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chun님의 아름다운 영상! 정말 감사드려요.



나는 너와 오래오래 만나고 있고 싶어.

십오 분. 이십 분.

한 시간이 아닌

죽음과도 같이 긴 시간을, 꿈의 시간을

 - 김승희 "흰 나무 아래의 즉흥" 중



*관린 시점


  좋은 것은 마냥 좋다. 싫은 것은 끝까지 싫다. 호불호가 그렇게 강하면 살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았다. 버릇이라기보다 습성 같았다. 아무리 길을 들여도 고슴도치의 가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그래도 나는 제법 유순한 고슴도치가 아니냐고 대응했다. 분명 싫은 것보다는 좋은 것이 많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생각했다. 나는 저 사람을 많이 좋아하게 되겠다고. 어떤 예감은 선언문처럼 온다. 비슷비슷한 연습생 백한 명, 그리고 그보다 많은 스탭들 사이에서 그 사람만 보였다. 호감은 얼굴로 시작했다. 그는 금방 발개졌다. 발갛던 볼이 웃을 때엔 하얗고 둥글게 솟았다. 누가 빚어놓은 것처럼 코가 반듯했다. 입술도 예뻤다. 그중에 제일은 눈이었다. 그의 두 눈 끝자락에 누가 구덩이를 파놓은 것 같았다. 처음 눈을 보았을 때 푹 발이 빠졌다. 그의 얼굴을 볼 때면 심장이 뛸 틈도 없이 추락했다.


  예쁜 사람이라 지켜보다 보니 나머지도 좋아졌다. 그는 말랑한 얼굴과 달리 다부진 사람이었다. 무대 밑의 소동물이 무대 위에선 우아한 맹수였다. 보여지는 방법을 정확히 아는 사람. 그것에 익숙하고 또 잘 쓸 줄 아는 사람. 이제 막 긴 팔다리를 삐걱거리며 춤을 배우기 시작한 나의 눈 안에서 그가 반짝거렸다. 반짝 반짝, 빛나는 별에 끌리는 것은 인류의 습성이다.


  ― 친해지고 싶어요, 형.

  ― 천천히 친해지겠죠.


  좋은 것은 마냥 좋은 내가 참지 못하고 다가갔을 때 그가 답한 말에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나는 그가 초면이어서 어색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사실이면서 사실이 아니었다. 나를 어색해하는 것은 맞았지만 초면이어서는 아니었다. 초면이 아니게 된지 한참이 지나가도 나에 대한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낯가림이 많은 성격도 아니었다. 그는 다른 연습생들과 금세 친해지고 웃고 이야기했다. 나에게만 어색해했다.


  나를 싫어하나. 왜 싫어할까. 의문이 들었지만 그냥 받아들였다. 좋아하는 것이 그렇듯 싫어하는 데에도 이유는 필요 없었다. 이유가 있더라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다가가는 것을 멈췄다. 대신 그 반짝이는 별을 멀리서 관찰했다.


  ― 어. 관린이 짝사랑 형이다.


  포지션 평가의 막바지였다. 동빈이는 그가 나타날 때마다 꼬박 꼬박 손가락질을 했다. 나는 그가 있는 방향을 한 번 바닥을 한 번 보다가 동빈이를 흘겨봤다. 그리고 다시 바닥을 봤다. 나를 놀리려고 ‘어, 관린이 짝ㅅ’까지 재차 말하는 입을 가사지로 막았다. 짝사랑이란 말이 웃겼다. 웃겨서 동빈이도 자꾸 그 말을 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몇 번 생각해봐도 짝사랑이 맞았다.


  실은 그보다 며칠 전에, 연습실에서 그와 단 둘이 마주친 적이 있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다. 나 싫으냐고, 나는 형 좋다고, 대체 어쩌다가 그런 어린애 같은 고백까지 한 건지 생각할수록 오리무중이라 비밀처럼 감춰뒀다. 머릿속에서는 그의 멍한 표정이 자동으로 반복 재생됐다. 그는 놀란 것 같지 않았다. 단순히 싫어하는 사람 보는 얼굴도 아니었다. 다만 가늠하기 힘들 만큼 복잡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 그렇게 복잡하게 흐려졌다. 미안해서 더 이상 말을 걸지 못했다.


  나는 스무 명 안에 들지 못했다. 마지막 발표가 끝난 후에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담담히 소감을 말하고, 우는 연습생들을 번갈아 달랬다. 그렇게 울면 진짜 마지막 같잖아, 우리 또 만날 건데. 나는 일부러 웃으면서 그들을 놀렸다. 껴안은 등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다른 연습생을 안고 있던 그와 멀찍이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웃던 얼굴 그대로 고개를 꾸벅 했다. 그는 다시 그 얼굴이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표정. 나는 그가 11위 안에 들 것임을 확신했다. 같이 데뷔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나중에 무대에서 보게 될까. 막연하게 그런 생각만 했다.


  순위권 연습생들은 곧바로 다음 경연에 대한 녹화를 했다. 탈락 연습생들과 함께 숙소에 돌아와 짐을 쌌다. 매니저 형이 차에 시동을 걸어두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느릿하게 짐을 다 챙겼을 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당연히 다른 탈락 연습생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기.’ 말하는 목소리가 예상 외였다.


  고개를 돌리니 그가 서있었다. 헐떡이는 숨으로 나를 보고 있다. 녹화 중 아니었나. 놀란 내가 그 말부터 꺼내자 그가 뚝 뚝 끊어지는 가쁜 호흡으로 대답했다. ‘잠깐, 쉬는, 시간.’


  잠깐의 쉬는 시간에 여기까지 뛰어온 건가.

  나를 보러 온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아마 다른 사람들과 인사하러 들른 모양이다. 나는 그의 마음이 예뻤다. 불편한 나에게까지 인사를 해주는 것은 고마웠다. 그래서 웃었다. 옆에 있던 물을 건넸다. 고개를 저은 그가 말했다. ‘할 말이 있어서.’


  어라 싶었다. 설마 나를 보러 왔나.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이 잠깐의 틈에 뛰어 와준 건가. 얄팍한 의혹이 점점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그 속도에 맞춰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발갛게 상기된 두 볼과 처음부터 좋아 죽을 것 같았던 두 눈을 번갈아 보면서 멍하게 물었다. ‘뭔데요.’

  곧바로 말을 못하고 그가 머뭇거렸다. 나는 속이 탔다. 아직 물병을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그의 예쁜 입술이 열렸다.


  ― 나도 친해지고 싶었어. 너랑.


  고작 그 정도의 말이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가 이상했다. 하기 힘든 말, 아니 해서는 안 되는 말인 것처럼 털어놓는 것도 이상했고, 그렇게 한 말이 과거형인 것도 이상했고, 그럼에도 그 말이 내 마음을 두들기면서 단단하게 위로하는 힘을 갖는 것도 이상했다. 친해지고 싶었다면서 왜 나를 그렇게 불편하게 대했냐는 원망도 들지 않았다. 그에게는 나에게 다 말할 수 없는 사연이 있어 보였다. 나는 그를 탓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보면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복잡한 얼굴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는 점점 초조해 보였다. 혹시라도 그가 어렵게 꺼내둔 말을 물리거나 다시 도망칠까봐 대답했다.


  ― 친해지면 되죠.


  ‘지금부터.’ 담담하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악수를 청한 것인데 그는 그걸 빤히 보고만 있다. 그에게 가까이 내밀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뛰던 심장이 다시 가라앉았다. 그가 아까보다도 복잡한 얼굴로 굳어졌다. 울 것 같다.


  ― 왜 그래요.


  참지 못하고 물으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답하곤 팔뚝으로 얼굴을 가린다. 예쁜 눈으로 울기라도 하면 나는 못 견딜 것 같다. 울지 말라고 속으로 몇 번이고 달래는 사이,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다행히 울지는 않지만 아직 멍울져 있는 두 눈을 나는 홀린 것처럼 바라봤다.


  ― 지금은 안 돼.


  친해지면 안 된다는 말 같았다. 친해지고 싶다면서, 쭉 친해지고 싶었다면서 지금 친해지면 안 되는 게 뭔지. 친해지면 큰일이 날 것처럼 말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뭐야 그게.’ 자조하자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문밖에서 매니저 형이 ‘관린!’ 불렀다. 그랬다. 나는 떠나야 하는 사람. 그는 머무를 사람. 그나마 머무는 사람이 떠날 사람을 찾아와준 것이 고마워서, 나는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힘주어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 지금 아니면, 다음에.


  그때 친해지면 된다, 말하고 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처음 맞닿은 그의 피부가 말랑하고 뜨거웠다는 것만 알았다.

 

  연습생의 일상에 복귀했다. 그는 데뷔를 했다. 나는 내 투표 덕도 있던 거라고 주위 사람 한두 명에게만 자랑을 했다. 그는 아주 바빠 보였다. 모니터의 아름다운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파주에서의 마지막 날을 떠올렸다. 친해지고 싶었어, 그의 말을 속으로 거듭할 때마다 심장이 떨렸다. 하지만 그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점점 더 바쁘고 유명해졌다. 원래 멀었던 사이가 더 멀어져갔다. 나는 그가 나와의 약속을 잊어버렸을 것이라 추측했다. 나아가 나라는 사람도 잊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약속으로부터 꼬박 1년 가까이 흘렀을 때 그를 사무실 근처에서 만났다. 비오는 밤, 주차장 한편에 쪼그리고 앉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너무 반가워서 숨이 막혔다. 누구를 찾아온 것인지, 왜 여기에 혼자 있는지 따위의 궁금증은 들지도 않았다. 그냥 반가워서 바보처럼 굴었다. 그는 내내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만 기억 그대로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건 오히려 나와의 약속이나 나를 잊지 않았다는 증거 같았다. 친해지고 싶어. 지금 아니면 다음에. 그때의 다음이 지금이 된 것 같았다. 이기적이게도 나는 그렇게 해석을 해버렸다.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면 그의 복잡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데뷔가 임박하며 바빠지는 와중에 나는 더 자주 그를 생각했다. 한 사람만 생각하고 한 사람의 흔적만 찾고 한 사람의 연락만 기다렸다. 짤막한 답장 한 글자마다 꽃이 폈다. 나는 그게 사랑임을 알았다. 그냥 받아들였다. 자각은 늦었지만 사실 예전부터 그런 거였구나 납득했다. 그래서 처음 통화를 한 날, 나쁘게 군 자기가 좋냐는 말에도 망설임 없이 답했다. 좋다고. 그 사람만 괜찮다면 좋아한다는 말은 한없이 할 수 있었다.


  통화를 몇 십 번, 따로 만나기를 한두 번, 좋다는 말을 수십 번 거듭했을 무렵까지도 그의 복잡한 얼굴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도 나와 같은 마음임을 알았다. 그가 숨기려 애를 썼음에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서로에게 빠져들며 가까워지다가도 필연적인 거리감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었다. 끝끝내 떼지 않는 한 걸음. 그것의 불가해함. 부드러운 마음과 강한 아득함. 그것들이 충돌하면서 더 커져버리는, 연애 없는 사랑.


  몇 년 간의 아이돌 활동을 접고 대만과 중국으로 활동 거처를 옮기게 됐다. 그렇게 됐다 전했을 때에도, 출국 일자가 나왔을 때에도, 출국 전날에도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나는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 그의 눈은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끝까지 그가 머뭇거리는 것이 한국 문화의 영향이라고만 추측했다. 그것 아닌 이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야망도 꿈도 많고 그걸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사람이라, 나는 굳이 연애라는 형식을 그에게 강요할 마음이 없었다. 내 안에서는 사랑과 꿈이 대척점에 있지 않았지만 그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출국 전날 밤까지도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은 것에는 화가 났다. 술을 마시며 짐을 싸다가 울컥하는 마음에 메시지를 보냈다.

  [형이 내 첫사랑이었어. 형은 어떤데.]

  제법 직설적으로 물었지만 씹혔다. 그것도 사랑으로 읽혔다.

 

  그리고 나는 한국을 떠났다. 익숙한 곳에서의 활동이라고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시간은 바쁘게 흐르는데 나는 그를 조금도 잊지 못했다. 첫사랑을 질문 받을 때마다 그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정말 그리운 사람하고는 섣불리 연락할 수 없었다. 나 없이도 잘 사는지. 나 아닌 사람과 연애나 결혼을 했을지. 지금도 나를 보면 복잡한 얼굴을 할지. 직접 묻지 못하는 질문을 몇 년간 차곡차곡 쌓아갔다.


  ― 관린도 곧 서른이네.


  스물아홉 여름이었다. 진짜 서른이 되기도 전부터 주변에선 서른 이야기로 야단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한국 나이로는 진작 서른인데, 생각했다. 조금도 잊어버리지 못한 그를 함께 떠올렸다. 서른하나. 한국 나이로는 서른둘. 그는 다부진 남자가 됐을 것이다. 어린 티를 벗은 성인 남자의 아름다움에 나는 다시 매혹될 것이다. 한 번이라도 만나는 그 순간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질 것이다. 주변의 누구도 나의 비밀 같은 생각을 알지 못했다.


  새로 계약한 영화의 대본 미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강아지 기색이 이상했다. 아픈 것처럼 낑낑거렸다. 신발을 벗고 강아지에게 다가섰다.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등을 쓰다듬었다. 개는 계속 한 곳만 보고 있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 그가 있었다.

  상상만 하던 사람. 넘치는 그리움이 상상을 낳던 사람. 당연히 그것만으론 부족해서, 끝끝내 그리움을 숨처럼 쉬며 살아가게 만든 사람.


  ― 형.

  한참 쓰지 않은 모국어처럼 그립게 말했다가,

  ― 지훈.

  욕심껏 고쳐 불렀다.


  그의 몸은 곧 사라질 것처럼 일렁였다. 그 어지러움이 어째선지 반짝임처럼 보인다. 내 기억 속의 그는 이십대 초반에 멈췄는데, 지금 그는 한참 어른이었다. 서른둘보다도 어른이었다. 세월의 자국이 단정하게 자리 잡은 그는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두 눈이 그대로였다. 상대를 두 발 딛고 서지 못하게 하는 아름다움을, 두 눈이 똑같이 품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그의 아름다운 두 눈과 어른스런 어깨와 투명하게 반짝이는 몸을 바라봤다. 겨우 그가 입을 뗐다. 아주 오래된 전화기처럼 그의 목소리가 웅웅댔다.


  ― 네 말이 맞았어.

  ― …뭐?

  ― 후회했어. 그래서 찾아왔어.


  그는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먼 시공간을 넘어 나를 만나러 온 지금의 박지훈은 이십여 년 전, 과거의 박지훈에게 몇 번이고 쪽지를 남긴 적이 있었다. 관린과 다 없던 일로. 그 쪽지를 남기다가 과거의 나와 만났으며, 내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했다고 했다.


  ― 나중에, 먼 나중에라도 지금을 후회하게 된다면. 나를 찾아와.


  과거든 미래든 언제든 상관없으니 자신에게 꼭 다시 찾아와달라고. 하지만 당시 그는, 자기 시간의 관린과 헤어진 것 때문에 자포자기였다. 나의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고 했다. 몇 달 동안 같은 쪽지를 남긴 후에는 이별의 고통과 시간의 공포가 뒤엉킨 채 엉망진창으로 살았다. 그러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헤어졌던 관린과 다시 만났다. 만나서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진작 알았다면 우리를 조금 덜 아프게 했을 사실. 피하려 애써도 피해지지 않는 한 가지.


  ― 우리는 결국 서로를 향해 가더라.

  ― …….

  ― 시간 여행은 의미가 없어. 내 모든 시간이 너니까.


  숨이 막혔다. 그리움의 파도가 시간을 따라 넘실댔다. 그가 언제나 복잡한 얼굴을 하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 모든 것을 그가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내 시간 속의 지훈, 다른 시공간 속의 무수한 지훈을 떠올리며 나는 무너졌다. 바닥에 엎드렸다.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고 있는 내 앞에 그가 쪼그리고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시간과 투쟁한 사람의 오랜 피로와, 그럼에도 끝내 사랑을 지키려 애썼던 사람의 단단한 용기가 엉켜 있었다. 우주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 언젠가 과거의 지훈을 만나면, 같은 얘기를 전해줘.


  자신은 더 이상 과거나 미래의 지훈과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게 더 위험한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고 했다. 대신 수많은 시공간 속의 관린을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나의 카운트다운 능력처럼 그의 시간 여행이 몸을 깎아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안 된다,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가 웃었다.


  ― 모든 관린이 다 똑같이 걱정하네.


  그의 말에 입이 막혔다. 그는 농담까지 했다. ‘어딘가의 시공간에선, 나 같은 마음으로 내내 비를 내리는 관린이도 있을까. 그건 싫은데.’ 웃는 듯 우는 듯 그의 얼굴이 기울어졌다. 지훈이 너에게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온다면 꼭 전해달라고, 그가 마지막으로 당부하며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날 밤. 어떻게 숨을 쉬고 울고 잠이 들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밤. 꿈으로 치부하기에도 너무 생생했던 밤.

  그 밤으로부터 이 주일 후에, 그가 찾아왔다.

  동그란 눈을 가진, 어린 얼굴의 지훈. 혼란과 고통과 외로움을 가득 짊어진, 내가 잘 아는 얼굴의 지훈.


  ― 기다리고 있었어. 지훈.


  나는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다정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팰릭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