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임리스, 모브 여밀레/톨비밀레, 르웰밀레
  • 전부 날조입니다. 공식이 아닙니다.
  • 르웰린 성격 나쁨주의. 성격도 나쁘고 말도 매섭게 하는 르웰린이 나옵니다. 주의해주세요. 상냥하고 부드러운 르웰린도 좋아하고 성격 나쁜 르웰린도 좋아해서 어느쪽이라도 다 좋아서 괴롭네요...
  • 초단톨. 엘베드톨. 선녀톨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은 중간에 있는 엘베드톨입니다. 그 약간 수상하고 좀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긴장감이 좋네요...뭐든 사귀기 전 썸탈 때가 가장 설렌다고...뭔가 묘하게 모시고 살아야 할 것 같은 느낌도 좋습니다(순순히 모셔질 것 같진않지만..)...받들어 모시고 살아야하는 남캐를 좋아해서...하여튼 그런이유로 또 엘벧톨입니다.
  •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나를 스토킹하는 남자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걱정이다>

 


 

 

알반 기사단에서 기사들에게 휴대용 개인 통신기를 지급했다. 기존에 사용하던 수신호만 전송이 가능하던 단말기의 업그레이드된 형태였다. 수신호가 아닌 장문의 텍스트를 입력해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 있었다.

 

임무 중 사용하라는 의도로 보급된 통신기였지만 고지식하게 ‘임무에만’ 사용하는 기사들은 별로 없었다. 자기들끼리 사적인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친한 조원들끼리 뭉쳐 단체 채팅방을 만들거나 했다.

 

아벨린은 몹시 못마땅해하며 임무 중이 아닐 때는 통신기를 압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녀의 분노에는 알터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채팅 중에 잠들어버린 내 답장을 기다리느라 밤을 꼬박 새운 알터가 훈련 중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고, 그 와중에도 손에서 통신기를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터를 비호하고 나선 것은 의외로 톨비쉬였다. 무작정 금지하는 것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스스로 통제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톨비쉬의 주장에 아벨린도 결국 뜻을 굽혔다.

 

알터의 통신기 사용은 톨비쉬가 관리하기로 했다. 알터가 스스로 통신기 사용을 조절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그것 외에도 여러 웃지 못할 해프닝들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기사들과의 실시간 통신은 나 역시 즐거운 일이었다. 등을 맞대고 사도와 싸우던 때보다도 더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 맛있다.”

 

한가로운 주말 오후. 오늘의 점심은 시판 소스를 끼얹은 파스타였다. 꼰 다리를 까닥거리며 포크로 둘둘 만 파스타를 입에 밀어 넣는데 식탁에 올려둔 통신기가 지잉, 하고 울렸다. 통신기를 들어 올려 화면을 확인했다.

 

도로시:[미친놈]

 

“아.”

 

익숙한 이름에 작게 탄식했다. 곧이어 채팅 알림이 연이어 떠올랐다. 띠링. 띠링. 띠링.

 

도로시:[전생에 공 물어오는 개였나 왜 이렇게 골프를 좋아해]

도로시:[여자 없으면 골프 못 치는 병]

도로시:[여자 골프웨어 페티시]

도로시:[골프치다가 사고로 위장해 죽이는 법]

도로시:[색골변태대머리늙은이]

 

나에게 폭발적으로 험악한 채팅을 보내는 이 사람의 이름은 ‘도로시’ 흔한 여자 이름이지만 사실 진짜 정체는 르웰린 신시엘라크였다. 보안을 위해서인지 그는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통신기를 제외하고도 여러 개의 통신기를 추가로 가지고 있었는데, ‘도로시’ 는 그중 하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채팅으로 대화를 마무리해야 만족하는 알터. 손가락이 부러지기라도 했는지 최소한의 초성만으로 채팅하는 카즈윈. 모든 채팅에 하나하나 장문으로 대답해주는 피네 등. 통신기를 사용하는 그들의 유형은 각양각색이었다.

 

그중 도로시, 그러니까 르웰린 신시엘라크의 채팅 스타일은 ‘자기 할 말만 하는 이기적인 유형’이었다. 그는 언제나 내게 예고도 없이 연락해 자기 할 말만 일방적으로 쏟아내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연락을 뚝 끊었다.

 

르웰린의 채팅은 대부분이 그 매너 놓고 사근사근한 도련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험악한 폭언이었다. 과도한 업무와 불편한 만남을 이어가야 하는 사교활동에서 오는 스트레스의 분출이었다. 평소에는 속으로 삼키기만 하던 말들을 나에게 이렇게라도 쏟아내니 속이 시원하단다.

 

어처구니가 없긴 했지만 사실 싫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한테 하는 욕도 아닌데 뭐 어떤가 싶었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르웰린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게다가 르웰린 신시엘라크는 의뭉스럽고 속을 알기 어려운 남자다. 몹시 계산적이며 자신의 선 안에 쉽게 사람을 들이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런 남자가 내게 이렇게나 날것의 감정을 쏟아내다니. 친해진 기분이라 솔직히 싫지 않았다. 내가 정말로 열 받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바로, 내 채팅을 안 읽고 무시하는 것.

 

사람을 감정 쓰레기통 정도로 쓰는 주제에 정작 내가 보낸 연락은 읽지도 않고 몇 날 며칠이고 무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열이 뻗쳤다. 하지만 그런 걸로 일일이 화내기엔 뭔가 쪼잔하게 느껴져서 혼자 속만 끓였다.

 

단말기를 톡톡 두드려 채팅을 보냈다.

 

[그 남자랑 또 골프 치러 가?]

도로시:[골프채로 사람 쳐본 적 있어요?]

 

“푸핫-”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왔다. 실실 웃으며 자판을 두드렸다.

 

[그 남자 정 불편하면 내가 실종시켜줄까?]

도로시:[실종되고 싶은 건 전데요. 저나 실종시켜주시죠. 실종된 김에 쉬게.]

[내가 그놈 죽여줄게]

도로시:[받을 게 많아서 아직은 안 됩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석 달이나 같이 골프 쳐준 값은 받아야죠.]

 

르웰린도 참 고생이다. 어마어마한 집안 장자라고 해서 인생 날로 먹을 줄 알았는데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네가 너무 재미있게 놀아주나 보다. 차라리 모든 판을 다 이겨버리면 어때?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네가 다 이기면 재미없어서 골프 치자는 소리 다시는 안 하지 않을까?]

도로시:[지면 난리 나요. 무조건 이기게 해줘야 해요]

도로시:[그런데 또 봐주는 거 티 나면 기분 나빠해요. 아슬아슬하게 져줘야 만족]

도로시:[조카랑 놀아주는 것보다 피곤]

 

채팅이 빠른 속도로 연달아 올라왔다. 시간을 확인하니 점심 식사가 거의 끝날 시간이다. 르웰린은 아마 화장실에서 몰래 통신을 보내고 있는 모양으로 여느 때보다 답이 빨랐다.

 

도로시:[그나저나 자꾸 약속 미뤄서 저도 이제 슬슬 웃기긴 한데, 내일 같이 차 못 마실 것 같아요. 골프 치러가야 해서]

 

내일은 르웰린과의 대망의 티 타임이 약속되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같이 차 마시나 했는데 역시나인가. 이번생에 르웰린이랑 같이 차 마실 수 있는 거 맞나?

 

[괜찮아. 예상했어. 그리고 다음에 나랑도 골프 치러가자]

도로시:[골프 좋아하세요?]

[아니 잘 몰라. 해본 적 없어.]

도로시:[네네. 무조건 이겨드릴게요. 패배의 굴욕 속에서 눈물 흘리게 해드릴게요.]

[왜 나한테 화풀이해!]

 

수상할 정도로 골프를 좋아하는 귀족에게 시달린 스트레스인지 르웰린의 채팅이 평소보다 매서웠다. 툴툴거리며 통신기를 내려놓고 음식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나저나 내일 시간이 비었으니 뭘 한다.

 

띠링-

 

식어가는 파스타를 포크로 말아 입에 욱여넣는데 잠시 내려놓았던 통신기가 울렸다. 알림을 확인하니 평소 친하게 지내던 조원들과의 단체 채팅방 알림이었다. 알터도 피네도 르웰린도 카즈윈도 모두가 있었다. 아벨린과 톨비쉬만 빼고.

 

그나저나 이거 아벨린이랑 톨비쉬도 초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초대 버튼을 누르려는데 어째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르웰린에게 다시 채팅을 보냈다.

 

[맞다! 그 있잖아 우리 단체 채팅방. 거기 아벨린이랑 톨비쉬 초대하는 거 잊어버린 것 같은데 내가 지금 할까?]

 

1분. 2분. 읽음 알림이 사라지지 않는 채팅방을 바라보았다. 1분만 더 기다려보고 그냥 초대해야지. 레몬 소다에 얼음을 넣으러 주방으로 향했다. 돌아오니 채팅 여러 개가 연이어 와있었다.

 

도로시:[눈치]

도로시:[좀]

도로시:[제발]

도로시:[벌써 한 거 아니죠?]

도로시:[대답]

도로시:[대답]

도로시:[대답]

 

아직 안 했다고 급하게 채팅을 보냈다. 반응을 보니 함부로 초대했다간 큰일 날 뻔했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지? 이 채팅방 말고도 특정 조원이나 조장들을 제외한 단체 채팅방들이 수십 개는 되었다. 초대하는 걸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걸까? 설마…

 

[아. 설마 일부러 초대 안 한 거야?]

도로시:[네. 네. 네.]

[미안해...화내지마...]

 

불편해서 일부러 뺀 거구나. 충격적인 진실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한 두 명씩 빼고 채팅방을 새로 만들면. 음…서운해하지 않을까? 나중에 알면 말이야.]

도로시:[본인은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

 

도로시:[사실 우리도 밀레시안님만 뺀 방 있는데.]

[뭐?]

도로시:[ㅋㅋ]

 

“...뭐...라고?”

 

이게 무슨 말이지? 나만 없는 방이 있다고? 나만 없이 자기들끼리 노는 방이 있다고? 다급하게 르웰린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채팅을 보냈다. 하지만 통신기를 꺼버린 걸까 르웰린에게서 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밀레시안님 평소에 확실히 눈치 없긴 해]

[저번에 그 파란색 옷 진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입으신 걸까?]

[아, 내가 좋아한다고 따라다녀 주니까 진짜 좋아하는 줄 아는 듯 우리 강아지니 뭐니 하는 거 징그럽네.]

[ㅋㅋㅋ니가 컨셉을 징그럽게 잡았잖아]

[자기 친구도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다던데 조심해라 다음은 너야]

[소름ㅋㅋ]

 

간밤에는 악몽을 꾸었다. 나 없는 채팅방에서, 그동안 친하게 지내던 조원들이 믿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꿈이었다.

 

말도 안 되는 개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울적한 기분으로 이불에 돌돌 감겨 있는데 통신기가 울렸다. 무시할까 하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집어 들었다. 톨비쉬의 연락이었다.

 

톨비쉬:[일전에 사건이 있었던 수도원에서 감사의 의미로 고급 품질의 과일을 보내왔는데 밀레시안씨와도 나누고 싶어서요. 함께 해결한 사건 아닙니까. 지금 자택으로 찾아가도 괜찮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상냥하고 정갈한 문체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는 신기할 정도로 귀신같이 내가 우울할 때 연락해온다.

 

[와. 온 김에 차도 마시고 가.]

톨비쉬:[차도 대접해주시는 겁니까? 이거 영광인데요.]

[빨리와.]

 

벌떡 일어나 욕실로 달려갔다. 세수하고 양치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너저분한 거실을 치우는데 창밖에서 마차가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초인종이 울렸다. 톨비쉬다.

 

“톨비쉬!”

 

반갑게 문을 열었다. 검푸른 로브를 깊게 눌러 쓴 남자가 과일이 담긴 종이봉투를 팔로 안고 서 있었다. 눌러 쓴 로브 탓에 다부진 턱과 입술만이 살짝 보였다. 순간 스산한 바람이 가슴을 관통해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흠칫하며 어깨를 떨었다. 뭐지? 이 기분은?

 

“밀레시안씨?”

 

톨비쉬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빨리 들어와. 잠깐 지금 비와?”

“조금요. 거의 그쳤습니다.”

 

현관으로 들어온 톨비쉬가 손에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두꺼운 로브를 벗었다. 남자는 평소의 육중한 갑주 대신 품이 넉넉한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질의 몸에 휘감기듯 달라붙는 셔츠가 상당히 잘 어울렸다. 바지는 말할 것도 없다.

 

갑옷이 커서 덩치가 커 보이는 줄 알았는데, 원래 그냥 거대한 남자구나. 무슨 곰 같다.

 

“이런 곳에서 생활하시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톨비쉬는 내 집에 오는 게 처음이던가? 치우다 만 양말을 소파 밑에 슬쩍 발로 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럽지?”

“생각보다 깨끗합니다.”

“생각보다라니 무슨 뜻이야?”

“하하.”

 

눈을 흘기자 톨비쉬가 대답을 피하듯 주방으로 향했다. 자기 집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무슨 과일을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봉투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사과, 석류, 배, 포도 등 종류도 다양했다. 색이 선명하고 윤기가 흐르며 껍질 바깥으로까지 진한 향기가 퍼져나오는 것이 확실히 고급스러웠다.

 

“무거웠겠다. 정리는 내가 할게. 앉아있어.”

“손을 씻고 오겠습니다.”

“응. 화장실은 저기 안쪽.”

“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찻잎을 꺼내고 물을 끓였다. 잠깐. 그런데 화장실 수건걸이에 팬티 널어둔 거 치웠던가? 사과를 깎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불안해졌다. 안 치운 거 같은데 그거.

 

지잉-

 

그때였다. 어디에서인가 미세한 진동이 들려왔다. 의자에 걸어둔 톨비쉬의 로브 안주머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한테 온 게 아니라 톨비쉬에게 온 연락이구나. 돌아오면 연락 온 것 같다고 말해줘야겠다. 사과를 반으로 가르려 과도를 고쳐 쥐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사실 우리도 밀레시안님만 뺀 방 있는데]

 

“……”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과도를 내려놓고 식탁을 향해 걸어갔다. 로브 주머니를 뒤져 손바닥만 한 통신기를 찾아냈다.

 

정말이야? 너희 정말 나만 뺀 채팅방이 있는 거야? 거기서 무슨 이야기하는데? 나는 왜 낄 수 없어? 나는 알면 안 되는 이야기야? 왜? 왜? 왜? 왜?

 

눈앞이 새빨갛게 물든다. 톨비쉬의 통신기 전원을 눌러 켰다. 화면에 네모 칸 네 개가 떠올랐다.

 

[□□□□]

 

…비밀번호?

 

“큭…!”

 

젠장!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설마 비밀번호를 설정해두었을 줄이야. 역시 보통 놈이 아니다. 톨비쉬가 할 만한 비밀번호가 대체 뭐가 있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래. 침착하자. 나라면 무슨 비밀번호를 했을까.

 

1234.

 

순서대로 입력했다. 빨간색 글씨로 ‘불일치’가 떠올랐다. 젠장…!

 

“그럼…”

 

설마 0000? 4321? 대체 뭘까. 액정을 노려보면 답이 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납게 노려보는데 머리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세 번 이상 틀리면 잠깁니다.”

“꺄아아악!”

“조심.”

 

내가 떨어트린 통신기를 낚아챈 톨비쉬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토, 토,톨. 톨비. 톨비시이…”

 

궁지에 몰리자 목에서 애원하는듯한 소리가 나왔다. 톨비쉬가 태연한 낯으로 통신기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비밀번호는 입력해 보셨습니까? 뭐라고 입력하셨습니까. 1234?”

“…어떻게 알았어?”

 

톨비쉬가 또 웃는다. 너 참 알기 쉽구나, 라는 눈빛이었다. 비참하다...!

 

“밀레시안씨가 제 통신기를 확인하고 싶어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그게. 그게…!”

“보고 싶으시다면 편하게 보셔도 됩니다.”

“뭐?”

 

기분 탓일까. 왜인지 톨비쉬는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였다. 그의 통신기를 몰래 확인해보려다가 현장에서 들켰다. 상당히 불쾌한 상황일 텐데도 톨비쉬는 그저 웃기만 했다.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접히고 고른 치열이 드러나도록 활짝 웃는, 몹시도 행복한 미소였다.

 

“그...저기...비밀번호...알려줘...”

 

그래도 일단 확인이나 해보자. 통신기를 손에 쥐고 우물쭈물 눈치를 살폈다. 톨비쉬가 숫자를 순서대로 불러주었다. 그대로 입력하자 정말로 잠금이 풀렸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통신기가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불러준 숫자가 이상했다.

 

“암호…신기하네.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어?”

“물론이죠.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숫자입니다. 밀레시안씨도 잘 아는 숫자일 텐데요.”

 

알다마다 너무 잘 아는 숫자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린의 영웅께서 이 세계에 당도하신 날 아닙니까.”

 

내 생일이었다.

 

“아. 정말 내 생일이야?”

“네. 밀레시안씨의 생일입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숨 막힐 정도로 화사하게 생긋거리며 톨비쉬가 조리대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내가 깎다 만 사과를 손에 쥐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톨비쉬의 옆에 붙어 섰다.

 

“왜, 왜. 왜? 왜 내 생일로 해둔 거야?”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을 좋아한다고.”

“뭐?”

“좋아하지도 않는 이와 관련된 숫자를 암호로 정해둘 리가 없지 않습니까. 좋아합니다. 밀레시안.”

“아아아악! 아아악!”

“그렇게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잖아요.”

 

머리에 과부하가 온 내가 마구 소리를 질러대자 톨비쉬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는다. 흐드러지는 미소가 달콤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멎었다던 부슬비가 다시 내리는 모양이었다.

 

“......”

 

통신기를 한 손에 쥔 채 멍하니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톨비쉬는 말없이 사각사각. 사과를 깎고 있다. 속이 비치도록 창백한 피부. 웃는 듯 마는 듯 요염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긴 속눈썹. 봉긋하게 솟아오른 이마에 오뚝한 콧날. 물결치는 금발. 실로 그림 같은 남자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좋아합니다. 밀레시안.’

 

톨비쉬가 나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종종 아니 꽤 자주 나에게 이런 식의 일방적인 호감을 표현해왔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불쾌했고 두 번째에는 짜증이났으며 세 번째부터는 당황했고 그 뒤로는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싫지 않습니다.’

‘당신이 좋습니다.’

‘좋아합니다.’

‘정말 좋아합니다.’

 

남자는 달변가였다. 자신의 얼굴만큼이나 달콤한 언어를 꾸며낼 줄 알았다. 얼마든지 화려한 수식으로 듣기 좋게 포장할 수 있을 텐데도 그는 언제나 단순하게 ‘좋아한다’라고만 할 뿐이었다. 코흘리개 어린애 같은 고백이었고, 나는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만 들어갈 수 있다는 진리를 안다. 남자의 고백은 보답을 바라지도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는 지극히 유순하고 순결한 고백이었다.

 

“톨비쉬.”

“네.”

“방금 나한테 한 것 같은 말…다른 사람한테도 해?”

 

톨비쉬의 손이 멈췄다. 그의 팔을 덥석 움켜잡았다.

 

“내가 진짜 걱정돼서 그래. 톨비쉬. 세상에 의외로 미친 여자 진짜 많다? 너 이 여자 저 여자한테 좋아한다고 하고 다니다가 까닥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려…하아…미치겠네.”

 

지금 나를 뺀 채팅방 따위가 문제냐. 모든 걸 다 아는 듯 능청스러우면서도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순진한 남자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가 돌 것 같았다.

 

내가 그동안 이 남자를 오해했구나. 너무 의심스럽게 잘생겨서 당연히 나쁜 놈인 줄 알았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가. 저렇게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 마냥 사랑스럽게 생겼는데 성격도 착하면 그거야말로 대재앙이다. 일생이 박복하리라.

 

“잘못 걸리면?”

 

한숨을 푹푹 쉬는 나에게 톨비쉬가 되물었다.

 

“잘못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니고 집착하고 집 알아내서 찾아오고 몰래 훔쳐보고 매일 편지 보내고 납치하려고 할 수도 있어...!”

 

톨비쉬는 건장한 남자니 성범죄를 당할 위험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걱정이었다. 상대가 약한 여자라면 그가 제대로 뿌리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여튼. 하아...세상에 미친 여자 진짜 많아. 조심해. 응? 물론 친절하게 대한 당신 탓은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당신이 결국 피해를 볼 테니까…! 아무한테나 막 좋아한다고 하고 다니면 안 돼! 사람들이 오해해! 미친 여자 꼬인다고!”

 

당신은 여자뿐만이 아니라 남자도 조심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이려다 그만두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톨비쉬가 고개를 한쪽으로 나른하게 기울이며 입술을 뗐다.

 

“그렇다면 밀레시안씨도 저에게 그렇게 하실 겁니까?”

“뭐?”

“졸졸 따라다니고 집착하고, 훔쳐보고. 납치하고. 뭐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까?”

“내가? 그, 그럴 리가 없잖아!”

 

훔쳐보려던 통신기를 손에 꽉 쥔 채로 외쳤다. “이건 그런 이유로 훔쳐보려던 게 아니야!”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진땀을 뻘뻘 흘리는 나를 톨비쉬가 물끄러미 응시한다. 곧이어 남자의 눈꼬리가 사르르 휘어진다.

 

“저는 싫지 않은데요.”

 

오히려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고 농담처럼 덧붙인다. 기가 막혔다. 발을 동동 굴렀다.

 

“당신이 진짜 미친 애를 못 만나봐서 그래! 온종일 감시하고 뭐 하는지 지켜보고! 졸졸 따라다니고! 뒷조사하고! 나중엔 물리적인 상해까지 입힐지도 모른다니까? 칼로 푹푹 찌르면서! 이게 다 당신을 위한 거라고 당신을 사랑해서 이러는 거라고 헛소리하면서!”

“…그게 이상한 겁니까?”

“당연하지!”

“좋아하면 그럴 수 있지 않아요?”

“…톨비쉬…”

 

엄격한 기사 생활을 하면서 직장 동료 말고는 여자를 못 만나봐서 그런가? 연애를 안 해봐서 뭐가 건강한 관계고 뭐가 비정상적인 관계인지 구별을 못 하는 건가? 너무 순진한 건가?

 

“그래…일단 알겠어. 이상한 여자 붙으면 내가 치워줄게. 큰일 날 사람이네 정말.”

 

어째 사람이 알면 알수록 구멍투성이다.

 

“……”

 

톨비쉬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묵묵히 사과를 썰기 시작했다. 톨비쉬 지금 뭔가 좀 뾰로통해진 것 같은데…?기분 탓인가?

 

“서 있지 말고 가서 앉아 계세요. 금방 깎아 드릴게요.”

“아. 으응.”

 

어색하다…








 

 

(끝)

 

이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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