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속 재생"으로 배경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석진은 사람들이 찾을 수 없도록, 대화를 들을 수 없도록 녹음의 숲 깊은 곳으로 납치하듯이 하련을 데려왔다. 

쿵!

“무슨 짓을 한 거야! 말이랑 다르잖아!”

그는 이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매서운 눈매에 성난 목소리로 하련을 커다란 나무에 밀치며 외쳤다.

“뭘 그리 흥분했니?”

세게 부딪혔을 텐데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지 하련의 표정은 평온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대체 몇 명이나 죽인 거냐고! 이 정도일 거라곤 말하지 않았잖아!”

“……변했구나. 우리 석진이.”

석진의 언성이 더욱 높아지자 그제야 의외라며 표정에 변화가 생기는 하련이다. 제 어깨를 움켜쥐고 서늘한 표정을 한 석진의 손을 쳐내곤 도리어 그의 턱을 쥐며 시선을 마주했다.

“석진아, 나는 지금 너무 서글퍼질 지경이야. 유일한 가족인 내게 이렇게나 화를 내니 말이야. 누구보다 인간을 싫어했던 게 너잖아. 이 세상이 망하기를 바랄 정도로.”

“!”

―하…… 젠장. 빨리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

오래전 자신이 내뱉은 말이 모두 비수가 되어 되돌아왔다. 입술을 깨문 석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랬던 네가 그깟 인간들 좀 죽었다고 내게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슬프면서도 불쾌해. 아무리 어제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다르다고 해도 이건 너무 하지 않니? 아카데미에서 인간들과 좀 어울렸기로서니 연민이라도 느끼게 된 거야?”

하련은 석진을 탓하듯이 잡은 턱을 거칠게 놓고는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치아를 꽉 깨문 석진의 입술이 한일자가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련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면…….” 

고개를 살짝 들어 석진을 응시하며 비웃었다.

“너를, 죽은 일 황자의 대용품으로 여기는 멍청한 개새끼가 다쳐서 이러는 거니?”

“!”

정곡을 찔린 석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이 이러는 이유의 구 할이 남준 때문임을 다시금 깨달았기에. 지금 눈앞에 하련과 얘기하고 있음에도, 피투성이의 넝마가 되어 흙더미에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던 남준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어쩌나 싶어 덜컥 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무언가가 제 심장을 꽉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라서 더욱더 불쾌감을 느꼈다.

만일 그가 다시 눈을 뜨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면 절대로 하련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무리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런 석진을 바라보는 하련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사라지고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존심 때문에 받아주기는 싫지만, 그렇다고 남의 손에 다치는 건 싫은 거야? 정말…… 모순적잖아, 우리 석진이.”

비아냥 섞인 말을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던 석진은 격분한 얼굴로 불 계열 마법으로 하련을 공격했다.

콰앙!

하련 역시 늦지 않게 물 계열 마법으로 석진의 공격을 막았다. 상극의 마법이 부딪힌 순간 큰 폭발음이 나며 주변 광경을 망가뜨리며 사라졌다. 반경 2km 이내의 멀쩡하던 나무가 불타고 부서지는 등 해를 입었으나, 하련은 석진과 거리를 벌리며 코웃음을 지었다.

“정곡을 찔렸어?”

“그 입 다물어. 누나.”

석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흠칫할 정도로 위압감이 느껴졌으나 하련은 달랐다.

“아니. 너야말로 내 말 잘 들어. 우린 맹세했어. 신의 이름을 걸고. 잊지 않았겠지?”

―반드시, 반드시 황가의 혈통을 다 끊을게요.

“신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는 반드시 이뤄야 해. 그렇지 않는다면 신의 이름을 망령되게 한 죄로 저주받게 되니까. 나라고 뭐, 이런 방법을 쓰고 싶었겠니? 황태자가 협조를 안 해주니 이렇게 강경책을 쓸 수밖에 없었어. 내가 아무리 유혹해도 놈은 오직 너만 바라보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했겠니.”

“…….”

석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니 오늘 일은 모두 황태자 때문이야. 내가 아닌 네게 반했기 때문이란 걸 기억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궤변에 어이가 없는 석진이었다. 

“웃기지 마. 그럼 대체 그 마물은 뭐야? 어비스에서도 본 적 없는 마물이었어.”

대공의 시신 옆에는 거대한 마물의 시체가 있었다. 어비스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석진이었음에도 처음 보는 생경하고 낯선 마물이었다.

“합성 변형 마물이야. 기본 생명체에 어머님이 물려주신 마법을 사용했지. 나름의 자신작이었는데 역시 검성은 다르더라.” 

이번에도 막아내다니. 대단해, 정말. 하련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저의가 뭐야. 황족만 죽이면 되는 거잖아! 왜 잘못도 없는 사람들까지 휘말리게 한 거냐고!”

하련은 석진의 말에 자지러지게 깔깔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숨을 고르며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석진아, 세상에 잘못 없는 사람은 없어. 단 한 명도. 누구나 크든 작든 비극에 기여하니까. 넌 그저 아카데미나 잘 관리해. 모든 준비가 될 때까지.”

그 말을 끝으로 하련은 모습을 감췄다.

두 사람의 짧은 공방 때문에 불타고 부서진 숲에서, 석진은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불끈 쥔 주먹이 떨렸다. 눈을 감으니  참사 현장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죽은 듯이 정신을 잃은 피투성이의 남준의 모습과 죽은 대공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호석의 모습, 마물과 싸우다 죽은 기사단의 온전하지 못한 시체와 마물에게 죽임당한 여러 사람의 흔적들까지.

지금껏 본 적 없는 끔찍한 비극적인 광경에 석진의 마음은 혼란이 가득한 깊은 어둠이었다. 그로 인해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하려는 일에 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피폐물 서브 남주가 내게 집착합니다 22

Chapter 3. 내 최애와 함께하는 캠퍼스 라이프 07

written by 휴위







영결식이 끝났다.

황제와 대공, 기사단과 여러 귀족의 죽음을 애도하는 합동 영결식이 신전에서 교황인 박지민의 주관으로 이뤄졌다.

성가대의 구슬픈 레퀴엠이 예배당에 성스럽게 울려 퍼졌고, 사망자의 가족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검은색 복장으로 참석하여 눈물 흘렸다.

“아오아이님이시여, 신실하고 가여운 영혼들을 받아주옵소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더는 눈물도 슬픔도 아픔도 없는 아름다운 낙원에서 영원토록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허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다시 만날 그날까지 이 땅에 남은 이들의 마음에도 안식을 주옵시고 그 마음을 어루만져 위로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마침 기도를 끝으로 영결식이 끝났고, 참석한 모든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 교황의 안수를 받으며 마음을 달랬다.

타국의 침범이 한 번도 없던 강대국인 아르카디아 제국이 정체불명의 마물 때문에 참사를 겪었고, 모든 국민이 슬퍼했다. 마물의 공격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에 큰 상흔을 남겼고, 김남준은 치료받았음에도 깨어나지 못했다.

마물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른들의 일, 황성과 마탑에서 할 이야기였고, 나는 그저 남편을 잃어 상심한 심 여사를 달래는 데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심 여사는 진심으로 대공을 사랑했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어머니!”

울다 지쳐 실신할 정도로.

영결식 후 대공가로 관을 옮겼고, 대공가 전용 묘소에 매장하기 무섭게 심 여사는 정신을 잃고 무너져내렸다. 그런 그녀를 재빨리 낚아채 두 팔에 안아 든 것은 윤기였다.

“침실로 모셔다드리고 올게요.”

“으, 응.”

심 여사를 안고 그녀의 침실로 가는 윤기의 뒷모습이 든든하게 보였다. 진짜 모자처럼 보이는 다정한 모습은 원작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얼마나 마음의 상심이 크십니까.”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쓰러진 심 여사를 대신하여 삼 일 동안 가신들의 조문을 맞이하느라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대공가를 섬기는 가신들의 수는 많았고, 매일 매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쉴 수 있었다.

‘심 여사에게 가봐야겠지.’

발걸음을 옮겨 심 여사의 침실 문을 노크했다. 깊은 잠에 빠졌는지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다시 노크하며 그녀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적막만 가득했다. 어디에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하는 생각에 대공의 침실로 향했다. 노크해도 여전히 대답은 없었고,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어둠 속에서 수면등을 켜놓은 채 침대에서 곤히 잠이 든 심 여사가 보였다.

‘역시…….’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대공의 셔츠를 품에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하얀 베개는 눈물로 흥건히 젖었고, 새근새근 잠이 든 얼굴도 눈물 자국으로 얼룩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감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대공과 심 여사가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지, 서로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지켜 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는지를.

―윤기를, 잘 부탁한다. 내 아내도.

대공의 죽음을 막고 싶었는데…… 막을 수 없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침대 아래에 앉은 후 손을 뻗어 심 여사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죽지 않게 막고 싶었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코끝이 찡해졌다.

“……호석이니?”

“……네.”

나 때문에 잠에서 깼는지 심 여사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엄마는 괜찮아.”

물기로 가득 젖어 떨리는 목소리였다. 괜찮지 않다는 거 알고 있는데, 내가 걱정되어 위로하고자 거짓말하는 듯했다.

“고마워, 아들.”

“…….”

“그이가 외롭지 않게…… 곁에 있어 주어서…….”

“…….”

“조문객도 엄마가 맞이해야 했는데…… 나 대신 응대하느라 고생했어. 오늘까지만 슬퍼하고…… 내일은 정신 차리고 일어날게…… 그러니 너도 어서 가서 쉬어.”

“……네.”

나는 심 여사의 부탁 아닌 부탁에 손을 놓고 침실을 나왔다. 문을 닫자 기다렸다는 듯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깐 그녀의 울음을 듣다가 내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주인을 잃은 대공가에 적막만이 가득했다.

“……윤기야.”

문 앞에서 잠옷 차림으로 기다리는 윤기가 보였다. 곁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잠이 안 와?”

윤기는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듯 느릿한 몸짓으로 양팔을 뻗어 나를 안았다. 평소와 달리 기운이 없어 보였다.

윤기는 가볍게 나를 안아 들고는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침대 위에 함께 누웠다. 어둠 속에서 윤기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른 숨을 쉴 뿐이었다.

“괜찮……아?”

먼저 말을 건 것은 나였다.

“……모르겠어요.”

윤기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도 더는 무어라 묻지 않았다. 

윤기가 대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둘 사이에 주고받은 애정이나 감정이 없었기 때문일까? 하인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일까? 대공이 죽어서 슬퍼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지금 윤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캐묻지 않았다. 윤기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에.

“그, 혹시라도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줘. 들어줄게.”

“……네, 형님.”

내 허리를 더욱 꼭 끌어안은 윤기의 애처로운 행동에 응하듯이, 나 역시 윤기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재워주었다.










윤기가 나이를 먹을수록, 강해질수록 자유자재로 본 모습인 바롱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곰랑이었다. 민들레 홀씨에서 선사웅 바롱이 되어 혼돈의 숲에서 마물을 사냥하며 달밤 산책을 마친 곰랑은 이제 잠을 자러 저택으로 돌아왔다. 윤기는 틀림없이 호석의 침실에 있을 테니, 늘 그러했던 것처럼 테라스를 통해 호석의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곳엔 낯선 손님이 먼저 와 있었다. 호석이야 둔하니 그렇다 쳐도 낯선 기척이 느껴지면 곧장 잠에서 깼을 윤기가 어쩐 일인지 눈도 뜨지 않고 자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무슨 일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구야.”

침대 가까이 서서 잠든 형제를 내려다보는 후드 로브를 쓴 사람의 뒷모습을 향해 곰랑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후드 로브 차림의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새하얀 선사웅 바롱을 보더니 손을 들어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오랜만이야, 태태.”

제게 알은척하는 이는 윤기 또래로 보이는 여자였다.

‘태태?’

곰랑은 저를 부르는 이름을 듣자마자 미간이 찌푸려졌다.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태, 태?

마법사의 땅에 갔을 때, 민들레 홀씨 모습이었던 제 모습의 봉인을 푼 호석의 입에서 나온 이름과 똑같았기에.

“날 알아?”

“물론.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하얀 바롱 태태. 퀸의 수호수. 역시 너도 여태 살아있었네?”

‘무슨, 소리야?’

퀸의 수호수라니. 퀸이라 함은 석진이 호석을 부르던 호칭이 아니던가. 여태 살아있었냐니. 제가 언제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던 걸까? 곰랑은 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어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 설마 이것도 날 방해하는 놈의 농간이려나? 참 쉽게 되는 일이 없네.”

이내 그녀는 무언갈 깨달았다는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픽 웃었다.

“난 곰랑이다. 태태가 아냐. 당장 거기서 비켜!”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태도가 거슬렸던 곰랑은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여자는 곧장 손을 뻗어 방어 마법진을 펼치며 곰랑을 막았다.

“하긴, 그때와 난 아주 다르니 알아볼 수 없겠지. 네가 날 몰라보는 것도 당연할지도.”

파지직!

따끔한 전류가 흘렀지만, 곰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꺼운 앞발을 휘둘러 마법진을 찢어발기며 여자를 공격했다. 여자는 살짝 놀라는 듯했으나 곧 피식 웃었다.

“많이 강해졌네?”

갈가리 찢어버렸다고 생각했으나 아지랑이처럼 사라진 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의 테라스에서 들려왔다. 곰랑이 다시 몸을 빠르게 돌리며 날카로운 어금니를 드러냈다.

“그렇게 이빨 드러내며 발톱 세우지 마. 오늘은 인사만 하러 왔으니까. 나의 퀸에게.”

“퀸? 김석진이랑 아는 사이냐?”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묘한 미소를 띠며 사라졌다. 곰랑은 서둘러 테라스로 달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대체 뭐야.’

미간을 찌푸린 곰랑은 몸을 돌려 침대로 다가가 앞발을 올려 상체를 일으키곤 윤기와 호석을 살폈다. 행여나 여자가 허튼짓했을까 봐.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 몸 위에 마법진이 나타나 있었다.

이게 무슨 마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윤기가 깨지 않은 게 아무래도 이 마법진 때문일 거 같다는 생각에 서둘러 한쪽 앞발을 휘둘러 마법진을 부수려 했다. 그러나 곧 효과를 다한 것처럼 마법진이 사르륵 사라졌다. 

그 순간, 윤기가 눈을 번쩍 뜨며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곰랑의 두툼한 앞발을 잡고 막았다. 

“……뭐야.”

곰랑과 눈이 마주친 윤기가 인상을 썼다.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을 공격하는 꼴이 된 곰랑이었다. 윤기가 팔을 뻗으며 움직이는 바람에 품에 안겨 있던 호석이 뒤척이며 옅게 신음을 냈다.

“……방문자가 있었는데 눈치 못 챘어? 마스터.”

“방문자라니?”

“처음 보는 여자였어.”

“꿈이라도 꿨어?”

윤기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곰랑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이 방에 있었다면 제가 몰랐을 리 없다는 단호한 눈빛이었다.

“……그러게.”

검성인 윤기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강한 마법을 쓰는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 그러나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 사람. 곰랑의 앞발에서 힘이 빠졌고, 윤기도 앞발을 놓았다.

상태를 봐선 두 사람 모두 별일 없는 듯했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로 인사만 하러 온 듯했다. 이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사한 듯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곰랑은 침대에서 앞발을 내렸다. 얌전히 침대 커버 레이스에 바짝 붙은 채 엎드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태태?

하지만 귓가에는 그녀가 불렀던 낯선 이름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게 누군데. 왜, 내가 태태였다는 거야?’

호석이 부를 때만 하더라도 잘못 불렀겠지 싶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여자까지 그렇게 부르니 신경이 쓰였다. 고개를 붕붕 저으며 애써 잠을 청했으나 쉽사리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이 든 곰랑은 꿈을 꾸었다.

―나, ●이 실망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할 거야. 그 어떤 환수보다 크고 아름다우며 강하고 정의로운 환수가 될게. ●은 내가 지킬 거야.

지금보다 훨씬 작고 어린 모습의 바롱이, 백발 소녀의 품에 안겨 고롱고롱하며 탐스러운 꼬리를 흔들었다. 소녀는 저를 꼭 안으며 웃었다.

―응~ 믿고 있어, 우리 태태.

소녀는 작은 바롱을 보며 태태라 불렀고, 바롱은 소녀를 태우고 아름다운 숲을 마음껏 날아다녔다. 그러다 바다를 건너온 낯선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소녀는 남자를 따라 먼바다를 건너게 되었고, 서로 사랑에 빠졌다. 잘 어울렸던 한 쌍의 연인은 비극으로 끝이 났다. 자신은 소녀를 지키다 죽었고, 소녀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다.

꿈인데도 어째서인지 생생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심장이 따끔 거릴 정도로 이상한 꿈이었다.










지민은 열두 번째의 영결식이 끝나자마자 곧장 기도실로 달려오더니 문을 걸어 잠그고 홀로 틀어박혀 기도했다. 마물로 인한 대참사에 희생된 가여운 영혼들을 위하여,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남겨진 자들을 위하여.

어찌하여 전능자는 이러한 슬픔과 고통을 주며 인간을 단련시키는 것인지, 그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역대급 규모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식음을 잊은 기도는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으며, 점점 오열로 바뀌었다.

등불과 촛불을 키는 것도 잊을 정도로 기도에 전념하느라 어두웠지만, 유리천장으로 내리쬐는 달빛 덕분에 기도실이 은은하게 빛났다.

“아오아이님이시여, 제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신다고 하셨건만, 감당하기 힘듭니다. 이 모든 것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저는 그저 지켜보아야만 한다는 것이 더욱 힘이 듭니다.”

가슴이 미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냥대회에서 마물의 공격과 대공의 죽음. 열한 번째의 회귀를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임을. 그렇기에 이번에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오아오님, 제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붙잡아 주시옵소서. 제게 말씀해주셨듯이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시옵소서.”

모든 축복을 가진 자의 영혼이 깨어나 버림받은 영혼의 겨울빛을 품을 때 비로소 저주가 파훼되리라고 말해주었던 그때처럼, 다시금 영음을 들려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였다. 달빛보다 더 빛나는 한 줄기 빛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민의 몸을 비추기 시작했다. 지민은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귓가에 생생히 들려오는 성스러운 목소리는 틀림없는 신의 음성이었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다정한 영음에 눈물이 그치더니 슬프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고통이 떠나가고 평안이 찾아오더니 얼굴엔 온화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걱정, 근심이 모두 사라진 표정이었다.

지민이 정신을 잃으며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를 감싸듯이 내리쬐던 빛줄기가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젊은 남자의 모습이 되어 두 팔을 뻗었다. 그는 소중한 이를 안듯이 지민을 품에 안아들었다. 단단한 근육질 체격에 두 눈은 무척이나 크고 맑았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성스러운 금빛 기운이 남자의 전신에 감돌았다.

낯선 남자의 품에 안긴 지민은 편안한 모습으로 색색 고른 숨을 내쉬었고, 남자는 지민의 잠든 얼굴을 응시하며 연인을 바라보듯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네 기도에 응답하고자 내가 왔단다. 내 아버지를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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