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인이 레너드의 첫 사랑이었다는 썰을 전에 푼적이 있어서 그거 기반해서 써본 글(ㅋㅋㅋㅋ) 







첫 인상은 그냥 동네 형 이미지였다. 아버지가 담당하게 되었다며 데리고 왔던 학생 중 한 명으로. 늦은 시기에 아카데미에 들어갔지만, 출중한 재능으로 순식간에 치고 올라가는 사람이었다. 소위 말하는 천재, 라는 걸까. 번듯한 집안 배경과 달리 본인은 편하게(라고 쓰고 본인은 막 나간다고 표현했다) 생활하고 있는 듯 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그냥 동네 형 이미지였다. 평범한. 아버지를 워낙 믿고 따라서 그런지, 자주 집에 놀러왔었다. 애초에 아버지 밑에서 일을 했으니 더 그런 것 일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그 때 마다 아인은 제게 꼬맹이라 불렀다.


그것이, 아인과 레너드의 첫 만남이었다. 18살과 10살 때의 일이다.


마치 제 집인 것 마냥 능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을 열었다. 집은 사람이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아인은 들고 온 봉투를 식탁에 올려놓곤 집에 있을 레너드를 찾기 시작했다. 부엌을 통해 본 거실에는 없었다. 아니, 없는 게 맞나? 아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엌을 가로질러 거실로 걸어갔다. 괜히 발소리를 죽이며 간 거실 소파에는 모로 누워 덮은 담요 위로 읽다 만 책을 배 부근에 엎어둔 채 잠들어 있는 레너드가 있었다.


테라스의 문을 열어뒀던가? 레너드의 앞머리가 살짝 살랑 거렸다. 곤히 잠들어 있는 얼굴은 평범한 어린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인은 허리를 숙여 가만 잠든 얼굴을 바라봤다. 대장 말로는 어디가 아프다고 그러더니. 아파보이는 얼굴이라기 보단, 평온해 보였다. 아니, 좀 안색이 질려 있는 거 같기도 하고.

깨지 않을 것 같던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레너드가 곧 눈을 떴다. 아인은 소파 앞 방바닥에 주저앉고는 마치 제집인 양 TV를 틀며 말했다.


“뭐야, 왜 깨고 그래? 내가 와서 깼어? 대장 말로는 아프다며? 대장은 내가 무슨 보모인 줄 알아.”

“…아픈 건 아니에요. 그냥, 좀…. 아빠는요?”

“보고서가 많으시댄다. 그래서 내가 왔지. 저녁 안 먹었지? 밥 먹고 약이라도 먹어.”

“아픈 거 아니라니까요.”

“그럼 뭔데?”


레너드가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으며 입을 우물쭈물 거렸다. “할 말 있으면 그냥 말 해. 내가 뭐라고 할 것 같나.” 무심한 목소리로 아인이 말했다. 그래도 여전히 레너드는 할 말을 찾지 못 해 입을 벙긋거리다 다물었다.


“요 앞에서 누들 사왔어. 먹지?”


아인이 먼저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테이블에 둔 봉지에서 포장 용기를 꺼내서 뚜껑을 열 때 쯤 레너드가 눈치를 보며 부엌으로 들어왔다. 눈치를 보는 모양새에 아인이 살짝 인상을 썼다가 애 앞에서 뭔가 싶은 뒤늦은 후회에 금방 표정을 풀었다. 포장 용기 안에는 볶음 국수가 들어 있었다. 아인은 레너드 몫을 밀어주곤 말했다.


“좋아 아픈 건 아니라고 믿어줄게. 아무튼 앉아. 잘 거면 뭐라도 먹고 자라.”

“……잘 먹겠습니다.”


레너드는 더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로,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한 채 식탁에 앉았다. 자신의 아버지인 마이어는 어찌 보면 지독한 일벌레에 가까웠다. 왜, 어찌 보면 이라고 하냐면. 일만 한다고 하나 뿐인 아들을 무신경하게 두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마이어는 태생적으로 일이 쌓여 있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일을 빨리 끝내고 집에 돌아가 자신의 아들에게 모든 시간을 쏟는 걸 선호했다.


이런 식으로 일이 뜻하지 않게 길어질 때면, 잘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했지만. 물론 이 부탁의 대상은 대부분 아인이었다. 집이 가까운 게 가장 큰 이유일거다.

레너드는 젓가락으로 국수를 몇 번 휘적거리기만 하고 도통 먹지를 않았다. 아인은 제 몫의 국수를 두어 번 먹다가 영 줄어들지 않은 걸 보곤 입을 열었다.


“왜 안 먹어? 편식 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아니, 그냥 좀. 별로 배 안 고파서요.”

“저녁 안 먹었을 거 아냐? 점심은 먹었냐?”

“……아뇨, 그냥…….”

“점심도 안 먹었어?”


레너드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기 싫은 것인지 입을 꾹 다문 채로, 휘적거리던 국수 가락을 몇 가락 집어서 입에 넣고 한 참을 씹었다. 아인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며칠 전 마이어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임무가 끝나고 기관에 복귀한 뒤, 보고에 여유 시간 때였다. 마이어는 쉬는 시간에 마저도 무언가를 한참이나 찾아보고 있었고, 아인은 그런 그를 그냥 일벌레라고 생각했다. 질린 표정을 하고 마이어를 봤다. 따지고 보면 마이어는 아인에게 있어서 직속 상사나 다름없었다. 직속 상사에게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다니, 아마 마이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넘어가주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마이어는 그런 표정 같은 건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애초에 마이어는 아인을 제 부하직원이기 이전에, 막내 동생 같은 느낌으로 아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일이 바빠 제 아들을 돌봐주지 못할 때 부탁을 할 수 있는 편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고.


“아인. 너 혹시, 요즘 레너드한테 무슨 말 들은 거 없냐.”

“…뭔 말이요?”

“아니, 그냥. 요즘 뭔가 고민이 있는 거 같은데…….”

“그런 건 좀 직접 물어봐요.”

“…에이. 아빠한테는 말 못할 비밀 같은 거라도 있는 거 아닐까 해서 물어보는 거지. 그 녀석 너랑은 제법 친하게 노니까, 너한테 뭔가 말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 말에 쿠키 하나를 입에 넣으며 아인은 잠시 생각했다. 꼬맹이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애초에, 그런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없다. 마이어 힐의 외동아들인 레너드 힐은 애 답지 않게 조용했다. 녀석이 10살일 때, 마이어가 데리고 와서 처음 만났는데. 10살 치고는 당돌했고, 조용했다. 아이 같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아인은 그게 오히려 적당히 애 같다고 생각했다. 그냥 또래에 비해 얌전할 뿐이지, 결국엔 10살짜리는 10살짜리였다. 마이어는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얌전한 건 맞았다. 그 말에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마이어는 실라가 죽은 이후, 레너드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기관을 관둘 생각까지 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괜찮다고 했고, 마이어는 끝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결국 관두지는 않았고, 여러 가지 타협점을 얻어낸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벌레는 일벌레였다. 레너드 녀석도 커서 저렇게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아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 말 안 했는데요.”

“진짜 아무 말도 안 했어?”

“자기 아빠한테도 말 안 하는걸 왜 저한테 말을 해요. 아무리 나랑 친해도 나랑은 남인데. 근데 걔 아카데미 들어갑니까?”

“……뭐. 남이긴 하지. 그래도, 친하잖아. 레너드가 제법 잘 따르고. 어, 조만간.”


마이어는 그렇게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답지 않게 기운이 없었다. 아니, 기운이 없다기 보단 어딘가 걱정스러운 것 같이 느껴졌다.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검사에서 정신계 중에서도 제법 강한 에고인 걸로 확인 됐는데, 마냥 좋아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그렇지.”

“강하다면 어느 정돈데요?”

“일단 나보다는 높게 나왔어. 실라의 영향일 수도 있고…애초에 나는, 에고가 뛰어난 편은 아니니까.”

“그건 그렇죠. 대장은 데스크 업무에 최적화 되어 있지.”


킬킬 웃으며 아인이 말했다. 제법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마이어는 기분이 나쁘긴 커녕 그냥 사람 좋은 웃음만 지어보였다.


“실라가 살아 있었으면 좋았을 걸.”


그 말에 아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이어도 더 말은 하지 않고, 찾아보던 자료만 좀 더 훑더니 금방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가끔 나대신 좀 신경 좀 써줘. 사춘기가 오는 걸 수도 있잖아.”

“이보세요. 아직 12살 밖에 안 된 사내애한테 무슨.”

“왜, 요즘 애들은 사춘기도 빠르게 온다던데.”


왜 그런 말이 떠오르는지. 아인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제 몫의 음식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레너드는 여전히 먹는 둥, 마는 둥의 태도였다. 결국 아인은 몇 번 더 먹다가, 젓가락을 내려놓곤 레너드를 바라봤다. 가리는 음식은 몇 개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것도 전에는 잘 먹었던 것 같은데.





“……너 진짜 무슨 고민 있냐?”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아니……아님 됐고. 고민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고. 그럼 왜 그래? 먹는 게 왜 이렇게 시원찮아?”

“……그냥…. 별 거 아닌데요.”

“누가 봐도 별 거 있는 얼굴이거든?”


아인의 말에 레너드는 뭐라고 대답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장한테 말 안 할게.”

“……그러고 말 하러 갈 거잖아요.”

“안 한다니까.”

“……그냥 진짜 별 거 아닌데. 그냥 좀……가끔 맛이…….”


레너드는 거기 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답을 끝까지 듣기 위해 캐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저 억지로, 음식을 씹어 삼키는 12살짜리만 있었을 뿐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 아인은 제집인 것처럼 TV를 봤고 레너드는 소파에 앉아서 가만히 책을 읽었다. 12살짜리가 만화 영화도 안 보냐고 했더니, 책이 더 재미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참이나 TV를 보고 있을 때, 아인은 제 옆으로 책이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레너드가 읽고 있었던 책이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요즘 잘 나가는 소설이라고 했었던가.


“야, 꼬맹이. 책 떨어졌…….”


아인은 말을 다 끝내지 못 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 책을 읽고 있던 레너드가 어느새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파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잠들어 있는 모습에 아인은 금방 입을 다물었다. 어디 담요 같은 것이 없나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안방에서 담요를 가져와서 레너드의 몸에 덮어주곤 TV 소리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레너드는 평소와 달리 사온 음식의 절반도 먹지 못했다. 그나마 먹은 것도 억지로 먹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인은 레너드가 끝맺지 못했던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냥 입맛이 없다? 단순히 배가 안 고프다? 아마 그런 말은 아닐 것이다. 레너드는 맛이. 라고 말했다. 맛이 없었나?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몇 번 사온 적이 있었고, 잘 먹었었다. 그러면 뭐지. 맛이 없다는 게, 그냥 맛없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의미 그대로라면.


레너드는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아인은 저도 모르게 잠든 얼굴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봤다. 확실히 녀석은 또래에 비해 얌전하다. 아니, 어쩌면 바네사의 말대로 그냥 너무 빨리 철이 든 것일지도 몰랐다. 꼬맹이를 본 지 겨우 2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인은 가만히 잠든 레너드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바닥에 앉아서 TV만 봤다.






유난히도 여름 햇볕이 따가웠다. 레너드는 무사히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아버지인 마이어부터 시작해 기관의 요원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카데미 학생들이나 교사들에게도 여러 가지 관심을 받았었지만, 그것도 몇 달이 지나서는 조용해졌다. 17살이 된 지금까지 성적 우수, 교우 관계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에고의 수치도 매우 안정적이고 높아서 기관에서는 졸업을 하기도 전에 당장 들어와 임시 요원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물론 레너드의 주변 사람들이 그런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지만. 유난히도 따갑게 느껴지는 햇볕에 레너드는 손바닥으로 제 눈가로 쏟아지는 햇빛을 가리며 하늘을 바라봤다. 조금만 걸어도 등에 금방 땀이 맺혔다. 벌써부터 이 모양이라니. 나중에는 얼마나 더우려고. 레너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손 부채질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마이어는 바빴고, 정신이 없었다. 집안일의 대부분은 자신의 몫이었지만, 레너드는 그것에 대해 별 불만은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한테 맡길 바에는 자신이 하는 게 속이 편했기 때문이다. 마이어는 주변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손재주가 없었다. 아니, 기관에서 하는 일을 빼고는 다른 일들은 아예 못했다. 진짜로, 끔찍한 수준으로 못했다. 어릴 때야 그럴 수 있겠다 싶었지만, 아직도 별 변화가 없는 걸 보면…….


레너드는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뱉었다. 근처 마트로 가서 장을 보려는 찰나, 레너드의 핸드폰이 울려댔다. 적힌 이름은 아인이었다. ……왜 전화를 하지. 아직 6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할지도 모르니 그냥 전화를 받기로 했다. 그리고 전화를 받자마자 나온 아인의 말은 인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 사거리 지나서 있는 마트에 가려는 거지?”


대뜸 물어봐오는 질문에 레너드는 대답하지 못하고, 하? 하고 반문했다. 킥킥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맞구만. 그래서 오늘 저녁은 뭔데?”

“…그걸 선배가 알아서 뭐 하려고요.”

―“예전엔 형이라 불러놓고, 이제는 선배냐. 섭섭하게. 에이, 그냥. 메뉴 뭔지 궁금해서. 가서 얻어먹을까 하고.”

“밥 정도는 직접 차려 드세요. 제가 무슨 가정부도 아니고.”

―“에이. 예전에 내가 보모 해줬던 값 갚는 거라고 생각해라. 그리고 내가 있으면, 간도 봐주고 좋잖아.”

“애초에 레시피 대로 하면 간에는 아무 문제없는데요.”

―“야, 방금 그 소리는 대장이 들었으면 진짜 울었을 거다. 대장뿐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망금술사들이…”

“아. 시끄럽고. 어디 있어요? 지금 일할 때 아녜요?”


질문에 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 레너드는 제 등 뒤에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온 몸의 감각이 등에 집중되는 것만 같다. 쭈볏, 하고 서는 솜털과 함께 몸을 돌리니 곧 어깨에 아인이 한 손을 올리며 웃었다.


“어디 있긴. 뒤에 있었지.”

“……이거 하지 말아요. 진짜 기분 나쁜 상태 된다고요.”

“하이고. 아무튼 네 놈 에고도 까다롭다. 알았어, 미안해. 다음부터 안 그럴게.”

“지난번에도 그러셨거든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레너드가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고 먼저 걸어가는 레너드의 뒤를 따라, 아인은 설렁설렁 걸었다. 그래도 조그만 할 때는 좀 귀여웠는데, 요즘엔 그냥 잔소리만 한단 말이지.


“그래서 오늘 저녁은 진짜 뭐야.”

“안 알려드릴 건데요. 그보다 왜 여기 있어요. 일은요?”

“방금 끝났거든.”

“보고 또 다른 사람한테 넘긴 거 아니에요?”

“아니거든. 보고까지 하고 왔어. 그거 하고 가도 된다고 해서, 온 거라고.”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다. 왜 이 녀석에게 변명 아닌 변명 같은 걸 하고 있지. 아인은 저도 모르게 볼을 긁적였다. 레너드는 여전히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가면 이곳에서 제일 큰 마트가 나왔다.

마트에 다다르자 그제야 레너드가 아인을 돌아봤다. 제 옆에 있는 카트를 손에 가리키곤,


“선배가 끌어요. 얻어먹을 거면 이 정도는 해요.”


라고 말해왔다. 여기서 더 무어라 말을 하겠나. 아인은 “아이고, 네. 네.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카트를 하나 빼 끌었다. 레네드는 식료품을 꽤 신중하게 살폈다. 그냥 아무거나 사면되는 거 아니냐는 물음에 그래도 좀 괜찮은 걸 사야죠. 라는 답이 돌아왔다. 솔직히 제가 보기엔 그게 그거 같았지만 그런 말은 삼켰다. 카트에 하나 둘, 물건을 담는 걸 보다가 아인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요즘 대장 몸이 안 좋은 거 같던데.”

“쉬라고 해도 말을 안 들으시던데요. 그래서 콕스 요원님한테 설득 좀 해달라고 부탁해봤어요.”

“그러게, 왜 안 쉬지. 진짜 일벌레는 일벌레다. 넌 나중에 그렇게 되지 마라.”


그 말에 레너드는 그냥 웃었다. 과일 몇 개를 더 담고는 계산을 하니 장이 한가득 이었다. “차를 가져올 걸 그랬네.”라고 중얼거리자 레너드는 “집 가까우니까 됐어요.”라고 대답하며 묵직한 봉지 하나를 먼저 들었다. 아인도 봉지 하나를 들며 옆에서 걸었다.


“아카데미는 요즘 어때.”

“그냥 평범해요.”

“기관이 대장한테 가끔 네 이야기 물어보는 거 같더라. 너 나중에라도 기관에서 임시 요원으로라도 일 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보면 일단 안 된다고 해. 무조건 거절하란 거야. 혹시 모른다고, 이것저것 뭐 안 좋은 조건을 걸지.”

“기관이 왜 안 좋은 짓을 하겠어요?”

“요즘 좀 상태가 안 좋아서. 아마, 조만간 가지치기 같은 거 하겠지만.”

“그런 이야기 저한테 막 해도 되요?”

“못 들은 거로 해.”


그렇게 말하며 아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킬킬 웃었다. 레너드는 질렸다는 표정을 했다. 자신의 아버지도 언성을 높이며 통화를 하는 일이 제법 많았고, 아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요원들의 근무 시간이나 여러 가지들이 들쑥날쑥했다. 정치적인 일에 휘말린 사람들도 있었고, 누가 봐도 기관의 요원이 가지 않아도 될 장소에 요원을 대동하는 일도 있었다.


“아. 맞다. 오늘 저녁 좀 늦게 먹을 거예요.”

“대장 늦는대?”

“네, 뭐…. 좀 늦는다고 그러셔서. 오셨으니까 정원에 물이나 좀 주세요.”

“아주 부려 먹는구나…….”

“이럴 때 아니면 제가 어떻게 요원님을 부려먹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레너드가 웃었다. 제법 장난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집안에 들어가자마자 부엌에 봉지들을 내려놓곤, 레너드는 장 봐온 것들을 정리했다. 아인은 제집인 것 마냥 테라스의 문을 열고 나갔다. 호스를 찾아선 물을 틀어선 주변의 나무며 화분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어느 새 냉장고 정리를 다 끝냈는지 레너드가 열린 테라스 문에 서서 저를 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감시꾼이 붙었구만.”

“딱히 감시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 말 들으니까 감시해야겠어요. 얘는 물 줬어요? 얘는요? 여기는?”


누가 들어도 장난스런 목소리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아인은 그런 말에 킥킥 웃으면서 “뿌렸어, 줬어, 줬다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순간, 아인의 머릿속에 장난 하나가 떠올랐다. 여전히 밖은 더웠고, 해가 조금씩 지고 있더라도 더웠다. 시원한 바람은커녕 더운 열기를 머금은 바람이 피부를 간질였다. 테라스 문에 서 있던 레너드가 나와서, 화분들의 위치를 조금씩 조정하고 있는 것을 보곤 나지막이 그 이름을 불렀다.


“힐.”

“아, 왜요.”


레너드가 왜 부르냐는 듯 숙였던 몸을 들었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아인이 물줄기를 레너드를 향해 쐈다. 순식간에 얼굴과 몸이 물에 젖어서,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졌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레너드를 보곤 아인이 배를 붙잡고 웃었다.


“덥잖냐, 그래서 내가 시원하게 해줬어. 시원하지?”


킬킬 웃는 모습이 얄미웠다. 레너드는 대답 없이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집어 보다, 성큼성큼 아인을 향해 다가갔다. 아인은 여전히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인의 손에 들려 있던 호스가 레너드의 손으로 넘어간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잠깐 이라고 외칠 시간도 없었다. 아니, 별로 외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순식간에 레너드와 똑같이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됐다. 머리카락이 물을 먹어 축 늘어져, 얼굴에 달라붙었다. 담배 안 피고 있어서 다행이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인은 손으로 제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더 뿌려야겠다. 선배 키 크시라고.”

“키 커야 하는 건 너 아냐? 어?”


호스를 가지고 또 뿌리려는 걸 어떻게든 팔을 뻗어서 잡으려 했다. 레너드는 아인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치거나 교묘하게 옆으로 빠져나갔다. 호스를 타고 흐른 물이 관리 된 잔디와 돌바닥을 적셨다.


“이러다가 물밭 되겠네! 빨리 안 내놔?”

“내놓으면, 또 저한테 물 뿌릴 거잖아요.”

“당연하지!”

“그런데 어떻게 줘요! 못 주지!”


레너드가 혀까지 내밀며 호스를 손에 쥔 채로 조금 멀리 떨어졌다. 약 오르네. 에고를 쓸 수도 없고, 아인은 조금 고민하다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잠시 방법을 생각하기로 했다. 머리에서 물기가 떨어졌다. 꽤 떨어져서도 호스를 제 방향으로 해서는 계속 물을 뿌려대는 통에, 물이 마를 일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알았어, 이제 그만. 항복. 내가 잘못 했다.”

“이 정도로 벌써 항복해요? 의심스러운데.”

“넌 너무 의심이 많아. 항복이면 항복이지. 내가 너한테 거짓말 쳐서 뭐해?”

“뭐…더 괴롭힌다거나?”


레너드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웃었다. “그럼 물 좀 잠가요.” 말을 하면서도 아인을 향해서 여전히 물줄기가 향해 있었다. “적어도 물줄기 방향 정도는 돌리고 말 해.” 아인이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레너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지만, 레너드는 좀처럼 거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럴 때 아니면 선배를 언제 놀려요.”

“노인 공경해라, 노인 공경.”

“아직 25살 밖에 안 됐으면서 그런 말 하는 건 좀…양심이 안 아파요?”

“안 아픈데?”


뻔뻔한 얼굴로 당당한 목소리로 말해오는 꼴이 우스워서 웃음이 났다. 레너드는 결국 배를 잡은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아인은 숨소리도 죽인 채 성큼성큼 레너드에게로 다가갔다. 조금 늦게 눈치 챈 레너드가 뒷걸음질 하며 아인과 거리를 벌리려다, 물을 머근 잔디밭에 발이 미끄러지며 몸이 휘청였다. 놀란 아인이 그대로 팔부터 뻗어 뒤로 넘어가는 레너드의 몸을 받쳤지만, 이미 두 사람 다 쓰러진 뒤였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잔디밭이긴 했지만, 혹시 모르는 급한 마음에 발동 된 능력 덕에 레너드의 뒤통수는 무사했다. 제 밑에 깔린 레너드의 얼굴로,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꼭 우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레너드는 멍하니 누운 채로, 아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스는 잔디밭에 떨어진 채로 하염없이 물만 뿌려대고 있었고, 레너드는 급하게 팔을 올려서는 제 얼굴을 가렸다. 팔로 다 가려지지 않은 얼굴이 새빨갰다.


“비, 비켜요. 빨리…. 무겁다고요.”

“몸으로 누르지도 않았거든. 그보다, 머리 괜찮아?”

“괜, 괜찮으니까 만지지 말고……”


레너드의 말에도 아인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레너드의 머리를 살폈다. 레너드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어릴 때, 아버지의 소개로 알게 된 자신을 종종 돌봐주러 오는 형을 좋아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까. 아닐까. 제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냥, 단순히 대화를 하고, 같이 있거나 하는 건 괜찮은데…이건 너무 가까웠다. 심장이 팔딱, 팔딱 뛰었다. 너무 크게 들려서, 이 소리가 아인에게 들릴 까봐 괜한 걱정까지 들었다. 얼굴을 가린 팔을 쉽게 떼지 못 하겠다. 마른침만 꼴딱, 꼴딱 삼켰다.


“지……진짜,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떨어지라니까요.”

“팔 좀 떼 봐라. 얼굴은 왜 계속 가리고 있어? 혹시 어디 다쳤어?”

“안 다쳤어요. 다칠 게 어디 있다고.”


팔로 입가를 가린 채로 웅얼거리는 소리로 최대한 높여 말했다. 아인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레너드를 보다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이제 보니 바닥에 그대로 넘어진 탓에 레너드의 옷은 다 젖어 있었다. 레너드가 몸을 일으키는 사이, 아인은 호스에 연결 된 수도꼭지를 잠갔다.


여전히 앉아 있는 채로 상의 앞을 잡아서 우선 물기만 짜내고 있었다. 물에 젖은 얇은 옷 때문에 피부가 비쳐보였다. 요즘 애들은 원래 다 저렇게 피부가 좋던가. 남자, 여자 상관없이? 진정하자. 아인, 넌 성인이다……쟨 아직 학생이고 미성년자고……넌 이성이 박힌 성인이다…. 그런 주문을 걸며 아인은 숨을 골랐다.


옷의 물기를 대충 짜내곤, 레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다 또 한 번 몸이 휘청거렸다. 아인이 당황해선 그대로 달려가 레너드의 팔을 붙잡았다. 미끄러지던 몸이 그대로 아인의 품으로 떨어졌다. 자신이 아인의 품에 안겼다는 걸 깨달은 레너드가 다급해하며 팔로 아인의 몸을 밀어내며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니, 그, 안 미끄러질 수 있었어요.”

“어, 그래. 잘도 그랬겠다.”

“진짜거든요. 이렇게, 안 해주셨어도…….”


아인이 눈을 가늘게 뜨곤 바라봤다. 레너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아인이 제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살짝 몸을 숙이고, 예고도 없이 들어 온 얼굴 때문에 너무 놀라 딸꾹질을 할 뻔했다. 입술이 닿을락말락한 거리였다. 숨소리가 간질거렸다. 얼굴이며,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몸이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아인의 얼굴을 치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테라스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


왜 대체 자신을 저렇게 빤히 쳐다볼까. 선명한 호박색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니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제대로 된 사고가 돌아가질 않았다. 이성이 아니라 그냥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라고 생각한 순간 제 입술은 이미 아인의 입술에 닿아있었다. 아주 살짝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생각과 동시에 레너드의 얼굴이 보다 더 빨개졌다. 팔을 뻗어선, 다급하게 아인을 밀어내며 누가 들어도 어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 저 씻고 옷 갈아입을게요. 선배 갈아입을 옷 드려요?”


아인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레너드는 얼른 그 장소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아인의 몸을 거의 밀다 시피 하고는 열린 테라스의 문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레너드는 먼저 씻고 옷 까지 갈아입은 채로 나왔다. 품에는 아인이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 있었다. 아마 마이어의 옷 일터였다. 아인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대충 털며, 레너드가 갈아입을 옷을 두는 걸 가만히 바라봤다.

아까 왜 그랬어? 라고 물어보기엔……조금, 타이밍이 늦었다. 레너드를 집요하게 바라보면, 레너드는 그 시선을 피했다. 확실히 의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샤워, 안 하셔도 돼요?”

“……그렇게 많이 안 젖었어. 대충 물로 닦아내면 돼.”


아인은 갈아입을 옷을 손에 쥔 채로, 욕실에 가려다 말고 도망치듯 냉장고를 살피는 레너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갈아입을 옷을 욕실 한 쪽에 두고선 슬쩍 레너드를 불렀다.


“야, 힐.”

“……왜요?”


불린 이름에 어깨가 순간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냉장고에서 저녁으로 먹을 재료들을 꺼내고 있었다.


“잠깐 나 좀 봐.”

“……왜, 왜요. 말은 얼굴 안 봐도 할 수 있잖아요. 얼른 옷 갈아입고 와서 도와주기나 해요.”


평소와 같이 말하고 있지만 목소리 어딘가 조금 떨려 있었다. 아인은 뭔가 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인은 욕실에 들어가서 금방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기척도 없이 부엌으로 와서는 채소를 썰고 있는 레너드의 옆에 섰다.


“도와달라며?”

“……생각해보니까 별로 안 도와주셔도 될 거 같아요.”


그 잠깐사이에 많이 침착해졌는지,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없었다. 아인은 조금 복잡한 기분이었다. 직접적으로 물어본다면 분명 돌아오는 대답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안 물어보자니……. 저도 모르게 레너드의 근처를 빙빙 돌았다. 레너드는 신경은 쓰이지만 쉽게 말을 꺼내진 못 하고 있었고, 아인은 그런 레너드를 보다 참지 못 하고 이름을 불렀다.


“레너드.”

“아, 왜요! 칼질하잖아요!”


어느새 평소의 레너드로 돌아와 있었다. 저를 부른 아인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빤히 보고 있었는지, 돌리자마자 보인 얼굴이 바로 코앞이었다. 레너드는 놀라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입술이 아주 조금 스치듯 닿았던 것 같다.


“……그냥.”


심장이 또 다시 쿵쾅거렸다. 레너드는 겨우 침착을 되찾으며, 고개를 획 돌렸다. “……놀랐잖아요. 칼 들고 있는 사람 그렇게 놀래 켜지 마세요.” 라고 최대한 침착함으로 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뒤에 저녁은 어떻게 먹었더라.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것도 같은데. 그런 복잡한 생각과 감정들도 저녁 자리에서 마이어의 심상치 않은 기침 소리에 전부 없어졌다. 에고를 가진 사람들은 보통 그 흔한 감기도 걸리는 일이 없었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보통 에고가 난리를 피우는 정도였으니까. 그런 아버지가 심상치 않은 기침 소리를 냈다. 레너드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결국 밥을 먹고, 설거지 까지 끝낸 뒤에 레너드는 마이어의 등을 떠밀어서 얼른 잠에 들게 했다. 옆에서 아인도 그런 레너드의 행동에 힘을 실어주듯 말을 실었다. “그러니까 제때, 제때 쉬셔야 한다니까요.” 라고 조금 퉁명스런 아인의 말에 마이어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미안, 미안.” 하고 말하면서 결국 침대에 누운 그가 잠드는 건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나, 그럼 간다.”

“…그냥, 주무시고 가는 게…낫지 않아요?”

“됐어. 옷은 내일 돌려줄게. 너도 잘 자고.”


레너드는 복잡한 표정을 한 채로 고개만 끄덕이며 아인을 배웅했다. 확실히, 자고 가는 것 보단……그런 게 나을 거 같긴 하지만. 저도 모르게 괜히 입술을 문질렀다. 기분이 이상했다.





레너드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눈을 떴다. “레너드.”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선배 목소리인데. 눈을 뜨고 보인 광경은 바로 제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인의 모습이었다. 양 다리 사이에 잡은 아인을 보자마자 레너드는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엉덩이에 묵직한 무언가가 눌려왔다. 본능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레너드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왜? 이렇게 하고 싶었던 거 아냐?”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몸만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해봤지만, 좀처럼 되지 않았다. 아인의 손이 옷 안을 밀고 들어왔다. 따끈한 피부의 위로 차가운 손이 닿아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아인의 얼굴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 이러고 싶었을 거 아냐.”라고 말해오는 얼굴이 상냥하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그대로 입술이 닿았다. 정원에서, 아주 짧게 했던 입맞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느릿하게, 혀를 얽으며 해오는 입맞춤에 숨을 쉬는 것이 힘겨웠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갑자기 오른 열기에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겨우 입술이 떨어졌을 때, 레너드는 잔뜩 달아오른 숨만 헐떡거렸다. “귀엽네.” 아인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거, 꿈이구나. 이거……. 레너드는 가쁜 숨만 뱉으며, 제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벌떡. 하고 몸을 일으키며 꿈에서 깼다. 비명도 내지르지 못 했다. 속옷이 축축하고 찝찝했다. 레너드는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막 꿈까지 꾼 적은 없었는데.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나도 이성 잡느라 힘들었다(???)  

아인은 바보야.. 왜 레너드가 널 자빠지게 할 거란 생각은 안 해... (자기가 써놓고 이런 말 하고 있음) 



272장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