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알바 천국은 있었다 3

-네, 말씀하세요.


-아까 봤던 금고는. 쉿. 비밀.

 

그가 쭈글쭈글한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 가운데를 꾹 눌렀다.

 

-네. 비밀.

 

 도희는 그가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여 보였다. 벽장 따위엔 관심이 전혀 없다고 그저 시급만 정확히 주면 된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비밀이란 지켜달라고 말하면 오히려 역효과라고 생각했다. 좀 전까지 특별한 관심이 없었는데도 그가 쉿, 비밀이라고 하는 순간 괜히 의심스럽긴 했으니까. 그렇다고 뭐 딱히 말할 때도 없지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차에서 내려 곧바로 집으로 가려다 되돌아 나왔다.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하긴 애매한 감정에 휘몰아쳤다. 미친 듯이 일을 마치고 쪽문으로 반 쪼가리도 안되는 석양빛과 마주했을 때,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슬픔이라고 불러도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럴 때 확 당기는 것은 역시 박카스였다.

 


 도희는 좌우를 살피며 맞은편 약국으로 길을 건너려고 했다.

 

끼익.

언제 날아왔는지 익숙한 자전거가 도희 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흠칫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굿 이브닝?

 

-놀랬잖아요.

 

도희가 앙칼지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나 원 참, 간이 생기다 말았어요. 그만 일에 다 놀라게?


-가던 길 가시라고요.


-지금 어디 가는지 내가 알아맞히면?

 

-정말 어이 상실.

 

-약국 가는 거 맞쥬. 박카스 사러.


 -아니거든요.

 

-아니면 마슈. 내가 보기엔 딱 약국 가는 거 맞는데?

 

-아. 짜증 나. 뭘 안다고, 진짜.

 

-킬킬킬. 박카스를 한 박스 사다 놓고 마시쇼. 딱 한 병이 뭐요. 귀찮게스리. 그럼.

 

확, 저걸 그냥. 도희는 차마 그 말을 밖으로 뱉지는 못했다. 그냥 엉거주춤 자라목을 하고 엉겁결에 묵례를 했을 뿐.

 

뭔 힘이 남아도는지 자전거 안장에서 엉덩이를 뗐다 붙였다 직성으로 가지않았다. 별종 같으니라고. 확, 저걸 그냥. 냅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싶어도 왠지 자전거 뒤꽁무늬가 도희의 마음을 약하게 했다.

 

저딴 자전거는 아마도 누가 버린다고 주워가지도 않을 정도였다. 어쩌면 알 수 없는 놈이라 남이 내놓은 것을 주워서 탈 수도 있었다. 평소에 워낙 도깨비 같은 모습만 봐서 그런가.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거지 발상 같은. 도희는 생각나는 대로 욕을 퍼댔다. 다만 밖으로 소리를 내진 않았다. 백수 주제에 계속 도희 앞에 수시로 나타나 신경을 건드린다고 툴툴거렸다. 그런데 이걸 어째? 기안이 했던 말은 빙고였다. 도희는 사실 약국에 가는 길도 맞고 박카스를 사려고 가는 것도 맞다. 다 맞다. 어쩌라고.

 


 약사는 노을을 등지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대체로 이 시간엔 한가한 것 같았다. 약국 문은 도희가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알람이 먼저 울렸다. 밖에서도 훤히 내다보이기 때문에 한눈에도 누가 오는지 가는지 다 알 수 있도록 출입구 정면에 마치 오래된 정물화처럼 그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박카스 한 병 주세요.


-오늘 엄청 피곤해 보이네?


-네. 좀.


-몇 군데 뛰었구나? 맞지?


-네, 두 군데 했어요.


-그럼 피곤하고말고. 이거 한 알 같이 먹어봐.


-뭔데요?


-아로나민 골드.


-아뇨. 됐어요. 박카스만 마셔도 힘이 솟아요.


-피로가 쌓이는 거 좋지 않아. 바로바로 풀어줘야지. 같이 먹어봐. 훨씬 빨리 풀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이야. 박카스 매일 마시는 건 좋지 않아.


-네. 이상하게 일 마치고 나면 허전해서요.


-그러다 박카스 마시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할 수도 있어, 그건 벌써 중독 증세지. 증상이 심해지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구토 증상도 일어나. 그러기 전에 줄여봐.


 -네. 그럴게요. 이제 한결 나아졌어요.


-어휴. 그건 일시적일 수도 있어. 어서 가서 쉬는 게 최고야.


-네. 그래도 오늘은 박카스 한 박스 살래요. 저한테 주려고요. 저, 오늘 무지 힘들었어요. 아까 낮에 좀 놀랬더니...


 -무슨 일로?


-나중에요. 저 갈게요.


-그래. 알바 안 하는 날, 생맥주나 한잔해. 잘 가.


-낼 또 올 거예요. 눈물 사러요.


-그래. 잘가.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따스했다. 목소리를 색깔로 그릴 수 있다면 인디언 핑크빛처럼 파스텔톤이었다. 도희는 어쩜 지친 몸을 이끌고 그의 따스한 저 음성을 듣고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약사는 도희 모르게 박카스를 비닐봉지에 덤으로 아로나민 골드 한 통을 슬쩍 밀어 넣었다. 도희도 더는 거절하지 않고 모른 척, 그대로 받아 돌아섰다.

 

박카스를 사 들고 천천히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투다리 빨간 간판이 따스하게 반짝였다. 뜨거운 우동 한 그릇 먹고 가렴. 다정한 목소리로 도희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 저쯤서 동네 책방의 초록빛 간판이 반짝거렸다. 도희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곧바로 원룸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언젠가 서점에서 살까 말까 수없이 망설이다 다시 제자리에 꽂아뒀던 책에서 'green is for sorrow'란 문장이 가슴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김 숨은 왜, 초록을 슬프다고 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던 날이었다. 그때 눈 딱 감고 그 책을 샀어야 했었어. 그래서 초록의 비밀을 알아내야 했었는데...

 

 

sorrow.

저 어휘만 보면 바로 생각나는 얼굴 없는 가수가 생각났다. 그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들었을 때. 얼핏 들으면 여성일 수도 있다는 착각을 들게 했다. 앨범의 제목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구입하려고 망설였던 그 엘피판도 초록빛이었으니까. 초록빛은 정말 슬픔, 비애를 대신하는 색깔일까.

 

같은 이유로 도희는 결국 둘 다 사지 않았다. 그냥 구경만 했다. 책도 서점에 가서 몇 번인가 뒤적여서 대충 스캔만 뜨고 거기서 몇 시간을 서서 읽었다. 돌아오는 길에 레코드사에서 흘러나오는 ‘sorrow’라는 곡을 끝까지 듣곤 했다.

 

도희는 언제부턴가 이상한 계산법을 터득했다. 뭔가를 사려고 손에 쥐었다가 아주 빠르게 시급으로 환산했고 방금 사려던 것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돌아섰다. 아주 냉정하게. 그때 그 두꺼운 책 속에는 도희가 좋아하는 열한 명의 작가들 글이 한 권에 몽땅 실린 책이었다. 거기다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까지 한 금박무늬 책.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골목 어귀를 돌아서면 자판 위에 펄럭이는 파라솔 하나로 덮은 한 장에 삼천 원씩 하는 팬티를 고를 때에도 색깔 별로 골랐다간 몇 시간 아르바이트비가 날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하늘색 팬티 한 장만 달랑 사서 들어온 적도 있었다.

 

오른편 주차장에는 후줄근한 낯익은 자전거가 비뚜름하게 서 있었다. 도희는 자전거에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자전거의 원래 색깔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루주가 지워져 버린 늙은 여자의 입술처럼. 초록빛 테두리가 희미하게 녹이 슨 바퀴 위에 흔적을 조금 남겨뒀을 뿐. 좀 전에 기안을 싣고 덜덜덜 달리던 것보다 더 초라하게 보였다.

 

도희는 사 들고 온 박카스 봉지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피로가 다시 엄습해왔다. 띠리릭. 늘 누르는 비밀번호가 에러가 났다. 그건 극도로 피곤하다는 것을 대신 말해주는 것이었다. 다시 비번을 천천히 눌렀다. 낮 동안 갇혀있던 실내의 후끈한 공기가 훅 밀려 나왔다.

 

딸깍.

문을 닫고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모든 게 귀찮았다. 이대로 쓰러져 며칠 내내 잠만 자고 일어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낼 오전에 또 어김없이 출근해야 했다. 자정까지 보내야 할 마지막 과제는 아무래도 제출 기한을 넘길 것 같았다. 몸은 바닥에 쓰러져 있고 정신은 이미 책상 앞에 앉아 과제를 쓰는 것 같았다. 


어쩌면 좋지? 도희는 비실비실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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