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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렇게 고통받을 바에야 그냥 싼값에 내놓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제 매력이요? 글쎄요, 저는 잘…. 언니가 보기엔 뭐인 것 같아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용선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쟤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TV 속 문별이가 쑥스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 다 컨셉이지.’ 며칠 전 문별이가 그랬다. 너 방송에서 하는 느끼한 멘트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문득 떠오른 말을 툭 내뱉은 용선을 보며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습관성이지 아주.”



중얼거린 용선이 쥐고 있던 수건을 각 맞춰 접는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신경이 쏠린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문별이 주변에 둘러앉은 패널들이 하나같이 깔깔깔 웃는 중이었다. 억지로 시선을 수건에 박아 넣던 용선이 끝내 한숨을 푹 쉬며 TV를 응시한다.


‘저는 근데 연상이 훨씬 편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수건을 냅다 집어던진 용선이 이를 악문 채 더운 숨을 뱉어낸다. 눈까지 감은 용선은 한참이나 끓어오르는 속을 간신히 잠재우려 노력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비친 광경이 감탄을 자아낸다. 오, 그러다 아주 한 몸 되시겠어. 한쪽 입꼬리가 자연히 올라간다. 깊은 한숨을 푹 내쉰 용선이 리모컨 전원 버튼을 꾹 누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다시 생각해도 내놓을 때가 됐다.

 문별이 여자친구 자리.




맛보기 이별

문별X솔라




“얼굴 무슨 일?”

“시비 걸지 마, 기분 진짜 구리니까.”



시선을 내리깐 용선이 빨대를 입에 물었다. 눈을 댕그랗게 뜨고 감탄하던 휘인이 입을 헙 다물며 분위기를 살폈다. 싸웠나. 짧은 추리 끝에 아니라는 결론이 일었다. 요즘 문별이 개바쁠 시기라 싸울 시간도 없을 텐데. 손에 들고 있던 지렁이 젤리를 입에 쏙 집어넣은 휘인이 입을 야무지게 움직인다.


“헤어졌어?”



입안의 음료를 느릿하게 꿀꺽 삼킨 용선이 간신히 고개를 든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별생각 없이 질문한 휘인의 입술이 작게 벌어진다. 뭐야, 진짜? 좀 전보다 눈이 1.5배는 커졌다.

꾹 다문 입꼬리가 쳐진다. 미세하게 떨린 턱 끝까지 확인한 휘인이 큰 소리를 낸다. 아씨, 미안해! 농담으로 한 말인데, 내 입이 방정이지. 짜증 내듯 혹은 자책하듯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용선을 와락 당겨안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용선이 휘인의 등을 아프지 않게 툭 친다.


“안 헤어졌어.”

“뭐야 이건..?”



‘아직은.’

아아-.

그제야 알겠다는 듯 입맛을 쩝 다신 휘인이 언제 그랬냐는 얼굴로 젤리 하나를 잘근 씹었다. 안 봐도 뻔할 뻔자지, 김용선 성격에. 아마 한 백 번쯤 이별 시뮬레이션을 돌린 결과로 만들어진 얼굴임이 분명했다.

왜? 뭔 일 있어?

무심하게 툭 뱉은 목소리에 용선이 고개를 저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비유법이야, 직설법이야?”

“돌았니.”



퉁퉁 부은 눈의 용선이 건조한 목소리로 되받아친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은 휘인이 딴청을 피웠다.

‘걔 이름이 별인게 내 탓은 아니지 않나?’

궁시렁거리는 목소리에 답할 의지마저 잃은 용선은 마지막 한 모금 남은 음료를 쭉 들이켠 뒤 쓰레기통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세 쪼르르 쫓아온 휘인이 슬쩍 눈치 보며 제 할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아, 오랜만에 TV 보는데 문별이 나오더라?’ 지금 타이밍에 별로 달갑지 않은 대화였다. 며칠 전 일이 흐릿하게 떠오르자 다시금 눈이 뻑뻑해진다. 이미 부을 대로 부어 이물감이 잔뜩 느껴지는 눈두덩이를 부드럽게 문지른 용선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양 무표정을 유지했다.


“근데 걔 장난 아니더라, 내가 걔 애인이었으면 벌써 굿했다.”

“비즈니스잖아.”

“헤엑. 대인배 컨셉? 근데 넘치는 살기는 뭐 때문?”



코웃음을 친 휘인이 얼마 못 가 용선을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네 맘 다 알아. 어깨를 토닥이는 손이 우울함보다는 경쾌함에 가까운 박자를 탔다. 네 맘도 알지만 난 네 미래도 알지. 이러다가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꺄르륵거리면서 붙어먹을 너네 둘을, 너무 잘.


“진짜 심각하거든?”

“다음 주에 문별이 출석한다며? 그럼 그날이 헤어지는 날인가?”

“너 신나 보인다?”

“신난다기보다는 의식이지. 또 한 해가 잘 흐르고 있구나, 같은? 너 분기에 한 번 이러는 거 알아?”

“이번엔 진짜라고.”

“그 말은 반기에 한 번 하더라.”



할 말을 잃은 용선이 입을 딱 닫는다. 진심이었다. 이번엔 미묘하게 다르다고, 보통 때랑. 아무리 설명해 봤자 귓등으로도 들어주지 않을 거란 걸 알아서 침묵으로 일관키로 했다.





정휘인의 말은 틀린 법이 없다. 대부분의 순간에서 그랬다. 이번에도 역시 불문율을 실감한 용선은 온몸으로 느껴진 찝찝함을 애써 모르는 척하는 중이었다.


“근데 진짜 안 가봐도 돼?”

“가봤자 술이나 마실 텐데 뭐.”

“그 재미로 가는 거지.”

“됐어 피곤해.”



사실 피곤함은 핑계였다. 맨들맨들한 얼굴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던 문별이가 아무럼 어떻냐는 듯 쿠션을 끌어안으며 다리를 쭉 뻗는다. 종일 이어진 강행군으로 피곤할 게 물 보듯 뻔했다. ‘나 이제 촬영 끝나고 집 가는 중.’ 그 전화가 걸려왔을 때가 새벽 세 시였나, 네 시였나. 잠결에 눈도 뜨지 못한 채 연신 응, 만 외치다 끊은 전화가 꿈같이 느껴졌다.

모임 전부터 왁자지껄하게 들썩이던 단톡방도 어느샌가 조용해졌다. 지금쯤 술집에서 부어라 마셔라 신명나게 놀고 있겠지. [김용선 진짜 안옴?ㅠㅠ] 마지막으로 왔던 카톡에 미안, 하고 답장한 게 마지막이었다.


“나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고?”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내던 용선이 물끄러미 거실을 쳐다본다.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은 문별이가 킥킥 웃으며 리모컨을 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번엔 다르다느니, 진짜 헤어질 거라느니 마음먹었던 일이 우습게 느껴졌다. 잠깐 요동쳤던 마음이 슬그머니 잠잠해진다. 그래, 내 피곤함을 핑계 삼아 네 피곤함을 달래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따지자면 결국 문별이의 말대로 같이 있고 싶은 마음 때문일 텐데.

대답 대신 머그컵에 주스를 가득 부은 용선이 타는 속을 진압하듯 단숨에 주스를 삼켜냈다. ‘주스 마실래?’ 툭 던진 질문에 고개를 휘휘 저은 별이가 쿠션 귀퉁이를 만지작거렸다. ‘아이스크림 없어?’ 한 모금 남은 주스를 마저 마신 용선이 냉동실 문을 열어젖힌다.


“재밌는 거 안 해? 그럼 영화나 보던지.”

“이거 봤어? 이번에 반응 좋다고 게스트 재섭외한다던데. 녹화도 재밌었어.”

“아….”



아이스크림을 건넨 용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소파에 허리를 내렸다. 화면 가득 들어차있는 하얀 얼굴이 천진하게 웃는다. TV 속 모습에 비하면 훨씬 수수한 모습의 문별이가 아이스크림 봉지를 주욱 찢으며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았다. ‘요즘 TV 잘 안 보나 봐?’ 심드렁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너 같으면 보고 싶겠니. 트는 족족 온갖 인간들이랑 엮여대는 꼴을. 입안을 간지럽게 만드는 말은 내뱉지 않기로 했다. 가뜩이나 바쁜 탓에 자주 못 보는데 굳이 그 시간을 싸움으로 채우고 싶지 않단 생각이 온 신경을 지배했다. 며칠 전 제 심기를 잔뜩 불편하게 만들었던 장면이 다시 한번 눈앞에 재생된다. ‘저는 근데 좀 아담한 스타일이, 약간 언니 같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들썩이는 TV 속 얼굴이 반짝거린다.

‘딴 거 보자.’

‘왜? 언니 이거 안 봤다며.’

‘나중에 보면 되잖아, 영화 보자니까.’

입을 꾹 닫은 문별이가 저를 빤히 쳐다보다 리모컨 버튼을 꾹 누르고는 뭐 볼 건데, 하고 퉁명스런 목소리를 냈다. 아무거나 틀어. 소파에 기댄 용선이 피곤한 눈을 부비적거리며 휴대폰을 더듬거린다.


“이거 아직 안 봤지? 손익분기점 벌써 넘었다던데 이거 볼까?”

“봤어, 그때 네가 같이 못 본다고 먼저 보라고 했잖아.”

“그랬었나? 한 번 더 봐도 괜찮지? 진짜 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 봤어.”



거리낌 없이 움직이는 손이 유독 하얗게 보인다. 괜히 가빠지려는 호흡을 눌러낸 용선이 휴대폰 액정으로 시선을 옮긴다. 포털사이트 메인에 떡하니 걸려있는 얼굴과 언제나처럼 걸려있는 판이한 문구가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다. 그놈의 다정함. 문별이와 함께 방송했던 선배 가수는 팬들의 반응을 제대로 읽은 건지 벌써 며칠째 문별이와 관련된 일화를 얘기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하나하나 따져보자면 별것 없는 시답잖은 이야기가 단순히 그 스토리의 주인공들이 핫하다는 이유로 특별한 일인 양 떠돌아다니는 게 아니꼬웠다. 내가 속이 좁은 건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자, 이거.’

간신히 고개를 드는 찰나 눈앞에 내밀어진 아이스크림에 얕은 숨이 터진다.

길게 재고 시작한 연애였다. 옆에서 그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본 정휘인은 가슴을 퍽퍽 내리치면서 울분을 토해낼 정도로. ‘아 뭔, 누가 결혼하래? 좋으면 만나는 거지, 만나보고 별로면 헤어지면 되는 거고!’ 머리로는 충분히 해석 가능한 현실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장 안되는 이유는 하얀 백지를 가득 채울 만큼인데, 선뜻 괜찮은 연애가 될 거란 확신은 한 줄도 제대로 적지 못한 탓에.

‘언니는 대체 뭐가 그렇게 힘든건데.’

얼큰하게 취한 문별이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저를 찾아왔을 때도 그렇다 할 답변 하나 제대로 꺼내놓지 못했다. 논리정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안 될 이유를 죄다 무시하고 뛰어든 연애의 말로가 물 보듯 뻔할 거라고, 그때의 김용선은 이미 알고 있었나?

어쩌면 오랜 기간 망설이다 시작한 연애라 이때껏 이별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정성껏 고민해서, 너무 공들여 인내해서. 연애는 누가 더 오래 참나 대결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 알면서도 그걸 시작하기 전까지 들인 내 시간이 아까워서. 좀 더 정확히는, 그렇게까지 조심스럽게 시작한 내 연애가 이렇게 시시하게 끝나는 걸 받아들이기 싫어서.


“별아”

“왱?”

“우리 헤어지자.”



의미 없는 비즈니스일 뿐인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눈에 거슬리게 만드는 망할 놈의 방송, 역시 착실하게 본인 일에 열심히인 숱한 사람들, 이미 혼자서 두 번이나 본 영화, 그리고 눈앞에 내밀어진 초코맛 아이스크림.

훗날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어떤 걸 먼저 얘기하게 될까,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 * *





“구라 치지 마, 진짜 핵노잼임.”

“내가 너 재밌으라고 이런 구라를 칠까?”



딸깍. 캔 음료가 시원한 소리를 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못 믿겠다는 듯 에이, 하고 과장된 표정을 짓던 휘인이 그제야 제 입을 틀어막으며 큰 눈을 껌뻑거린다.


“미친, 실화야?”

“믿든가 말든가-.”



입안을 훑고 내려가는 탄산 덕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래도 잔뜩 겁먹었던 거에 비하면 이별 후유증은 제법 견딜만했다. 비록 해가 꼴딱 넘어간 밤부터 괜히 울컥울컥 치미는 감정 탓에 고개를 자주 치켜든다는 것만 빼면.


“아니 무슨 초딩도 아니고, 쌍쌍바 때문에 헤어졌다는 게 실화냐고. 와씨 최악인데?”



‘나 헤어졌어, 당분간 걔 얘기 피해주라.’

‘엥? 왜? 왜 헤어졌는데?’

‘그냥.’

‘그냥이 어딨어, 왜. 너 또 그냥 싸운 걸로 과대망상하고 있는 거 아님?’

‘진짜야. 진짜 헤어졌어.’

불과 몇 분 전 대화였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쯧쯧 거리던 정휘인이 금세 진지한 얼굴로 왜, 하고 이유를 캐물었다. 우리 이별의 원인은 뭐였을까. 몇 날 며칠을 고민했지만 뚜렷하게 정리하지 못한 이유가 아무렇지 않게 툭 튀어나왔다. 쌍쌍바. 똑 잘랐을 때 댕강 윗부분이 날아가버린, 짧똥하게 잘린 쪽을 주더라고. 말이 끝날 때까지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정휘인은 한참 후에야 제 귀를 만지작거리며 잘못 들었나? 하고 코를 훌쩍였다. 뭐, 뭐 때문에 헤어졌다고? 재차 건네온 답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 나도 최악이라고 생각해. 마찬가지로 지금의 심경도 구태여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암튼 당분간 내 앞에서 걔 얘기,”



하지 마, 라고 말하려고 했다.

용선의 한쪽 팔을 끌어안은 휘인의 입에서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전여친이 연예인이면 이런 구린 점이 있구나…. 김용선 씨, 현재 심경은?’ 

악의 없는 목소리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타이밍은 어쩜 이렇게 기가 막힌지, 이달의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는 중인 편의점이 야속했다.


“하필이면 쌍쌍바 모델이 됐냐, 쟤도 참.”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그날부터였다. 문별이는 작정이라도 했는지 전에 없이 공격적인 스케줄을 이어나갔고 그 탓에 김용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여기를 가도 문별이, 저기를 가도 문별이. 하루에 두세 번은 지나치게 되는 편의점은 온통 문별이로 도배된 모양새였다. 단순히 문별이 얼굴만 붙어있다 쳐도 심장이 벌렁거릴 판에, 하필이면 이 모든 일의 발화점 역할을 했던 방송에서의 그 여자, 그러니까 문별이 표현에 따르면 본인이 좋아하는 아담한 사이즈의 여자와 나란히 찍혀있는 포스터는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발휘하는 중이었다. 당분간은 혼자 충분히 이별을 곱씹으려 했는데. 빡침에 빡침을 더하는 뭐, 그런 건가. 아니지. 하필이면 저 투 빡침이 광고하는 제품이 쌍쌍바라는 점이 화룡정점이었다.

물끄러미 편의점 앞에 서서 포스터를 보던 용선은 끓어오르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제 갈 길로 걸음을 옮겼다. ‘쌍쌍’ 이라는 네임에 맞게 얼굴을 맞댄 채 웃고 있는 두 얼굴을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웬일이래, 김용선이 술자리에 참석하시고?”

“얘 지금 술고픈 상태야. 관심 끄고 배려해드려.”



북적북적한 분위기가 낯설었다. 한쪽에 조용히 자리하고 앉은 용선에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손을 휘휘 저어가며 시선을 날려버린 휘인이 주문벨을 누르고 명랑한 목소리를 낸다. 얼마 못 가 쫙 깔린 술병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부어라 마셔라 몇 번이고 외친 인간들은 딱히 주제가 뚜렷하지 않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한쪽에서 쪼로록 소주잔을 채운 용선은 몇 번 고민하다 술잔을 털어냈다. ‘크, 이별주 제대로 드시네.’ 옆에서 깔깔거리며 용선을 쳐다보던 휘인이 잽싸게 청포도 한 알을 집어 내밀었다.

난 너 술 마시는 건 대찬성이거든? 근데 오늘은 딱 세 잔만 마셔. 알았지?

다부진 표정의 휘인이 어르고 달래듯 얘기한다. 잠시 뚱하게 있던 용선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어, 이거 뭐야?”

“아이씨, 야 술 누가 이거 시켰어!”



앞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던 용선이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휘인이 버럭 외치자 시선이 다시 한번 모였다 흩어진다. 뭐야, 왜 저래. 웅성거리며 깔깔거린 목소리가 아무렇게나 섞인다.

이 망할 문별이는 어찌나 잘나가시는지, 눈길 닿는 곳마다 화사하게 웃고 있다. 소주 병에 떡하니 붙어있는 문별이를 확인한 용선이 앓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엎어진다. 개 짜증 나, 왜 하필이면 잘나가는 애랑 만나고 헤어져서 이별의 시간도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는 건데. 마음 같아서는 목놓아 외치고 싶었다. 망해라, 문별이. 간신히 진정한 속을 달래며 고개를 슬쩍 든 용선이 소주 병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소주 모델은 또 언제 돼 가지고선.


“김용선 취했냐? 별로 마시지도 않더만.”

“그럴 일이 좀 있어. 그리고 얘 원래 알콜 안 받아. 컨셉 아니고 찐.”

“그래? 바람 쐬러 갈래? 편의점 갈 건데.”



김용선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반사적으로 답한 정휘인이 끝에는 관심 없다는 듯 그러든가, 하고 제 술잔을 채운다.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내린 용선이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있어봤자 심란하기만 심란하지. 의자를 뒤로 죽 빼고 벗어나자 성큼 앞서나가는 뒷등이 눈에 들어온다.


“뭐 사려고?”

“담배. 너 뭐, 초코우유 같은 거 사줄까?”



찬 공기가 얼굴을 훑는다. 담백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순간 실소가 터졌다. 문별이도 이랬었는데. 그날은 무슨 술자리였더라. 데면데면한 사이였는데 굳이 잠깐 나가자고 부르는 것부터 티가 나긴 했다. ‘초코우유 좋아해요?’ 넌지시 묻는 목소리가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지만 문별이는 그 이후에도 그날 일을 종종 얘기하곤 했다. 초코우유 아니었음 우리 첫키스도 못 했어, 하고. 굳이 입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 의견엔 반대하는 바였다. 못 하진 않았을걸, 좀 늦게 했겠지.


“너 살 거 사서 나와, 난 밖에 있을게.”

“왜?”

“찬 바람 좀 맞고 싶어서.”



그래, 그럼.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편의점에 뛰어들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용선의 입꼬리가 축 내려간다. 다른 편의점과 다를 것 없이 유리 문에 도배되듯 붙어있는 포스터가 대문짝만 했다. 초코 아이스크림의 상징은 갈색 아닌가. 상품이랑 어울리지도 않는 핑크색이 덕지덕지 발라져있는 포스터는, 광고하고자 하는 게 초코맛 아이스크림인지 볼을 딱 맞대고 웃고 있는 저 두 사람인지 헷갈리게 했다. 게다가 쌍쌍바를 사이좋게 들고 있는 각자의 손은 은근히 사람을 약 올리는 중이었다.


“자, 이거.”



초코우유를 불쑥 내민 손이 투박하다. 땡큐. 예의상 웃으며 받아든 용선이 걸음을 옮기려다 우뚝 멈춰 선다. 너 먼저 들어가, 나 좀만 더 있다 갈게. 호흡도 끊지 않고 와다다 내뱉자 벙찐 표정을 한다. 알았어. 심플하게 답한 뒤 후다닥 뛰어가는 뒷모습에 그제야 어깨가 축 늘어진다. 몇 초나 지났을까. 슬그머니 몸을 틀어 돌아서자 전의 그 포스터 속 문별이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저를 마주한다. 뭘 봐. 술기운이 올라오는 건지 속이 뜨끈하게 달아오른다. ‘방송에서 막 그러는 거 괜찮아?’ 그러고 보면 문별이도 초반엔 그런 질문을 종종 던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양, ‘일이잖아.’ 하고 답했던 것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일은 일이지. 그깟 거 이해 못 하겠니. 분명 머리로는 그랬고 이론적으로도 그랬다. 언제부터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더라. 포스터 속 두 여자가 나란히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울컥 치솟은 서러움이 끝내 눈가에 가득 고인다. 유치한 거 아는데, 그래도.

주머니 속에서 쥐고 있던 휴대폰에 진동음이 울렸다. 생각 없이 휴대폰을 확인한 용선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 미친. 저도 모르고 육성으로 내뱉은 용선이 숨을 헙 들이키며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헤어짐과 동시에 제일 먼저 했어야 할 팬카페 탈퇴를 아직도 잊고 있었다. 스케줄이야 업로드되든 말든, 이제 나랑 뭔 상관이냐고.


“아 집에 안 갔어 밖에서 바람 좀,”

- 야, 문별이 왔어.

“뭐라고?”

- 문별이 왔다고! 방금 나갔어, 너 찾으러 온 것 같던데.



탈퇴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걸려온 전화가 황당했다. 분명 저를 내팽개치고 도망갔을 거라 생각한 정휘인의 단속이겠거니, 알아서 답하던 용선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후두둑 떨어진 눈물을 서둘러 닦아낸다. 반대편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는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저를 발견한 건지 모자를 한 번 들썩인 문별이가 빠른 걸음을 한다.


“너 미쳤어?”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마스크에 푹 눌러쓴 모자까지, 분명 저는 완벽 무장이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삐죽 튀어나온 탈색한 머리카락이며, 후드집업을 걸쳤지만 익숙한 태까지는 생각 못 했을 것도.

주변을 대신 스캔 한 김용선이 서둘러 문별이를 낚아챘다. 건물 사이로 들어가자 컴컴한 골목의 차분한 공기가 느껴진다.


“술 마셨어?”

“……”

“어디 거 마셨어.”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소름이 일었다. 불현듯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술병들이 떠올랐다. 나올 때 봤던 광경이 장관이었는데. 테이블 가득 들어찬 문별이 얼굴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아 이게 의리 아니냐고-.’ 시뻘겋게 익은 얼굴로 술병을 흔들어대던 동기들이 떠올랐다. 미친놈들아…. 걔네는 문별이랑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걸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모양이었다.


“네가 광고 하는 거.”

“……”

“그게 중요해?”



답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시장조사하러 온 건가. 별 시답잖은 생각이 들 때쯤 문별이가 고개를 떨어트린다.


“우리 왜 헤어진 거야?”



말문이 막힌다.

우리가 왜 헤어졌냐면, 뒤에 붙을 온갖 이유가 한데 섞여 차마 마침표를 찍을 수 없게 만들었다.


“……”

“나 오늘 감독님한테 엄청 혼났어.”

“……”

“촬영에 집중도 못하고 자꾸 휴대폰만 본다고.”

“왜,”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었어. 왜 헤어지자고 한 건지, 내가 뭘 잘못한 건지.”



그래도 아직, 내가 싫어진 건 아니지, 언니.

문별이 눈에서 눈물이 톡 떨어진다.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던 용선이 팔을 들어 올려 제 얼굴을 가렸다. 왜 울어, 너. 그러는 저도 이미 소매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먹먹함에 떨리는 목소리를 낸 용선이 입술을 딱 다물었다. 몇 번이고 숨을 삼킨 후에야 입술 사이가 벌어진다.


“스케줄 바쁜 거 나도 아는데, 방송에서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것도 다 일인 거 아는데. 다 아는데도 섭섭했어. 어느 순간부터 자꾸 비교하게 됐어, 네가 나한테도 저렇게 말했었는지, 저런 눈으로 봐줬었는지.”

“……”

“내가 이미 본 영화라고 했잖아.”

“……”

“아이스크림은 왜 또….”



항상 큰 건 나 줬으면서.

뒤죽박죽 섞인 이야기가 아무렇게나 튀어나갔다. 끝에는 펑 터진 풍선처럼 울음이 터졌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용선이 푹 주저앉아 고개를 처박은 채 엉엉 우는소리를 낸다. 내가 본 영화라고, 이미 봤다고 했잖아….

꾸역꾸역 눈물을 참고 있던 문별이도 끝내 한 손으로 얼굴을 뒤덮으며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미안해, 울지 마 응? 누가 보면 무슨 사단이라도 난 것처럼 부둥켜 안은 채 눈물을 흘려냈다. 

‘나는 언니가 점점 시큰둥해지는 것 같아서 초조했단 말이야. 내가 너무 바빠서, 우리가 자주 못 만나서 마음이 식은 건지, 내가 나온 프로그램도 안 보고 같이 있어도 재미없어 보여서.’

어느 틈엔가 문별이에게 안긴 채 엉엉 울던 용선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방송 하나도 안 빼놓고 다 봤어, 볼 때마다 개빡쳐서 얘기 안 한 거지. 넌 이상형이 수백 개야? 웃는 게 어쩌구, 키가 어쩌구, 스타일이 어쩌구, 내가 그거 보고 뭔 피드백을 해줘야 돼? 제일 잘 어울리는 인간이라도 뽑아줘?’

‘그거 다 언니 생각하고 한 말이야, 그렇다고 내가 거기서 김용선이요 할 순 없잖아.’

‘그럼 쌍쌍바는.’

‘안 하던 다이어트를 너무 빡세게 해서 당이 떨어졌나봐. 잠깐 눈이….’

닭똥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 * *





“너 집에 안 가?”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데. 당분간 안 가.”

“누가 보면 몇 년 만에 재회한 줄 알겠네….”



별아, 우리 고작 3일 헤어졌었거든.

덧붙인 용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파에 털썩 앉는다. 거의 뛰어들다시피 제 옆자리를 차지한 문별이가 제 허리를 끌어안은 채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그 3일이 얼마나 암흑 같았는지 알아? 잠은 잘 잤는지, 일어나서 밥은 잘 먹었는지, 어디서 뭐 하는지…. 속이 다 탔어, 난.’ 잔뜩 울상으로 종알거리는 입술을 내려다보던 용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난 3일 동안 네가 뭘 입고 뭘 먹고 뭘 하는지, 발 닿는 곳곳마다 네가 있어서 죽을 것 같던데. 심지어는 친절한 네 팬카페가 앞으로 향후 활동까지 알려주더라. 말하자면 긴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언니도 표현을 좀 해, 속에만 담아두지 말고.”

“그래? 아이스크림 좀 가져와봐, 내가 확실하게 표현해 줄 테니까.”

“아이스크림 끊었어.”



그리고 내 앞에서 아이스크림 언급 삼가주라.

진지한 얼굴로 얘기한 문별이가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난다.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던 용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문별이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너 울어?”

“안 울어, 울긴 누가 울어.”

“아닌데, 눈꼬리에 뭐 맺혔는데?”

“아니라니까, 아이스크림 때문에 우는 거 아니라고.”



숨을 크게 들이켠 문별이가 고개를 훽 돌린다.

눈을 끔뻑이던 용선이 난감한 표정을 한다. 아이스크림 때문에 우는 게 맞나 본데. 볼을 만지작거리며 문별이를 살핀다. 소리 없이 흘린 눈물을 벅벅 닦은 문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괜찮아?”

“뭐가?”

“아니,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때문에 운 거 아닌데?”

“그럼?”

“……”



저를 빤히 보던 눈에 금세 들어찬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반사적으로 일어난 용선이 별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너 왜 그래, 왜 울어. 등을 토닥이자 그제야 귀에 들려온 흑흑 소리가, 앞전의 반짝임이 눈물이었음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나 그날부터 악몽 꿔, 아이스크림 계속 삐뚤게 자르는 꿈. 그리고 언니한테 차이는 꿈.’

상황에 맞지 않게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내가 원래 약간 못된 스타일이었나. 품 안에서 들썩이며 우는소리를 내는 문별이를 힐끗 내려다보면 죄의식이 가득 들다가도 들썩이는 입꼬리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가자, 아이스크림 사줄게. 사서 같이 나눠먹으면 되겠다. 그럼 이제 그런 꿈 안 꿀 걸.’

달래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겨우 고개를 든 문별이가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Flofu0221 나문사 문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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