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카아시, 괜찮아?”


보쿠토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팔을 내밀었다. 아카아시는 피로에 전 얼굴로 보쿠토의 손에 서류가방을 넘겨주며 구두를 벗었다.


“카즈마는요?”

“방금 전에 숙제 다 하고, 지금은 들어가서 자.”

“늦게까지 깨있었네요……. 선배도 주무시지.”


거실에는 무드등만 켜져있어 안온한 어둠이 깔린 채였다. 아카아시가 곧장 부엌으로 향하는 것을 보쿠토가 뒤따랐다. 


“아카아시 물 줄까? 마실래? 아니면 맥주?”

“……맥주로 부탁합니다.”


잠깐 망설이던 아카아시는 사양하지 못하고 식탁에 무너지듯 앉으며 대답했다. 보쿠토가 요란하게 냉장고 문을 열고는 맥주 캔을 꺼내어 아카아시 앞에 놓아주었다. 아카아시가 두어번 헛손질을 했고 보쿠가 곧장 캔을 빼앗아 열어주었다. 


“정말 일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원래 좀 바쁜 시즌이에요. 

“그 원래 바쁜 게…….”


그 원래 바쁘다는 게 문제인 거잖아, 보쿠토는 그렇게 말을 늘어놓다 그만두고 입을 다물었다. 맥주캔을 기울이던 아카아시가 슬쩍 고개를 들고 보쿠토를 바라본다. 이어질 말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보쿠토는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지긋이 깨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을 돌렸다.


아카아시는 더 묻는 것 없이 맥주만 냉수 들이키듯 마시고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침실로 들어간다. 보쿠토는 부엌 한 쪽에 놓여있는 아카아시의 서류가방을 흘끗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요 며칠 전부터 갑자기 바빠지는가 싶더니 퇴근 시간이 늦어지고, 그게 며칠 이어지자 이젠 아카아시는 저녁 즈음 들러서 식사를 준비해주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가 한밤이 되어서야 귀가했다. 그리고는 잠깐 쉬었다가 내일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아, 아카아시. 내가 뭐라도 할까?”

“…….”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아카아시가 부엌 불을 켜며 보쿠토를 바라본다. ‘선배가요?’라고 반문하는 것같은 표정에 보쿠토가 입을 삐죽거렸다.  


“나 요리 잘해!”

“됐습니다.”

“진짜야! 전에 배웠어!”

“요리를 배웠다고요? 선배가?”


아카아시가 앞치마를 걸치며 웃으면서 반문한다. 오랜만에 실없는 농담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고 순식간에 10년의 시간이 삭제되는 표정이었다. 이대로 그대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보쿠토는 그만 들떠서 우쭐한 얼굴로 불쑥 말을 뱉었다. 


“그럼~! 예전에 TV쇼에 나갔을 때! 완전 잘한다고 칭찬도 들었단 말야!” 

“무슨 TV쇼에서 요리를 배웁니까.”

“그게 신혼 컨셉으로 둘이 지내는 거 찍는 거라서 쉐프도 붙……여…서…….”

“…….”

“……아, 아니야……. 배운 적 없는 것 같아…….”

“됐고, 냉장고에서 고기나 꺼내주세요.”


보쿠토의 얼굴이 가감없이 새하얗게 질려가고, 아카아시는 잠시 굳었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갯짓으로 냉장고를 가리켰다. 보쿠토가 뻣뻣한 동작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일부러 소리내는 게 분명한 태도로 한참이나 고기를 뒤지다가 하며 그의 눈치를 본다. 아카아시는 도마와 칼을 꺼내며 한숨을 삼켰다.


학창시절에도 그렇게나 눈에 띄었던 사람이다. 국가대표면서 저런 외모까지 두르고 있으니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해도 몇 번은 브라운관 위에 얼굴을 비추었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단한 배우와 결혼까지 하였으니 그 뒤로는 더욱 쉬웠을 것이고 저런 프로그램에 몇 번쯤 출연했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게 뭐라고.’


보쿠토는 줄곧 다정한 사람이었다. 곁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다. 드물게 아카아시가 처져있는 날이면 보쿠토는 되레 보는 사람이 안절부절 못할 만치 어쩔줄을 몰랐고 그런 아카아시를 위해 사탕이나 과자를 가져다주고 세상의 재미있다는 것들은 전부 알아오느라 고군분투하고 귀가하고 난 뒤에도 몇 번이나 연락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는 등교할 때에 그의 집 앞까지 찾아와서……. 


“안에 베이컨도 꺼내주세요.”

“으, 으응!”


그게 TV에 방영되는 쇼라고 해도, 보쿠토는 아마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그래서 한 때 그렇게나 못견뎌 하지 않았던가, TV에 비치는 보쿠토의 모습을. 그것으로밖에 마주할 수 없으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보지 않는 쪽을 선택했었다. 


그게 그랬던 건 자신의 일이다. 아카아시는 여전히 창백하게 질린 채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보쿠토를 흘끗 쳐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보쿠토가 특별했던 자신의 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보쿠토가 보기 싫었던 것은. 보쿠토에겐 그냥 지나가는 하루 중에 하나였을 텐데. TV 쇼의 촬영이라니 조금은 특별할지 몰라도, 그저 지나가는 하루. 그런데 왜 저렇게 잘못을 들킨 것마냥 어쩔 줄 모르고 눈치를 살피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쉐프한테 배웠다는 칼질 좀 보죠. 양파 썰어주는 건 할 수 있죠?”

“아, 아니야. 아니야. 안 배웠어. 모, 못하는 것 같아.”


거짓말을 못하는 것은 어쩌면 저렇게 변하질 않는지 알 수가 없다. 아카아시는 자신과 눈도 마주하지 못하는 보쿠토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냄비에 물만 받아주세요.”


그 뒤로는 침묵이었다. 그릇과 젓가락 같은 것이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카아시가 얼추 내일 아침에 먹을 것들 준비를 끝냈을 때야 보쿠토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이맘때면 항상 이렇게 바빠?”

“네, 아무래도. 신상품 개발도 있고요. 그래서 이 시즌엔 카즈마 돌봐줄 사람을 따로 구하는데…….”


아카아시는 앞치마를 벗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구하면 보쿠토에게는 이만 나가라고 말을 할 작정이었는데. 


‘갑자기 일이 좀 많이 바빠지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어.’ 


사람을 어떻게 구해볼 틈도 없이 일이 쏟아졌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손등으로 누르며 생각의 꼬리를 가다듬었다. 자꾸만 어영부영 일정이 뒤로 밀린다. 처음에는 잠깐만 있기로 했던 보쿠토였는데 어느새 보쿠토가 없으면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 그러면 내가 돌봐주면 되지. 내가 있는 동안에는…….” 

“……카즈마 때문에 일부러 계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그런 게 아니고. 그 아직도 막 그 카메라…기자……찾아다니는 것 같고…….” 


보쿠토가 우물쭈물 대답한다. 아카아시는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크기만 한 사람이었다. 등을 보고 있으면 믿을 수 있었다. 의지할 수 있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보쿠토를 놀리곤 했었다. 너 아카아시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아카아시가 더 선배다, 선배. 그러면 보쿠토는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알고 있었다. 보쿠토가 그 앞에서 때로는 응석을 부리고 때로는 제멋대로 굴고 때로는 이렇게, 눈을 내리뜨고서 하염없이 아카아시의 표정만 살피기도 했지만 사실은 다른 그 누구에게도 그러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모두가 꺾일 것 같을 때에 결코 지지 않는 태양은 존재 자체로 눈부심을 다하여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 태양이 이따금 아카아시 자신 한 사람만을 위해 빛을 낸다는 듯이 굴었다. 그러면 정말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에게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그가 그러하듯이. 자신에게 그가, 보쿠토가 너무나 특별하여 없이는 살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듯이.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보쿠토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졸업을 했다고 얼굴을 보기 드물어졌다고 그것이 그대로 10년의 간극이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이제와서. 왜 지금 다시 나타나서, 어떻게든 여기에 함께 있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까닭도 영문도 알 수 없는 저 사람은 그냥 나가라고 하면 되는 일이었다. 자신은 지난 10년동안 모두 치우고 정리했으니 이제 더는 미련도 아쉬움도 없다고 돌려보내면 되는데. 매스컴에서 키리에나 안즈에 대한 이야기는 잠잠해진지 오래이고 그녀와 결혼했다 헤어진 배구 선수에 대한 것도 사그러들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 나가라고 하면 되는데. 아주 오랜만에 마주한 선후배로서의 예의는 처음 일주일을 꼬박 머무르게 해준 것으로 다 한 것일 텐데. 


‘당장 카즈마 돌봐줄 사람을 구할 수도 없으니까…….’ 


아카아시는 피곤한 미간을 문질렀다. 벌써 자정을 넘기는 시간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해야 한다. 여기서 이런 사소한 실랑이를 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그럼 카즈마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응, 응! 나만 믿어! 그보다 아카아시, 빨리 자야하는 거 아냐?”

“예. 좀 피곤하네요. 선배도 주무세요.”


아카아시는 식탁 위에 남아있는 맥주 캔을 흘끗 바라보았다. 보쿠토가 직접 열어주었던 것이다. 아카아시의 눈길을 알아챈 보쿠토가 남은 건 자신이 치울테니 걱정말라고 아카아시를 침실로 떠밀었다. 


“내일도 새벽에 출근해?”

“네, 여섯시 반쯤 집에서 나가야 돼요.”

“아침에 잘 못일어나면서…….”

“그것도 고등학교 때예요. 이젠 잘 일어나죠. 사회인 된지 몇 년이나 됐는데.” 


이제 자신에겐 그 시절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아침에 잠이 많아 힘들어했던 소년 아카아시 케이지는 없다. 보쿠토는 조금 당황한 듯이 ‘그렇구나’라고 대답하고는 아카아시를 침실로 떠밀었다. 아카아시는 저항하는 것 없이 자신의 침실 방문 앞에 서서 한 번 더 밤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보쿠토의 답은 듣지 않고 침실로 들어온 아카아시는 천천히 침실 문을 닫았다. 


소년 아카아시 케이지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그건 그가 굳이 학창시절을 전부 내던지려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났다. 세월이 흘렀다. 사람은 변하고 달라지고 성장하고 그리고 잊기 마련이었다. 지나간 과거는 퇴색되고 남은 것은 흐릿한 잔상 뿐이다. 


그런데 왜 보쿠토에겐 그렇지가 못할까. 왜 자신과 있었던 고등학교 시절들을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는 걸까. 무엇하나 잊은 게 없는 저 사람은, 도대체 뭘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걸까. 


아카아시는 일이 바빠져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색에 잠길 여유도 없이, 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묻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rr_mielp

리리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