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이건… 마치 우리 아버지 방 같은데."


루스터 네 평소 스타일을 봐서 알고는 있었지만 취향 진짜, 엄청 올드하네. 루스터의 방에 막 발을 들여놓은 행맨이 내뱉은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기껏 들어오겠대서 데려왔더니, 뭐라고? 불만스러운 얼굴의 루스터가 가방을 텅 하고 내려놓고선 휙하니 제 두 손을 들어보였다.


"그래? Shit, 불만이면 꺼지시든가."

"농담이었어, 농담. 날카롭긴, 브래들리."

"후우…"


역시 저 멍청이를 지금이라도 내쫓는 게 나을까? 루스터의 입에서 땅이 꺼질듯한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참 이상한 일이다. 꽤 오랫동안 서로 못 봤다가, 이번 임무 때문에 펍에서 다시 재회했던 그때까지도 행맨 쟨 원래 저런 놈이었지 하고 쉽게 신경을 껐었는데. 이상하게 저 능글맞고 얕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 게 쉽지 않았다. 아마도 어제, 아니, 아까부터였겠지. …아닌가? 곤죽이 되어 흐물거리는 기억의 편린들이 루스터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진짜 G-LOCK이라도 겪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루스터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 사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행맨이 루스터의 방을 빙 둘러보았다. 오래 전에 데뷔한 유명한 재즈 가수 포스터와 잡지에서 찢어낸 것 같은 전투기 페이지들이 몇 장 붙어 있는 벽은 대체로 썰렁했다. 있는 가구도 많지가 않아서, 상당히 단출한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침대와 책상 주변 물건의 가짓수가 많아 난잡스러운 느낌을 주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그렇게 정돈된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닌, 신기한 곳이다. 


이를테면… 이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이불이라든가. 분명 침대 위에 고르게 펼쳐져 있긴 했지만, 군인의 것답지 않게 각 잡혀 개어져 있는 것도 아닌 새하얀 이불자락을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응시하던 행맨이 짐짓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가끔 피닉스가 나를 dick head라고 부른다고 해서 루스터 너까지 그러기야?"

"Shit, 마음 같아선 그 앞에 fucking까지 붙여서 불러주고 싶으니까 관두지 그래."

"그래도 애인인데… 나한테 너무하네, 스윗 하트."

"오, 제발. 백맨."


나 진짜 토할 것 같으니까 그만 둬. 정말로 속이 안 좋아 보이는 루스터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행맨이 두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래, 루스터. 그거야."

"뭐가?"

"난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가 너무 좋더라고."

"…Holy shit. 진짜 돌았어?"

"아마 넌 이해 못하겠지만, 어쩌겠어. 내가 그런 걸. 네 그 반응을 볼 때마다, 처음 F-18 엔진 스로틀을 밀었을 때에나 느낄 법한 감정이 몰려오는데."

"…"

"그런 말도 있잖아, 허니. 기침과 사랑은 절대 숨길 수 없다?"


우우욱. 루스터가 기어이 소리내어 헛구역질까지 하고 나서야 행맨은 루스터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모습이 마치 실컷 원하는 만큼 가지고 논 장난감을 제자리에 가지런히 가져다 둔 아이 같았다. 반면 얼굴에 심드렁한 기색이 역력한 루스터가 제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런다.


"그래서, 굳이 내 방에 오겠대서 데리고 들어오기는 했는데. 이제 뭐 어쩔 생각인데? 행맨."

"아무 생각 없어. 그냥 네가 자는 것 좀 보고 돌아가겠다고 했잖아."

"…"

"왜, 루스터. 혹시 뭔가를 더 기대하기라도 한 거야? 그래? 오, 이거 너무나 바람직한…"

"꺼져, 망할 백맨."


대놓고 눈가를 찡그린 루스터가 아예 제게서 등을 돌려버리기 전, 씩 웃은 행맨이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 크지 않은 방 안에, 덩치가 커다란 두 남자가 나란히 앉아 있으니 방이 꽉 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뜩이나 약간 거리감이 있는 사이인데, 밀폐된 공간에 단 둘이 남아 서로의 얼굴만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자니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행맨의 색 옅은 눈 안에 오직 루스터 본인의 모습만이 들어 있다는 것 자체가, 조금. 그랬다.


크흠. 괜히 헛기침을 한 루스터가 버릇처럼 제 왼뺨에 남은 흉터를 만지작댄다. 누군가가 칼로 긋기라도 한 듯 선명한 흉터였다. 길게 그어진 흉터의 흔적은 목에도 남아 있었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던 행맨의 시선이 살짝 이채를 띤다.


"잠깐, 루스터. 그거… 우리가 탑건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없었잖아."

"아, 그랬지."

"졸업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냥, 별 일 아니었어. 너도 알잖아, 행맨. 우리 다 전투기를 몰다 보면…"

"말해, 루스터."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던 잘생긴 얼굴이 차갑게 식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자기 장난감처럼 전투기를 모는 와중에도 늘 여유롭던 얼굴이 저 정도로 진지해진 것은 처음 보았기에, 루스터의 눈이 동그래졌다. 동료들이 소위 '풀렸다'고 말하는, 순하게 내려간 루스터의 눈꼬리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해맑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얘한테 얘기한 적이 없었던가. 눈을 몇 번 껌뻑인 루스터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몇 년 전이었더라…? 편대 비행 훈련하다가… 신입이 타고 있는 다른 기체가 내가 타고 있는 전투기를 거의 들이받을 뻔했지. 조종 부주의였어."

"그래서?"

"다행히 충돌하지는 않았는데, 내가 무리하게 방향을 틀다가 엔진이 두개 다 나갔어. 완전 고물이었거든."

"…Shit. 활주로를 굴러가는 것도 요행일 정도의 그런 빌어먹을 고철 덩어리는 이제 그만 퇴역시키든가 했어야지. 하여간 윗분들의 세금 사랑이란!"

"그래도 뭐, 사출좌석이 제대로 작동했으니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거 아니겠어? 그 때 깨져나간 캐노피 파편에 제대로 긁힌 자국도 있고, 뭐 대충 그래. 여기랑, 목도."

"…"


슬쩍 목을 틀어 행맨에게 제 흉터 부위를 보여준 루스터가, 문득 그 위로 와 닿는 뜨거운 체온에 움찔한다. 행맨의 마디 굵은 손가락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선명한 흉터 위를 훑어내려오고 있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애정 어린 손놀림. 순식간에 모든 감각이 그쪽으로 쏠리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서로의 체온이 농밀하게 맟닿은, 그 한 지점으로. 그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기묘한 간질거림이 이내 루스터의 살갗 아래로 스멀스멀 흘러들고 있었다. 


삐, 삐, 삐. 머릿속에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상대 기체에게 락온당했을 때에나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루스터를 일깨웠다. …젠장, 안 돼. 이제 그만. 저도 모르게 몸을 파드득 떠는 루스터 덕에 행맨의 손은 손쉽게 떨어져 나갔다. 이내 몸을 바로 세운 루스터가 애써 제 동요를 감추려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여튼 그거야. 그게 다야.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행맨 너도 그렇게 흥분할 필요까진…"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정말로."

"…"


왜 유독 지금의 저 목소리가, 전에 들었던 그 어느 때보다도 화가 난 것 같을까. 이상하지. 어쩐지 좀 날카롭게 느껴지는 행맨의 반응에, 묵묵히 눈을 깜빡이던 루스터가 잠시 고민한다. 이럴 땐 뭐라고 말을 해 줘야 하지. 지금의 행맨에게는 남을 놀려먹으려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순수하게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서로 알고 지낸 지는 꽤 되었지만,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다행히도 루스터의 짧은 고민은 행맨이 굳어 있던 제 표정을 풀고 다른 곳을 응시하면서 해소되었다. 루스터의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액자를 발견한 행맨의 입에서 오,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그러자 뭔가 싶어 흘끔 본 루스터가 이내 눈썹을 들썩거렸다. 그가 부대를 이동할 때마다 한 번도 두고 간 적 없었던 액자다. 마른 나무 껍질 같은 질감의 액자 안에서, 선글라스를 낀 구스와 캐롤, 그리고 어린 루스터를 안은 젊은 매버릭은 함께 씨익 웃고 있었다. 대충 봐도 누구인지 알 것 같은 얼굴들이었지만, 행맨은 일부러 한 번 더 물어본다.


"가족사진?"

"맞아."

"…아하, 음… 말이 나온 김에, 루스터."


왜, 이번엔 또 뭔데? 웬일로 하던 말을 머뭇거리는 행맨의 기색에 루스터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자신이 행맨을 안 이래로 그가 이렇게 주저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모습이 똥 마려운 금발 강아지 같아서, 내심 좀 우습기도 했다.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행맨이 주저주저 입을 연다.


"네게 사과하고 싶어."

"뭘? …아."

"진심으로 미안해, 브래들리. 확실히 그 날은… 내가 선을 넘었어."


뭔가 했더니, 아마도 둘이 멱살잡이를 할 뻔했던 그 날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 날은 행맨을 알게 된 후 처음으로 행맨한테 F워드를 날렸던 날이었고, 또 모두의 앞에서 처음으로 이성을 잃을 뻔한 날이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뜬 아버지 구스는 자신의 영원한 롤모델이었다. 어떻게든 아버지처럼 하늘을 날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해군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고, 탑건 스쿨에 입학했고, 졸업장-아버지는 끝내 받지 못했던-을 받았고, 시간이 흐른 후 이렇게 다시 탑건에 돌아왔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 동안, 아버지가 남겨 두고 간 피아노 악보와 하와이안 셔츠를 바라보며… 어린 자신은 얼마나, 이 모든 걸 제 손에 쥘 수 있게 되기를 소망했던가.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에, 집에 몇 개 남아 있지도 않은 아버지의 흔적들은 마치 제 인생과도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 저를 이끄는 별 같은 존재였다, 구스는. 루스터는 아직도 그 지난한 나날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제 코앞에서 그런 식으로 언급한 사람은 행맨이 사실상 처음이었다. 그러니 루스터가 이성을 잃었던 것도 일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니까. 그리고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제가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적절한 상태가 아닌 것도 맞긴 했었다. 그땐 매버릭한테 쌓여 있던 감정의 둑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지. 정말 위태위태했어.


그러니까 사과는 됐어, 하고 말할까 했지만 루스터는 그냥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 미안하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약간 초조해진 듯한 행맨이 두 무릎을 꾹 쥔 채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함부로 네 아버님을 언급한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야기해 보자면, 루스터. 난 네가 매버릭 앞에서 그렇게 뻔히 보이는 멍청한 짓을 하는 게 싫었어."

"…뭐?"

"평소엔 내가 놀려댈 정도로 안전을 그렇게 중요시하더니, 정작 매버릭과 붙었을 땐 네 목숨을 걸고 치킨 게임을 했고. 그걸 통해 기회를 얻었음에도 정작 쏴야 할 땐 쏘지 못했지, 너는."

"…"

"매버릭의 전략이 이 임무를 안전하고 빠르게 완수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란 걸 알면서도, 네가 무모하게 반항하는 걸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Oh god, 브래들리. 그 때의 너는 내가 아는 루스터가 아닌 것 같았거든. …Shit, 그냥 솔직히 말할게. 난… 이제는 다 지나버린 이야기지만, 내가 만약 임무 수행 팀의 리더가 된다면 무조건 윙맨으로는 널 데려가고 싶었어, 루스터. 내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전투기 조종사는 너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 때의 너는, 작전에 절대 데려가서는 안 될 조종사 같았어."

"…"

"그래서 화가 났지. 네가 직접 겪은 것도 아닌 과거의 일에 발목이 붙잡혀 눈앞의 현실을 전혀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더 나아가 스스로의 미래도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앞으로도 그런 상태로 비행을 할 거라면, 보나마나 오래 가지 못할 테니까."


그랬나. 내가 그 정도였던가? 타인의 입에서 듣는 자신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돌처럼 굳어 눈만 껌뻑이고 있는 루스터를, 행맨의 푸른 눈은 따스하게 담아내고 있다. 충격을 받아 아파오는 머리를 무시한 채, 루스터는 문득 제 곁에 앉은 행맨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 


그저 한없이 제 잘난 맛에 살고 가볍기 짝이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거라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뭐, 서로의 말마따나… 자신도 펍에서 행맨을 처음 마주했을 때 '하나도 안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결국은 서로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데에서 시작된 마찰이었다. 루스터의 침묵이 다시 길어지자,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행맨이 다시 대화의 물꼬를 튼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 생각을 그런 방식으로 네게 표현해선 안 되는 거였지.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으음."

"…왜?"


행맨의 말을 듣자마자 한 쪽 눈가를 찡그린 루스터가, 저를 향한 행맨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한다.


"행맨 네가 그렇게 순순히 잘못했다고 인정하니까 어쩐지 좀, 얼떨떨해서."

"Oh, shit. 루스터, 도대체 지금까지 날 어떤 놈이라고 생각해 온 거야?"

"이런, 행맨. 평소의 네 행동을 생각하면… 그걸 내 잘못이라고 볼 순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솔직히 난 지금 상당히 놀란 상태라고. 무엇보다 너랑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었고…"


말끝을 흐리는 루스터의 시선이 이내 바닥 쪽을 향한다. 누가 봐도 어색해 죽겠다는 반응이었다. 그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은 행맨이 제 두툼한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그런다.


"그냥… 문득 생각했지. 정말 '문득'이었어."

"…"

"매버릭과 너희 셋이 출발하고, 내 전투기에 앉아서… 부디 대거 스페어가 출격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혹은 절대 그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었을 때 말이야. 처음에 대거 1이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출격하려고 했었어. 물론 홈플레이트의 답은 불허였지만."

"…"

"그리고 그 다음에, 루스터. 네가 격추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때 또 생각했지."

"…뭘?"

"네가 죽었다고, 아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더라고. 내가 생각해 왔던 모든 것들을, 말할 기회도 없이 널 이렇게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그냥… 그 생각만 했지. 아, 좀 더 일찍 말해줄 걸. 좀 더 솔직하게 말해줄 걸, 좀 더 내가…"


어쩐지 좀, 더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귓가가 확 달아오른 루스터의 시선이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이렇게 절절한 누군가의 마음을 듣는 것도 사실은, 제 35년 생애 처음이었기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슬쩍 붉어져 있는 루스터의 왼쪽 볼을 캐치한 행맨이 이내 씩 웃는다.


"브래들리.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

"아버님 얘기를 들려줄 수 있어?"

"…좋아."


아주 오래된 이야기였다. 매버릭과도 이야기한 적 없었던, 그저 루스터 혼자만 간직하고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감정들. 그 소중한 기억들이 하나 둘 루스터의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렸던 자신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유쾌한 구스의 목소리. 자주는 보지 못했어도 볼 때마다 세상 소중한 보물처럼 자신을 들어올려 안아주던 구스의 품과, 말소리와, 체온, 그리고 냄새까지 모두. 아버지와 매버릭이 썼던 레이벤 선글라스는 도대체 왜 그렇게 멋져 보였던 건지. 그래서 어린 루스터가 자연스럽게 제 진로를 해군 조종사가 되겠노라 선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것이, 브래들리 브래드쇼의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꿈이자 목표였기에.


한번 입이 열리니 거칠 것이 없었다. 루스터는 계속 이야기했다. 제가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겠노라 선언했을 즈음, 그 무렵부터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진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부재를 채워주던 매버릭과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아버지가 복무 중 순직한 터라,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게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추천서 전형으로 지원할 때마다 자신은 계속해서 해군사관학교 입학에서 탈락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넣었던 일곱 번째 지원서마저 탈락했던 날, 이 모든 게 매버릭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느꼈던 배신감은 차원이 달랐다. 그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제 마음을 몰라주는 매버릭이 야속했고, 그랬기에 화가 났다. 제 삶에서 어머니를 제외한다면 가장 믿고 따랐던 사람이기에 더 그랬다. 


루스터의 이야기를 쭉 듣고 있던 행맨이 낮게 흐음, 하는 침음성과 함께 한 쪽 턱을 괸다. 턱을 괸 행맨의 왼손에는 늘 그랬듯 굵은 금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할 때 동기들과 다같이 맞췄던 졸업반지였다. 행맨의 반응에, 잠시 이야기를 끊은 루스터가 이내 눈으로 묻는다. 왜?


"아버님의 뒤를 따르고 싶었던 거라면… 고려할 만한 다른 루트들도 있었잖아, 브래들리."

"…"

"그런데 왜 꼭, 해군사관학교 입학에 집착한 건데?"

"우리 아버지가 해군사관학교를 나왔으니까."


돌아온 대답은 덤덤했다. 오. 행맨의 입술 새로 짧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아하, 그래서. 덤덤한 목소리와는 달리, 옆에서 바라본 루스터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울고 싶은 것을 겨우 억제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기에 행맨은 더 이야기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난 그냥, 쭈욱 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따라 살고 싶었어. 그냥 그것뿐이야."


분명히 다른 사람과 똑같이 시작할 수 있는 루트가 있었음에도 그 길을 굳이 4년이나 더 걸려 늦게 돌아가게 되었으며, 평생 아버지 삶의 궤적을 똑같이 따라 살겠다는 결심이 좌절되었다는 것. 그것이 루스터의 마음 속에 상당한 좌절감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루스터는 해냈다. 그는 명실상부한 해군 전투기 조종사였다. 하지만 그 사실 하나만으로 루스터가 매버릭에게 쌓아 왔던 모든 감정의 벽이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행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해, 루스터."

"…"

"아마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나라도 매버릭에게 화를 냈을 거야. 한두 번이야 모르겠지만, 무려 일곱 번이나 됐잖아. 햇수로 따지면 6년이라고. 엄청나게 긴 시간이야. 어떤 사정이 있었든, 내 미래는 내가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거니까."

"…진짜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 감정을 임무까지 가져오는 것은, 음. 또 다른 영역의 문제겠지."

"그래. 너답네, 행맨."


그래, 그렇지. 너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 피식 웃은 루스터가 다시금 묻는다.


"혹시… 나이를 서른다섯이나 먹고도 아직까지도 아버지 품이나 찾고 있다고 놀리기라도 할 생각이야?"

"전혀. …아, 루스터. 하나만 더."

"…?"

"만약에 말이지. …네 아버님의 파트너가 매버릭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 없어?"

"흐음."


행맨의 질문에,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루스터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네."

"아하."

"정말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어. 우리 아버지도… 매브와 함께 하는 비행을 사랑했거든. 아주 많이."

"…"

"그래서 아마… 같은 부대 소속이 아니었어도, 탑건 스쿨에 함께 가지 않았어도… 다른 곳에서 복무하다가 어디에선가 만났다면, 두 사람은 만난 즉시 서로를 알아봤을 거라고 생각해. 서로가 서로의 하나뿐인 비행 파트너가 될 거란 사실을."

"와우. 멋지다, 루스터."


그냥 의례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행맨의 눈에 담겨 있는, 구스에 대한 깊은 존경의 빛을 확인한 루스터가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뭐가?"

"너희 아버님도, 그리고… 너도. 루스터."

"…"

"존경하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걸 실제로 이루어내는 게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잖아. 그게 진짜 멋있고 쿨한 거지."

"…아. 그래, 칭찬… 고맙다. 행맨."

"별 말씀을."


이미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던 루스터의 귓가가, 이제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빨개졌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자꾸만 제 내면에서 요동치는 무언가 때문에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다. 손이 차가워지고 입술이 떨렸다. Oh god, 무슨 첫 데이트 상대와 앉아 있는 십대 애도 아니고! 루스터가 애써 입을 꾹 다문다.


그 상태로, 다시금 대화가 끊겨버린 두 사람 사이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이번에 그 묘한 분위기를 먼저 깬 것은 루스터의 살짝 쉰 목소리였다. 


"그, 행맨. 지금 분위기 너무… 십대 사춘기 애들 같지 않아?"

"뭐 어때, 루스터.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확실히 피곤하긴 피곤하네. 기지개를 쭈욱 켜더니 갑자기 털썩, 뒤로 누워버린 행맨의 행동에 침대가 크게 출렁였다. 뭐 하는 거야? 놀란 루스터가 눈썹을 들어올린다. 분명 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만 해도 피곤해서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잠이 멀리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막 이륙한 전투기를 탄 것처럼 급작스레 또렷해진 정신이 낯설다. 갈 곳을 잃은 루스터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방황했다. 그런 루스터의 옷을 움켜쥔 행맨의 두툼한 팔뚝이 있다.


"누워 있으니까 좋네. 너도 누워, 루스터."

"아니, 행맨. 난 됐…"

"졸리다며, 아까부터 계속."


거부했지만 뒤에서 당기는 힘을 버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행맨이 이끄는 대로 철퍼덕 쓰러져 누운 루스터가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린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평소와는 달리 늘 어려 있던 장난기가 사라진 푸르스름한 눈이다. 한 쪽 팔을 괴고 제 쪽으로 돌아누운 행맨의 잘 빠진 얼굴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너무 가까운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루스터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행맨이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왜 웃는 거지? 


"왜 웃어, 행맨."


Shit, 내 목소리 너무 갈라졌잖아. 당혹스런 루스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행맨이 한결 나른해진 목소리로 그 질문에 답했다.


"허니, 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순한 눈을 가졌구나 싶어서. 레이벤 선글라스 너머에는 확실히… 또 다른 세상이 있네."

"행맨, 이제 그만…?!"


예고 없이 훅 다가오는 입술은 벌써 오늘만 두 번째였다. 이번에도 눈을 감을 타이밍을 놓친 자신에 비해, 어느덧 반대쪽 손으로 루스터의 얼굴을 감싸쥔 행맨은 고스란히 두 눈을 다 감은 채였다.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입술과 함께 뒤늦게 루스터가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오로지 혀끝과 입술의 부드러운 점막으로 온 신경이 집중되자 다시금 나른함이 몰려왔다. 톡톡, 처음과는 달리 부드럽게 들어온 혀끝이 노크하듯 가볍게 안을 훑는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아, 루스터가 천천히 깊은 숨을 내뱉는다. 


어느새 그의 위에 거의 몸을 포개다시피 한 행맨이 느긋하게 입을 맞추었다. 세상 모든 것이 당장 멸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급했던 처음과는 달리, 따스하게.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하나하나를 맛본다. 루스터가 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느리지만 다정하게. 조금 더 깊게 숨을 불어넣은 행맨이 이내 제 입술을 떼어낸다. 꾹 감고 있던 눈꺼풀이 떠지고, 아직은 흐릿한 시야에 담긴 서로의 얼굴을 응시한다.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는 루스터의 옅은 갈색 눈에 비친 행맨이 늘 그렇듯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이번에도 꽤나 상냥한 웃음이었다.


"잘 자, 루스터."

"…"

"내일 훈장 수여식에서 보자."

"…그래."


행맨의 담백한 말투는, 마치 방금 전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자연스러웠다. 발개진 왼쪽 뺨을 문지르며 뒤늦게 루스터가 몸을 일으켰지만 행맨은 이미 방을 나선 뒤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루스터가 이내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이제야 좀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몸을 던진 루스터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불이 꺼지고, 기분 좋은 어둠만이 내려앉은 방 안에는 오직 루스터뿐이었다. 불을 끄고 나자 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새까만 허공뿐이다. 하지만, 그러나. 쉽사리 눈을 감고 싶지가 않았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을 만큼 피곤했지만 정신은 좀처럼 휴식을 취하려 하지 않고 있었다. 


Holy shit, 내일 도대체 어쩌려고. 아마도 매버릭의 훈장 수여식이 있을 텐데, 거기에서 멍청이처럼 졸고 있을 순 없는데. 낮게 욕설을 중얼거린 루스터가 제 오른팔을 두 눈 위에 올려놓은 채 깊은 숨을 내쉰다. 하지만 자꾸만 발딱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잠재울 수도 없는 일이라, 루스터는 그 뒤로도 한동안 새까만 방의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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