그들의 분비물이 어디로 떨어지는지는 몰랐지만……. 

 마르크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우리 외엔 지구상에 아무도 없는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람. 그렇게 생각하며 활짝 웃었다. 더러운 생각은 하지 말자. 마르크는 방긋 웃음 지었다.

 그런데, 그 순간,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크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 곁으로 다가갔고, 세라는 여전히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지? 비 오는 소린가?”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 아냐?”

 

 창문 곁을 기웃거리는 마르크에게 세라가 대답했다. 마르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새하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산해 본 결과, 런던에서 솟아오른 연구실은 적어도 천 미터 상공에 있을 게 틀림없었다. 비가 오는 소리이거나, 바위, 혹은 우박이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이 근처에 있을 리가 없었다. 천 미터 상공을 날아오르는 인간이 존재할 리가. 

 그러나 마르크의 예상을 뛰어넘고서, 이번에는 두드리는 소리가 아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시다면 문 좀 열어주세요. 사람이 있습니다……”

 

 마르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세라의 목소린가. 아니었다. 와이파이 연결이 되길 간절히 바라던 세라는 느린 인터넷 때문에 지쳤는지 잠에 빠져 있었고, 그는 현재 남성의 몸이 아닌 여성의 몸을 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마르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열었다.

 제발 아니기를. 잘못 들은 것이기를, 하고 바라던 마르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틀에 턱, 하고 누군가의 손이 놓였고, 그 때문에 마르크는 심장이 조여지는 감각을 느꼈다. 

 귀신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나 귀신 무서워하나 봐. 공포 영화에나 나올 장면을 직접 체험하다니! 

 마르크는 덜덜 떨리는 가슴을 안고서 창문에 바짝 다가섰다.

 

 “아, 다행이다. 사람이 있었네요. 갑자기 방문하게 되어 죄송하지만,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하하, 하……”

 

 창밖에는 서울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하얀 다람쥐가 겸연쩍게 웃으며 서 있었다. 

 게다가, 날개를 달고서.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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