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믿음을 잃는다면, 그는 무엇으로 삶을 살아가는가?

-톨스토이


 1.쿠르네 엘랑은 파리의 어느 빈민가, 집도 아닌 어느 골목 판자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어느 유망한 프랑스 귀족 집안의 자제가 길거리 창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로, 입막음을 위해 상당한 양의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도박에 빠져 모든 돈을 날려먹은 뒤, 빈민가 여자들의 기둥서방이자, 감방을 들락거리며 건달들과 어울려 다니는 인간 말종이였다. 쿠르네는 그런 자의 아들이었다. 5살이 되기 전의 해, 그의 아비는 술을 마시고 경찰에게 덤벼들었다가 총살당하고, 어미는 그 다음해 춥디추운 파리의 돌바닥에서 얼어 죽었다. 이것이 그의 불행이 되진 않았다. 파리에는 그런 고아들이 많고 많았으므로. 파리의 화려한 왕의 거리를 조금만 파헤치고 들어가도, 그런 사연의 아이는 정말, 너무, 차고 넘치게 많았다. 쿠르네는 그런 평범한 축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가 8살이 되던 해, 그는 경찰 손에 잡혀 고아원에 들어갔다.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이 많고 많은 이 도시에서 고아원도 언제나 아이가 넘친다. 타고난 잔꾀와 긍정적이고 자기비하적인 해학성으로 그는 우울한 보육원을 그나마 즐겁게 보내려 노력했다.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또래 친구 실비아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둘은 노래를 부르고, 밥을 같이 먹고, 같이 말썽을 부리며 보육원 생활을 보냈다. 성 니콜라스의 이름 아래 지어진 보육원은 다 큰 청년은 공장으로, 다 자란 숙녀는 수녀원으로 보내곤 했다. 공장으로도, 수녀원으로도 가기 싫었던 단짝 친구 둘은 성인이 되는 전날 밤 보육원에서 도망쳤다. 8살의 빼빼 마른 두 고아는 어느새 18살의 소년소녀가 되어 있었다.

 둘은 어느 후미진 골목 반지하의 셋방에서 살림을 차렸다. 현대의 반지하와 파리의 반지하는 비교되어선 안 될 지옥이다. 19세기 훌륭하게 설비된 하수도가 있음에도 거리에 오물을 버리는 것이 일상이던 사람들은 그 버릇을 쉬이 고치려 하지 않았다. 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오물과, 거리의 흙먼지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견뎠다. 결혼한 첫 해에 태어난 아기는 3일 만에 죽고, 그 다음해 태어난 아이는 제 아비를 닮은 요상한 머리색의 아이. 매 같아. 여전히 소녀처럼 키득이는 실비아에게 쿠르네는 히죽이며 허리까지 길러낸 제 머리를 흩날렸다.

 아이의 이름은 드레닌이다. 우리는 이 이름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쿠르네 엘랑의 처음이자 마지막 자식. 그와 쏙 빼어 닮은 딸아이.

 쿠르네는 어떤 사람인가? 그건 당신들도 겪어봐서 알 것이다. 정이 많지만 당신에게 너무 다가가지 않는다. 경거망동하고, 수다스럽고, 입이 가볍고, 언제나 농담과 아무렇게나 내뱉는 두서 없는 말들로 혀를 놀리는 실없는 사람. 일 벌리는 건 좋아하지만 마무리를 지을 정도의 책임감은 부족하고, 기분파라 화르르 불타오르지만 겁이 많아 금방 도망을 쳐버린다. 신기한 것에 대해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지만, 뒷골목에서 허투루 자란 것은 아닌지라 쉬이 봉이 되진 않는다.

 그는 문맹으로,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라고는 총 쏘는 것뿐이었다. 당시의 파리에서 밀렵은 중죄로, 그 중에서 리볼버를 제외한 다른 총기류를 소지하는 것 역시 중범죄였다. 그러나 먹고 살기 바쁜 쿠르네에게 법은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는 종종 파리의 외각의 숲까지 나가 밀렵을 했다. 어느 나폴레옹 시대에 남작 위를 받았다가 숙청당한 멍청한 사내의 사유지였던 그 숲은 이제는 주인 없는 숲으로, 각종 토끼와 다람쥐 등등을 잡을 수 있었다. 명사수인 그의 총은 총알이 빗겨가는 법이 없었다. 총알은 암거래 시장에서, 화약은 물에 젖어 버려진 화약통을 뒤져 얻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었으므로.

 그의 인생의 전환점은 언제 찾아 왔는가. 그것은 어느 학생 무리와의 만남이었다. 술집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이다. 먹고 살기 바빠도 술집은 자주 오게 된다. 아내와 춤을 추기 위해, 아니면 정말 단순히 한잔하기 위해. 그 날은 혼자 간 날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아직 어렸으니까. 학생무리 하나가 술을 마시고 있기에, 변죽 좋은 그는 공짜 술도 얻어먹을 겸,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에 대해 나누고 있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듣고 있던 그의 귀가 번쩍 뜨일 정도로, 그들은 열정적이었고, 그들이 원하는 세상은 이상적이었다. 쿠르네는 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대의를 쫓는 무능한 가장의 불쌍한 집안이여. 쿠르네가 학생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하면서, 실비아의 삶은 더더욱 힘들어졌다. 쿠르네는 막일을 하러 가는 대신, 공원에서 웅변을 하는 멍청한 무리들을 따라 다니기 시작했다. 주말에 토끼를 잡아오는 대신, 어릴 때는 어렵다며 배우지도 않던 글자를 다시 외기 시작했다. 배를 곯기 시작한다. 안 그래도 마른 아이는 뼈만 남기 시작한다. 싸우는 날이 늘어난다.

 아이가, 드레닌이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날이었을 것이다. 웅웅거리며 부모님이 싸우는 음성이 점점 커지다가, 실비아가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동생을 임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말 빼면 시체라던 쿠르네가 침묵하고, 실비아는 그녀의 딸을 잠시 내려다보았다가, 열에 몽롱한 그 시선을 피해 매몰차게 고개를 돌리고는 그대로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쿠르네가 실비아를 쫓아 뛰쳐나가고, 드레닌은 이 이후를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실비아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드레닌을 데려가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먹고 살기에도 벅찼을지도 모르고, 아비를 닮은 그녀를 볼 때마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을 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실비아는 부녀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드레닌이 8살, 쿠르네가 28이 되던 해였다. 실비아와 만나지 햇수로 꼭 20해였다. 


   2.잘 들었냐? 실비아가 집을 나간 뒤에도 쿠르네는 그 정신 나간 모임에서 빠져나오질 않았어. 오히려 책임질 사람이 하나 더 줄어들자 더 밖으로 나돌았지. 8살의 딸아이는 완전히 방치되어있었다. 방치된 8살된 아이는 그가 길거리를 떠돈 20년이 지난 과거와 마찬가지로 흔했다. 아이는 대부분의 시간은 밖에서 나돌았다. 어미의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아비는 분노로 새겨져 그 뒷모습을 쫓았지. 
어느날 아비가 깜박잊고 두고 나간 머스킷을 손에 쥔 것은 완전히 우연이었어. 쏘는 법도 모르는데, 쥐는 순간, 그 멍청한 남자가 멀쩡하던 때가 잠깐 떠올랐다. 총은 어디선가 주운 크고 낡은 첼로 가방에 넣어 어깨에 매고, 한 손에는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다른 손에는 드레닌의 손을 잡고 걷고 걸어 파리 근교까지 갔지. 자 보렴 아가씨. 총구 끝에 보이는 오소리. 장전막대를 열고, 화약을 넣고, 장전. 그리고 불씨. 군더더기 없는 동작과, 총알이 나가기 전에 재빠르게 하는 조준. 그리고 저녁으로 먹을 불쌍한 오소리. 매캐한 화약냄새에 놀라 울어버린 딸아이를 안아들고, 너털 웃음을 짓던 저녁.  손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요란하게 집안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지고, 안그래도 낡은 반지하방, 어린 시절에는 혼이 빠지게 울었던 그 익숙한 냄새가 퍼지면서, 벽에 구멍이 생겼다. 드레닌은 천재였어. 총을 쥔 그날부터, 그녀는 더이상 배 곯는 불쌍한 거리의 아이가 아니었다. 인류 최악의 무기를 가진 이빨달린 포식자였을 뿐.
아이가 총을 쥔다는 것을 안 아비는 그녀를 수녀들이 운영하는 수녀원에 보냈다. 고루한 회색 원피스와, 높디높은 담장 너머의 남자 목소리가 최대의 핫이슈인 아이들과, 엄하고 친절할일 없는 수녀님. 당신의 행복이 신과 함께하기를. 신이 함께하지 않았기에 드레닌은 불행한 거였겠지. 그녀는 기도했어. 어느날 수녀원 문 앞에 아름다운 드레스 차림의 어머니가 나타나 자신을 데려가 주기를. 아름다운 드레스 같은 건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을 텐데. 쿠르네와 함께하느라 고생했다고, 입안 가득 역겨운 양배추 스프가 아닌 따뜻하고 흰 빵에 고기가 잔뜩 들어간 요리를 차려주면서, 겨울에도 훈훈한 방안에서 잠들 수 있게 해준다면. 안된다면,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쿠르네의 부고소식이라도 들려왔으면, 아비가 죽어서, 오갈데 없어진 자신이 수녀원에 남아 수녀가 된다면.
수녀원장의 사무실의 장식함에는 고급 사냥총이 하나 들어있었다. 어느날 창문으로 도둑이 하나 들어와 그걸 훔쳐갔어. 이상하지. 수녀원장님의 책상 위에 금으로 된 예수 상도, 은으로 되어 벽에 걸린 베드로서의 말씀 구절도 모두모두 멀쩡했는데, 어떤 멍청이가 무기만 들고 갔을까. 기숙사도 샅샅이 뒤지고, 성당도 한껏 헤집어 봤지만, 원장실 책상 밑으로 들어간 색 바랜 갈색 머리카락과, 1년 내리 헤집어지는 히비커스 꽃밭 옆 두렁에 은근하게 생긴 봉우리는 아무도 찾지 못했단다. 그 뒤로 번개 치는 밤에 어디선가 화살 쏘는 듯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와. 우레와도 같이 울리는 천둥소리 끄트머리 희미하게 화약내가 났지만, 왕을 죽였던 국민이 있는 나라는 40년 전부터 화약내가 끊긴 일이 없어,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었지.
18살의 성인이 된 드레닌은 결국 쿠르네와 다시 조우하고 말았어. 1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쿠르네는 변한 게 없었지. 빌어먹을 계몽이니, 혁명이니. 전부 사랑하는 프랑스를 위해서 라면서도, 제 딸 하나 간수할 줄 몰랐지. 수녀원에 맡겨둔 것도 잊어버릴 것이지. 딸을 고리타분한 수녀로 키우고 싶지 않다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며 그는 드레닌을 다시 지옥 같은 반지하방으로 데려왔다. 그곳은 여전히 낡았고, 물이 샜고, 10년의 세월동안 서까래도 썩어버렸지. 드레닌은 더 이상 아비에게 휘둘릴 정도로 아기가 아니었다. 10년 만에 만난 부녀, 그 첫날에 드레닌은 쿠르네에게 소리를 질렀지.
뭐라고 말했을 까. 이제는 드레닌도 기억하지 못할걸. 나를 왜 데려온거야. 차라리 그곳에 더 행복했을 텐데. 적어도 이 지긋지긋한 곳에선 나갔을 텐데. 왜 그 뻔뻔한 낯짝을 다시 나에게 보이는 거야. 차라리 죽지. 죽어버리지. 그 사랑하는 혁명이니, 조국이니, 한 몸 불살라 태워버리지. 짜증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증오가 되었다. 언성은 점점 높아지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비명으로 바뀌었어. 그 폭언을, 쿠르네는 가만 서서 듣고 있었다. 허리 께에서 왔다갔다 하던 그의 꼬마 아가씨는 이제는 그의 가슴팍까지 키가 크고 말아, 앙상하니 맑고 푸른 눈은 화로 인해 탁하게 번뜩였지. 언제 이렇게 컸을까. 나의 아이는. 죄인은 침묵했어.
한참 그렇게 감정을 쏟아내고서야, 드레닌은 대답없는 쿠르네에게 지쳐 숨을 삭혔지. 그제야 지긋지긋한 환경에서 벗어나 쿠르네를 똑바로 볼 수 있었어. 분노에 지친 사람은 시야가 좁아지거든. 등만 보고 자랐던 아버지, 분노에 점철되어 보고 자란 아버지가 조금 작아보여서, 드레닌은 흠칫 물러났다. 그는 생각보다 더 말랐고, 더 지쳤고, 덜 못되보였어. 사랑하던 아내가 떠나간 그는 어떻게 살아왔을 까. 겨우 8살에 총을 쥔 제 딸아이를 보고 그는 왜 수녀원에 보낼 결심을 세운 걸까. 분노로 미뤄뒀던 생각이 혼란스러워, 드레닌은 뒤를 돌았다.
미안하다고 라고 하지. 쿠르네는 끝까지 말이 없었어. 그저 멀어지는 발걸음 없이 한참을 제 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겠지.


3.드레닌은 집을 나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18세의 갓 성인이 된 여자가 파리에서 혼자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직업은 삯바느질, 아니면 품팔이 뿐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것도 어릴 때부터 해온 기술이 필요하다. 수녀원에서 배운 것이라곤 약간의 바느질과 가갸거겨 읽고 쓰기뿐이다. 그녀는 새벽부터 나가 날품팔이, 좀도둑질을 하고, 해가 다 진 저녁에서야 집에 들어와 양초를 밝히는 쿠르네를 등지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약해보이던 쿠르네의 인상과 무색하게, 그는 다시 경박하고, 멍청하고, 시끄럽게 바뀌었다, 딱하나 예전과 다른 것은 더 이상 드레닌에게 말을 걸지 않는 다는 것뿐이다. 부녀였다. 한 집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일들이었다. 쿠르네는 혁명을 원하는 이들과의 교류를 끊지 않았고, 조금씩, 조금씩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혁명을 원했다.
어느 날엔가, 군인들이 드레닌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드레닌에게 정중하게 가만히 있어달라고 부탁하곤, 온 집안을 들쑤신다. 어차피 뒤질 것도 없는 작은 두 칸 방이다. 드레닌은 애써 낡은 마루바닥 중 미묘하게 들린 부분에 눈이 가지 않도록 시선을 위로 향했다. 총 두 자루가 그 안에 숨겨져 있었다. 상당한 양의 화약과 함께. 가죽으로 둘러 싸매뒀으니 냄새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쿠르네는 부재. 아버지는 어디 있나? 군인의 질문에 드레닌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말 모르기도 하고, 알고 싶지도 않고. 추측성의 답이라도 해달라는 요청에 드레닌은 술집 어딘가에 취해 골아 떨어져 있으리라고 답했다. 틀린 말도 아니니까. 군인은 한참 그녀를 미심쩍게 쳐다보다가 물러났다. 쿠르네가 새벽이 되어서야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돌아왔으니,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 셈이다.

“드레닌.”
늦은 낮이 되어서야 술이 깬 쿠르네는 실실 웃으며 드레닌에게 말을 건다. 필요한 대화가 아니면 한 달이 넘도록 2마디 이상 오간 적이 없는 부녀간의 대화. 그 불안정한 평화를 쿠르네는 기어코 깨트리고 만다. 못들은 척 아궁이 앞에서 스프를 끓이던 드레닌은 힐끗 그를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히죽이는 얼굴이 퍽이나 거울 속의 자신과 닮았다. 가면 갈수록 닮아가는 구나. 달갑지 않은 사실을 하나 더 알아가며 드레닌은 약간 미간을 찌푸린다.

“오늘 일하러 가나?”

"알아서 뭐하게.”

“아빠랑.. 아니다. 나랑 어디 좀 가자.”“전에도 경고했지만 그 술 냄새나는 애새끼들한테 데려가면 폐에 바람구멍 뚫어버릴 거니까.”

“절대 아니야. 약속하지.”
네가 언제 약속 제대로 지킨 적은 있어? 라는 가시 돋친 말이 혀끝까지 올라오지만 이내 삼키고 만다. 그녀는 미적미적 몸을 일으켜 쿠르네를 쫓았다. 그는 시장거리를 휘적휘적 지나가다가, 골목으로 들어간다. 길거리를 떠도는 아이 하나가 골목에 기대어 자고, 고양이 한 마리가 허겁지겁 훔친 고깃덩이를 씹는다. 안으로, 더 안으로. 파리의 골목은 복잡하다. 이를 제 손바닥처럼 다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는 이내 건물과 건물 좁은 사이에 낡은 천으로 얼기설기 엮은 천막 같은 곳까지 드레닌을 안내했다. 들어가. 불신으로 가득찬 드레닌의 등을 떠민 쿠르네는 넉살좋은 웃음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간다.
어둑한 천막 안쪽에선 향초냄새가 난다. 은은하게 양초가 피어오르는 그 뒤에 딱 봐도 집시로 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여자인가? 남자인가? 엘랑 집안 사람들은 전부 유니섹스한 느낌이 크다. 노인은 늙어 있고, 긴 머리타래를 곱게 땋았기에 더더욱 구분이 가지 않았다. 드레닌은 막연히 그녀가 엘랑 집안의 인물이리라 생각했다. 전체적으로 희끗한 머리카락이지만, 머리 뿌리부분만 조금 짙었다. 자랄수록 색이 빠지는 머리카락 역시 엘랑 집안의 특징이었다.

“누구야?”

“네 고모할머니..일걸 아마.”
허허, 사람 좋게 넘어가려 해도 애초에 실비아와 쿠르네를 제외한 친척을 본 적이 없는 드레닌이다. 고아원에서 자랐다면서. 친척 없었다면서.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총이 따갑자 쿠르네는 못이기는 척 털어놓고 만다. 아주 최근에 찾았다고, 아마도 친할아버지의 사촌. 그러니까 이 괴상한 머리카락은 집시 쪽 유전자에서 물려나온 셈이다.

“그래서 여긴 왜 왔는데.”

“그림이나 그려달라고 할까 해서.”
이분 그림실력이 아주 좋아. 인상이 더 일그러지는 드레닌에게 쿠르네는 변죽 좋게 웃어보였다. 진정해, 그냥 초상화 하나만 그리자. 응? 드레닌은 쿠르네의 정면 얼굴에 약했다. 그녀는 최대한 쿠르네를 향해 눈을 부라리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1시간이야, 그녀는 더러운 방석 중에 하나에 털썩 주저앉는다. 낡은 터번 같은 비니에, 스카프. 쿠르네는 평소 입는 그 넝마 같은 정장. 둘 다 다리를 잡자 말이 없던 노인은 히죽 웃더니 작은 돌 위로 붓을 움직인다.

“있지, 있지. 드리.”

“말 걸지 마. 얼굴 잘못 그려지면 책임질 거야?”

“여기 오는 길 외웠지?”

“알게 뭐야.”
퉁명스럽게 대답하지만 외웠다. 힐끗 쿠르네를 올려다보니 그는 정말 오랜만에 히죽이는 웃음이 아닌 정상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묘하게 주말에 놀러다녀주던 아비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아 그녀는 급하게 시선을 돌린다. 지금 와서 이 관계의 골이 매워지길 바라는 건가? 그건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고, 소용없는 짓이다. 묘하게 쿠르네는 피곤해 보였다. 슬퍼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긴긴 머리카락 타래가 드레닌의 등에 부딪혀 간지러웠다. 그림은 정말 금방 그려졌다. 쿠르네는 돌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는, 제 목에 걸었다. 뭐야, 가지고 다니려고? 불만 어린 목소리에 쿠르네는 허허 웃기만 했다. 집에는 알아서 가. 쿠르네의 말에 드레닌은 더더욱 성이 난다. 그래서 길 외웠냐고 물어봤을 것이 틀림없다. 뭐하려고. 술 좀 마시다 들어갈까 해서. 당연한 대답에 드레닌은 망설임 없이 뒤를 돈다.

“아가.”
한 번도 말을 건 적이 없는 노인이 그제야 드레닌을 불러 세운다. 그냥 뛰쳐나가 버릴까. 그녀는 전에 없는 자제심으로 그것만은 참았다. 문 앞에 것들 가져가렴. 문 앞에는 보따리 하나가 있었다. 드레닌은 그것을 거칠게 집어 든다.

“드리.”

“아 왜!”
이번에는 제 아비다. 뒤를 돈 드레닌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쿠르네는 2년 전의 그 날과 겹쳐보였다. 그 때 뒤돌고 있어 보지 못한 아비의 표정이 이랬을까. 쿠르네는 거의 인상을 찌푸리듯이 웃음 짓고, 손을 저어보였다. 그러니까, 조심해서 가라고. 마음에도 없는 걱정은. 드레닌은 부러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 그녀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 보따리를 품에 꼭 안은 채 도망치듯 천막을 벗어났다. 그녀는 집까지 뛰었다. 불안한 기분인지 뛰었기 때문인지, 심장은 영 진정하지를 못했다.


4.그리고 쿠르네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거리에 소문이 돌았어. 때는 7월. 난장패거리 몇몇이 거리를 장악하고 농성을 벌인다고. 왕에게 물러나라고 요구를 했다나. 드레닌은 모르는 척 하려고 했지. 하려고 했지만, 역시 못해. 그녀는 생 탕투안의 거리로 뛰어갔다. 170을 조금 넘는 키의 특이한 머리색을 가진 남자가 대장이 되어 벌이는 작은 전쟁. 그녀는 그 대장의 정체를 알았으니까. 그녀는 총을 쥐었다. 화약도 있었어. 싸울 수 있어. 멍청한 아비의 명치에 개머리판을 박아 주자. 얻어터지면 자신이 한 잘못을 알겠지. 이렇게 다신 안 돌아올 것처럼 멍청한 짓을 다해놓고, 또 딸을 버려두고 나가? 드레닌은 분노에 활활 불탔었다. 차라리 무시할 것을, 분노는 사람을 참 멍청하게 만들어.
그 뒤는, 뭐.

-여긴 어떻게 온거야! 드레닌! 물러나! 도망쳐 드레닌, 도망쳐!

-쿠르네! 아버지 안 돼!

-도망쳐 드레닌 멀리멀리 가. 얼른. 얼른!

-안 돼! 아버지. 나를 두고 가지 마세요. 아빠! 아빠!
깃발 위에 서있던 혁명의 상징은 공포에 가득 찬 아버지로 바뀐었어. 공포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지. 또다시 딸을 잃을까 두려움에 가득 찬 평범한 아버지일 뿐. 비명 지르는 드레닌 위로 얼룩한 망토가 감싸이고 다정한 목소리가 포성 사이로 드레닌의 귀에 들어온다. 뒤돌아보지 말고 뛰는 거야. 역시 갓 성년이 되어 아직 죽기 아깝다고 이야기를 들은 젊은 청년이 드레닌의 손을 이끌고, 좁은 바리케이드 구멍으로 억지로 쑤셔 넣어진 쿠르네는 이내 바리케이드 밖으로 빠져나오고 말아. 좁은 구멍 틈으로 그녀는 톡톡히 보았을거야. 가장 미워하는 이의 함락을. 바로 귀 옆에서 총성이 들리는 듯 착각과 함께, 찰나가 길게 늘어져, 색바랜 긴 갈색 머리카락이 쓰러지는 방향과 반대로 흩날렸으니까.
차라리 그때 죽어버릴 것을. 쿠르네는 죽지 않았었나봐. 곧 넋이 나간 드레닌이 있는 집으로 소환장이 하나 왔으니까. 쿠르네가 죽지 않은 채 잡혔고, 국왕에게 불충한 죄를 물어 교수형을 당했으니, 유품을 찾아오라는 명령이었으니까. 그녀는 아비의 목에 그어진 밧줄자국을 보았고, 바로 며칠 전 그린 초상이 있는 돌목걸이 하나만 손에 쥔 채 집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찾아갔는지,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생각은 비약하고,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한 대가는 커. 쌓인 오해와, 뒤틀린 진실과,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은 드레닌을 좀먹었지.
어느날 집 한구석에 놓인 보따리, 고모할머니일 사람이 줬을 그것을 풀어본 그녀는 그안에서 낡았지만 멀끔한 양복을 꺼냈다. 아마도 아비의 것일. 그녀는 그것을 입어보았어. 꼭 맞아. 그녀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어. 어떻게 걸었는지는 또 기억나지 않아. 많은 시간 굶고 말아, 그녀의 하늘은 노랗고 팽팽 돌았어. 그 와중에도 아비가 둘러준 얼룩덜룩한 망토와, 손에서 간신히 떼어내 목에 건 돌로 된 목걸이는 그대로였지. 상점가까지 걸어갔는데, 보석상 앞에 전신거울이 하나 있었어.
약간 몸집이 작고, 젊어 보이긴 하지만 아빠야. 거기엔 쿠르네가 서있었어. 잔뜩 지친 쿠르네. 어딘가 아플지도 모르는 쿠르네. 혁명에 실패하고, 동료도 잃고, 딸도 잃고, 총에 맞은걸로 모자라 교수형을 당한 그 남자. 나는 누구였지? 지금 거울 앞에 선 건 누구야?


그녀는 미쳤어. 불쌍한 드레닌. 그녀는 제 아빠와 자신을 혼동한 거야. 실비아가 질색할 만큼, 그들은 닮았었으니까.

망사랑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 댓글 피드백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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