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성연의 손길은 침착했다. 마님, 마아님…. 채근하는 유모의 목소리가 문간을 넘어온다. 성연은 재차 매듭 끈을 동여맸다. 안채의 문이 열리자 유모가 얼른 팔을 뻗는다. 유모의 품에 안긴 것은 이제 갓 100일을 넘긴 간난쟁이였다.



“자네 새끼처럼은 안 바라. 그저 사람 구실 제대로 할 줄 알게끔 키워주면 돼.”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결연한 표정으로 돌아서려던 성연은 머뭇거리다 유모의 품에 안긴 아기의 손을 쥐어보았다.



“잘가렴, 아가. 사랑한다, 아가야.”



대청마루에 앉은 성연이 유모에게 손짓했다. 작게 목례를 한 유모가 미리 만들어 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을 걷어차고 들어 온 사내들이 마당을 가득 메웠다.



“도망이라도 가셨으면 모른 척 찾지 않았을 것인데 꼭 이렇게 서방을 따라나서야겠습니까?”

“자네가 열녀문이라도 세워줄 텐가?”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총을 건네받은 규원이 탄피를 장전한다. 달칵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 상황에서도 성연은 꿋꿋했다. 적의를 가진 사이지만 한때는 자신이 모셨던 상사의 아내로 예의를 갖췄던 여인이다.



“살아 눈 떠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제 얼굴이라 송구합니다. 남기실 말이라도 있으시면….”

“무슨 사내가 그리 말이 많나?”



미련한 여편네. 눈 하나 깜짝 않는 성연을 보며 규원은 총구를 틀었다. 짧은 총성이 울린다.



횃불 하나 없이 산길을 오른 유모는 산 중턱에 와서야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우는소리 없이 조용했던 아기는 어느새 잠에 빠진 듯 고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련님…….”



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기는 천하 태평했다. 아기를 감싸고 있는 포대기 모서리를 만져본다. 올록볼록 올라온 수가 손끝에 만져진다. 李帝努. 남편이 죽은 후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성연이 밤낮으로 놓은 수다.



“조선 땅 어디든 이리 귀한 이름이 있을까요.”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하는 사내가 되길 바라며 지었다는 그 이름. 하지만 아기의 이름이 올곧게 자라나는 것을 봐줄 부모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낭만 언파레드 (Romance On Parade)

契. 여홍






양장점 앞은 늘 북새통이라 그곳을 지나려면 어깨를 좁혀야 했다. 주머니에 바람이 들어 빈털털이인 모던보이들은 늘 양장점 유리 너머로 새로 들어온 양복 따위를 보며 껄렁거렸고, 모던걸들은 그 옆 레코드점 앞에 서서 라디오를 통해 노래를 들으며 연애를 걸만한 모던보이들을 물색했다.



‘오, 님이여, 그대여, 나의 천사여……. 나 홀로 남겨두고 어데로 갔나.’



학당에 가기 위해선 양장점이 있는 길을 통해야 했고, 그 길을 통할 때면 언제나 이름 모를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나왔다. 갈 길이 바빠 걸음을 서두르는 제노도 익숙한 그 목소리가 들릴 때면 자리에 멈춰서 노래를 들었다.



“이 노래를 부른 자는 사내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어라. 이런 소리가 어찌 사내 목에서 나온단 말이니?”

“아니야, 내가 소리판에서 봤는걸. 있지, 이 자는 낙원회관 가수란다. 여급이 퍽 아낀대.”



클로쉐를 쓴 모던걸의 말마따나 라디오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는 사내의 것이라고 보기엔 맑고 청아했다.



“낙원회관 애기씨 말하는 거요? 어찌 고운지 꼭 매화 같아 매화 애기씨라고 부르오. 같이 가보지 않겠서?”

“어머! 낮부터 웬 주정방이람.”



모던걸 사이로 술에 잔뜩 절은 남자가 들어오며 인파가 해산됐다. 라디오에서 나오던 노래도 바뀌었다. 책을 고쳐잡은 제노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매화 애기씨. 애기씨라 함은, 그자가 사내가 아닌 여인이란 뜻 아닌가? 낙원회관이라…. 사랑을 노래하는 매화 애기씨의 노랫소리가 귓전을 멤돈다.





*




학당을 나온 제노는 골목 앞에서 몸을 틀었다. 이쪽으로 가면 낙원회관이다. 유흥은 오늘만 아는 청춘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구락부나 카페 쪽으로는 손도 뻗지 않았으나, 오늘만큼은 그 신념을 작파할 필요가 있었다. 고운 목소리를 가진 매화 애기씨. 아니면 사랑옵는 소리를 가진 매화 도련님. 여인일까 사내일까? 매화 같다 하였으니 필경 희고 어여쁠테지. 어찌 얼굴도 본 적도 없는 자가 궁금한 것일까? 제게 물음을 던졌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러브란 말이다, 전보같은 것이야. 오겠다 허지 않고서 찾아와서는 가슴을 콩딱이게 만들지.’



다만 언젠가 친우인 재민이 해주었던 말로 뭉뚱그린 의문에 대신 대답을 할 뿐이었다.



혼마치는 낮이나 밤이나 사람이 득시글거린다. 아침의 양장점 앞 인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다.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피해 낙원회관으로 들어온 제노는 처음 마주하는 별천지에 압도되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서오셔요. 무엇으로 드릴까요?”

“아, 가, 가배 주십시오.”



모던한 웨이트리스 복장을 한 여급이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민망함에 자리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던 제노의 시선이 문간 옆의 자리에 닿았다. 문간 옆에는 아무렇게나 복사한 종이가 한 움큼 놓여있다. 공연히 주위 눈치를 보며 종이를 집은 제노는 자리에 앉아 제 무릎 위에 종이를 올렸다. 귀퉁이에 별건곤이라 찍힌 것을 보니 잡지에 실린 글을 복사한 것 같았다. 여급에 대한 글을 읽기도 전에 ‘매화’가 먼저 눈에 띄었다.



… 소리가 여인 못지 안타. 얼골이 곱디고와 매화를 달맜지마는 손들이 추태를 부리고 주정을 부리면 눈쌀을 찡긴다나. 일홈이 황인준 옷은 모던-뽀이 말도 조선말이라 조선사람으로 알겟지만 그는 완전한 만주사람이란다. 나히는 스물하나. 저 부모를 따라 만주서 경성으로 왓다. … 고운 얼골에 반하여 수작할 맛으로 차저오는 사내들 그에게서 에로를 찾다가 도라가곤 한다지. 사내가 잇느냐고? 그런 것은 뭇지 말라. 카페팬들 로만-스 원성에 건듸리지 안키로 하엿다.



마이크 도닥이는 소리가 난다. 언제 올라왔는지 인준이 무대 가운데 서 있었다. 만주사람이라. 조선인 같다가도 어찌 보면 또 이국의 아름다움을 쏙 빼다 박은 것 같기도 하다. 무대 아래 관객을 내려다보는 인준이 제노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청춘들은 참 부지런도 하지요. 암요. 노래를 듣는 이 순간만큼은 우리 청춘도, 자유연애도, 조선도 모두 봄 아니겠어요.”



여급이 제노의 앞에 가배(커피)를 내려놓았다. 향긋한 가배 냄새가 올라온다. 윤심덕 선생님의 사의찬미를 들려드릴 것이에요. 인준이 마이크를 살짝 두드리자 레코드판이 돌아가며 음악이 틀어졌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이 너 찾는 것 설움….”



저는 까막눈이라 듣는 귀밖에 없다 하던 유모가 매일같이 부르던 노래다. 그 덕에 제노도 이 노래만큼은 익숙하다. 더듬더듬, 인준의 입 모양을 따라 노래를 따라 불러본다. 제 입에서 인준의 목소리가 나는 것 같아 가슴이 간지러웠다.



두 곡의 노래가 지나가는 동안 가배에는 손조차 대지 못했다. 소리를 주워 담는 귀는 바빴고, 얼굴을 그려 넣는 눈알은 그보다 더 바빴다. 인준이 무대를 내려가자 여급이 올라와 다른 가수를 소개했다. 단숨에 가배를 입안에 털어 넣은 제노는 테이블 위에 돈을 내려놓고 인준이 나간 길을 따라갔다.



“저, 저기!”

“?”



무작정 불러 세워놓긴 했으나 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입만 옴짝달싹이던 제노가 어렵사리 운을 뗐다.



“가, 가수 선생님께서는 여인이십니까?”

“여인? 여인이라 하셨습니까?”

“매화 애기씨라 하지 않습니까?”

“스물 하고도 한 해를 더 산 사내에게 애기씨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매화 애기씨이? 질색하는 인준이 눈을 파르르 떤다. 저를 ‘매화 애기씨’라 칭하는 사람은 주완 뿐이다. 좌우간 유한계급이면 무얼 하나. 권번에나 들락거리며 노상 술이나 처마시는 주정방이인데. 인준이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제노는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여인이 아니라 실망하셨나요?”



목소리가 좋다고, 노래 잘 들었다고, 그런 말을 하려 입술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말 주머니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대신 튀어나온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진심이다.



“아뇨. 가끔 서신을 보내도 되는지 궁금해서요.”

“서신이요?”

“에로를 찾으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가수 선생님 목소리가 곱고 좋아서, 좋단 말을 하고 싶어서요. 간혹 그런 것을 서신으로 보내는 이들이 있다고 하기에….”



당황해 ‘에로’ 자에 힘을 주어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고개를 갸웃대던 인준이 피식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관으로 보내면 다른 이가 읽으니 이리로 주세요. 인준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펜을 찾는 모양이었다. 바짝 긴장해 서 있던 제노가 셔츠 주머니에 꽂혀있던 펜을 내밀었다.



“간혹 서신을 훔쳐 가는 자도 있으니 아침나절에 넣어주면 고맙겠어요.”



제노의 손목을 쥐어 든 인준이 동그랗게 말려있던 주먹을 풀었다. 말랑한 손바닥 위에 인준의 집 주소가 적혔다. 손목과 손등을 받치고 있던 작은 손이 거둬진다. 답신은 기대하지 마세요. 온종일 펜 물고 앉아 있을 만큼 한가하지는 않습니다. 제노의 셔츠에 펜을 도로 꽂아 넣은 인준이 회관으로 돌아갔다.





*





유모 몰래 밤새 서신을 쓴 제노는 해가 밝자마자 집을 나섰다. 몇 번이고 주물럭거려 반질대는 종이는 약간의 손때가 묻어있었다. 인준의 집 앞에 다다를 무렵, 담장을 넘어 늘어진 능소화가 눈에 띄었다.



“하나쯤은 괜찮을까.”



담장 옆을 지나가는 척 능소화의 머리를 뚝 떼어내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인준의 집 앞에 다다라 서신을 넣기 전, 봉투에 능소화를 동봉했다. 비록 한 송이지만 서신을 열면 꽃향기는 익히 날 것이다. 우편함에 서신을 넣은 제노가 기분 좋은 얼굴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머니의 성화에 요에서 일어난 인준은 대강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밖으로 나와 우편함을 확인했다. 우편함에는 늘 적지 않은 서신들이 쌓여있었다. 대개 의열단이 보내는 것이었기에 아침 일찍부터 나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조선인들과 소통했다던 부모는 언젠가부터 만주로 이주해오는 독립군을 돕기 시작하다 아예 경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들처럼 해방에 큰 뜻이 있어 돕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은 짐승이 아니며 마땅히 부려질 존재가 아니기에 돕는 것뿐이라고 했다.



“이것은 아버지의 것이고, 이것은…… 매화 도련님.”



서신을 넘기며 수신인을 확인하던 인준이 멈칫했다. 매화 도련님이라? 어젯밤 회관에서 만났던 제노가 떠올랐다.



“정녕 서신을 보냈단 말이야?”



달리 기대를 하고 주소를 일러준 것은 아니지만 서신이 오니 공연히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안채로 가 아버지에게 서신을 넘긴 인준은 제 방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봉투를 열어보았다. 눅눅한 능소화 향기가 잠깐 코끝을 스쳤다.



“매화 도련님이래놓구 능소화를 넣어두면 어쩌자는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짓무른 능소화를 책상 한편에 두었다. 서신 내용은 단순했다. 소리가 곱다. 아름다웠다. 다시 듣고 싶다. 흔해 빠진 말이지만 기분 좋은 칭찬이었다. 무엇보다 편지를 보내온 이의 반듯하고 올곧은 글씨가 좋았다.



“치들은 글씨도 못났던데….”



잠깐 본 것이 전부지만 제노는 확실히 미남이었다. 동그란 은테 안경을 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양인과 비슷하게 생긴 코 모양은 또 어떻고. 이웃집 백구 같이 생긴 눈매도 그래. 순하게 생겨놓고 숱하게 사람 홀릴 인상이다.



“참, 그 작자가 어찌 생겼든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거세게 머리를 흔든 인준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두어 번 쳤다. 답신을 줄까? 무어라 쓸까? 펜을 꺼낸 인준이 턱을 괴고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엇던 표현이든 매화 도련님이 불러주시면 다 조치만 작가라 불러주셧음 해요. 아즉 문인은 아니지만 매화 도련님 목소리만큼이나 어엿쁜 글을 쓰려고 합니다.



문인을 꿈꾸는 자인가? 복장이 저와 같은 모던보이라 한량인 줄로만 알았다. 하기사 세상천지 모든 사내들이 주완 같으랴. 펜을 죔죔이던 인준은 고민 끝에 답신하지 않기로 했다.





*




인준이 답신을 하지 않은지 벌써 아흐레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제노의 서신은 매일같이 우편함에 들어 있었다. 무슨 사내가 이리 할 말이 많냐며 푸념하다가도 자기 전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제노가 보낸 서신들을 읽었다. 연애소설을 읽는 모던걸들 기분이 꼭 이러할까?



매화 도련님께.

 

학당 벚꽃나무 아래서 저녁 해를 바라보면서 노래나 듯는 청춘들의 풍경을 모록코의 정열적 연애풍경이라 한다면 낙원회관에서 고-히를 마시며 매화 도련님의 노래를 듯는 청춘은 로맨지스트의 애무광경이 아니겠습니까. 잉-그리시를 가르쳐 주시는 죤 선생님은 각금 러브 이약이를 해주시는데 양인들은 러브를 시상(時常)이라 생각하는 듯해요. 모름지기 글을 스는 사내라면 늘 시상을 각가이 하는데, 러브란 겻헤서 함께 하는 것 아니겠어요?



“러브?”



모난 곳 없이 또박또박한 글을 읽어나가던 인준의 눈동자가 ‘러브’의 앞에 멈췄다. 주완은 인준에게 ‘러브’란 자유연애보다 더 뜨거운 것이라고 했다. 나는 매화 애기씨, 자네와 러브를 하고 싶어. 주완이 그런 말을 할 때는 짜증이 앞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럿다면 매화 도련님 겻헤서 같이 러브를 하는 것이 조흘텐데 말이지요.



“러브으…?”



손가락이 곱아든다. 흔해 빠진 러브. 무어가 좋다고 이리 가슴이 뛰나.



“이놈의 가슴은 왜 이래. 망가졌나.”



서신을 접어 책 사이에 끼워놓은 인준이 제 가슴을 두드렸다. 치. 서신만 보내지 말고 회관에도 찾아오면 좀 좋아. 왈칵 쏟아질 듯 움찔대는 심장이 속도를 모르고 야단을 떨고 있었다.





*





벌써 네 번이나 넥타이를 고쳐 맨 덕에 카라 근처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직 봄이라 땀이 날 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인준을 만날 생각하니 절로 땀이 베어 나왔다. 언제 만나자 약조한 것은 아니지만 회관으로 와 노래하는 것을 보는 것도 만남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회관의 문을 열고 들어간 제노는 가배를 주문하고 앉아 공연을 준비하는 무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작가 선생님이시죠? 인준이 드릴 말씀이 있다 하니 따라오시겠어요?”



제노의 자리로 찾아온 여급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가배는 그 이후에 드릴게요. 여급을 따라나선 제노는 무대 뒤 대기실로 들어갔다. 여급이 문을 닫고 나갔다.



“이렇게 부르실 것 같았으면 꽃이라도 들고 올 걸 그랬습니다.”

“순 능소화밖에 모르면서. 또 우리 집 옆 담장서 꺾어 왔겠죠.”



당황한 제노가 손사래를 쳤다. 매화 가지를 꺾을 수가 없어 능소화를 드린 것일 뿐입니다. 변명 아닌 변명은 참으로 잘하는 사내였다.



“그동안 답신을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요.”



인준이 손을 뻗어 제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레코드였다. 파는 것은 아녜요. 작가 선생님 드리고 싶어서 세숀 친우한테 부탁해 녹음한 거예요. 레코드를 안은 제노가 멀뚱히 서 있다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서신으로 전해 드리려던 것인데, 뵌 김에 드려야겠어요.”

“무얼요?”

“영 재능이 없어 마음에 드실까 염려되지만 그래도 보이자고 나온 글인데 감춰두면 글이 슬퍼할 것이니 드리겠습니다.”



인준의 무릎 위에 서신을 내려놓은 제노가 레코드판을 들고 대기실을 나갔다. 무엇을 준단 거야? 서신을 펼쳐 든 인준은 끝까지 다 읽고 나서야 그가 전하려던 것이 노랫말임을 알았다.



“뭉실뭉실 핀 구름 조각, 고운 손에 한 조각 떼어다 드리고파….”



어쩜 이리도 좋냐는 노랫말이 꼭 저한테 하는 말 같아 얌전했던 가슴이 요란하게 뛴다.



공연을 마치고 나온 인준은 살을 에는 봄바람에 재킷을 당겨 몸을 감쌌다. 무슨 바람이 이리 요란하다니. 눈이라도 맞출까 싶어 노래하는 내내 제노가 앉은 자리를 찾았지만, 어딜 갔는지 제노는 보이지 않았다.



“갈 거면 간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제노가 온 것을 알고 여급에 세션까지 들볶아 온통 ‘러브’니 ‘연애’니 하는 노래로만 바꾸어 부른 인준이다. 들어야 할 사람이 듣지 못했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 콧등을 스치고 간 바람에 마른 기침을 하는 인준이 제 몸을 옥죄여 안았다.



“감기 들겠어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제노가 인준의 어깨 위에 포대기를 둘러주었다. 어찌 여기 계세요? 노래도 안 듣고 가신 줄 알었는데? 퍽 섭섭하다는 말투라 제노가 옅게 웃었다.



“회관에는 노래를 들으러 오는 이가 많지요?”

“그러믄요.”

“그럼 매화 도련님을 보는 사람들이 많은 거잖아요.”

“?”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 오롯이 둘이서만 함께 있고 싶었어요.”



캘록캘록. 인준의 기침 소리가 거세졌다. 공연히 민망해 제노가 덮어준 포대기를 끄집어 당겼다. 손끝에 무언가 닿는다. 수 잖아? 이름인가? 이… 제노? 인준이 수를 만지고 있는 것을 보았는지 제노가 포대기를 고쳐 덮어주며 입을 열었다.



“갓난일 적 어머니가 직접 놓아주신 겁니다.”

“이름 뜻이 거창하네요. 멋진 이름이군요.”



얼마 전, 별안간 유모가 이 포대기를 꺼내 보여주었다.



도련님, 마님께서 이 수를 놓으시면서 그리 말씀하셨어요. 내 아들이 이 땅에 존재함은 조국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힘껏 사랑하기 위함이라고요. 그러니 마음껏, 힘껏, 사랑할 사람 찾으시라고요. 참, 요즘 말로는 연애라 하지요?



색이 바래 누래진지 오래였지만 이름이 수 놓인 자리만큼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귀한 패물이라도 만지는 양 조심스레 수를 쓰다듬던 제노는 문득 인준을 떠올렸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독립군이셨어요.”

“……….”

“저를 죽이러 온 사람의 앞에서도 절개를 잃지 않으신 어머니가 갓난이었던 제게 남긴 유언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인준은 대답 대신 제노를 올려다보았다.



“마음껏 사랑할 사람을 찾으라고.”



독립투사가 되어 민족해방운동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라니, 참으로 재밌으신 분 아닙니까? 소리 없는 웃음이 어딘가 씁쓸해 보여 마음 한편이 아렸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그리되리라는 것을 믿으신 거겠지요.”

“……….”

“그러니 당부하시고 싶었던 것이 마음껏 러브할 사람을 찾으라, 그뿐이셨던 것 아니겠어요.”



러브. 제 입 밖으로 꺼낼 땐 낯 간지러웠던 말이 왜 인준의 입을 통해 나오면 저리 어여쁘고 야살스럽게 느껴질까. 하여, 작가 선생님께서는 그 ‘러브’나 할 상대를 찾으시면 됩니다. 멈춰있던 인준이 먼저 발걸음을 뗐다.



“찾았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물어야겠지요.”



걸음이 늦춰진다. 맞춰 걷던 제노가 인준의 앞에 섰다. 이렇게 말입니까? 긴장한 인준이 눈을 올려 떴다.



“나와 러브 한번 해보지 않겠습니까?”



설익은 시선이 오간다. 이 다음엔, 입을 맞추면 되지요? 무릇 연애소설이란 다 그런 모양이니까요. 인준이 웃는다. 발뒤꿈치가 들어 올려지자 입술이 와닿는다. 그 사이로 따스한 봄바람이 불었다.


- 오 그대여 님이여 나의 천사여 … 채규엽, ‘병운의 노래’ 중 발췌

- 뭉실뭉실 핀 구름 조각 … 영화 해어화 OST ‘봄날의 꿈’ 중 발췌

- 잡지내용 1932년 11월 1일 발행된 <별건곤> 57호 ‘카페여급 언파레-드’에서 참고

- 편지 내용 1932년 12월 <삼천리> 제 8권 12호 ‘끽다점 연애풍경’에서 참고 

- 남녀를 구분하는 문장이 서술되어 있으나 시대상의 반영일 뿐 글쓴이는 여자의 것, 남자의 것을 나누지 않습니다.

-  잡지/편지의 내용, 제목인 언파레드는 당시 쓰였던 말을 그대로 가져와 썼습니다.


너무 무게잡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가볍게 다루지도 않는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역시 어렵네요.

한 인간이 수행하는 역할은 그보다 훨씬 더 성숙한 인간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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