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천 시간대의 얼마 안 되는 평화로운 어느 날 중의 하루였으면 하는 바람





결국 알피노가 감기에 걸렸다. 

요사이 힘든 일정을 소화하느라 무리하기도 했지만 커르다스의 찬바람을 며칠 맞았더니 대번에 감기가 걸려버린 것이다. 당분간 쉬는 게 좋겠다고 해도 도통 말을 듣질 않다가 열이 펄펄 끓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지고 나서야 순순히 빛의 전사를 따른다. 포르탕 가에 손님 자격으로 머무르고는 있지만 앓아누운 모습까지 보여서 괜한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알피노의 사려 깊은 말에 빛의 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잊힌 기사 주점에 머물고 있던 타타루에게 부탁해 아홉 구름 여인숙에서 가장 상태가 괜찮은 방을 예약해 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관 개인실로 겨우 모셔온 알피노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꼬물꼬물 침대 속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똑똑히 확인하고서야 빛의 전사는 방을 나섰다. 알피노는 항상 자신이 빛의 전사에게서 너무 과한 보살핌을 받는 게 아닌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빛의 전사가 어떤 호들갑을 더해 가며 과잉보호하려 들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했는데.’

자신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되는 알피노였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무엇이든 강인하게 척척 해나가고 싶은데. 이렇게 침대 속에 들어앉은 유약한 모습을 알리제가 본다면 또 한소리 하겠지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노크 소리와 함께 빛의 전사가 다시 들어온다.

빛의 전사가 손에 든 쟁반 위에는 방금 만들었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수프 한 그릇과 약병 하나가 있다. 쟁반을 테이블 위에 두더니 떠먹여줄까 하고 묻는다. 알피노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곤 침대 밖으로 발을 빼꼼 내어 실내화를 신었다. 테이블 앞에 앉아 빛의 전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부어올라 따끔하던 목구멍이 진정되는 듯하다. 빛의 전사는 그걸 다 먹고 나면 반드시 이 약을 먹으라며 약병을 톡톡 친다.

맞은편에 앉아 알피노가 먹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빛의 전사가 문득 입을 연다.

“언젠가 떠도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감기 걸렸을 때엔 다른 사람에게 옮기면 빨리 낫는다더군.”

알피노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건 어떤 원리로 작용하는 거지? 신빙성이 있는 처방인가?”

“글쎄, 미신 같은 게 아닐까.”

알피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는 방법이라면……. 

알피노는 방금까지 자신이 쓰던 스푼으로 수프를 떠서 빛의 전사 쪽으로 내밀었다. 빛의 전사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한 음식을 한 식기로 먹음으로써 옮기는 방법이지. 어서 내 감기를 가져가 주게.”

빛의 전사가 갑자기 당황하여 횡설수설한다.

“그, 그걸 왜 나에게? 그리고 직접 옮겨야 효과가 있다고! 아니, 그럴걸? 아마도? 이런 간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장난일세. 그렇게까지 흥분할 일이었나……. 직접적인 방법은 또 뭐란 말인가?”

머쓱해진 빛의 전사가 괜한 헛기침을 한다.

“흠흠, 뭐 어쨌든. 타액의 직접적인 맞교환쯤 되어야 직접 옮기는 방법이지 않으려나.”

다시 생각에 잠겼던 알피노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그 변화를 포착한 빛의 전사가 슬쩍 말을 건네본다.

“혹시 그 방법도 시도해 보려고?”

“아, 아니! 그걸 누구에게!”

“정 없으면 여기에 실험해 봐도 괜찮은데.”

자신을 가리키며 헤벌쭉 웃는 빛의 전사를 말없이 바라보던 알피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찌 그리 잘도 하냐며 한마디 던지고는 먹던 수프를 마저 들었다.

그릇을 깨끗이 비운 알피노가 물약을 들이킨다. 빛의 전사는 식기와 빈 병을 정리한 쟁반을 들고 나가면서 알피노에게는 꼼짝 말고 침대에 누워 쉬라며 당부한다. 

그 말대로 알피노는 얌전히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다. 창밖은 아직 환한 낮이다. 잠이 오진 않아서 눈만 꿈뻑꿈뻑 하다가 아까 빛의 전사가 말했던 괴상한 처방에 대해 생각해본다. 자신의 입술이 누군가의 입술과 맞닿아 벌어지고, 끈적한 타액을 머금은 두 혀가 얽히며 오가는 상상. 약 기운 때문일까. 갑자기 열이 오르고 몽롱하다. 그리고 그 입술의 얼굴은…….


문이 벌컥 열리며 시커먼 그림자가 뛰어들어온다. 알피노는 공중으로 솟아오를 만큼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에스티니앙이었다.

“도련님 앓아누웠다는 소문을 듣고.”

기척도 없이 뛰어든 게 민망했던지 머리를 긁적이며 효력없는 변명을 한다.

“그 친구가 수프를 끓이네, 약을 짓네 하며 하도 부산 떨면서 돌아다니는 통에.” 

그러는 자신도 다급하게 구하러 뛰어다녔을 손에는 약병과 작은 꽃다발이 들려있다. 왜인지는 몰라도 알피노는 그것을 보고 방금 전까지 상상하던 타액의 직접적인 교환 방식을 다시 떠올리고 만다. 알피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본 에스티니앙은, 감기가 심하다더니 역시, 하며 알피노의 침대 곁으로 다가온다. 꽃다발은 협탁 위의 빈 꽃병에 대충 꽂아두고 침대에 걸터앉아 알피노의 이마를 짚어본다. 이마가 뜨거운 것을 확인하고는 들고 온 약병 뚜껑을 따 알피노에게 건넸다. 알피노는 이번에도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물약을 들이켰다.

“에스티니앙 공도 이곳에 머물고 있는 건가?”

“일단은. 야영하거나 다른 곳에서 지내느라 방을 비우는 날이 더 많긴 하지만.”

끊어진 대화를 더 잇지는 못하고, 다 마신 빈 약병만 쥐고서 잠잠히 앉아있으려니 다시 약 기운이 퍼지는지 나른해진다. 이때가 아니면 절대 하지 못할 말이 있었다.

“좀전에 들은 이야긴데, 감기는 다른 사람에게 옮겨야 빨리 낫는다고 하더군.”

에스티니앙이 웃었다.

“그래서 나한테 옮기시겠다?”

단번에 속내를 간파당한 알피노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도 하던 말은 멈추지 않는다.

“또 그게, 타액의…… 직접적인 접촉 방법이어야만 효력이…….”

순식간에 에스티니앙의 몸이 알피노 위로 훌쩍 올라왔다. 침대에 기대어 앉은 알피노의 머리 옆에 손을 짚고선 은근하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다.

“그래서, 각오는 되어 있겠지?”

각오를 하지 않았다면 꺼내지도 않았을 말이었다. 자못 굳은 결심을 한 터라 망설일 것도 없다. 그래도 부끄럽긴 했으므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에스티니앙이 덧붙인다.

“키스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거.”


알피노는 미처 그 이후의 것까지 각오할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키스 이후엔 뭐지?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건가? 물론 어떤 단계인지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다지만 자신이 실제로 그것을 행한다는 경우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다. 어쩌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만 에스티니앙 공 앞에서 벌벌 떨기만 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싫어. 그래도 키스는 하고 싶은걸. 두려워. 궁금해. 괜찮지 않을까. 에스티니앙 공이라면.

비록 발개진 얼굴이었으나 그 눈만은 당돌하게 에스티니앙을 마주하고 있다. 사실은 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뒤섞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만. 그런 알피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스티니앙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자그마한 머릿속에 몰아치는 생각들이 빤히 보이는 듯하다.

“도련님, 좀 더 자란 다음에 와서 도발하라고.”

그러고는 침대에서 내려서서 알피노의 이마를 한 번 더 짚어본다.

“열이 아까보다 더 올랐는데.”

알피노가 쥐고 있던 빈 약병을 챙겨서 방문을 나선다.

“그 친구 안 되겠어. 음흉한 이단의 처방이나 퍼뜨려서 괜히 사람 현혹시키고 말이야.”

문을 닫기 직전 에스티니앙이 한 말에 알피노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달아오른다.

방문을 닫고 나온 에스티니앙은 어찌된 일인지 문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다.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있더니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위험했다고, 도련님.”

손가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에스티니앙의 얼굴도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날 밤, 아홉 구름 여인숙의 어두컴컴한 복도를 휴대용 램프 불빛에 의지해 살금살금 걸어가는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에스티니앙이 묵고 있는 방 앞에 서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노크를 한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램프의 불빛과 함께 작은 그림자는 방 안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빛의 전사는 알피노의 방을 찾았다. 노크에 대답이 없어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알피노는 아직 잠들어 있다. 이마를 짚어보자 열은 이미 다 떨어졌다. 호흡도 편안하고 두 뺨의 홍조도 한결 옅어졌다. 항상 매끄럽던 입술이 약간 부르튼 듯이 보이는 것 외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다. 건조해서 입술이 텄나보다 여긴 빛의 전사는 습도를 조절할 넉넉한 물그릇이라도 가지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방문을 나섰다. 방문을 나오자마자 어쩐 일로 에스티니앙과 마주쳤는데 에스티니앙은 전에 없이 눈을 피하더니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얼굴이 왜 그래? 열이라도 나는 건가?”

빛의 전사가 묻는 말에 손사래를 치던 에스티니앙의 입에서 참다못한 호된 기침이 결국 튀어나오고 만다. 빛의 전사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찬다.

“아무래도 감기가 유행인가 보군. 다른 사람에게 감기를 옮기면 낫는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방법이 있다던데 자네도…….”

빛의 전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스티니앙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며 알피노의 방으로 얼른 들어가버린다. 설마 이제 막 감기 떨어진 애한테 옮기려는 건 아니겠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에스티니앙의 뒷모습을 좇던 빛의 전사는 물그릇 가지러 가는 김에 에스티니앙 몫의 약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아마도 자신의 본직은 보모가 아니었을까 하고.



에스티니앙은 알피노가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아직 곤히 자고 있는 알피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어젯밤 일을 떠올린다.

여기까지 용케도 찾아왔구나 싶었다. 얼마나 큰 용기를 냈을까도 싶었다. 방황하는 눈동자로 꽤나 당당히 입맞춤을 요구하던 너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다. 키스 이후의 그 어떤 것도 각오하고 왔다던 너의 떨리는 목소리를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널 잡고 끌어당겼을 때, 애처롭기까지 하던 네 눈빛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달고도 부드럽기 그지없던 네 입술과 한탄하듯 내뱉던 네 숨소리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밀어넣은 혀에 닿은 촉촉하고 따뜻한 네 혀가 수줍게 움직이던 그 감각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기어이 내 옷자락을 꼭 쥐어잡던 네 작은 손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대로 너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네 속살을 파헤치고 싶었다. 너를 가두고 있는 옷을 죄다 끌어내리고 네 모든 곳에 내 흔적을 새기고 싶었다. 정말이지 나는 너를 지켜주고 싶었는데.

한 톨 만큼의 이성이란 것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한계에 이를 정도로 기나긴 입맞춤에 네가 숨을 헐떡일 정도가 되어서야 나는 입술을 뗐다. 

‘이 정도면 충분히 옮겼을 것 같은데.’ 내가 하는 말에 너는 왠지 상처를 받은 것 같다. 이걸로 네 감기가 낫길 바란다며 얼른 돌아가서 푹 쉬라는 내 말에 네 눈가가 젖어든 것 같다.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말았으면 한다. 네가 나에게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하고 있는지 너는 모른다. 나를 더 이상 시험에 들게 하지 마. 나는 직접 방문을 열어서 너를 밖으로 내보냈다. 풀죽어 걸어가는 너의 뒷모습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당장 달려가 네 손을 잡고 다시 이 방으로 끌어오고 싶었다. 침대 위에 너를 눕히고 괴로울 정도로 간절한 입맞춤을 네 눈가에, 네 입술에, 네 허리에, 네 모든 곳에 퍼붓고 싶었다. 문을 닫고 들어온 나는 방금 전까지 손끝이 저리도록 애타게 너와 입맞춤을 나누던 침대 위에 앉았다. 그새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보니 그 입맞춤으로 인해 나 역시 감기에 걸린 것 같다. 



알피노가 눈을 떴다. 눈앞에 서 있는 에스티니앙을 발견하곤 순간 꿈인가 싶었다. 실제 사람인 것을 확인한 순간 이불을 끌어올려 부어오른 제 입술을 가린다. 

“도련님, 어제 꽤 좋았었나봐? 얼굴이 폈는데.”

능글맞게 던지는 에스티니앙의 장난기 어린 말에 알피노가 이불을 내던지고 펄쩍 일어난다.

“무슨 소리를!”

에스티니앙이 알피노의 이마를 짚었다. 

“그 처방이 효과가 있었나보군. 덕분에 나는 네 감기를 얻었다만.”

……미안하네.”

자신이 이기적으로 군 탓에 에스티니앙까지 아프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알피노는 금세 침울해지고 만다.

“나도 누군가에게 옮겨버리면 나을 것 같은데. 도련님은 이제 이 감기에는 면역이 생겼을 테고. 그럼 다시 옮겨도 괜찮지 않으려나.”

그 말에 곧바로 알피노의 표정이 풀어지며 뺨이 불그스레 달아오른다.

“그,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 처방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에스티니앙이 쿡쿡 웃는다. 이 도련님, 순진한 건지 영악한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알피노의 곁에 바싹 다가가 앉았다.

“그렇다면 기꺼이 되돌려주지.”

에스티니앙의 손이 알피노의 뺨을 감쌌다.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알피노가 파르르 떨며 눈을 감는다. 작은 손이 어제처럼 에스티니앙의 옷자락을 그러쥔다. 에스티니앙의 입술이 알피노의 부르튼 입술에 닿으려다 멈칫한다. 어제의 입맞춤이 이 여린 입술에게는 혹독했을 첫 시련이었으리라 생각하던 그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빛의 전사가 외친다.

“그렇게 써먹으라고 알려준 방법이 아니라고!”

화들짝 놀란 알피노가 온 힘을 다해 에스티니앙을 밀쳐버렸다.

빛의 전사는 이제 겨우 회복한 애한테 무슨 짓이냐고 씩씩대며 물그릇부터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즉시 약병을 따서 에스티니앙에게 건넨다. 어쩔 수 없이 알피노와 떨어지게 된 에스티니앙은 웃으며 약을 받아 들고, 알피노는 황급히 이불을 끌어당겨 다시 제 입술을 가려버린다.

빛의 전사가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일랑 전혀 아랑곳도 없이 단숨에 약병을 비운 에스티니앙이 빈 병을 건네며 묻는다.

“저 물그릇은 뭐하려고? 도련님 열도 다 내린 마당에 물수건은 너무 늦은 거 아닌가.”

“하룻밤 사이에 알피노 입술이 다 텄더라고. 이 방이 너무 건조해 그러나 싶어서…….”

빛의 전사가 하던 말을 멈춘다. 어째 두 사람의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진 까닭이다. 이불로 입술만 가리고 있던 알피노는 이제는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풀썩 누워버렸고, 에스티니앙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새빨갛다.

이제서야 빛의 전사는 알 것 같다. 알피노가 오늘 아침 갑자기 말짱하게 회복됨과 동시에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수상쩍게도 에스티니앙이 감기에 걸려버린 이유를. 그렇게 확실한 효과가 있는 속설이었던가 감탄을 해볼 만도 했지만 그보다 시급한 일이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에스티니앙에게 다가가 소리없는 분노의 주먹질을 퍽퍽 날려댄다. 억울한 등짝만 사정없이 얻어맞으면서도 에스티니앙은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알피노는 이불 아래에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할 뿐이었다.

“둘 다 제발 그만둬 주게…….”

어제의 어느 시간 사이에 알피노가 손수 깨끗한 물로 채워왔을 꽃병 속에 담긴, 알피노가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정성스레 정돈해 예쁘게 꽂아두었을 작은 꽃다발만이 그날 아침 소동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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