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스포주의(논컾)

*언젠가의 그분과 그분의 왕










오차없이 정갈하게 배열된 돌판 위를 가죽신을 신은 발이 두들겼다. 창문 틈 사이로 파고든 바람에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린 천이 펄럭였다. 시원하게 트인 높이의 공동에서, 햇빛을 받아 빛을 뿌리는 군석을 가진 진왕이 천과 천 사이를 손끝으로 훑으며 깊게 깊게, 안으로 향했다. 

드르륵, 마침내 가장 안쪽인 방을 향하는 마지막 문이 열렸다. 잠시 멈춘 가죽신 끝이 이내 턱을 넘어 공기를 가르며 닫히는 문에 모습을 감췄다.

옷자락을 휘감으며 몸가짐을 정돈한 진왕은 잠시 숨을 돌리듯 한숨을 내뱉었다. 한 손을 뻗어 닿은 향을 집어들어 익숙한 손길로 피어올리곤 향로에 조심스레 꽂은 그는 몸을 뒤로 물러 눈을 감았다. 질좋은 비단이 사르륵 흘러내리고, 소매 끝에 검은 실로 장식된 나비문양이 어두운 실내를 유일하게 밝히는 촛불에 비추어 살아 숨쉬었다. 금빛 속눈썹이 나긋나긋 위아래로 팔랑이고 하나로 묶여 쇄골 위로 드리워진 결좋은 금발이 향내음에 물씬 젖어들었다. 누군가를 그리듯, 경애하듯 향을 피워올린 진왕의 눈에선 애도의 뜻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저 속을 태우듯 향을 태워 오갈데 없는 마음을 풀어내는 행위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던 과거가 고스란히 남아 현재를 이루었다. 속내를 숨기고 늘상 웃는 얼굴을 짓던 치기어리고 광기에 찬 소년왕은 잔악한 손속을 갈고닦아 세상을 살아내었다. 피어올린 향 연기가 자욱하게 스민 그림을 덧그리듯 손끝으로 매만졌다. 무엇이든 해내야 했던 경험과 재주 좋은 손이 만들어낸 그림이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속내가 고스란히 반영된. 언제나 예외를 만들어내던 ‘그’가 노을빛에 잠겨 그림 속에서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같이 다니기 즐거워서, 안전하고 웃음이 끊이질 않아서, 성장하는 자신을 보며 그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듯이 웃던 그가 좋아서, 미련 넘치게도 끊어내질 못했다. 제 옆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항상 망가지고 무너지는 것을 제일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질질 끌다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마지막에 마지막에서, 끝에 끝에서도, 그는 왕을 위해 살았다. 자신을 위해 생을 바쳤다. 그 생을 쥐고 자신은 어땠던가. 눈 앞에서 죽어가는 그를 보고 무기력하게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은?

미쳐버릴 수 밖에 없잖아. 나는, 인정 못 해. 받아들이지 않을거야. 절대로, 용서 못해. 너를 이렇게 만든 이를, 세상을. 절망에 빠진 소년왕은 애도를 거부했다. 악몽이라는 진명을 가진 진왕으로 눈을 뜨면서. 

짙은 향 연기가 퍼졌다. 어른어른 촛불로 비춰지는 그림을 애틋하게 덧그리는 손끝이 저를 곧게 바라봐오는 검은 눈을 툭, 건드렸다. 현실이 아닌 기억은 왜곡될 수 밖에 없다. 그 기억을 꺼내 그려낸 그림은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눈에 마주친 까만 눈이 다정함을 머금고 저를 직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잔소리를 하고 한숨을 쉬어도 그 근간에는 걱정과 호의, 상냥하고 바른 마음이 있었기에 그렇다.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울타리를 세우고 이끌고 걱정해주는 그가 진실로 저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모진 말을 들어도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쉽게 용서하고 웃어주는 그였기에 그렇다. 그는 정말로, 라야는 저를 위해 살았다. 떨리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검은 빛을 뿌리는 군석이 그림에 살며시 닿았다.

널 경애해, 라야. 오갈데 없는 진심이 한숨과 함께 흩어졌다. 다시 살아나도 저를 우선하던 기억이 여즉 생생하다. 새하얀 머리칼을 꿈결처럼 흩날리며 사과처럼 빨간 눈으로 저를 끌어올린 그는 몇번이고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악몽이 아니라 소년왕 시절, 그때 그 이름으로. 애틋한 마음을 담아, 죽음에서 건져내면서.

툭, 심지가 다 된 향이 꺼졌다. 촛농을 뚝 뚝 흘려내던 초마저도 생이 다해 불을 꺼뜨렸다. 순식간에 어둠 속에 잠긴 그림에서 힘겹게 몸을 떼어낸 악몽이 숨을 몰아쉬었다. 불이 꺼지고 향은 흩어졌다. 태양이 물러나고 달이 떠오를 시간이었다. 다시금 찾아온 악몽의 시간에 빛은 필요없으리라. 소맷자락이 흩날리며 문을 열었다. 미련없이 돌아선 악몽은 속내를 감추듯 문을 단호하게 닫았다. 걷어내진 천들을 서서히 제자리로 돌려내면서, 차례로 가림막 사이를 빠져나간 진왕은 어느새 뜬 달을 보며 마지막 가림천을 돌려두곤, 문을 걸어 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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