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

W. Hathor





※ 가스라이팅, 폭행 등 트리거 주의.





교실로 들어오면서 묶은 머리를 풀었다. 밤새 얼음찜질을 해도 뺨의 멍이 좀처럼 빠지질 않았거든. 머릿속은 텅텅 울렸다. 지금 보는 게 어제인지, 오늘인지, 혹은 글피인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수면제 때문에 오는 부작용일지는 아직 모르겠다.



“여주야, 너 얼굴이 왜 그래? 맞았어?”


“...”


“여자애 얼굴이 이게 뭐야아.”



내내 쓰리던 볼을 하얀 손이 문질러왔다. 딱 그 또래 여자애들에게서 나는 간지러운 로션 냄새가 났다. 어딘지 뭉근하게 묻어 나오는 탄 냄새도. 아는 담배 냄새였다. 낯선 손길이 불편해 봉긋 올라온 가슴팍 위 박힌 이름표만 봤다. 이 도 희. 쉬는 시간마다 종종 내 환심을 사려, 정확히는 제노의 시선을 끌고자 가끔 내게 한두 마디씩 말을 걸어오던 여자애였다.



 하얀 피부, 탄탄하고 늘씬한 몸, 조목조목한 이목구비, 세련된 스타일. 차라리 이런 쪽을 좋아하는 게 네 수준에 알맞지 않았을까 이제노? 올려다보니 죄 없는 예쁜 얼굴이 날 보며 싱긋 웃는다. 괜한 짓이었다. 나한테 잘해준다고 해서 이제노의 환심을 사는 것도 아닐 텐데.



시야에 찬 교복 치마 너머 옆을 봤을 땐, 이제노도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저를 돌아보길 기다렸다는 듯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는다. 아니, 틀렸다. 저 눈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 와서야 내가 그 눈을 마주한 것뿐이었다. 날카로운 눈과 코 아래로 꾹 다물린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밤에 닿았던 점막 간의 접촉이 또다시 떠올라 속이 메슥거렸다.



“진짜 다리를 잘라야 하나.”



저 입술로 말했다. 내 행동에 기가 찬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선. 보통 때와 다를 게 없는 밤이었다. 그래, 착취. 넌 빼앗고 난 빼앗기고. 바닥을 구르는 약통들, 널브러진 옷, 깨진 캐리어의 모서리, 욱신거리는 볼, 머리 위로 쏟아지는 차가운 독설. 놀라울 것도 없었다.



“전에 너 좋아하냐고 물었지? 내 대답, 아직도 궁금해?”



그런데 이번엔 뭔가 좀 달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평소보다 좀 더 많이 빼앗긴 기분이었다.



“어, 그건가 보다.”


“...”


“네가 한 번씩 이럴 때마다 자꾸만 좆같은 기분이 드는 게, 아마 그건가 봐 여주야.”



제발.



“좋아하나 봐.”



그 말만은 하지 않길 바랐는데.



“내가 너를.”



낮은 목소리로 제 속내를 표현한 그 애가 성마른 입술을 겹쳐왔다. 입안 가득히 들어오는 물컹한 혀에서 텁텁한 쓴맛이 느껴졌다. 이만큼 끔찍한 고백이 세상에 또 있을까. 제 것인 양 온 입안을 멋대로 헤집어 놓는 생경한 혀의 느낌과 앞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시선을 조금도 참을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저 꿈이길 빌고 또 빌었다. 그게 우는 것보다는 백 번 나았다. 몇 분만 참고 견디면 깨어날 지독한 악몽. 독한 향수 냄새가 섞인 담배 향이 올라왔다. 조금도 닿고 싶지 않아 숨을 참았다. 그마저도 허락지 않으려는 듯 거친 손이 올라와 고개를 우악스럽게 젖혔지만.



잡힌 머리채가 아팠다. 위에서부터 꾹 눌러 짓이기는 입술을 받아내며 온몸에 서서히 힘이 빠져갔다. 단순한 치욕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발로 밟고 서있는 바닥 저 깊은 곳으로 끌어내려지는 기분. 모든 걸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구멍이란 게 세상에 정말로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 걸까.



좋아한다고? 누가, 네가? 나를?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시작부터 꼬인 고백이었다. 왜냐고 물은 들, 답을 들을 수 있는 물음일 리 만무했다. 무어라 묻는다 해서 순순히 대답해 줄 놈도 아니었고. 귀로 들은 그 끔찍한 고백과, 제 나름의 배려랍시고 옅은 악력으로 머리칼을 느슨하게 쥔 그 애의 손이 그저 끔찍하고 또 끔찍할 뿐이었다.



숨이 모자라 고개를 뒤로 물리며 눈을 뜨자 제노의 머리칼과 하얀 얼굴선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차라리 불이라도 좀 꺼주지. 이 비참한 광경 대신 지금 날 부여잡고 혀를 섞고 있는 게 이제노가 아니라, 이동혁이라고 부정이라도 할 수 있게.



제노의 손이 허리를 감싸왔을 때쯤, 따끔하고 비릿한 쇠 맛이 났다. 징그럽게 말아 들어오는 혀의 감촉이 역겨워 저걸 깨물고 내 혀도 깨물고 콱 죽을까 생각도 했다. 싫어. 더는 싫어. 혀에 먹혀 들어간 목소리가 자연스레 입안으로 뭉개졌다. 내 것이 아닌 타액과 함께 목구멍 밑으로 전부 넘어가버린다. 차라리 독을 삼켜도 이것보다는 달았을 텐데.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어떻게든 떠올리고자 애썼다. 하얗고 창백한 살가죽이 아니라 햇볕에 그을린 갈색 콧등을, 독한 향수 대신 말간 비누 냄새를, 손에 닿는 족족 찢어발길 듯 꽉 쥐어 오는 거친 손이 아니라 깃털을 쥐는 양 사뿐 감싸오는 여린 손가락을, 따갑게 깨물어 오는 짐승의 이빨 말고 조심스럽게 살살 핥아오는 입술을. 온통 착취뿐인 이제노가 아니라,



“원래 좋아했다니까.”



처음이라 서툴던, 그저 어여쁘기만 하던 이동혁을.



“좋아해, 여주야.”



그전부터 우리 사이에 좋아한다는 감정이란 건 사치였다.



“나는 너 싫다니까?”


...”


“귀먹었어? 몇 번을 말해.”



이렇다 할 연고 하나 없이 보호시설에 버려진 미성년자 둘. 불 보듯 뻔히 그려지는 멀지 않은 미래의 불행. 냉혹한 현실과는 반대로, 대책 없이 간지럽기만 한 사춘기의 감정. 우린 행복할 수 없을 게 너무 당연했다.



“그래도, 나는 너 좋아.”


“너도 참 취향 뭐 같다. 내 성격 개차반인 거 뻔히 알면서.”


“...예쁘지나 말던가.”



그래서 또 동혁을 할퀴었다.



“우리 둘이면 또 제자리잖아.”


“...”


“고아 둘이서 뭘 어쩔 건데?”


“...”


“너랑 나, 가진 거라고는 쥐뿔 아무것도 없잖아. 둘이 합해 빵이라고 빵.”


“...”


“너랑 좋아한다 어쩐다 지지고 볶고 하느니 차라리 돈 많은 팔십 노인네랑 원조를 하겠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말했잖아. 난 너 싫, 아니... 네 고백 못 받아.”


“...”


“그러게 내가 하지 말랬지 고백 같은 거.”


“...”


“나 미안하단 말은 안 한다? 그니까 너도 마음 정리해, 엉?”


“...”


“야...! 왜 대답을 안 해.”


“...싫어.”


“아 진짜 너랑 어색해지기 싫다고오...”


“...”


“동혁아,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나는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



동혁의 단단했던 마음에, 그날 커다란 흉터가 졌다.



“내 마음이 네가 좋다는 걸 어떡해.”


“...”


“나도 이걸 어쩌지 못하는데 네가 뭘 어떻게 할 거냐고 내 마음을.”


“...”


“열에 한 번쯤은 받아줄 수 있잖아.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수 있는 거야 여주야.”


“...야, 너 울어?”


“가끔은 못 이기는 척... 그냥 고맙다 해주면 안 돼?”


“...”


“너 진짜 못됐어.”



내게 싫은 소리 한번 한 적 없는 애였다. 상처받은 얼굴로 훌쩍이던 그 애는 발개진 눈을 수시로 부벼대며 한동안 울적했다. 단단히 토라진 건지 일주일 동안 저한테 말 한마디 못 붙이게끔 거리를 두면서도, 밥 먹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뾰루퉁한 얼굴로 생선 가시를 발라 내 밥 위에 살코기를 얹어주던 동혁을 보며, 난 말없이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그때도 내 입은 제 멍청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꾹 다물려 있었다. 나 같은 거 좋아해 줘서 고맙다, 나를 보는 그 예쁜 눈을 나도 참 좋아한다, 콧등에 입 맞추고 싶다, 따위의 간지러운 말들은 그저 밥술과 함께 목으로 삼켰다. 그 애가 나한테 그토록 듣고 싶어 했을 그 몇 마디를 못해주고.



♬ Life Sucks – 핫펠트(HA:TFELT)



“…!”



울던 동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멋대로 입안을 휘젓던 제노의 혀가 목젖을 건드린 탓이었다. 내 속에 홀연히 들어왔다 나가기라도 한 것 마냥 코앞에서 질책하는 눈이 다시 내게 꽂혔다. 이동혁의 잔상들로 채워졌었던 머릿속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하얘졌다. 숨 쉴 틈도 없이, 그야말로 쥐어뜯을 듯 집요하게 입술을 삼켜오는 제노를 한번 보다, 바닥을 구르는 약봉지의 문구를 다시 눈으로 훑었다. 당신의 행복한 순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



행복은 무슨 얼어 죽을. 무슨 심오한 주문이라도 되는 양 흘림체로 멋들어지게 박아 놓은 그 명문장을 쏘아보며 죽어라 저주했다. 분명 인생의 거센 풍파라곤 티끌만큼도 알지 못할 헛똑똑이들이 지어낸 말일 거다. 행복이고 나발이고 지금 이 순간 동혁이 손이라도 한번 잡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게 진짜 행복일 텐데.



“...”



현실은 피 맛이 느껴지는 혀와 이제노의 눈뿐이었다. 저 시선의 끝점이란 게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방 안이 후덥지근했다. 한참을 혹사당한 후 떨어진 입안이 비릿했다. 거북한 느낌을 못 이기고 기침이 나와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귓가로 들려오는 비웃음을 애써 무시하며 창을 봤다.



닫아 쳐 놓은 커튼이 무색하게 그 사이를 비집고 햇빛이 들어왔다. 완연한 여름, 여러모로 참 귀찮은 것들이 많아지는 계절.







결핍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



이동혁이 삼 일째 전화를 받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급히 연락을 달라는 문자를 오늘로 여덟 번째, 아니 마지막 아홉 번째로 찍어 보낸 후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그냥 화면을 꺼버렸다. 하여간에 되는 일이 하나 없었다.



오늘 비서실에서도 그래. 이제노가 선수를 치긴 했지만 어쨌건 말해야 했다. 독립하겠다고. 제법 거창한 그 말을 전에도 여러 번 했었다. 몇 번을 간신히 바들바들 떨며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 쉽고 빠른 거절이라 이제는 너무 많이 무뎌진 말이었지만. N 홀딩스 빌딩으로 들어선 후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길을 지나오기까지 분위기가 사뭇 다른 걸 느꼈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어수선한.



“이번 사고만 마무리되고... 그러니까, 식품 쪽 계약 하나가 문제가 터졌는데... 아니다, 넌 이런 거까진 알 거 없고, 아무튼 안돼. 나도 회장실에서 전달받은 사항이 전혀 없어.”


“...”


“한동안 잘 지내더니 왜 또 이래?”


“...”


“이런 문제는 내 선에서 도와줄 수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본가 관리실에서는 뭐라셔? 아 정말... 아무튼 안된다는 소리야. 내 말 알아듣겠니?”



네, 그 집에서 단 한 발자국이라도 나갈 생각, 추호도 하지 말라는 거절 의사잖아요. 존나 잘 알아들었어요. 해야 할 말들을 잔뜩 준비했는데 결국 한마디도 대꾸하질 못했다. 집에서 나가게 해주세요. 불편해요. 발등에 불 떨어진 우리 고 비서님 귀에,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딱 그 정도 어린애 투정으로 밖에 안 들릴 것 같아서.



아침 등굣길 차 안에서 뉴스로 먼저 접했다. 아산 쪽 식품공장에 큰 화재가 났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비서실을 걸어 나오는 내내 사방에서 전화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전화를 받는 손이 모자라 사무실이 온갖 잡음들로 들어찬 아수라장을 보며, 난 준비해 온 서류를 구겼다. 늘 이런 식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



올 들어 N 그룹이 후원하는 위탁아가 여섯 명이 더 선정됐다고 했다. 장학금, 생활비, 식비 명목으로 들어가는 돈의 액수가 늘어나는만큼 회사는 예쁘게 포장된 제 이미지를 더욱 불려갔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공익을 위해 저희가 이만큼 힘씁니다 하는 것도 보여줘야 하는 양, 저를 뽐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 나조차도 이 대단한 쇼의 꼭두각시였지 참.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선 내내 이동혁 걱정만 했다. 어쩌면 하루 종일. 일하다 몸을 다친 건 아닌지, 멀쩡해 보여도 제법 잔병치레가 많은 애라. 과로로 쓰러져 버려 아무도 그 애를 발견하지 못한 건 아닌지. 온갖 걱정에 휩싸여 걷다 보니 또 그 끔찍한 집구석이었다.



창 곳곳의 불이 꺼져 있었다. 관리인들도 모두 퇴근한 건지 현관으로 들어오는 길의 핀 조명만 오롯이 켜진 채였다. 발소리를 죽여 들어온 거실도 불하나 남질 않아 새카맸다.



“늦네.”



그 어둠을 뚫고 낮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잠들지 않고 여기 앉아 나를 기다렸을 제노였다. 크지 않은 그 애의 목소리가 거실 천장을 치며 울려 댔다.



“어디 다녀와.”


“나 피곤해.”


“서.”


“...”


“서.”



무심코 목소리를 지나쳐 계단을 오르는데 그대로 손목이 잡혀 자리에 묶여 버렸다.



“이동혁 서울 왔어?”



허. 기가 차 저를 바라보는 얼굴에도 제노는 아랑곳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한 그 눈이 집요하게 내 눈을 좇을 뿐이었다.



“그 새끼 만났어?”


“...”


“입 안 열어?”


“놔.”


“이동혁이 아니야? 그럼 뭐 다른 새끼랑 어디서 뒹굴다가 온 거야?”



손목을 움켜쥐는 강압적인 행동에 불쾌한 낯을 비추자 더 세게 잡아온다. 그리고는 그대로 제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오는데, 머리칼 사이로 알코올 향이 슬몃 끼쳤다. 가슴 속에서부터 무언가 아릿하고 일렁이는 것들이 느껴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안에서 팍 소리를 내며 터져버리는 감정들처럼.



“나도 너처럼 생각 없이 살아봤으면 좋겠다.”



어쩌면 화풀이였는지도 모른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짜증 나는 것들 투성이라 갑자기 들이받고 싶어졌는지도.



“네가 나를 좋아해?”


“...”


“그냥 내 반응이 궁금한 거 아니었어? 괴롭히고 싶었니? 모욕 주고 싶었어? 뭐가 됐든 좋으니까 제발 아니라고 말해.”


“...”


“뭐라 거짓말이라도 해, 너한테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잔뜩 열이 받은 투로 대꾸해도 그저 웃고만 있는 저 얼굴이 가장 짜증이 났다.



“안아 달라고 해봐.”


“뭐?”


“얼른.”


“...”


“좋아한다고 말해봐.”



사람 속앓이 하는 줄도 모르고 며칠을 전화 한통 하지 않는 이동혁이나, 집을 나가고 싶다는 내 바람을 묵살한 니네 아버지 회사나, 기어코 내가 하려는 모든 일에 딴죽을 거는 네 알량한 짓궂음이나, 전부 내 맘대로 되질 않아서 그냥 냅다 터뜨리고 싶어진 걸까. 아니면, 나는 항상 간절한데 너는 늘 손쉽게 모든 걸 부숴버려서? 그냥 지금 눈앞에서 같잖은 어리광이나 부리고 있는 네가 도무지 감당이 안 돼서?



“왜 나야?”


“...”


“왜 하필 나였어?”


“...”


“말해, 왜 나였냐고.”


“...”


“이미 시궁창이었어. 네가 더 망쳐놓지 않아도 내 인생, 이미 엉망이었다고. 아빠는 태어날 때부터 없었고 엄마는 날 버렸어. 유일하게 하나 남은 내 가족이던 이동혁조차 네가 그날 망가트렸잖아.”


“...”


“그날 동혁이 무릎에 난 상처 때문에 난 매일을 울어. 더 물러설 곳도 없는 날 치고, 조롱하고, 그리고 이제는...”


“...”


“그런 내 모든 걸 다 망쳐 놓은 네가 감히 날 좋아해 보겠다고? 사람이 어떻게 그래?”


“...”


“말 좀 해봐,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


“...”


“있잖아, 내가 정말 할 수 있었다면 그랬을 거야.”


“...”


“제노야.”


“...”


“네가 죽었음 좋겠어.”


“...”


“정말 간절히.”



저를 저주하며 말하는 내 표정에도 미동도 없던 입이 움직였다.



“땡.”


“...”


“그거 내가 듣고 싶은 말 아닌데.”


“...”


“좋아한다고 해봐.”



딱히 듣고 싶은 대답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엉망인 대답이 나올 걸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화를 누르며 말하느라 힘이 잔뜩 들어갔던 몸에서 도로 힘이 빠졌다. 이로써 증오뿐이었다. 이제노에 대한 내 감정은. 소소한 연민? 잠시라도 같이 지냈던 정? 아, 진짜 웃기지도 않아.



“접근이 잘못됐잖아.”


“...”


“내 원망을 하고 싶으면 처음 우리 만나던 날 그때 네 탓을 먼저 해야 할 텐데.”


“뭐...?”


“사실 그게 맞는 순서거든.”


“...”


“네가 그날 웃더라고.”



여전히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는 저 입을 그저 찢어 놓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물을 인내심조차 남아있지가 않아서.



“왜 그랬지? 그날 네가 입은 교복이 너무 잘 어울려서 그랬나.”


“...”


“너 웃는 거 되게 예뻤어.”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우리가 처음 서로를 봤던 날의 감상을 말하고 있는 거구나.



“근데 그게 맘에 안 드는 거야 이상하게. 왜 그런가 생각해 봤는데,”


“...”


“내가 아니라 그 거지새끼를 보면서 웃는 거야 네가.”


“...”


“나 그게 좀 서운하더라고.”


“야 이제노.”


“네가 그러면 안 됐어.”


“너 진짜 미쳤어...?”



당최 내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 잘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래, 이건 수면제 부작용일 거다. 아마도 내가 지금 환청을 듣는가 보다.



“여주야, 내 방 진열장 예쁘지?”


“...”


“있잖아, 난 구도상 거기 어울리지 않는 장식품이 있으면 그냥 다 깨버리거든? 그게 전체 배열을 망치면 안 되니까.”


“...”


“말하자면 그날 배경에서 마음에 안 드는 장식이었던 거지, 동혁이가. 그래서 내가 좀 뽑아낸 거야.”


“...”


“거슬리면 안 예쁘잖아, 그치?”



아무렇지 않은 듯 천진하게도 끔찍한 말을 내뱉는 저 얼굴을 보면서, 난 어쩐지 화가 나기보다는 점점 어안이 벙벙해져만 갔다.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내뱉기 힘든 말이었다.



“근데 내가 실수를 했더라고.”



“...”


“거기서 걔를 빼 버리면 네가 날 보고 웃지를 않잖아.”


“...”


“그래서 생각을 바꿨어. 아, 그럼 얘 우는 얼굴은 꼭 내 걸로 만들어야겠다. 내 옆에서 웃을 수 없으면, 내 옆에서만큼은 꼭 나 때문에 울게 만들어야지.”


“...”


“근데 넌 우는 것도 좆같게,”


“...”


“내가 아니라 이동혁을 위해서 울더라고. 그러니 꼴 받지 않고 배겨?”


“...”


“여주야, 내가 미쳤댔지? 응, 지금 보니 약간은 그런 것도 같다. 그날 망쳐 놓은 배경이 아직도 별로라 짜증도 좀 나고.”


“...”


“원래 뭘 좋아하면 거기 좀 미친다잖아. 내가 너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 미칠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


“혹시 네가 불행해진다 해도 그 불행의 원인이 나라면 난 기꺼이 웃을 수도 있어. 원체 너랑 뭐로든 엮이지 못해 안달 난 새끼라서.”


“...”


“그러니까 어디 내 옆에서 한번 실컷 불행해져 봐. 혹시 알아? 네가 우는 게 가상해서라도 널 좀, 덜 좋아해 볼지.”



웃는 얼굴이 끔찍했다. 마치 어제 꾼 것만 같은 악몽처럼.



“울어봐 여주야, 예쁘게.”







바빠 죽겠는데 입덕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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