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상비약 정도는 있어야겠더라. 지금은 너도 있으니까."

"약골이라고 놀리는 거예요?"

도현이 하는 말에 상우는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곤란한 얼굴에 도현도 짓궂게 굴기를 그만뒀다. "농담이었어요." 상우가 자기 뒷머리를 매만졌다.

버스를 기다려 타기엔 애매한 거리였기에 그들은 해안을 끼고 난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오후의 햇볕이 따가워 건물이든 나무든 그늘진 곳을 찾아 따라 걸었다. 도현은 휴대용 선풍기를 들어 여름 오후의 더위를 이겨내려 애쓰고 있었다. 손풍기가 애앵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상우는 그마저도 없었다.

상우는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반바지에 반소매 티를 입고 터덜터덜 걸었다. 도현은 상우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까지 다니다 그만뒀다는 것도 알았고 그의 연령이 그리 낮지는 않다는 것도 알았지만 지금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상우가 양복을 차려입고 도시에서 그럴듯한 직장을 다녔다는 걸 떠올리기 쉽지 않았다. 그보다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평생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았다는 쪽이 훨씬 믿을만한 사연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다가 상우가 걸음을 멈춘 걸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도현은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고개를 향하고 있었기에 상우가 무얼 본 건지 정확하게 보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도현은 상우가 길가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멈춰 섰다는 걸 유추했다. 상우는 차가 오는지 살피곤 통행량이 별로 없는 도로를 가로질러 현수막이 걸린 앞에 가 섰다. 도현도 뒤를 따랐다. 

현수막은 가게를 홍보하거나 지자체에서 주민들에게 무언가를 알리거나 안전 운전 캠페인 카피가 적혀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중간 부분이 찢어져 있어서 정확한 전체 문구가 보이진 않았지만 무언가에 반대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색상과 글씨체부터 분란의 분위기가 풍겼다. 찢어진 현수막 천이 바람에 뱀 혓바닥처럼 정신없이 팔락거리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찢어졌나 봐요."

"글쎄. 내가 보기엔 누가 고의로 훼손한 것 같은데."

악의를 가정한 말이었다. 상우는 아예 바로 앞까지 다가가 찢겨나간 현수막을 자세히 살폈다. 현수막은 칼로 자르거나 한 게 아니라 그냥 찢어진 거라 살펴본다고 해서 누가 힘으로 찢어버린 건지 아니면 바람에 찢긴 건지 구별할 수는 없었다. 상우가 현수막의 찢어진 부분을 원래 형태를 복원하듯 맞추어 들었기 때문에 도현도 상우의 팔 너머로 현수막을 만든 이들이 무얼 반대한다는 건지 읽을 수 있었다. 

"관광지로 개발하면 보통 좋아하지 않아요? 전보다 사람들도 많이 오고 발전도 된다고 특구니 뭐니 유치하려고 경쟁도 하는데요."

"사람마다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난개발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거든."

"……이 동네는 뭘 해도 난개발이라곤 못할 것 같은데요."

상우가 현수막에서 손을 떼고 픽 웃었다. 부피가 있는 존재를 떠밀듯 부는 바닷바람에 휘말려 사라질 것 같은 힘 빠진 웃음이었다.

"뭐 작은 어촌이니까 그런 면도 있지. 개발에 찬성하는 주민들도 많아."

"이쪽 상인들이나 땅 주인들은 거의 그럴 것 같아요."

"보통은 그렇지."

상우는 지금까지 걸어온 것처럼 유유자적 다시 걷기 시작했다. 허허벌판이라 불러 마땅한 곳을 지나 그들은 이제 어느 정도 번화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중간에 내륙 쪽을 지나는 길을 거쳐 지금은 다시 바다가 가까워졌다. 그들이 지나온 곳과 비교하자면 상가도 많고 차도 사람도 상대적으로 붐비는 곳이었다. 주중의 낮인데도 놀러 온 걸로 보이는 차나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한쪽으로 길게 바다가 보이는 도롯가에는 크지 않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높은 건물이 겨우 3층 정도라 스카이라인은 나지막했고 대부분의 건물들이 낡은 티를 내고 있었다. 도로와 붙어있는 새 건물들은 거의 횟집이었다. 파란 배경에 빨간 도미가 펄떡이는 커다란 간판들 아래로 네모난 수조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잠깐 어디 좀 들렀다가 가자."

상우에게 볼일이 추가로 생긴 모양이었다. 상우는 도현을 데리고 큰 도로를 벗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간판을 단 상가가 늘어선 곳으로 접어든 상우는 그중 한 건물로 쑥 들어가더니 좁은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익숙하게 철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사무실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던 직원이 방문자의 등장에 고개를 들었다. 상우를 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같은 걸로 드려요? 모카골드 아님 블랙 있는데."

도현에게 하는 말이었다.

"블랙으로 주세요."

"같은 거네. 덥죠? 잠시만 기다려요."

상우는 안내도 필요 없다는 것처럼 한쪽에 있는 소파에 가 앉았다. 에어컨을 틀어둔 실내에 들어오니 좀 살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한동안 몸의 열이 식지 않아 도현은 휴대용 선풍기 바람을 얼굴로 하고 틀어두었다. 걸을 때는 몰랐는데 앉으니 갑자기 훅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상우가 티셔츠 목 부분을 잡고 펄럭이는데 직원이 손잡이가 달린 사기 컵에 커피를 타왔다. 안에는 얼음이 들어있었다. 떨어진 곳에 있던 선풍기를 끌어와 틀어주기까지 하는 친절을 베푸는 게 그가 보기에도 두 사람이 상당히 더워 보인 것 같았다. 

"바로 올라오신대요."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현은 검고 맑은 커피 안에 떠 있는 얼음을 보다가 상우를 보았다. 상우는 벌써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하는 말이나 상우의 태도를 보아하니 여기 자주 와본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일인지는 짐작이 안 갔다. 상우가 이 지역 상인 조합과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아는 사람을 보러 온 거라고 해야겠지만 도통 시원히 이해 가는 일은 아니었다. 

도현은 얼음 하나를 입에 물고 불편할 정도로 푹신한 소파에 가능한 피부가 많이 닿지 않도록 앉아서 체온이 내려가길 기다렸다. 다행히 상우가 만나러 온 사람이 등장할 때쯤에는 빨갛게 달아올랐던 도현의 뺨이 조금이나마 식은 후였다.

"상우야! 잘 지냈냐."

현관으로 들어온 까무잡잡한 남자가 반가운 얼굴로 바로 상우를 향해 다가왔다. 상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합장님 오래간만입니다."

"아, 그 호칭 참 간지럽단 말야. 어쩐 일이야? 또 무슨 일 생겼나?"

"얼굴도 볼 겸 해서 와봤어요. 별일 없으셨죠?"

"하긴 저번 회의 이후론 잠잠했지. 주민 투표 이후론 뭐 눈에 띄는 게 없더라고. 자기들 입맛대로 시킨 환경조사다 뭐다 그렇게 사람들 들쑤시며 극성이더니 요즘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조용해. 자아, 자, 앉자고. 앉아."

소파에 묻히듯 푹 주저앉은 조합장이 도현을 흥미로운 눈으로 보았다. 쿠션감 푹신한 소파가 그의 몸을 거의 삼키려는 것 같았다.

"여기 이 잘생긴 친구는 누군가? 상우 군에게 동생이 있었던가?"

친족으로 보일 만큼 닮은 점은 전혀 없었지만 조합장은 그렇게 말했다. 상우가 설명했고 도현은 조용히 들었다.

"그냥 아는 동생입니다. 같이 나왔다가 저 따라서 온 거예요."

도현은 거의 다 녹아 사라진 얼음을 입 안 한쪽 구석에 몰아넣어 놓고 그냥 미소 지었다. 소개는 그걸로 족했던 모양인지 화제가 바로 넘어갔다. 

조합장이란 사람은 피부가 불그스름하고 혈기가 넘치는 사람으로, 그대로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수다를 떠느라 30분이 넘게 시간을 잡아먹었다. 도현은 상우의 옆에 앉아서 어쩌다 보니 쓰게 된 조합장이라는 감투가 익숙하지 않다는 남자의 인생의 희로애락을 장황하게 들으며 그닥 관심도 없는 그의 시시콜콜한 얘기를 잔뜩 들어야 했다. 도현은 그가 매번 이런 식으로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일 거란 생각을 했다. 

굉장한 수다쟁이였다. 그러나 상우는 매번 굉장히 흥미롭고 놀라운 이야기라는 것처럼 리액션을 했다. 상우의 반응이 시너지를 일으켜 남자의 수다를 더욱 늘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현에겐 안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체온이 완전히 식을 정도로 눌러앉아 있는 건 도움이 됐다.

앞뒤 없는 수다를 반강제로 들으면서 새로 알게 된 것도 있었다. 개발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해 결집하고 조직을 이루도록 하는 일에 상우의 공이 혁혁하다고 했다. 

상우가 연신 손사래를 치는데도 꿋꿋하게 말을 이어간 조합장의 말에 의하자면 상우는 외지인이라 사람들을 설득은커녕 말도 잘 들어주지 않는데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가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는 간절한 모습에 설득된 사람들이 많았고 그중 하나가 조합장 자신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렇게 주민들을 모아 단체를 조직하고 의사를 표명해나가는데 상우가 정말 혁혁한 공을 세웠다며 조합장이란 남자는 몇 차례나 대단한 청년이라 상우를 추켜세웠다. 

어느 정도는 과장 같았지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활약에 힘입어 그 뒤로 쭉 개발사와 힘겨루기를 하다 지금은 반대파가 사실상 우세한 상황에서 소강상태라고도 했다. 도현은 그냥 그렇구나하고 들었다. 상우가 그렇게까지 관련되어 있다는 건 다소 신기한 일이긴 했다. 그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현수막이 훼손된 걸 봤습니다. 바람에 찢긴 건지 사람이 고의로 그런 건지는 얼핏 봐선 잘 모르겠더라고요."

"상우 네가 오는 길이라고 하면 그, 파출소 방향이지?"

"예. 그냥 철거를 목적으로 했거나 아니면 개인의 화풀이일 수도 있고……. 정확한 건 추측뿐이지만 일단은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요. 그대로 둬서는 흉물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장장 30분의 도입부 끝에 본래의 방문 목적이 나왔다. 반 시간의 대장정 끝에 겨우 나온 본론은 허무할 정도로 짧기 그지없었다. 얼음마저 녹아내려 밍밍해진 커피가 테이블 위를 덮은 유리에 물 자국만 만들고 있었다. 상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현도 어중간히 인사를 하고 그림자처럼 상우를 따라 상인조합 사무실을 나왔다. 에어컨으로 적당히 온도를 조절하고 있던 실내에서 밖으로 나오자 벌써 습한 온기가 피부에 붙어왔다. 도현이 투덜거렸다.

"다음부턴 전화로 얘기하세요. 용건만 간단히요."

"아 좀 오래 걸렸지? 조합장 아저씨가 날 너무 좋아하신다니까."

"저도 형 좋아하지 않았으면 중간에 뛰쳐나갔을 거예요."

"에이 뭘 또 그 정도야. 그런데 생각한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해서 너 데려다주고 출근하면 꽤 빠듯하겠는데. 서두르자. 우리가 걷지 않으면 집까지 거리가 줄어들지 않으니까."

"그건 또 무슨 자기계발서 문구예요?"

"훌륭한 말이고, 또한 진실 아니냐."

상우는 아주 멋지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현은 딴지를 걸 기력마저 잃어버렸다. 상우는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가이드라도 되는 것처럼 도현에게 저 가게 주인은 박 모인데 어머니 때부터 여기서 장사를 해왔다든가 저 건물은 최근에 공사를 했는데 엉망인 배선 정리를 하느라 돈이 얼마가 들었다느니 하는 얘기를 해주었다. 도현이 그런 것들을 어떻게 다 아느냐 묻자 상우는 간단한 답을 주었다.

"저기 공사할 때 인력 사무소 통해서 내가 일하러 가서 직접 보고 들었거든. 퇴사하고 이쪽으로 진로를 나가볼까 하고 수업도 수료했는데 시험날 일이 생겨 빠지는 바람에 자격증은 못 땄지만. 참, 욕실이랑 마당의 수도도 내가 한 거야. 그럴듯하지? 혼자서 한 건 아니지만."

간단하진 않은가? 하지만 이해 가능한 설명이었다. 상우는 모자 가게에서 비싸지 않은 캡 모자를 하나 샀다. 구체적으로 무언가가 필요하다기보다는 그냥 기분을 내는 것 같았고, 그를 증명하듯 도현에게도 비슷한 모자를 하나 사주었다. 흡사한 디자인과 색상의 충동구매 물품을 하나씩 갖고 걸으며 시멘트의 비율이라든가 공사용으로 전기를 끌어오기 좋은 상황 같은 걸 얘기하다가 약국에 도착했다. 원래 목적이던 상비약까지 사서 돌아가는 길에 도현이 질문했다.

"형은 왜 개발 반대 같은 걸 해요? 아무리 그래도 보통은 그렇게까진 안 하잖아요. 형은 여기 오래 살았던 것도 아닐 텐데……."

상우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답을 꺼내려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기울어졌으나 위세는 꺾이지 않은 햇살이 시야를 괴롭히는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도현은 답답하게 막힌 구석이 없는 상우의 이목구비에 내려앉은 오후의 빛을 보았다. 상우가 가벼운 약국 봉지를 바스락거리며 말했다.

"그런 개발이 이루어지면 많은 것이 바뀌거든. 생각보다 더. 해안선이 달라지고 동네 모습도 알아볼 수 없게 바뀌니까 그냥 낯선 곳으로 변해버려. 난 그렇게 되는 걸 막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 이유로요? 상우 형은 여기가 엄청 마음에 들었나 봐요."

"나보다는 그 애가 마음에 들어 했지."

도현이 상우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그 애라고 하면……?"

상우는 입으론 웃는 것 같았는데 눈가는 웃음기가 없이 약간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자기가 한 말에 스스로 당황한 것 같았다. 

"전에 알던, 나랑 친하게 지내던… 아는 사람이 있었어. 한동안 본 일 없으니 넌 모르는 사람이야."

"그쪽도 친한 동생이에요?"

"아니. 아냐……. 너랑은 다르지. 동생도 아니고."

도현이 우스개로 던진 말에 상우가 급하게 부정의 말을 했다. 상우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상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 봐도 쓰게 웃는 표정이었다. 마주 보는 햇빛 때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어."

상우는 이번엔 말꼬리를 돌리는 것마저 잊어버린 것 같았다. 도현이 아스팔트를 데우는 오후의 햇볕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을 꺼냈다. 아주 크게 선심을 썼다.

"찬성하는 쪽도 많지 않아요? 개발한다고 하면 좋아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관심도 없고 심지어 오늘 한번 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런 걸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그냥 다른 얘기면 뭐든지 꺼낸 것에 불과했다. 두 사람이 모두 원하는 일이었기에 대화의 불판에 오른 화제가 다시 돌아갔다. 상우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야 당연히 그렇지. 마찰이 꽤 있었어. 그래도 이래저래 여길 지키려는 분들도 많아서 지금은 꽤 괜찮아. 점심 먹은 곳에서 본 김 사장님도 나처럼 개발을 막으려는 분이셔."

"아… 어쩐지 친해 보인다 했어요."

"그렇지? 동지애 같은 게 있거든. 내 경우엔 가까이 살다 보니 남들보다 자주 본다는 점도 있지만."

"뉴스 보면 싸우기도 하고 그러던데 형은 괜찮아요?"

"개발이 크게 되면 보상금 받고 떠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지금 그 사람들은 나를 엄청 욕하고 있지. 지금이 운동권 대학생들이 위장 취업하는 80년대인 줄 아느냐느니 외지인이 주민들 재산권 행사를 방해한다느니……. 그 사람들 입장에선 그럴 만도 해."

"애인이 여길 좋아했다는 불순한 의도로 개발 반대를 하니까요?"

결국 꺼내버리고야 말았다. 상우는 입을 다물었다. 수줍어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상우는 손을 들어 자신의 햇볕에 그을린 목 뒤를 매만졌다. 염치없다는 것 같기도 하고 낙심한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완전한 부정은 아니었다. 도현의 눈이 샐쭉해졌다.

"상우 형이 그런 로맨티스트인 줄은 몰랐네요. 사랑에 목숨 거는 타입이었다니. 영 안 어울려요."

"그건, 그런 건 아니야……."

이번엔 조금 당혹하며 부끄러운 듯한 기색이었다. 도현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제가 하루 이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코빼기도 안 비추고 형한테 애인이 있는지도 몰랐다니 이상하네요. 혹시 이미 헤어졌는데 형만 모르고 있는 건……?"

도현이 당황해 멈춰섰다. 어두운 대양을 누비는 심해 생물의 차가운 지느러미가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현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도현이 잘못한 거였다. 

하지만 도현이 우뚝 멈춰선 상우에게 다가가 잘못을 시인하고 미안하다며 사과하거나 빌거나 애교라도 떨며 상황을 수습하려는 어떠한 시도를 시작하기도 전에 상우가 하얗게 질린 얼굴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은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입꼬리를 당겨 올리려는 것 같았으나 위로 올라가진 않고 옆으로 힘주어 당겨지기만 했다. 있을 리 없는 그림자가 상우에게 짙게 드리워진 것 같았으나 상우는 그렇게 그냥 미소를 지었다. 조금 당황한 것처럼도 보였다.

"이러다 나 지각하겠다. 빨리 가자."

도현이 그를 본 이래로 상우가 처음으로 불행해 보였다. 도현은 후회했고 그보다는 불쾌해졌다. 상우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든 이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순간 도현은 자기 자신이 아주 싫어졌다.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해주기엔 지나치게 치졸한 감정이었다. 

도현은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닷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바람 속을 유영했다. 지느러미를 멈추면 하류로 떠내려가 버린다는 얘기처럼 새는 날개로 무거운 수류같은 바람을 저으며 허공에 떠 있었다. 새의 유선형 몸체를 떠받치는 것과 같은 바람이 도현의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기분이 엉망이었다.


그날 밤에도 도현은 언제나처럼 야심한 시간에 퇴근한 상우를 맞이했다. 도현이 살짝 눈치를 봤지만 상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이었다. 도현은 복잡한 기분이 되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않았다. 대신 준비한 것을 내밀었다. 상우가 말한 대로 야식이었다. 메뉴는 부침가루에 물과 계란을 넣고 맛살과 느타리버섯을 찢어 넣은 부침개였다. 기름 냄새를 맡은 상우가 바람같이 달려가 막걸리를 사 왔다.

"비 오는 날은 아니지만 부침개엔 막걸리지."

"아저씨도 아니고……."

도현의 딴지를 상우는 웃어넘겼다. 둘은 야식이 아니라 술안주가 된 손바닥만 하게 여러 장 구운 부침개에 더해 다음날 된장찌개에 들어갈 예정이던 애호박을 일부 희생해 애호박전까지 부쳐 먹었다. 

"된장찌개 끓일 때는 집된장이랑 밖에서 파는 된장 반반으로 해야 맛있거든요. 집된장 얻어왔으니 내일은 무조건 된장찌개에요."

"순두부찌개는?"

"설마 된장찌개에 두부가 들어가니까 순두부찌개랑 비슷하다는 생각한 거 아니죠?"

도현은 잠시 상우를 세상에서 제일가는 무식자를 보듯 바라보았다. 상우는 말이 없었다.

"저는 된장찌개에 두부 안 넣어요. 그냥 주는 대로 드세요."

모르면 입 다물라는 말처럼도 들렸다. 상우는 도현이가 아는 것도 너무 많고 음식 솜씨도 좋다고 칭찬을 늘어놓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상 앞에 얘기를 나누다 상을 치우고 자리를 펴 누웠다. 

불은 껐지만 완전한 암흑은 아니어서 도현은 상우를 힐끔거릴 수 있었다. 도현이 이렇게 상우와 나란히 누울 때면 종종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우가 방에 앉아있을 때 통이 넓은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햇볕에 덜 탄 허벅지를 보며 어떤 걸 느끼는지 상우가 안다면 이런 밤은 이어질 수 없을 터였다. 상우는 평온하게 느린 숨을 쉬었다. 도현은 아예 상우 쪽으로 돌아누웠다. 도현은 쉬이 잠들지 못하고 생각을 이어갔다. 

상우의 목소리는 좀 특이한 편이었다. 단순히 저음이라든가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었다. 목소리 자체가 거친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 귓바퀴를 긁는 것처럼 탁하게 갈라진 음성이 섞여서 나올 때가 있었다. 특히나 숨이 차도록 움직인 다음에는 비록 말하는 바가 공익광고 톤이거나 거기서 거기인 자기계발서 같은 소리라곤 해도 호흡이 섞여 살짝 갈라지는 소리가 야릇하게 섞여들곤 했던 것을 떠올리며 도현은 상우의 몸을 만지는 상상을 했다. 

밤이 되자 도현은 꿈을 꾸었다. 그들이 만약 모든 허위를 벗고 바닷속을 빙글빙글 춤추며 도는 한 쌍이라면 그때 상우는 어떤 목소리를 낼지 궁금했다. 상상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몸을 만지며 헐떡이는 신음을 뱉었다. 도현은 잠결에 인어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곳은 바다였다. 물의 압력이 고막을 짓눌렀고 해류가 피부 위를 술렁거렸다. 세상은 깊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흐릿했고 자신의 몸의 감각과 손에 닿는 거리에 있는 것만이 선명했다. 감각이 닿는 모든 곳이 푸른 빛깔이었다. 

도현이 있는 곳은 햇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해저 동굴 같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아 신비로운 곳이었다. 우묵한 곳마다 하나의 신비와 하나의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상우도 거기에 있었다. 바닷속은 상우와 똑 닮아있었다. 그래서 도현은 아무런 위험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도현은 상우와 깍지를 껴 손을 잡았다. 응달에 햇빛이 비쳐들어 어둠이 물러나는 것처럼 두려움이 사라졌다.

꿈속에서 상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꿈이었기에 도현은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모든 걸 알았다. 상우는 도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으나 말을 하지 못했다. 마법이나 저주가 분명했다. 현실적 제약이나 명확한 논거의 부재는 꿈꾸는 자의 확신으로 뭉개졌다. 적어도 꿈이 끝나기 전까지는 도현은 자신이 믿을 수 없는 걸 믿고 있을 수 없는 걸 본다는 걸 깨달을 수 없을 터였다.

다행히 그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도현은 상우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제 상우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도현뿐이었다. 상우도 도현과 함께하길 원하는 게 틀림없었다. 도현을 보는 눈빛과 마주 잡은 따뜻한 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현은 여러 가지를 말하고 싶었지만 말보단 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 바닷속에 빠져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았다. 수면 아래, 희망도 삶도 먼 곳에서 아주 오래 머물고 싶었다. 상우를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었고 더한 것도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겐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구체적인 기억을 잊을 터였다. 다만 자신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인지 만큼은 남았다. 도현에겐 그게 전부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두려웠으나 한편으론 가장 얕은 곳부터 깊은 곳까지 발각당하고 싶었다. 상우는 따뜻하고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도현 하나 정도는 충분히 머물 곳이 있으리라. 도현은 그런 꿈을 꿨다. 


그 이름만큼이나 여러모로 엄청난 외관을 하고 있는 명물식당에 도현이 또 가 있었다. 그것도 상우도 없이 도현 혼자였다. 저녁 시간인지라 일하러 나가 있으니 상우가 지금 여기에 없는 건 아주 당연한 인과였다. 

그렇다고 해서 도현이 해린과 노닥거렸다는 건 아니었다. 일단 그 시간엔 해린도 바빴다. 도현이 아니라 상우나 상우 할애비가 와도 해린에게 시간 낭비를 해달라 요청하기엔 양심에 찔릴 것이다. 저녁 시간 식당은 어느 곳이나 그렇듯 한가하게 놀아줄 여유 같은 건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현은 거기서 자신만큼이나 한가한 다른 사람과 남아도는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새벽이었으며 상우가 김 사장님이라 부르는 해린의 딸이었다.

"고무줄놀이하러 나갈래? 학교에서 배웠는데 믿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꽤 잘하는 편이거든."

도현의 새로운 동지는 숙제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도현만큼이나 이 시간을 지루해하고 있었으므로 도현의 몇 가지 단점을 참아주며 자신이 잘 돌봐주겠다는 태도를 취하곤 했다. 도현이 딱히 어른스럽지는 않은 것도 사실이었기에 별로 항의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리 어른스럽지 않다고는 해도 초등학생과 진심으로 대거리하기엔 너무 늙기도 했다.

"너희 엄마 허락받고 오면."

"별걸로 비싸게 구네 진짜."

초등학생의 언어생활에 이런 영향을 끼치는 게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황금시간대에 방영하는 드라마 탓일 가능성이 컸다. 아무튼 착한 아이인 새벽은 쪼르르 달려가 자신의 엄마에게 상황을 알렸다. 답변이 부정적이었던 모양이다. 분위기가 안 좋았다. 해린은 단호했으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도현 오빠 괴롭히지 마." 

"안에선 고무줄놀이 못하잖아!" 

"안에서 왜 못해?" 

그렇게 가게 한쪽 좌식 자리에 노란 장판 위 고무줄놀이판이 생겼다. 고무줄 고정1 남는 의자, 고무줄 고정2 도현. 아주 합리적이었다.

"어휴~ 아, 이렇게 잡아야지, 이렇게!" 

도현은 타박을 들으며 자신이 여기서 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고민에 빠져들었다. 대체로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는 신세는 고민이라는 걸 하기에 퍽 어울렸다. 새벽이 고무줄놀이에 질릴 때까지 도현은 고무줄을 묶어놓는 장대 겸 리액션 주크박스로 기능했다. 고무줄놀이를 할 때 부르는 노래도 배웠다.


도현은 다음날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엔 정말로 할 일이 없었고 상우도 없이 집에 혼자 있느니 초등학생이랑 맞춰서 노는 편이 훨씬 나았던 것이다. 게다가 새벽이도 심심한데 도현이 놀아주니 좋아했다. 도현은 약간 확신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그냥 좀 부려먹기 좋은 어리바리한 놈 정도로 여기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것도 좋아한다 취급해도 괜찮을 터였다. 무엇보다 도현이 심심한 탓이었다. 자원봉사 같은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전날에 해린이 얘기한 대로 오늘은 저녁 피크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갔다. 시간대를 잘못 맞췄는지 도현이 식당에 들어서니 안이 좀 소란했다. 손님 때문은 아니었다. 보아하니 식당에 햇빛 너무 들이치는 걸 막으려 전면 창에 블라인드를 새로 설치하고 있는 게 보였다. 주인 부부가 꽤 고군분투 중이었다. 급할 때면 그게 누구든 손 하나가 아쉬운 법이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도현은 꽤 만만했다.

"도현 학생! 여기 와서 이거 좀 잡아봐." 

"? 넹." 

"이야, 키가 커서 의자 안 올라가도 되네." 

그의 말대로 도현의 신장은 제법 쓸모가 있었다. 도현이 팔을 뻗어 레일을 잡아서 고정하고 그사이에 해린의 남편이 나사못을 박았다. 무사히 블라인드 설치를 완료한 해린의 남편이 의자에서 내려갔다. 갑자기 맡게 된 보조 일을 끝마친 도현도 몸을 돌리는 순간 쪼르륵 서서 올망졸망 올려다보는 세 가족과 시선이 딱 부딪혔다. 

아직 어린 새벽이야 그렇다고 해도 여기 가족들은 다들 작았다. 주방장이라 거의 안에만 있어서 평소엔 보기 힘들었던 해린의 남편은 동그란 얼굴에 순한 인상이었다. 웃는 얼굴이 새벽이랑 판박이라 앞에서 이상하게 웃음이 터질까 봐 도현은 애써 다른 생각을 해야 했다. 

해린의 남편은 도현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도현 덕분에 일을 쉽게 했다며 새벽이랑도 놀아줘서 고맙다고 공치사를 하더니 갑자기 주방으로 가서 도현에게 먹을 걸 마구 내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시간이라 아예 저녁상을 차렸다. 민어도 또 상에 올랐다. 이번엔 사골국물처럼 뽀얗게 우러난 민어탕이었다. 그릇에 담긴 일부분만으로도 생선의 어마어마한 크기가 짐작이 갔다. 작은 건 튀기고 큰 건 탕을 한 모양이었다. 물론 작다고 해도 상대적인 얘기지 자잘한 조기나 양미리 같은 걸 생각해 보면 그것도 굉장한 크기긴 했다.

민어탕을 먹으며 해린이 말했다.

"부레 회가 맛있는데 여기 오고 나선 못 먹어서 아쉬워."

"그런데 너무 말랐네." 

아저씨가 해준 바삭바삭한 연근 튀김에 감동하느라 도현은 그게 민어가 아니라 자기 얘기라는 걸 좀 뒤늦게 깨달았다. 살집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나잇살이 있을 연령도 아니기도 하고 벌크업을 한 것도 아니었다. 도현은 스스로 비만이 아닐 뿐 평범한 편이라 생각했지만 그가 보기엔 좀 달랐던 모양이다. 도현에게 좋아하는 음식이나 못 먹거나 꺼리는 음식이나 재료 같은 걸 묻다가 갑자기 도현의 입맛에 맞는 걸 만들어 줘야겠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곧바로 주방으로 뛰어들려다가 해린에게 한 소리 듣고 다시 앉았다. 

"진정하고 밥이나 먹어. 내일 해주면 되지." 

도현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이 집에 입양이 됐나 의심했다. 도현은 대체 여기서 자신이 뭐 하는 건가 고민했지만 어느새 상우의 퇴근 시간이 다 되도록 집에 안 돌아가고 식당 구석에서 새벽이랑 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손님 어떻게 해드릴까요?" 

"잘 모르겠는데……." 

"그럴 땐 '예쁘게 해주세요' 해야지. 미용실 안 가봤어?" 

"…예쁘게 해주세요." 

도현은 한참 시달렸다. 정말…… 한참이었다. 시간이 제법 흐른 후에 거울 좀 보자니까 새벽이는 거울이 없다고 대답했다. 어딘가 좀 미심쩍었으나 방법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도현이 가게 출입구 옆에 있는 거울 보러 가려는데 새벽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손님 정~말 잘 어울리세요." 

"근데 왜 거울을 못 보게 하는데?" 

"아냐 이뻐." 

애를 상대로 이겨서 뭘 한단 말인가. 도현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앉아서 기브앤테이크의 원칙에 충실하게 새벽의 머리를 묶여주기 시작했다. 물론 새벽의 주장을 따른 거였다. 확인을 끝까지 못 한 터라 기분이 좀 찝찝하긴 해도 열심히 빗질해서 새벽의 머리를 묶어주었다. 딱히 남의 머리를 묶어주거나 유심히 본적이 없어 그냥 뒤로 묶어주기만 했다. 새벽이 매의 눈으로 손거울을 들고 돌려가며 열심히 살폈다. 뭐야 거울 있잖아? 도현은 착잡해졌으나 그의 심정과 관계없이 곧 새벽의 판결이 내려졌다.

"도현 오빠 진짜 개손이구나? 괜찮아. 엄마가 열심히 하면 뭐든지 조금은 나아진댔어. 난 아빠한테 다시 해달라고하지 뭐. 혹시 실뜨기 할 줄 알아? 모르면 내가 가르쳐줄게." 

다 맞는 말인데 왜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다. 그때 식당 문을 열고 상우가 들어왔다. 상우가 일을 마치고 집에 갔다가 도현이 없으니 여기로 찾으러 온 것이었다. 새벽이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갔다.

"상우 삼촌!" 

"아이고 우리 공주님! 아직 안 자고 있었네?" 

확실히 어린이는 자야 할 시간이긴 했다. 상우가 애를 번쩍 들고 두 바퀴 돌았다. 돌고래 소리가 났다. 새벽은 오늘 본 중에 가장 활달한 모습이었다. 시간대를 생각하자면 과연 좋기만 한 일인가 싶었지만 새벽의 부모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새벽이를 위한 간이 놀이기구가 되었던 상우가 척 멈춰 섰다. 그리고 자신을 멀뚱히 보고 있는 도현과 딱 마주쳤다. 그러니까 도현이 양쪽 짝짝이로 빨강 분홍 방울로 묶고 분칠 당한 꼴로 있는 걸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갑자기 목격했다는 뜻이었다. 상우는 웃음을 참다가 거의 반쯤은 울었다. 도현의 섬세한 마음은 상처를 받았다. 새벽은 딴청을 피웠다. 마감을 하며 앉아있던 해린이 도현을 보고는 집에 그러고 갈 거냐며 안타까움 반 떨떠름함 반의 얼굴로 클렌징 티슈 주었다. 도현은 마침내 거울 보고 클렌징 티슈로 얼굴 닦다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용서 못 해……."

새벽이 양심에 찔렸는지 도현의 눈치를 보며 상우 뒤에 숨었다. 상우가 대신해서 변론을 시도했다.

"애가 그런 큽! 건데 뭘 진지하게, 크흑……."

"형은 조용히 해요."

"그럴 수도…… 크흐흡!"

상우는 정말 하나도 도움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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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 안에 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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