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모 1호>







집이 된통 시끌벅적했다. 새해를 기념해 해모 집에서 한번 모이자, 모이자 하던 게 한 달을 훌쩍 넘겨 오늘에 이르렀다. 메시아기 59년 1월 25일. 거실에 가득 모여 앉은 손님들에게 좋아라 안주거리를 계속 만들어 바치던 모임의 주최자가 연한 머리칼을 흔들어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왜 그러십니까! 그만 좀 하십시오!”

“한 방에 다 찢겼다에 한 표.”

“아닙니다!!!”

“아, 난 생각이 좀 달라. 사령님이라면 왠지 한 번에 한 줄씩, 하나 하나 찢어가면서 위협했을 것 같은데.”

“안 찢었습니다!!!”


유멧이 마른 과자를 든 손가락을 흔들며 웃었다. 


“찢은 거 맞고.” 

“……”

“우리 내기하자. 한 방에 다 찢었다? 하나 하나씩 천천히 찢었다?”

“아니 저기 사부님들…”


해모는 목까지 시뻘개져서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을 휘둘러 살폈다. 크나우 씨와 유멧 씨야 야시꾸리한 코스튬 플레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거리낌이 없겠지만 덴사와 덴사의 아내, 그리고 바를 선생님은 이런 음담패설에는 아직 적응이… 


“그 선택지보다 이건 어때. 입으로 찢었다? 손으로 찢었다?”


바를 선생님……. 

아이 셋 아버지 노릇 짬밥은 참 대단한 것이었다. 주방에서 바를의 아이들이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고 귀가 따갑게 울자 바를은 재빨리 자리를 떴다. 덴사가 짐짓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의견을 냈다.


“그래도 손으로 찢지 않았겠습니까?”


해모는 두 팔로 거세게 공중을 훠이 훠이 휘저었다.


“그만! 그만!!! 아니 왜 얘기가 이렇게 흐릅니까! 제 말은…”

“꺄아악!!!! 꺄악!!! 흐엉엉. 아빠 쟤가 나 때렸어!!”

“제 말은…”

“아니야 언니가 먼저 때렸어!!”

“제 말은…”

“끼아악!!!! 끼이아아아악!!!”

“제 말은…”

“우아아으앙ㄱ!!! 흐엉, 흐엉엉엉!!!”

“제 말은…”

“너네 남의 집에서 이렇게 싸웠다고 엄마한테 다 이른다?! 어?”


그제야 바를의 두 딸은 비명을 멈추었고 해모는 하려던 말을 이어 할 수 있었다. 


“제 말은, 그 야시꾸리 옷 만들기 장인 선생님께서 옷 같지도 않은 옷을 만들어 주셨다는 거 아닙니까.”

“원래 그래.”

“네?”

“옷을 입을 장본인이 가진 몸의 곡선과 형태를 고려하여 최적의 결과물을 창조해 내시지.”

“제 몸의 곡선과 형태를 고려한 게 그런 이상한 팬티도 아닌 끈도 아닌…”

“그러니까! 찢을 수 있게끔 만들어 주셨으니까 감사를 해야 할 거 아냐.” 


무슨 말을 해도 그놈의 찢었니 안 찢었니로 귀결되었다. 해모는 갑갑한 마음을 담아 으유! 원망을 내지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행이나 굽자 싶어 주방에 섰다. 


신년 분위기를 내려고 사령과 함께 커텐도 가벼운 재질로 바꿔 달고 거실 테이블 장식도 조화를 꽂은 유리컵으로 바꾸었다. 산뜻한 달력도 달았다. 

오늘 사령이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령은 서역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보인다는 보고를 받고 열흘 전 북녘 국가의 군부 수뇌부와 함께 현장 정찰을 나갔다. 머나먼 서역 어디까지 가는 건지도 정해지지 않았고, 그래서 언제 돌아올지도 정해지지 않은 비상 상황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사령이 있었다면 아마 조용히 부엌에서 은행이나 굽고, 그 핑계로 구석에 서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 격식 없이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령님이 있으면 바를 선생님 빼고는 다 불편해 할 테니까.’


바를의 아내 분은 잠시 인사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셨는데, 잠깐 모습을 비쳤을 뿐인데도 고매한 품위를 남겼다. 화려하고도 위험했던 과거를 가진 바를 선생님이 무슨 복이 있어 저런 아내를 맞았을까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바깥이 어둑어둑해진 후로 시간이 꽤 흘렀다. 밤 열한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령님 보고 싶다.’ 


시끌벅적한 손님들, 왠지 들뜬 북적함 가운데서 해모는 휑한 그리움을 느꼈다. 은행을 굽다 말고, 사령이 뒤로 몰래 다가와 몸을 겹치고 팬을 채어 가는 상상을 떠올렸다. 안 본 지 며칠 됐다고 몸의 온기가 그리웠다. 


“해모! 근데 묘목 얘긴 뭐냐?”


멀리서 크나우가 소리쳤다. 해모는 은행을 그릇에 옮겨 담으면서 대답했다.


“느릅나무 묘목이요. 결국 시들었습니다.”

“에이, 당연하지.”


술 기운이 오른 유멧은 말수가 많아지는 동시에 말도 빨라졌다.


“묘목이 살아남는 꼴을 못 봤어.”

“그래도… 간혹 엄청 크게 자라기도 하잖습니까.”

“거의 기록에 남을 수준이지, 그런 경우는.”

“혹시 모르잖습니까. 그냥 크게 자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저는 기분 좋던데.”


사령이 떠나기 전날, 해모는 완전히 가망을 잃은 묘목을 보고 큰 실망과 상실감을 느꼈지만 사령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심적인 부담을 더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해모는 그 묘목에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이름까지 지어 주고 애지중지 돌보았는데, 비쩍 말라 비틀어진 마지막을 보았을 때에는 마음이 심란했다.


“비료를 너무 많이 준 게 문제였는지, 광량이 적어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땅 자체가 썩었고. 광량도 광량인 것 같고.”


크나우가 무신경하게 대답하자 덴사가 애써 해모의 마음을 달래려 한 마디 던졌다.


“다음엔 괜찮을 수도 있으니까, 또 심으면 되잖냐.”

“그건 그런데……”


맘이 안 좋다고. 

해모는 속으로 쏘아붙였다. 





*   *   *




바를과 아이들을 따라 나가 배웅해 주었다. 기분 좋게 밤길을 걸어 돌아서는 가족의 뒷모습을 한참 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돌아서고 보니 큰 달이 가까이 떠 있었다. 집 앞의 초지가 밝게 흔들렸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터덜터덜 걷다 묘목이 있는 자리로 갔다. 묘목이라 해도 어엿한 나무다. 땅에서 뽑혀 누운 나무는 며칠 새 더욱 메말라 마치 땔감이라도 된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천능시 5가 반려인. 규율 위반.”


고개를 돌리자 어둠을 뚫고 가까이 걸어오는 회색 제복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 한 손에 담배를 들고 피식 옅은 웃음을 품었다. 


“사령님!”

“20시 이후 외출금지 조항 위반.”

“언제 오셨습니까!”

“정렬.”

“말 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정렬하라니까.”


사령은 평소와 달리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그대로 두고, 제복 단추를 하나 풀고 있었다. 약간 흐트러진 차림새였다. 먼 길이 피곤했겠다. 사령은 담배를 옆으로 꼬나물고 해모의 두 손을 잡아 기어이 정렬 자세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해모의 바지 앞섶을 턱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얇은 웃음이 입가에 떠 있었다.


“오자마자 뭐 하십니까.”

“정렬해라.”


손을 떼어 내려 했더니 사령은 장난스레 해모의 팔을 낚아채 뒤로 붙이고 몸까지 붙여왔다. 그 힘에 밀린 해모가 킥킥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담배를 손가락으로 옮겨 들고 이번에는 해모의 목에 혀를 부딪쳤다.


“안에 사람 있습니다!”

“근데 밖에서 뭐 해.”

“바를 선생님 가시는 거 보고 와서, 얘 보고 있었습니다.”


사령의 시선이 묘목에 가볍게 얹혔다. 해모가 담배 쪽을 힐긋 보자 먼저 보고를 했다.


“두 개째.”

“네. …일은 잘 끝나신 겁니까?”


마지막 연기를 가볍게 내뿜은 사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 좀 붙이고 가자는 걸 말려서 빨리 왔어.”

“왜요?”

“하늘이 맑길래.”


사령의 눈짓 끝에는 커다란 달이 있었다. 해모는 쏟아지는 달빛만큼이나 밝아오는 가슴을 느꼈다. 흐트러진 제복에 머리를 묻고 등에 팔을 둘렀다. 먼 땅에서 묻어 온 밤공기의 냄새가 났다.


“사람들이 저보고 묘목 뭐하러 심냐고 막 뭐라 그랬습니다.”

“듣지 마라.”

“솔직히 제가 우겨서 심자고 했던 건데, 사령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아니. 같이 심자고 한 거잖아.”

“그래도 속으로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신 거 아닙니까?”

“아니다.”


해모는 고개를 들어 사령의 표정을 한 번 확인하고 다시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저 솔직히 해모 2호 죽어서 마음 되게 안 좋았다고요.”

“해모 2호?”

“쟤 이름이요.”


웃음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는 숨을 흘린 사령이 말했다.


“해모 1호의 의견에 따라 2호는 장례를 치러 주도록 하지.”

“해모 1호 보고 싶으셨습니까?”

“그래서 빨리 왔잖아.”

“그럼 저희 오늘 여행 갑니까?”

“손님들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 안에서 손님들이 쏟아져 나왔다. 령번이 몇 차례 크게 울려 퍼지고 시끄러운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그들은 각자의 보금자리로 향하는 말에 몸을 실었다. 사령이 돌아와서 기분이 더 좋아져 해모는 더 방방 뛰며 손을 흔들었다. 쫓아 달려가 말의 궁둥이를 치면서까지 명랑하게 배웅했다.


해모는 마른 풀숲 가운데 휘영청 서 있던 사령의 허리에 매달려 질질 끌려가다시피 걸었다. 


“사령님. 밤하늘은 30분 뒤에도 맑습니다.”

“음?”

“제비 떼보다 더 보고 싶은 거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해모 1호의 은밀한 곳 같은 거 말입니다.”


거적대기 끌듯 해모의 겨드랑이 아래를 잡고 무게를 지탱해 걸어가던 사령이 잠깐 눈을 높이 굴렸다.


“밤하늘이야, 2시간 뒤에도 맑겠지.”






*   *   *






지난밤, 결국 여행 갈 시간과 체력은 남지 않았다. 


따갑게 눈 위로 번져오는 햇빛에 해모는 눈을 떴다. 진녹색 장포 자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장포 사이 두껍게 올라온 가슴에다 손을 철퍼덕 얹고, 아직 뻑뻑한 눈을 깜빡거렸다. 어젯밤이 맑아서였는지 오늘 아침까지도 구름 없이 쾌청한 날씨였다.


손으로 조물딱거리다 보니 어젯밤 자신이 남긴 키스마크가 사령의 가슴에 집중되어 있는 게 보였다. 


“사령님, 제가 어제 여기만 공격했습니까?”

“집중포격했지.”

“맛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 대충 대답을 흘린 사령이 일어나 해모의 알몸을 일으켜 세웠다. 뒤에서 허리를 안고 미적미적 걸어 데려간 곳은 창문 앞이었다. 창밖을 보던 해모가 잠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 사령님! 해모 2호 살아났습니다! 보십쇼!”


싱싱한 느릅나무 묘목이 원래 자리에 심어져 있었다. 아침이라 뇌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아직 부은 눈을 찡긋거리는데 사령이 해답을 내놓았다.


“해모 3호다. 구하느라 사우가 며칠 고생 좀 했지.”

“며칠…이요?”

“해모 1호가 영 상심이 커 보이길래 미리 부탁해 놓고 갔다.”


부탁의 탈을 쓴 명령. 느릅나무 묘목 구하기 작전을 수행했을 사우의 딱딱한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터졌다. 


“사령님. 저건 이름 다른 걸로 지어요.”

“뭘로?”

“초노 2호…”

“절대 반려다.”

“준명 2…”

“절대 불허가다.”

“그럼 사령님 2…”

“잠깐 기다려라. 뽑아서 버리고 올 테니까.”

“아닙니다! 해모 3호가 맞습니다!”


녹색 장포와 알몸이 섞여들어 거실 바닥을 굴렀다. 따뜻한 계절을 알리는 빛이 창문을 적시고, 싱그런 잎을 단 느릅나무 묘목이 멀리 보이는 아침, 두 사람은 웃음이 절반인 키스를 나누었다. 









*



달을 보다가 갑자기 사령님과 해모가 보고 싶어져서 썼던 조각글입니다. 속편의 출발과 이어지는 에피소드이기도 합니다. 


BL소설 작가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사랑이야기로 삶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메일 : nomuggles0_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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