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한창 서류와 씨름을 하던 찰스가 그제야 고개를 든다. 눈앞에 보인 건, 자신의 책상 위에 둥둥 떠 있는 찻잔이었다. 거의 흔들림 없이 티스푼까지 곁들인 서비스를 본 찰스가 미소 지었다.


“고맙구나, 진.”


찻잔을 받아들자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진이 제 몫의 코코아를 든 채 찰스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학생들의 짤막한 기록을 모아둔 페이지에서 진의 이름을 찾은 찰스가 ‘안정적인 염력’ 이라고 덧붙여두었다. 카이로에서의 일 후로, 진은 확실히 좋아졌다. 진은 그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다. 악몽이나 트라우마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큰 일을 겪은 거잖아요. 하지만 그녀를 비롯한 베이비들은 전부 오히려 괜찮아졌다. 너희들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직접 증명해 보인 거니까. 찰스의 말에 아이들은 여전히 애매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든 진은 능력이 안정되었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에도 아이들과 잘 어울리기 시작했다. 찰스는 안심했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이제 고민을 말할 결심이 섰나 보구나.”


그 말에 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는 머릿속의 목소리만 듣는 건 아니잖니.”


가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더구나. 찰스는 그런 진의 표정을 알았지만 굳이 먼저 묻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의미로 조심스러운 사람이었고, 찰스는 그것을 존중했다. 동시에 언젠가 진이 자신에게 그것을 말할 것도 알았다. 찰스가 그녀를 머릿속으로 불러 들여온 만큼, 진 또한 자신을 신뢰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찰스는 책상 앞의 의자를 눈짓했고, 진은 여전히 조금 고민하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찰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천천히 말해보렴.”

“저는…”


진이 머뭇거렸다. 찰스는 재촉하는 대신, 진이 타온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전에 찰스가 대량으로 구매했던 찻잔과는 전혀 다른 디자인. 레이븐의 취향은 찰스보다도 심플하고 무던했다. 그녀는 찻잔이 왜 필요한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머그컵으로 다 사면 안 돼? 투덜거리면서도 그녀와 행크는 부지런히 차로 도시를 오가며 물건을 사다 날랐었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다를 게 없었지만-부서진 그 파편 그대로 재건했으니-여러 가지로 많은 것들이 변한 자비에 스쿨을, 찰스 자비에는 여전히 사랑했다. 돌아온 사람도 있었고, 결국 머물다 떠난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제 이야기는 아니에요.”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컵을 만지작거리며 정말로요. 하고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녀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정확히는 그게 궁금해서, 교수님을 찾아온 거니까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진은 찰스의 수업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을 마주했을 때보다도 난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찰스가 잔을 내려놓고는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러면 진, 혹시 내가…?” 그리고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아니, 안 돼요. 교수님.”


찰스가 눈썹을 살짝 찡그린다. 진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이건… 말로 해야 하고, 말로 들어야 해요. 그래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교수님께요.”


진은 힘겨운 일을 하는 것처럼 잔뜩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감정을 읽고 내보내는 일을 하는 텔레패스의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완벽하게 감응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 그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찰스는 논문을 쓰는 직업을 택했다. 찰스는 깍지를 끼고 등받이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그렇다면 나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편하게 이야기하렴.”


나는 마음만 아니라 이야기의 조각도 찾아내는 법을 오랫동안 연구했단다. 찰스의 자상한 말에도 진은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빤한 시선에, 찰스는 약간 의아해졌다. 왜, 하는 질문이 나오기 전에 차분해진 진의 입술이 열린다.


“누군가를… 생각해요.”

“진?”

“누군가를 생각해요. 아주 많이요. 그러니까, 빈도도 그렇지만 강력하게요. 아주 강력하게요. 그걸 힘으로 치환한다면 온몸이 울릴 만큼. 그 생각이 정확하게 나누어지진 않아요. 조금 불분명하고… 복잡해요. 아주 큰 것도 있고, 아주 사소한 것도 있어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그러니까. 생각하고 있어요. 걱정도 하고, 안쓰러워도 하고, 증오도 하고, 숭배도 해요.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나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사실 모든 걸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도 잘 모르겠어요. 알고 싶은지도 모르겠어요. 그건 조금 두려워서요. 뭐가 두려운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 생각과 감정 모든 게, 정말로 하나도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에요.”

“진.”

“교수님도… 아시잖아요. 감정을 읽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특히 저는, 물론 교수님도 제 나이 때 그랬겠지만, 제가 겪지 못한… 감정들이 밀려오면 너무 어려워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마찬가지로 제가 텔레패스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감응하게 되어 있어요. 따지자면 색처럼요.”


그 말을 마치고, 진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찰스는 그녀의 리듬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대답하지 않았다. 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모든 색의 이름을 알지 못하잖아요. 하지만 그게 어떤 계열의 색인지는 알잖아요. 보이니까. 모든 바리에이션을 구분하지 못하더라도, 이건 빨강 계열. 이건 노랑 계열. 이렇게 나누듯이. 저는 제가 알지 못하는 많은 감정들을 색처럼 가늠해서 구분해둬요.”


그리고 진이 고개를 들어, 찰스를 바라본다.


“하지만 이건 모르겠어요. 아예 무슨 색인지조차… 구분이 안 돼요. 많은 분노도 느끼고, 많은 동정도 느끼고, 많은 애정도 느껴요. 온몸을 던지고 싶다가도, 털끝 하나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기도 해요. 욕망을 느끼는 것 같다가도 계산적으로 관계의 거리를 재어보려 이성적으로 굴기도 해요. 너무… 어려워요. 모든 색이 다 섞인 것 같아요. 어떤 것도 약하지 않고 모두 강렬해서 특정할 수 없어요. 살면서 이런 건 처음이에요.”


이런 감정은 처음이에요, 교수님. 그 말을 속삭이는 진의 눈은 젖어 있었다. 찰스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까 했지만 관뒀다. 그녀가 먼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기 때문에. 진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진.”


찰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린다. 진은 손을 내리고, 찰스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따뜻한 램프의 조명에 반사되듯 밝은 하늘색을 가진 눈동자. 그러나 조금 움직이면,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선 짙은 바다색을 띤다.


“이 말을 해서, 너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저는… 쭉 고민해왔어요. 이제는 답이 정말 궁금할 만큼.”


카이로에서의 일 이후에요. 덧붙인 그녀의 말에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그가 낼 수 있는 가장 상냥하고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진에게 물었다.


“너를 그렇게 사랑에 빠지게 한 사람이 누군지 내게 말해주겠니?”


그 말에, 진의 표정이 덜컥 굳는다. 찰스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눈을 접어 웃어 주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그러지 않아도 돼. 그건 놀라울 만큼 대단한 감정이고, 그래서 굉장히 소중하니까. 네가 존중받았으면 좋겠구나.”

“교수님.”

“내가 섣불리 판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주렴. 왜냐면 나도 분명히 그런 감정을 겪었고…”

“찰스.”


진의 부름에, 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진의 표정은 아까와 달리 단호했다. 그녀는 놀라 있었지만 확실히 정리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에 확신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 감정이 사랑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왜 굳이 그에게 묻기 위해-


“오, 진.”


찰스가 얼굴을 감쌌다. 그의 손가락이 잘게 떨린다. 얼굴을 가린 사이로 진의 목소리가 천천히 들어왔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천천히 풀어놓은 기억이 찰스의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그녀의 기억이되 그녀만의 기억은 아니었다. 그 기억은, 그 선명한 감정은 누구보다 찰스가 잘 아는 것이었다.


“네가 어떻게…”

“카이로에서요.”


진이 눈을 감았다. 죄송해요.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찰스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교수님을 도우러 교수님의 머릿속으로 들어갔을 때, 쏟아져 들어와서.”

“진. 나는…”

“죄송해요. 하지만 도저히 떨쳐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어요.”


너무 깊었고, 그래서 생경했어요. 진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찰스에게서 시선을 애써 돌리며 손끝을 매만졌다. 그런 색은 처음 봤어요. 아니, 그런 감정은요. 찰스는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많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부끄럽기도 했고, 후련하기도 했고, 얻어맞은 것처럼 숨이 막히기도 했다. 이것 또한 제대로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겠지. 찰스는 이것이 익숙했다. 그에 관해서라면 모든 게 이런 식으로 굴러갔으니.


“…그 사람이죠?”


이번에는 진이 기다릴 차례였다. 오랫동안 자신의 손바닥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든 찰스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매그니토.”

“내게는 에릭이지.”

“죄송해요. 이런 식으로… 교수님을 곤란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찰스는 기가 죽은 듯한 진에게 웃어 보였다. 살짝 눈썹을 끌어내린 탓에 그는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진은 찰스를 보았다.


“너를 내 머릿속으로 들이면서 그 걱정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

“그 정도로 그 사람이 교수님께…”


찰스가 가만히 입술을 끌어올린다.


“내 분노와 슬픔, 그리고 환희까지. 모든 순간에 함께 있었던 사람이잖니.”


나는 그 때문에 휠체어에 앉았고, 지금은 머리카락도 잃었고. 찰스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날았다. 하지만 얻은 것도 많았지. 그것들은 모두 남겨진 것으로 되어 버렸지만, 얻었을 때의 기쁨 또한 내게는 너무나도.


“상실감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게 사랑인지, 조금 헷갈렸어요.”

“모든 것이 충만한 사랑의 경우는 아주 드물단다.”


물론 내 인생은 줄곧, 에릭에 관해서는 계속해서 상실의 기록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그 부분이 너무 많지만. 찰스가 눈을 깜빡였다. 진이 가늘게 숨을 참았다. 그녀의 눈가가 다시 젖는 것을 본 찰스가,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손수건을 내밀었다.


“텔레파시도 아닌데 눈물을 흘리다니, 진.”

“그 정도로 강렬했으니까요. 교수님의 감정이.”


그래서 찰스는 순순히 웃어 주었다. 고맙구나. 누군가 그의 사랑을 위해 울어준다는 것은, 그의 사랑이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는 것이기도 했다.


“왜… 그를 보냈나요. 그는 여기서 우리와 함께 지냈었잖아요.”

“그는 나와 많이 다른 사람이니까. 그를 또 가둘 수는 없었어.”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요, 교수님. 어쩌면 그도…”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단다. 너도 보았잖니. 카이로에서.”

“하지만 그는 결국 교수님을 지키러 돌아왔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떠난 거란다.”


그 말에 진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너무 어려워요.


“곁에 있을 때 더욱 서로를 지키지 못하는 관계도 있는 거야.”

“같이 있으면 서로 상처를 주기 때문에요?”


찰스는 나직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많은 시간이 그것을 증명해 왔지. 진은 다시 눈물이 고이려는 것을 참았다.


“대신 에릭은 헬멧을 두고 떠났단다. 나는 가끔 그가 어디에서 잠들어 있는지 확인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도 내가 그러길 바랐고.”

“그건 너무… 슬픈 것 같아요.”

“네가 읽은 감정 중 슬픔도 아주 컸지.”


시간을 먹고 자란 감정들은 모두 비중이 컸다. 진은 느리게 찰스를 올려본다. 진이 속삭이듯 물었다. 왜 같이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 말에는 찰스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다.


“내가 너를, 아이들을, 그리고 모두를 두고? 이곳을?”

“하지만 교수님은 그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잖아요.”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겠구나.”


네가 이 긍정에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고. 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읽은 감정은 너무나도 강하고 깊은 것이라, 진은 아직까지 찰스가 에릭을 따라 학교를 떠나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이제는 너무 늦었지.”


시간이 허락했다면 떠났을지도 모른다. 찰스는 그리 생각했다. 에릭이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그의 발아래 엎드려 울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발목을 자르고 싶기도 했다. 그를 끌어안고 소리 지르고 싶기도 했고 그를 끌어안고 죽고 싶기도 했다. 잠든 에릭의 머리맡에서 찰스는 영겁의 시간처럼 제 감정의 모든 역사를 훑었다. 에릭은 고작, 무겁지 않은 숨소리를 흘려 보내며 죽은 듯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면 찰스는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손끝으로 덧그린 얼굴을 따라 머릿속에 새겼다. 기억할 수 있도록. 그 손길에 에릭의 표정이 잠깐씩 굳거나 웃을 때면 그것도 고스란히 떠올리고 싶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때 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랑블루Le Grand Bleu.”


찰스가 고개를 들어 상념에서 빠져나온다. 진은 뺨을 닦으며 말했다.


“교수님 눈이요.”

“내 눈?”


진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눈을 볼 수 없는데. 찰스가 작게 대답하자, 진이 눈을 감으며 웃었다.


“아주 넓은 바다 같다고 그랬어요.”


그 말에, 찰스가 그대로 굳는다.


“가만히 바라보면 아주 큰 바다에서 혼자 표류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무섭다가도.”


온 감정이 휘몰아치고 남은 잔잔한 바다 같은 눈동자. 커다란 파도가 그의 눈동자 안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진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뛰어들고 싶다고.”


너의 바다 속으로, 찰스.

그가 오랫동안, 그리고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온다. 찰스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진은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교수가 혼자 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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