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남형 회장님께
회장님, 감히 당신이라 불러봅니다.
당신은…. 나를 좋아하나요?
저는 ...
당신 같은 사람은 저를 보지 못할 거 같았어요.
그냥 수단을 위한 존재
당신은 너무 빛나는 존재이고 바쁜 사람이고
당신 옆에는 당신처럼 잘난 사람들이 많으니까
나 같은 건 돌아보지 않을 줄 알았어요.
나는 그림자입니다.
늘 어딘가에 기대 숨어 살죠.
저는 수줍음이 많아요.
사람들 눈이 두려울 때도 많아요.
그래서 더욱더 당신 옆에 있었나 봅니다.
당신 뒤에 숨을 수 있어서
당신이 나를 찾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옆에 있을 테니까.
*
늘 너를 보고 있었으니까.
12살 때였어..
너는 우리 아버지 차를 모는 기사의 아들이었지.
학교를 마치고 왔는데 우리 집 응접실에 네가 있더라.
너희 아버지를 따라온 너는 우리집이 그리고 내가 낯설고 두려운지
간식으로 내어준 쿠키와 우유에 손을 내지도 못하고 두리번두리번
그 반짝이는 까만 눈으로 주변을 보고 있었어.
8살이라고 구승효라고..
나는 그때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8살 구승효를 봤어.
머뭇 머뭇 거리다가
숙제한다고 볼록한 네 파란 책가방에서 책과 노트를 그리고 필통을 꺼냈어.
로봇이 그려진 그 파란색 자석 필통.
너는 필통을 열어보더니,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는
글쎄. 조그마한 칼로 연필을 도르륵 깎더라.
나는 8살짜리 손이 그렇게 야무진지 몰랐어.
내 연필은 항상 누군가가 깎아줘서. 난 연필을 깎아본 적이 없었어.
너는 연필을 다 깎더니 부스러기가 담긴 휴지를 곱게 싸서 휴지통에 버리고 오더라
그리고 사각사각 열심히 그림일기를 쓰는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너한테 점점 다가가서
네 일기를 훔쳐보고 있더라.
네가 쓰는 그 연필의 사각 거리는 소리가 좋아서
아니 그냥 너의 숨소리가 좋아서.
너는 바짝 너에게 붙어 앉은 내가 부담스러운지 노트를 접고 아버지를 찾는다며 밖으로 나갔어. 나는 네 그림일기를 열어봤지. 너의 매일이 어딘가 궁금해서. 그러다가 다 써지지 못한
그 일기 끝에서 ‘남형이형’이라는 단어를 봤어.
그때부터였을 거야.
너만 보면 심장이 빨리 뛰었어.
때로는 손에 땀이 날 정도로 널 보면 긴장되었어.
*
말하지마..
말하지마, 구승효
무슨 말을 할건지 대충 짐작하고 있으니까.
그래 네 표정만 봐도 심각한 얘기인 건 알겠어.
네가 무슨 말을 할지 내가 말할까?
너는 갑자기 이렇게 나를 불러내서 미안하다고 하겠지.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불러냈다고.
나는 네가 나를 왜 부르는 줄 알면서도
네 전화에 좋다고 뛰쳐나왔어.
그래, 어느 날부터인지 모른다고 말할 거야.
아니. 네가 상국대학병원에 간 뒤로부터 넌 달라졌어.
널 거기로 보낸 건 내 최대의 실수야.
구승효 너는 기어코 하려는 일은 다 해야 하는 사람.
하고 싶은 말은 결국에 하는 사람
내 기분을 맞추며 입에 발린 말보다는
때로는 독한 사실을 얘기하는 그 입.
둘러대는 표현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
네가 무슨 말을 할건지 알아.
네가 나를 미안해하는 눈으로 나를 보기 시작한 지가
언제부터인지.
네 마음이 어디론가 떠나있다 느낀 게 언제부터인지.
구승효
중요한 건 난 너하고 헤어질 수 없어.
그런 생각을 나는 해본 적이 없어.
뭘 믿고 그러는지 몰라도
구승효는 조남형 말고 누군가가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해봤거든.
그러니까. 그 사람하고 정리해 길게 말하지는 않을게
....
그 사람하고 제가 어떤 사이인 거는 아닙니다.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너 좋다는 얘기는 들었지?”
“......”
“어떻게 말해야 그놈 마음이 덜 다칠까 신경을 쓰는 게
네가 그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되지 않아.”
“......”
“인간적인 연민도 호감도 네가 누구한테 그런 마음을 갖는 거
나는 싫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회장님.”
“그럼 아무 말도 하지마..”
“그래도 이렇게 지내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울지마. 누가 죽었어? ”
“네가 덜 착했으면 내가 지금 덜 열받을 텐데.
뻔뻔하게 너한테 협박이라도 할 텐데.
그것도 지금 못하잖아.
구승효 네 새끼가 너무 착해서.”
“넌.
내가 다짜고짜 화를 내도
영문도 모르고 내가 너한테 하는 사나운 말도 다 받아주고
그 화를 다 받아주고. 그렇게 다치고 아프면서도 ”
“나 너무 후회해 구승효.”
“내가 무서워서 그랬어.
초라해질까 봐 그랬어. ”
“헤어지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나는 큰 착각을 했어.
고쳐지지 않는 나의 무심함으로 너한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지.
열이 펄펄 끓게 아파도 아프고 힘들다 말할 줄 모르는 너를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네가 나를 지켜주고 있었던 거야.
승효야. 이제 내 품에서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줄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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